♣복음말씀의 향기♣ No3220
8월17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7xk2LCT19hQ (진효준 요셉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마땅합니다!>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천지 차이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은 다르다는 것.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 하느님의 시계 바늘과 인간의 시계 바늘은 그 속도가 다르다는 것.
인간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받고,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받는 것입니다. 일 잘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우받고 인정받지만, 부족하고 약한 사람들은 홀대받고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의 생각은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른 아침 6시에 포도밭으로 일하러 나온 일꾼이나,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심지어 오후 5시에 나온 일꾼까지도 포도밭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준 것입니다.
그런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심기가 뒤틀린 오전 6시 일꾼팀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1절)
포도밭 주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하느님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른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3~15절)
후하고 너그러운 포도밭 주인의 말씀에 제 마음까지 다 훈훈해졌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능력과 건강이 철철 넘치는 사람도 사랑하지만, 사회적 약자들, 어린이들과 노인들, 환자들과 장애인들, 불치병 환자들과 임종자들은 더 사랑하고 환대하시는 분,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모든 존재는 하느님께서 생생하게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그런 우리 교회와 사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rnSyAGwuJg
++++++++++++++++++
<사람이 시키는 일과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차이; 일이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거나!>
‘내일의 죠’(1980)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죠는 본래 길거리에서 주먹 쓰기를 좋아하는 건달이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코치가 그를 훌륭한 권투선수로 키워냅니다. 그런데 죠에게는 항상 내일을 향한 목표가 생깁니다. 일본 챔피언을 꺾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 챔피언이 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힘든 과정을 거칩니다. 자신의 라이벌과 경기하던 중 라이벌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큰 실의에 빠져서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 구토합니다. 큰 노력으로 동양 챔피언이 되고 세계 챔피언과 시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손이 떨리는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챔피언전에 나서지 말라고 청합니다. 그렇지만 죠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꿈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치고는 숨을 거둡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후후…. 불태웠어…. 모두 새하얗게….”
다 타버린 연탄재가 연상됩니다. 뜨겁게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왔던거죠. 하지만 죠에게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 타버린 연탄재에게 고마워합니까? 치워야 하는 골칫덩이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죠”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오늘 권투경기를 하는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에 목적이 부여되면 그 일을 하며 자신을 소진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그렇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인들이 그렇습니다. 일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면 지치고 소진되고 결국 꼴찌가 되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첫째였던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였던 사람이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첫째이고 어떤 사람이 꼴찌인지 말씀해주십니다. 한 데나리온씩 자기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일당으로 내어주었을 때 고마워하는 사람이 첫째고 그것밖에 안 주냐고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꼴찌입니다. 그 이유는 일 자체에서 행복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는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제가 유학을 나가서 공부할 때 목적은 학위가 됩니다. 학위가 목적이 되면 공부가 재미없습니다. 자신을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공부가 목적이 됩니다. 학위는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가며 학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하는 동안 자신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허태균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고의 착각’에 빠져있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시험을 보면 엄마도 같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귀의하여 잠도 자지 않고 치성을 드립니다. 왠지 그래야 자녀가 잘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힘이 들어서 아이들 시험이 끝나면 더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군 생활을 할 때 틈틈이 열심히 영어단어를 외웠습니다. 잠꼬대를 영어로 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로 사고를 내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었다면 그 자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즐기지 못하고 군 생활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꼴찌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임 씨는 두 아이를 하나는 서울대에, 하나는 카이스트에 보냈습니다. 유 씨는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다가 미끄럼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온 적도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가는 일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재미있게 읽게 하고 공부도 재미있게 하게 하였습니다. 공부하였으면 ‘폐인 데이’라는 것을 만들어 폐인처럼 게임도 하고 TV도 보는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공부한 시간보다 두 배를 놀게 했습니다. 공부가 목적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도 좋게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탕에 때 밀러 갑니다. 그런데 때는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떨어져 나갑니다. 굳이 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밉니다. 이런 사람은 목욕탕에 오래 못 있습니다. 목적만 달성하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목욕탕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오래 즐깁니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고 사우나도 하며 잠도 잡니다. 그렇게 피로를 풉니다. 누가 목욕을 즐기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하신다면 그분은 인간과 똑같이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더라도 그 일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큰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떤 봉사를 하든 행복해야 합니다. 사제로 살면 사제로 사는 하루하루가 목적입니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 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열매가 맺힙니다.
결혼생활도 그렇게 자녀를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 하지 말고 그것 자체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미국 인구의 60%는 백인이고, 18%는 히스패닉이고, 14%는 흑인이고, 나머지는 소수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교도소의 40%는 흑인이라고 합니다. 인구의 비율로 보면 흑인의 재소자 비율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렇게 된 경위에는 슬프고도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흑인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흑인은 노예로 팔려올 때 화물로 취급 받았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과정에서 많은 흑인이 죽었고, 노예로 살면서 많은 흑인이 죽었습니다. 흑인이 아프면 치료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아픈 흑인을 치료하기보다는 새로 흑인 노예를 사는 것이 경제적이었다고 합니다. 노예해방이 이루어졌지만 흑인들은 배움도 없었고, 기술도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농장주의 밑으로 들어가서 노예와 비슷한 생활을 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흑인들의 삶이 그와 같았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미국사회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 오후에 나와서 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주인에게 더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없다는 말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미국 정부는 흑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주거와 복지, 문화와 교육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동네에 도서관을 세워주고, 깨진 유리창은 갈아주고, 노후 되어서 허물어져가는 건물은 다시 세워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흑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흑인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흑인 재소자들의 비율도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흑인들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흑인들의 슬픈 역사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우리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을 하늘나라에서는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아프고, 힘들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노숙자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쉼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노숙자들과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옷에 진흙이 묻을지라도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팬데믹 시기를 지내면서 서울의 명동에는 서울교구에서 운영하는 ‘밥집’이 생겼습니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명동 밥집은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따뜻한 한 끼의 밥은 주인이 주려고 했던 품삯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고 있지 않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교부들은 이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준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그들은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하느님 나라는 누가 들어가든지, 또 언제 들어가든지, 누구에게나 똑같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뿐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언제 얻든지 간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한 가지뿐입니다. 다른 종류나 다른 등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바로 그 단순한 사실을 기초로 한 비유입니다. 얼마나 오래 일했든지, 얼마나 많이 일했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하느님 나라는 똑같은 나라이고, 누구나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늦게 와서 일을 적게 한 사람을 차별대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생활을 짧게 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하신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 주제입니다.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더 오래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높은 등급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짧게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등급이 더 낮은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순교자라고 해서 더 좋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순교자가 아니라고 해서 덜 좋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똑같다.’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항의할 순교자나 성인 성녀는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항상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분들이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마태 20,1-5)
여기서 ‘일꾼들을 사다.’ 라는 말은, ‘복음을 선포하다.’ 라는 뜻이고,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복음대로 살면 얻게 되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뜻을 생각하면, 밭주인이 일꾼들을 구하는 일은 잔치에 참석하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일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한 다음에, 품삯을 받고 떠나면 그만인 일꾼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품삯을 받는 일꾼이라면, 그가 하는 일은 ‘남의 일’이고, 일을 다 하고 나서 품삯을 받으면 주인과의 관계가 끝납니다. 자녀라면, ‘아버지의 일’은 곧 ‘나의 일’이고, 일을 하는 동안에도, 일을 마친 뒤에도,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니 품삯을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이 끝난 뒤에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남을 위해서 하는 노동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나의 생활’이고,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입니다. 은총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태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 분입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9-12)
맨 먼저 온 이들의 불평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불평과 거의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먼저 온 이들’은 자기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했다.”고 주장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자기가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일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강제노동 하듯이 기쁨 없이 한 사람들입니다.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으니 은총을 받아도 은총인 줄 모르고, 노동의 대가만 요구합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먼저 온 이들’과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을,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하느님을 믿고 섬겼다. 그런데 이제 막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에게 어찌하여 우리보다 더 좋은 은총을 주는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 자체는 자랑거리가 아니고, 이제 막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신앙인들이 구약시대의 유대인들보다 낮은 등급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이 받은 것보다 등급이 낮은 구원과 생명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나라와 구원과 생명은 없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받는 은총과 인생의 마지막 시점이 되어서 비로소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사람이 받는 은총이 달라야 한다면,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에 믿게 된 사람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차별도 없고, 시기 질투도 없는 나라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일꾼들의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세상의 통념과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이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며 놀다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가 품값으로 지급되는 일을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주인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을 부르러 광장에 나갑니다. 수확에 매진하였던 그는 일꾼들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하여 적어도 네 번이나 더 집을 나섭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이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포도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낮’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저녁’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고자 줄을 세웁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들이 가장 먼저 불려 나가 품삯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각과 주인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맨 먼저 나와 열두 시간씩 일한 일꾼들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일한 일꾼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맨 처음 나와 일한 이들에게도 나중에 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에는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은 공로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행하시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종교, ‘보상’의 종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선행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 두고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공로에 따라 지불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은 수고하며 땀도 많이 흘렸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먼저 부름을 받고 응답한 이들은 맨 나중에 와서 품삯을 받은 이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간 인생이 최고의 보상이고 감사한 인생이 아닌가?’ 비유 속 포도밭 일꾼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 앞에서 의아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습니까?
=====================
[전주교구 김광태 야고보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포도원 주인은 마치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왕 쓰는 김에 하루 종일 고생한 사람들에게 몇 푼 더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후한 주인이 자기를 위해 수고한 이들에게는 오히려 인색한 것 같아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비유 내용을 아무리 읽어 봐도, 주인은 농사에 관심이 있어서 일꾼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그 일꾼들이 아침부터 서 있는 것을 보았단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는 일꾼의 대답은 옳습니다.
오후 5시까지 일꾼을 찾아야 할 정도로 손이 모자랐다면 일찌감치 그 일꾼들을 데려다 썼을 것입니다. 결국 일을 시키는 이유도 꼭 일손이 모자라서가 아니었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는 이유도 수고를 보상하려는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부족함 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은총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물론 감사해야 하지만, 많은 수고를 한 사람 역시 감사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일찌감치 품삯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는 행복을 누렸지 않습니까? 못하겠다고 손사래 치지 않고, 봉사를 부탁할 때 기쁘게 응답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이재희 베네딕도 신부님]
1년 전 쯤에 제가 타던 차를 판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때 누가 저에게 말해주기를 차에 세차도하고 광도내고 타이어엔 약품을 뿌려서 더 새것처럼, 때깔 좋게 해서 팔아야 돈도 많이 받고 잘 팔린다고 했습니다. 중고상에도 차 팔 때 다 그렇게 겉만 보기 좋게 해서 돈 많이 받고 판다고 했습니다. 차를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차의 성능보단 겉모습으로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높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외부의 형태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품을 자꾸 대형화시키고 자꾸 비싼 값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값도 싸고 소비자에게 유익한 물건은 이윤이 적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선택의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본래의 모습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화장하고 겉만 치장하려 합니다. 겉을 바꾸기 보다는 삶을 바꾸고 내면을 변화시키려는 풍토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에 온 사람 순으로 임금을 주었습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많이 받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모든 일꾼들은 똑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아침에 일찍 온 사람에게나 오후 늦게 온 사람에게나 임금을 똑같이 주는 것은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한사람, 시간적으로 오래 한사람이 보상을 많이 받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하고 그렇지 않고, 또 내가 본당에서 직책은 무엇을 맡고 있고, 영세를 일찍 받고 늦게 받고 그것이 은총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때 더 귀한 일이 있고, 덜 귀한 일이 있고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덜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날 일의 실적이나 단순히 쓰여진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내가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제까지 너무 못살았다는 실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느냐, 그렇다면 지금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다면 현재의 변화된 모습과 일하고 있는 그것만으로 하느님의 은총은 풍성하게 내려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나라이며, 하느님께서 활짝 열어 놓으셨기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품삯을 주는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과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는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립니다.
신앙인의 삶에서 변화가 지금 시작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시작된 변화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뒤늦게 후회하고 회개한 사람이 구원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언제나 후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한편, 겉으로는 일을 잘하고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잔꾀를 부린다거나 심성이 악한 사람에게 은총이 풍성히 내려진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현대에는 포도원에 일하러 오라고 부르는 포도원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 일이 많은데도, 본당에서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도 봉사에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
[부산교구 박기흠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은 ‘하늘나라’란, 어떤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숨 쉬는 생명체이며, 인격이라고 하십니다. 한때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어떤 세상 또는 장소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마음 상태'(루카17, 21)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넉넉한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야말로 바로 ‘하늘나라’이며, 우리 삶이 되어야 함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 역시 이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이른 아침, 노동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품을 팔기 위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 역시 일꾼을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새벽 인력시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이른 아침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일당을 주기로 하고 모두 포도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주인의 깊은 뜻을 알 수 없지만 세 시간 후, 오전 9시에 다시 나가 그 시간까지도 일품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일한만큼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그들도 자신의 포도원에 데려옵니다.
그때까지 장터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하루를 공쳤다고 생각했을 터인데 일거리를 얻었으니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주인은 계속해서 정오 12시든, 오후 3시든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일꾼들도 그냥 노니 자신의 수고에 절반에 그 절반이라도 버는 것이 좋을 테니까 주인의 말에 쉽게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오후 5시면 그날 일을 마무리하고 끝내야 될 시간인데 포도원 주인은 또 시장에 나갑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 주인이 단지 포도원의 일이 급해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이 아니라 바로 '사람'에게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몸으로 일을 해야 먹고사는 사람에게 일이 없다는 것은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일자리가 없어 쉬고 있다는 것은 분명 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IMF를 겪은 우리 국민들은 ‘일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일하라'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구원의 목소리입니다.
그 가운데 오후 5시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하루에 대한 절망뿐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으로 깊은 자괴감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잊지 않고 그들에게까지 희망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비록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포도원에서의 일은 단지 '고달픈 노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인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샀고 시간이 되기까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능하면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뿐,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삯을 받아야 하는 고달픈 현실입니다.
그들에게 포도원에서의 일은 삶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달픈 현실이기에 한 데나리온은 은혜가 아니라 단지 그들 품에 대한 삯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후 시간에 늦게부터 잠깐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은 일에 대한 품삯이 아니라 주인의 깊은 연민과 그의 자비심을 체함하였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평생을 하느님의 일에 헌신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어떤 보상을 기대한다면 하느님을 율법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은 결코 우리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며, 영원한 생명도 우리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은 주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은혜입니다. 나아가 주인은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 모두에게 똑같이 엉뚱하게 한 푼씩 주는 계산법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세상의 원리로 보면 당연히 위배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으로는 먼저 온 자들에게는 많이, 나중에 온 자들에게는 조금씩 차등을 두어야 당연하지만 하느님은 인간들의 계산과는 다르며, 그 어떤 누구도 잊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하늘나라’로 상징되는 포도원 주인은 일감이 없어 비록 일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밥을 굶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일꾼들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법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주는 한 데나리온은 우리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의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들 역시 이 주인과 한 데나리온처럼 자비로운 신앙 행위로 하늘나라를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
마태오 20,1-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선한 포도밭 주인>
맨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생각지도 못한
한 데나리온을 받고
기쁨에 겨워 돌아간 후에
맨 처음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정당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음에도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간 후에
일꾼들과 가족들이
하루의 고운 땀의 결실로
오늘 하루 삶의 이야기 곁들여
맛난 저녁식사를 즐기며
내일의 꿈으로 가득할 시간에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
아무도 없을 듯한 장터이지만
여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무도 사지 않은 일꾼들이 있을까
선한 포도밭 주인이 홀로 애타게 서성인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이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가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달 마감에 시달립니다. 바로 이 책, ‘쓰담쓰담’ 묵상집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 다시 온 뒤에 후원회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매달 발행하는 묵상집입니다.
2016년 9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묵상집의 모든 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 혼자 쓰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이미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을 써왔기에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감’이라는 단어에 힘듦을 매달 느끼고 있습니다.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제때 묵상집을 발행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초조해지고 몸과 마음의 피곤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난 6월처럼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받고 회복하는 시간까지 길어지면 몸과 마음으로 더 힘들어집니다. 솔직히 마감이 없는 경우, 글이 잘 써지지 않습니다. 편안한 상태가 아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자극받아서 글을 쓰게 됩니다. 또 마감이 있어야 그 날짜를 염두에 두고 계획성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삶도 마감이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이 죽음에 자극받아 더 발전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내 삶의 마감인 죽음을 바라보면서 더욱더 지금을 계획성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바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눈으로 볼 때, 포도밭 주인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 부분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그런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이른 아침에 장터의 인력시장에서 일할 일꾼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낮 기온이 너무 높아서,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는 인력시장을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포도밭 주인이 찾아갔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선택받을 수 있었고, 그 희망으로 인해 후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정의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처사에 대해 우리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영성>
-사제는 사업가(businessman)가 아닌 목자(shephred)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누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시편 23,1-3ㄱ)
착한 목자 영성은 비단 교회의 사제뿐 아니라, 신자들은 물론 모든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 대통령 모두에게 해당되겠습니다. 참으로 사랑과 지혜, 온유와 겸손을 겸비한 착한 목자같은 지도자들이 목마르게 그리운 시절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부터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전 장상인 아빠스님으로부터 원장 재직시 받은 조언을 잊지 못합니다. 장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목자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규칙서에도 강조되는바, 우선적인 것이 아빠스의 목자로써의 자질입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어제 소개해 드린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을 통해서 착한 목자의 모범을 만납니다. 마르타의 집 청소담당 자매의 증언입니다.
-“저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일하면서 교황님을 매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정말이예요. 그분은 결코 혼자 있는 걸 원하시지 않는 듯해요. 어느날 아침, 우리 청소팀은 청소도구를 가득 싣고 엘리베이터에 모두 탓죠.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어요.
우리 앞에 누가 있었는지 아시겠어요? 네, 바로 교황님! 본능적으로 우린 그분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하여 내리려고 하는 찰나에, ‘아녜요. 아닙니다. 그냥 있으세요. 우리 좀 당겨서요. 자 됐어요!’ 교황님과 우리는 모두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었지요. 제겐 꿈같기도 하였고, 사건 그 자체였어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의 인터뷰 기사중 감동적인 부분을 나눕니다. “교황님께서 저를 임명하실 때 ‘교황청에 아시아인 장관이 한 사람밖에 없어 새로운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유 주교님의 이름이 떠올랐을 때, ’아, 찾았다!‘라며 기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추기경은 교황청을 거닐면서 보이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자신을 ‘돈 라자로’라 소개한다. 직책이나 신분의 높낮이 없이 그저 한 사람의 신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형제로서 사람들을 만나고 친교를 나누고자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황청에서 돈 라자로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물론 후에 유추기경이 ‘성직자부 장관’임을 알고 깜짝 놀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배우게 되니, 이렇듯 보고 배우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0.), 무려 1년전 집무실 게시판에 써붙인 글이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공동체 형제 하나하나에게 좋은 점을 보고 배우니 공동체는 제 스승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참 많이 보고 배우며 깨닫습니다. 이 또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이처럼 착한 목자 영성으로 살 때 실현되는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 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아니 이런 이들의 삶자체가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과는 대조적으로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서 주님의 이스라엘의 고약한 목자들에 대한 개탄이 흡사 하느님의 육성을 듣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대로 오늘날 본분에서 이탈한 목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분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제 착한목자영성이 보편화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음에서 제시되는 착한 목자상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포도원은 세상을, 포도원에 고용된 이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선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착한목자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눈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용된 당신의 백성이요 성소자들입니다.
일한 시간이나 노동량에 상관없이 아침 일찍 온 사람이나 끝무렵에 온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은 하루 한 데나리온 일당을 지급합니다. 사람마다 다 고유의 사정이 있기에 불림받은 시간이 동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예외없이 똑같은 일당을 지급하니 흡사 요즘 회자되고 있는 '안전 그물망'과도 같은 기본소득제의 실현처럼 생각됩니다. 모두에게 최저 생계비를 지급함으로 모두가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 기본적 인간 품위를 누리며 일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언젠가는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계산법입니다. 산술적 공정과 정의의 잣대가 아닌 사랑의 잣대입니다. 각자 불린 자들은 남과 비교할 것 없이, 하느님 은총의 사랑을 자신의 이기적 잣대로 잼이 없이,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를 크게 깊이 깨닫고 배우며 자기 본분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면 될 뿐입니다. 이런면에서 맨 먼저 불림 받아 고용된 자들은 일견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입니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자신의 분수를 너무 몰랐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 군요.”
일견 맞는 것 같지만 감사가 전무합니다. 다른 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할 시간, 하루종일 일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늦게라도 일자리를 찾아 적은 시간동안이라도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일한 이들에게도 이들의 내적 처지를 헤아린다면 시간의 양에 관계없이 그대로 일당을 지불함이 자비로운 주인의 마음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이런 주인처럼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며 지혜롭고 깊으신 분입니다. 이어지는 주인의 답변은 우리에게는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도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헤아리지 못한 무지無知에, 제 분수를 모르는 월권越權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래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어 한결같지 못했을 때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고, 늘 초심의 자세로 살 때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마태 20,16)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내적현실을 점검케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여전히 내적으로 무너짐 없이, 불림받았을 때 내 본연의 첫째의 초심의 삶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내 책임을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조용히 속삭이며 한결같이 깨어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하루하루 깨어 평범한 섬김의 일상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나를 따르니리,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6).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20,1)
오늘 복음(마태20,1-16)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선한 포도밭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일꾼들을 사려고 찾아 나서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뽑혀진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옹기장이이신 주님의 손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주님께 호되게 야단맞습니다.
"친구여,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시기하는 것이오?"(마태20,15)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을 가려주는 척도가 바로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고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 앞에서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이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을 온전하게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니 고통도 나쁜 친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제 아침에 코린토 2서 필사를 마쳤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벌써 신약성경 완필을 했어야 하는데, 공소성전재건축 문제로(핑계) 좀 늦춰지고 있습니다. 이제 정신차리고 달려가야 할 길을 잘 달려가겠습니다.
코린토 2서가 끝 말씀으로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인사와 축복은 이렇습니다.
"그럼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13,11-13)
저도 여러분 모두에게 같은 인사와 축복을 드립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B47GPnx388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5)
적어도
하느님의
후하신 처사를
우리가
악용해서는 안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다는
엄청난
이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두루 살피시고
가장 좋은 시간에
우리를 초대하신다.
언제나
어느 때나
후하신
하느님의
사랑법이다.
사랑 앞에
꼴찌도 첫째도
모두가 동등한
사람들이다.
포도밭의
한 가족들이다.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은
후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알게되었다는 행복이다.
행복의
한 데나리온을
갉아먹는 우리의
시기와 질투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연민은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신다.
사랑 앞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들 욕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내놓으시고
우리는 욕심을
내놓는다.
우리를
맞아들이시고
거두어들이는
분 또한
하느님이시다.
모두가
가장 알맞은 때에
이루어지는
한 데나리온의
회개이다.
때에 맞게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참된
구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욕심이 아닌
구원으로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하느님 중심이며
회개를 통한 행복이다.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오늘이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지금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알맞은
은총의 때이다.
후하신 은총 속에
너와 내가 있다.
가장 좋은
사랑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포도밭을
구원으로
물들이시는
하느님이시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