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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7
#칭의
그냥 아무 근거없는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요즘 횡행하는 '칭의'에 대한 논란은 왠지 하나님께서 소위 '개혁신학'을 추구한다고 하는 '성경교사'들과 '가르치는 직분자'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싶다. 즉,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내가 이것으로 너희의 수준을 점검하리라' 하시는 것 같다.사실, 이런 '칭의' 논란은 아우구스티누스 선생 때나, 종교개혁 시대 때나,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치고 올라오는 해묵은 주제이다. 그리고 이미 신앙의 선배들은 펠라기우스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교회의 공적 회의에서 이단으로 판결을 내린바 있다. 따라서 요즘 다시 들먹이는 이 펠라기우스/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냥 성경과 선배들의 교훈을 따라 간단히 '이단'으로 판단을 내리고 무시해버리고, 신자들을 잘 가르치면 되는 것이지, 시시콜콜 다시 학문적 논쟁을 벌일 사항이 아니다.그런데 문제는,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 위치에 있는 권위있는 개혁신학자들이 잠잠하다는데 있다. 잘못된 칭의 사상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판단 내리기를 주저한다. 나로서는 왠지 몸사리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이단이라고 입장을 내비치는 순간 잃게 되는 것들, 또는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들이 많아서일까? 그저 몇몇 의식있는 목회자들을 통해서만 회자될 뿐이다.'자, 너희들이 성경교사고 가르치는 자들일진대, 이 칭의 논란에 대해서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으시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잠잠해질 때까지 두고 보기만 할 것인가? 과연 개혁신학 성경교사들 중에 하나님의 불시험을 견디고 그 공적이 남아있을만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20220907
#요한계시록 #Revelation 22:8-9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者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天使의 발 앞에 敬拜하려고 엎드렸더니
I, John, am the one who heard and saw these things. And when I had heard and seen them, I fell down to worship at the feet of the angel who had been showing them to me.
Et ego Joannes, qui audivi, et vidi hæc. Et postquam audissem, et vidissem, cecidi ut adorarem ante pedes angeli, qui mihi hæc ostendebat :
Κἀγὼ Ἰωάνης ὁ ἀκούων καὶ βλέπων ταῦτα. καὶ ὅτε ἤκουσα καὶ ἔβλεψα, ἔπεσα προσκυνῆσαι ἔμπροσθεν τῶν ποδῶν τοῦ ἀγγέλου τοῦ δεικνύοντός μοι ταῦτα.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고 친근하게 지냈었으며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육신의 모친인 마리아를 공양할 것을 부탁받기도 하였었다. 사도들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까지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고 사랑을 강조하였으면서도 신비한 환상으로나 복음의 가르침으로나 모든 영을 믿지 말고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지로 시험해보라는 지침도 주었었다. 그렇게 당대 최고의 성도라 할 수 있는 요한 사도 조차도 바울 사도가 셋째 하늘의 환상을 체험하듯이 장차 속히 될 일들에 대한 하늘의 계시를 받게 되자 정신이 현황하여 계시를 전하는 이가 천사인지 주님이신지 구분하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는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과 우리가 보게 될 보좌에 앉으신 주 하나님 그리스도의 지극한 영광은 이 땅의 우리로서는 우주의 끝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초월적인 것이어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알아가는 복음의 진리들과 신앙의 삶들은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턱없이 희미하고 보잘것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복음과 신앙이 아니고서는 지극한 하늘의 영광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환난과 고통들은 하늘의 상급에 비해 지극히 가볍고 우리가 받을 하늘의 상급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비해 지극히 무거운 것이라 하였다.
주님이시건 천사들이건 하늘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이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본성적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 거할 때에는 참되고 진정한 경외심만이 있었던데다가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실 때에는 그들 수준에 맞도록 하늘의 영광을 가리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스스럼없이 여호와 그리스도와 지내며 거닐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는 수치심과 아울러 신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생김으로써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류 또한 유전적으로 영적인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걸어가시는 여호와 그리스도와 두 천사에 대해서는 직접 대면하여 음식을 접대할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하였으나, 언약 제사를 드리는 중에 흑암과 횃불과 함께 나타나신 여호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두려움에 정신을 잃고 엎드려 혼절할 수 밖에 없었다. 모세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광 보기를 간구하고 그분의 등을 볼 정도로 담대하였으나, 시내 산에 빽빽하고 어두컴컴한 흑운과 우레와 번개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에는 극심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벌벌 떨 수 밖에 없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러 진격하는 중에 멀리서 칼을 들고 마주하여 서 있는 사람을 보고서 그가 적인지 아군인지 판별되지 않았을 때는 그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을 때에는 곧바로 엎드려 절부터 하였다. 기드온과 마노아 부부는 자신들에게 나타나서 말을 거는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했을 때는 두려움 없이 스스럼 없이 대화하였으나, 정작 그 사람이 직접 제물을 받고 사라짐으로써 여호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을 때에는 죽을까봐 두려워하였다. 선지자 이사야는 환상 중에 셋째 하늘로 들려올라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그리스도를 뵙자마자 자신에게 죽음의 화가 닥쳤다고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선지자 다니엘은 바벨론의 가장 높은 신하를 역임함으로써 온갖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것들을 두르고 있었으면서도 강가를 거니는 중에 나타나신 여호와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 앞에 자신의 아름다운 것들이 빛을 잃었고 자신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다고 고백하였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을 때 엘리야와 모세와 말씀을 나누시는 동안 잠깐 찬란하게 변화하셨던 모습을 보고서 초막을 짓고 살자며 횡설수설 하였었다. 이처럼 하늘의 주님의 영광은 감히 사도들 조차도 넋을 잃을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괜히 주제넘게 신비한 것들을 추구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만약 무슨 신비한 환상을 체험하게 된다면 요한 사도가 가르친 바 환상을 주는 그 영이 과연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지 시험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우리 영이 환상에 묶이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兄弟 先知者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者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敬拜하라 하더라
But he said to me, "Don't do that! I am a fellow servant with you and with your fellow prophets and with all who keep the words of this scroll. Worship God!"
et dixit mihi : Vide ne feceris : conservus enim tuus sum, et fratrum tuorum prophetarum, et eorum qui servant verba prophetiæ libri hujus : Deum adora.
καὶ λέγει μοι Ὅρα μή· σύνδουλός σού εἰμι καὶ τῶν ἀδελφῶν σου τῶν προφητῶν καὶ τῶν τηρούντων τοὺς λόγους τοῦ βιβλίου τούτου· τῷ Θεῷ προσκύνησον.
통상적으로 하늘의 천사들은 순수한 영으로서 이 땅의 성도들보다 고귀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요한 사도 조차도 자신에게 계시를 전하여주는 천사의 지극한 영광을 보고 주님이신가 혼동할 정도였다.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물질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셋째 하늘과 천사들을 먼저 지으셨고 그 천사들 중에서도 그룹들은 당신의 보좌를 호위하고 이동하게 하시거나 에덴동산의 입구를 지키는 화염검으로 삼으시거나 천사장으로 삼으시기도 하시고, 스랍들은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위엄을 창화하며 찬양하게 하시며, 어떤 천사는 반역을 저지른 붉은 용과 싸워 이기게 하시고, 어떤 천사는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멸하거나 사흘 동안 7만 명을 죽이는 전염병을 일으키거나 앗수르 군사 185천 명을 하룻밤에 몰살시키게도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히브리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른 바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아들이나 후사로 세우지도 않으셨고 타락한 천사들을 구원하려 하시지도 않으셨으며 그 고귀해보이는 천사들도 결국에는 성도된 우리들을 섬기는 존재라고 하였다. 요한 사도에게 계시를 전하는 천사가 자신을 성도들과 함께 된 종이라고 알려준 것은 이전의 사람들의 개념에 비해서 많이 낮아진 것이며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성도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낮추는데 그친 것이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천사들의 등급은 하늘의 성도된 우리를 섬기기까지 더욱 낮아지게 될 것이다. 요한 사도에게 나아온 천사는 그런 자신의 직위와 신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그리스도만 받으실 수 있는 경배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장차 종으로서 주인으로 모시게 될 요한 사도의 절을 받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행위로만 본다면 요한 사도는 주님이 아닌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엎드려 절하였으므로 이미 우상숭배를 저지른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이 땅의 육신 그것도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노년의 육신이 감당하기 버거운 하늘의 환상을 봄으로써 정신이 현황하고 넋이 나갈 정도여서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범한 것이어서 고의적인 우상숭배가 아니므로 말로 하는 견책과 책망만으로도 바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땅의 성도들이 언제나 항상 성경과 성령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새에 부지불식간에 우상숭배를 비롯한 모종의 죄를 지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럴 경우 이를 인지한 다른 성도는 그가 이러저러한 죄를 지었음을 정중하고 격식있게 지적해줘야 하고 지적을 받은 성도는 경각심을 가지며 근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전에 남아있던 육신의 습관을 따라 이방인 성도들을 멀리하는 죄를 지었을 때, 바울 사도는 그런 베드로 사도를 적절하게 책망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바울 사도의 책망을 기분나빠 하지 않고 주님의 책망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Revelation 22:10-13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豫言의 말씀을 印封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Then he told me, "Do not seal up the words of the prophecy of this scroll, because the time is near.
Et dicit mihi : Ne signaveris verba prophetiæ libri hujus : tempus enim prope est.
Καὶ λέγει μοι Μὴ σφραγίσῃς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τούτου· ὁ καιρὸς γὰρ ἐγγύς ἐστιν.
앞서 요한 사도는 하늘에서 울린 음성의 내용을 기록하려 하였으나 기록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멈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과 승천, 짐승이 이끄는 천하의 왕들의 군대와의 1차 전투, 용이 이끄는 땅의 백성들에 내리는 하늘의 불 심판과 용의 영원한 처벌, 하늘의 성도들이 누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는 명을 받는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들을 귀 없는 자는 듣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하지 말고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 설교나 강해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해석의 난해함으로 인한 지나친 조심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럴수록 더욱 때가 가까우므로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할 수 있는대로 선포해야 한다.
11 不義를 行하는 者는 그대로 不義를 行하고 더러운 者는 그대로 더럽고 義로운 者는 그대로 義를 行하고 거룩한 者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Let the one who does wrong continue to do wrong; let the vile person continue to be vile; let the one who does right continue to do right; and let the holy person continue to be holy."
Qui nocet, noceat adhuc : et qui in sordibus est, sordescat adhuc : et qui justus est, justificetur adhuc : et sanctus, sanctificetur adhuc.
ὁ ἀδικῶν ἀδικησάτω ἔτι, καὶ ὁ ῥυπαρὸς ῥυπανθήτω ἔτι, καὶ ὁ δίκαιος δικαιοσύνην ποιησάτω ἔτι, καὶ ὁ ἅγιος ἁγιασθήτω ἔτι.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한 번 복음의 빛을 받고 성령의 좋은 것들을 맛보아 알았으면서도 돈이라는 바다 짐승과 권력이라는 땅의 짐승의 표를 받고 육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바리새인 같은 목사와 교인들을 의미한다. 더러운 자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복음과 성령을 받아 맛보았으면서도 우상숭배와 패륜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말을 일삼는 목사와 교인들을 의미한다. 의로운 자는 교회에 불의와 더러운 악이 관영한 현실을 개탄하며 주님의 공의와 긍휼을 간구하는 성도들을 의미한다. 거룩한 자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매순간 하늘을 바라보며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의미한다. 악인이건 의인이건 각자의 소행대로 하라시는 주님의 말씀은 가장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철부지 어린 아이들을 다루듯이 악인들은 어떻게든 돌이키려 하시고 의인들은 어떻게든 보존하시려고 직접적인 개입을 해오셨으나, 이제는 사람의 인생처럼 청년기를 지나 장년기에 접어들어 하나하나 챙겨주는 부모의 역할은 끝났으니 신앙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각자 가던대로 내버려두라는 주님의 말씀은 악인보다는 거룩한 의인들에게 한층 더 가혹한듯이 보이는데, 이는 이 땅에서는 악인들이 짐승의 표를 받고 음녀와 어울려 음행을 저지르므로 세상 권세를 마음껏 누리는 반면에 거룩한 의인들은 짐승때문에 매매를 하지 못하거나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의 온갖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건져주시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주님께서는 거룩한 의인들이 낙심하지 않고 이 예언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기를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것이다.
12 보라 내가 速히 오리니 내가 줄 賞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行한 대로 갚아 주리라
"Look, I am coming soon! My reward is with me, and I will give to each person according to what they have done.
Ecce venio cito, et merces mea mecum est, reddere unicuique secundum opera sua.
Ἰδοὺ ἔρχομαι ταχύ, καὶ ὁ μισθός μου μετ’ ἐμοῦ, ἀποδοῦναι ἑκάστῳ ὡς τὸ ἔργον ἐστὶν αὐτοῦ.
주님께서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우리에게 주시는 상이 동급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모든 부자들의 헌금보다 더 많다고 하시고 복음 사역자에게 준 냉수 한그릇도 상급을 주시는 것이 주님의 원리이므로 우리로서는 과분한 긍휼의 상급을 받는 것이다. 한편 악인들도 자기들의 악행대로 주님께서 갚아주시는데 겉으로만 보면 한시적인 그들의 악행에 비해 그들이 받는 형벌은 영원히 타는 불못이므로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이는 오로지 주님의 공의의 심판에 따른 것이므로 사람이 감히 왈가왈부 할 수 없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始作과 마침이라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the First and the Last, the Beginning and the End.
Ego sum alpha et omega, primus et novissimus, principium et finis.
ἐγὼ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σχατος, ἡ ἀρχὴ καὶ τὸ τέλος.
주님께서 스스로를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라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의 신성에 대해서만 영원한 존재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인성에 대해서도 그러하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육신 때 처녀 마리아의 육신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지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영원 전에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신성과 연합하신채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이시다. 따라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세 위격과 구속사역을 논하실 때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구원하실 성도들을 미리 선택하셨고 그리스도의 인성께서는 당신 자신의 자유로우신 판단과 의지로써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태초에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동산에서 그들과 거니시며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신 분, 아브라함을 비롯한 여러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살렘 왕으로서의 멜기세덱, 모세를 세우셔서 애굽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시며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신 분,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와 회복을 주관하신 분이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게 영원 전부터 하늘 보좌에 계셔왔던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당신 자신의 인성을 한없이 낮추셔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신 것이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인성이 높아지신 정도가 아니라 성육신 전에 원래 가지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인성을 회복하신 것이었다. 이제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시고 하늘로 들어올리시며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땅의 왕들과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 넣으신 다음에 하늘의 성도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셨기 때문에 마지막도 영원 후 하나님과 함께 마치시는데, 이는 그분의 인성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10907
#신명기 #Deuteronomy 31: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신 마지막 지시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미리 안다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복일 수 있는 반면에 어떤 자들에게는 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모세에게만큼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 받은 것은 화가 아니라 복이었을 것이다. 모세는 이미 여러차례 백성의 죄악 때문이었건 자기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건 자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생을 마치게 될 것을 여호와께로부터 변함없는 기정 사실로 통보를 받았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께 철저히 순종하면서 백성을 인도만 하면 되었었기 때문이다. 자기 사역과 인생을 마감해야 할 때가 다가올 때도 별다른 두려움이나 미련없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선한 심령으로 넘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여호와의 은혜로 가까스로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에 이제는 좀 몸과 마음의 평안을 누려보기도 전에 갑자기 여호와께로부터 당장 죽을 것이니 삶을 정리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선지자 이사야에게서 듣게 된다. 그런 히스기야가 여호와께 자기 삶에 대해서 눈물로 간구했던 이유는 물론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의 선고에 대한 육신의 두려움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왕으로서 여호와의 율례를 회복시키기 위한 선한 사역을 시작하고서도 갑작스럽게 허망하게 중간에 내려놓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앗수르의 침공을 막아내느라 대를 이을 후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대에서 여호와의 언약이 불미스럽게 끝나버리는 것에 대한 비통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히스기야가 자기 자신의 유익보다는 여호와의 언약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호소를 드리자 여호와께서는 이를 기다리셨다는듯이 즉시 받으시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왕궁을 떠나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바로 다시 되돌아가서 15년의 생명이 연장되었다고 전하라 하신다. 히스기야는 이제 자기의 남은 생명이 단 15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죽을 병에서 놓이게 된 지 2년 후에 자기 뒤를 이을 므낫세를 얻음으로써 유다 왕가에 대한 여호와의 언약이 끊기지 않음을 볼 수 있었고 아마도 그 15년 내내 자기가 이루려던 신앙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지속적으로 이어나갔을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은 어느 날 문득 선지자 에레미야의 예언서를 읽다가 여호와께서 귀환을 약속하신 70년이 거의 다다른 것을 깨닫게 되어 그 섭리가 온전히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작정하며 드렸다. 또한 다니엘은 여호와께로부터 큰 은총을 받은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가 비록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는 못하더라도 바사 왕궁에서 천수를 누리며 평안히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기가 그런 예언을 듣고 나이가 매우 많다고 해서 신앙이 느슨해지도록 놔두지 않고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신앙의 유익을 끼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육신으로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신께서 언제 십자가에 달리실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때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시지 않고 사력을 다해 복음사역을 이루어가셨다. 베드로는 예수님께로부터 젊어서는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복음사역을 다니겠지만 늙어서는 다른 자들에 의해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옮겨다니게 될 것이라며 그가 어떻게 무슨 죽음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될 지 어렴풋이 듣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마도 성령을 받은 후에야 그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끌려가건 감옥에 투옥되건간에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결백을 가이사에게 항소하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던 중에 타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2주 동안이나 정처없이 떠다니게 되었어도 천사로부터 그가 반드시 로마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는 고지를 받고 절망에 빠져있던 배 안의 276명을 위로하며 먹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20200907
#레위기 #Leviticus 19:35-36
35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36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하기 위해 헷 족속과 거래를 한다. 헷 족속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족속이었으나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서 복을 주시고 자기들도 그 복을 함께 누린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아브라함이 원하는 매장지를 거저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사코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그 땅의 원래 가격인 은 4백 세겔을 주고 구입을 한다. 어쩌면 헷 족속은 자기들의 호의를 극구 거부한 아브라함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가 여호와와 함께 하고 그분의 복을 받고 주위에 그 복을 흘려보낸다고 그들로부터 물질적인 호의나 혜택을 받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올무에 걸리고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지 않기 위해서와 물질적 호의를 권리로 여기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기 위해서 정당한 가격으로 매장지를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재물에 탐욕스러운 자라서 자기 조카 야곱을 무려 60년 동안이나 부려먹고 착취하였다. 게다가 자기 두 딸들 마저도 야곱의 노동의 댓가로 팔아버려서 그들의 고백대로 이방인처럼 취급해버렸다. 도망한 야곱을 추격하던 중에 꿈에서 야곱을 해치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으나 돌이켜 회개하지는 않았다.
다윗 왕은 인구조사를 한 죄로 3일 동안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은 후에 천사가 멈춰선 아라우나의 밭에서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아라우나의 밭을 후한 가격을 주고 구입한다. 아라우나는 자기의 누추한 곳에 고귀한 왕이 행차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했기 때문에 땅은 물론이거니와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제물과 장작까지 모두 자발적으로 다윗 왕에게 바치고자 했으나 다윗 왕은 거저 받지 않았다. 또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마음만 먹으면 아라우나의 땅을 편한대로 취해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 왕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합당한 가격을 주고 땅을 샀다.
솔로몬은 성전과 궁궐을 지은 후에 지대한 도움을 준 두로 왕 히람에게 보답으로 얼마간의 영토를 떼어주는데, 히람이 그 땅을 받고 보니 너무나 형편없고 쓸모없는 땅이어서 솔로몬에게 어떻게 이런 땅을 줄 수가 있느냐고 불평을 하였다. 솔로몬은 성전과 궁궐을 짓는 그 20년 동안 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여호와를 떠났던 것이었다. 히람은 그렇게 쓸모없는 가불 땅을 받았어도 솔로몬의 영향력이 워낙에 커서 도리어 그에게 많은 금을 보내 울며 겨자먹기로 감사함을 표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명을 따라 은 17세겔을 주고 사촌의 땅을 사야 했는데, 이는 사실 얼마 안있으면 바벨론에 멸망 당해서 1도 보상 받지 못하게 되는 그런 땅이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그 땅을 구입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담합하여 성전에서 매매하던 장사꾼들은 성전에서 드릴 제물을 사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그만한 가치에 미치지 못하는 짐승을 내어줌으로써 폭리를 취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예수님께서는 두 번이나 그런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처럼 자기 땅 전부를 팔아 교회에 바침으로써 명성을 얻으려 했으나 도중에 욕심이 생겨 절반만 바쳤다가 베드로 사도에게 발각되어 성령을 속인 정죄를 당해 죽임을 당한다.
그리스도인은 물건을 팔 때 지나친 폭리를 취해서도 안되고 물건을 살 때 지나친 에누리를 쳐서도 안된다. 지금 당장 속임수로 폭리를 취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손해를 보게 되고, 지나친 에누리로 당장 이익을 보더라도 다른 곳에서 에누리의 몇 배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위험은 속임수를 쓸 때에는 여호와를 마치 안계신 것처럼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모종의 사고를 당해 보험비를 청구할 때 피해를 부풀려서도 안된다.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았으면 그냥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받은만큼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책, 특히나 신학 서적을 비싸다고 구입하지 않고 전체를 복사하거나 스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죄이다. 아무리 돈이 없다고 공부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의미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오늘날 교회들이 흔히 저지르는 속임수는 마땅히 정당한 비용을 지급해야 할 것에 교회라는 이유로 무료봉사 또는 턱없이 낮은 비용만을 지급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많은 비용을 아끼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교묘히 포장한다. 하지만 교회의 이런 행태는 단지 거지 근성에 불과하다. 교회니까 돈을 들이면 안되고 무엇이건 바쳐야 한다는 인식은 유물론에 젖어 있는 것이다. 도리어 교회라면 기꺼이 모든 것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합당한 소비를 하는 것이다.
#20190907
#에스겔 48:1-35
하냐님께서 새 성전을 지으시고 백성들에게 새 기업의 땅을 배분하시면서 그들에게 새 지파명을 주시지 않고 원래 지파명을 주신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어떠했건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언약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심을 가르치신다. 또한 백성들로서는 이미 자기들의 범죄로 먼저 하나님과의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으므로 그 영광스러운 지파명을 박탈 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처지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그 지파명을 허락하심으로 자기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그분의 백성이 되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파명을 그대로 두시면서도 모든 지파의 이름은 당신께서 명하시는대로 지을 것이라 하신 것이다.
동->서를 방향으로 했을 때 각 지파의 분배 받은 기업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단-아셀-납달리-므낫세(요셉)-에브라임(요셉)-르우벤-유다-레위(성전)-베냐민-시므온-잇사갈-스불론-갓. 새 성전과 성소가 있는 레위 지파의 기업을 중심으로 했을 때 동서 최측근에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 시대에 열 지파가 갈라지면서 북이스라엘을 세울 때 오직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이 레위 지파와 더불어 다윗 왕조를 계승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다 지파는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실 지파로 예언 되었기 때문에 새 성전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베냐민 지파는 가장 막내 지파인데다가 역사적으로는 한 번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 앞에 심하게 패역하여 나머지 형님 지파들과 대대적으로 동족상잔을 저지른 전과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가 낙태되어 죽은 자와 같이 일찌감치 멸망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살아남은 6백 명을 통해서 새롭게 성장시키셨다. 더군다나 베냐민 지파에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 특별히 선택되어 그분의 영광의 모습을 보고 여러 환상들을 체험하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이 태어난 지파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연약한 베냐민 지파를 성소의 가장 가까이 두시길 원하셨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여서 그 기력이 탁월하였으나 아비 야곱의 첩, 자기에게는 서모가 되는 빌하와 근친상간을 저지름으로써 마치 에서가 한그릇 음식으로 장자의 권리를 야곱에게 넘긴 것과 같이 한 번의 욕정으로 장자의 존엄을 내팽개쳤다. 이로 말미암아 아마도 르우벤은 장자였으면서도 다른 모든 동생들로부터 제대로 맏형의 대접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르우벤은 이를 만회하고자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 할 때 자기가 몰래 살려서 아비 야곱에게 데려가 위신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이마저도 유다의 주도로 여의치 않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르우벤 지파는 무언가 뚜렷한 역할을 한 바가 없어서 성소의 인접성에도 유다에게 밀리고 말았다. 그러나 르우벤 지파가 더 뒤로 물러나지 않은 것은 그나마 그가 혈통적으로는 장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로서 조부 야곱이 더욱 특별히 축복하였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그런 특별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사사일 때는 처음부터 돕지 않고 나중에 기드온이 기세를 잡은 것을 보고서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잡는데 협조하고서는 왜 처음부터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도리어 화를 내었다. 또한 입다가 사사일 때도 그렇게 입다가 목숨 걸고 세운 공로를 가로채려 하자 자기의 성급한 서원으로 인해 딸을 잃은 입다의 분노를 사게 되고 그 유명한 십볼렛의 희생을 당하게 된다. 에브라임은 이토록 그 성정이 매우 야비한 지파여서 야곱의 축복이 무색하게도 근친상간의 죄를 지은 르우벤 지파보다 성소에서 더 멀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성소로부터 가장 멀리 끝자락에 위치한 단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서도 다른 지파들보다 자기 기업의 땅을 확보하는데 가장 게으르고 지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지파들이 자기 기업의 땅을 확보하여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단 지파는 여전히 이리저리 떠돌고 다니게 되었다. 게다가 자기 형제 지파의 집에 침입하여 그 집안에서 묵고 있는 레위 제사장을 강탈하여 가고, 이를 따지러 온 집안 사람에게 은근히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단 지파가 다른 지파들보다 특히나 더 하나님의 일에 게으르고 지체하며 불의한 짓을 서슴지 않는 지파임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먼 훗날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모일 14만 4천명을 지파별로 기록할 때 오로지 단 지파를 배제하는데, 이는 단 지파가 스스로 더욱 범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멸망의 길로 나아갔디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단 지파는 외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여 일정 기간 이 땅의 교회에 속해 있어 성령의 빛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복음과 교회를 저버림으로써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향하는 배교자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레위 지파 중 오직 사독의 자손들이 특별히 새 성전의 제사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전 역사 중에서 다른 백성들, 특히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레위인들 조차도 범죄에 빠져 있을 때 오로지 사독의 자손들만이 그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규례를 준수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런 실질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아무리 바른 길을 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길이 과연 옳은 길이 맞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다른 동료로부터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절대 기준으로 삼았을 때만 가능한 일인데, 사독의 자손들은 긴 세대 동안 변치 않고 하나님의 율법 지키기에 힘을 내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교회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특히 담임목사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한국 교회의 시스템에서 부교역자들은 담임목사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교회나 담임목사가 비성경적인 부당한 지시를 내린 것을 따른 것에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도 사독의 자손들은 부당함을 거부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규례대로만 준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교역자들은 교회에서의 자기들의 불의한 행실을 한국 교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도피처로 삼지 말고 담대히 그리스도의 뜻을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부교역자들을 사독의 자손처럼 대우하실 것이다.
모든 지파들은 이스라엘 전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성전과 성소를 보존하는데 힘써야 할 의무가 있다. 각자의 기업에서 소유를 늘리더라도 그것으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성소와 레위인들을 위해 일부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성전과 성소가 보존되지 못하면 결국 새로 받은 그 기업도 먼지가 되어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지파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전과 성소를 모든 위험에서 지켜내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사역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지성소와 같은 사역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잘 파악하여 그 사역이 온전히 보존되도록 가장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독의 자손과 같은 교역자들을 모시는데 심헐을 기울이고 편중됨이 없이 골고루 많은 사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각자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실행하여야 한다. 여기서 성령의 뜻을 가장하여 자기 만족과 유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장 쉽게 성령의 뜻을 알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바르게 배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시로 성경을 읽고 수시로 목회자들에게 질문하여야 한다.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다가는 아전인수에 빠져 결국 미훅의 길에 접어들게 뒨다.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 성읍의 문들을 열두 지파의 이름을 따서 동서남북 각 방향마다 셋씩 열두 문을 세우신다. 그리고 그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의 '여호와삼마'라고 지으신다. 이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더욱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데, 그의 기록에 따르면 열두 문 이외에 열두 사도의 이름으로 명명된 성곽의 열두 기초석이 있으며 각 기초석은 현란한 보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 완전한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할 것이므로 언제나 여호와삼마의 상태에 있게 된다. 그날이 오기 전에는 단지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와 성도들에게만 성령께서 임하여 계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성전 된 교회와 성도의 주인이신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