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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내전들!
전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내전들!
©Getty Images
홍해 일대에서 후티 반군의 공격은 2014년에 시작된
예멘의 계속되는 내전을 강조했다.
내전은 같은 나라의 시민들 사이의 전쟁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국제적이지 않은 무력 충돌은 종종 길고 잔인하며,
일부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내전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역사에는 이러한
종류의 군사적 교전이 고대부터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내전은 무엇이었을까?
사진을 통해 역사상 최악의 내전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카이사르 내전
(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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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로마 내전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로마 제국으로 개편되기 전 로마 공화국의
마지막 정치-군사적 갈등 중 하나였다.
이것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폼페이)가
이끄는 두 파벌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났고 15,000명이 넘는
폼페이우스 사람들이 죽었지만,
카이사르는 단 200명만 잃었다.
사산 내전
(589년 ~ 5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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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사산 왕들의 왕인 호르미즈드 4세의 통치에 대한
귀족들 사이의 반대는 결국 사산 전쟁으로 이어졌다.
호르미즈드 4세는 귀족들, 특히 미흐라니의 침략자
바흐람 초빈을 싫어하고 불신했다.
이 전쟁은 초빈의 타도와 이란의 통치자로서
사산 가문의 부활로 끝이 났다.
덴마크 내전
(1131–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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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국이 1131년부터 1157년까지 겪은 산발적인
내전은 수많은 목숨과 7명의 왕의 죽음을 앗아갔다.
1146년부터 1157년까지 계속된 계승 전쟁은 마침내
그의 모든 경쟁자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덴마크의 유일한
왕이 된 발데마르 1세와의 적대관계를 종식시켰다.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
(1407–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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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은
오를레앙 왕가(아르마냑)와 부르고뉴 왕가라는
프랑스 왕실 간에 발생한 갈등이었고,
백년 전쟁의 일부였다. 이것은 1407년 11월
파리에서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암살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또 다른 유명한
희생자는 부르고뉴 공작인 용맹공 장이었다.
장미 전쟁
(1455–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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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은 랭커스터 왕가의 지지자들과
요크 왕가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영국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일련의 내전이다.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튜더가
1485년 왕으로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리차드 3세를 무찌른 보즈워스 필드 전투로 끝이 났다.
오닌의 난
(1467–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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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관리 호소카와 카츠모토와 지역 영주 야마나 소젠 사이의 논쟁은
반복되는 교전 동안 전투원들에 의해 거의 완전히 파괴된 교토 제국의
수도 내에서 전국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오닌 전쟁은 명확한
승패 없이 끝났고 일본 역사상 가장 큰 내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잉카 내전
(1529–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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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왕조 전쟁이라고도 알려진 잉카 내전은
그들의 아버지인 후아이나 카프의 죽음 이후
잉카 제국의 왕위 계승을 놓고 이복 형제인
후아스카와 아타후알파 사이에 벌어졌다.
아타후알파(사진)가 우세하게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재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카자마르카를 약탈하면서 아타후알파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랑스 종교 전쟁
(1562–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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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종교 전쟁은 36년 동안
프랑스의 개신교(위그노)와 가톨릭 파벌 사이의
8개의 갈등이었다. 앙리 4세가 평화를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2백만에서 4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갈등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생한 폭력, 기근, 질병으로 사망했다.
잉글랜드 내전
(1642–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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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내전은 사실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잉글랜드
왕국 전역에서 일어난 많은 별개의 갈등을 말한다.
왕실주의자들과 의회주의자들은 1645년에 있었던
네이즈비 전투로 유명한 많은 사건에서 충돌했다.
이 전쟁에서 결국 크롬웰이 승리했고,
그 후 찰스 1세 왕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촉토 내전
(1747–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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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토 내전은 촉토인들 사이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내전으로 발전했다. 촉토 내에서는
부족들이 영국과 프랑스와 교역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놓고 대립하며 파벌들 간에 적대감이 일었다.
결국 영국과의 교역은 단절되었고,
프랑스인들과의 관계는 강화되었다.
태평천국의 난
(1850–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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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은 인류의 삶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희생이 많은 내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전쟁은 당시 중국 인구의 약 10분의 1에서
20분의 1인 2천만에서 3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남북전쟁
(1861–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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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유명한 내전 중 하나인 미국 남북전쟁은
근본적으로 미국 건국에서부터 시작된 노예제의
옹호자들과 반대자들 간의 투쟁의 절정이었다.
남부연합에 대한 연합의 승리는 국가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총 62만 명에서 75만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칠레 내전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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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칠레 의회를 지지하는 칠레 해군 세력과
대통령인 호세 마누엘 발마케다를 지지하는
육군 세력이 충돌하며 내전이 발생했다.
이 갈등은 칠레 육군과 대통령군의 패배로 끝났고,
그 결과 발마케다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내전
(1917–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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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은 러시아 혁명의 중요한 순간인
10월 혁명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내전은
볼셰비키에 의해 이끌어진 "붉은 세력"과
반볼셰비키의 다양한 연합인 "백군"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갈등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죽음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의 결말은
또한 러시아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인 정부
형태를 채택한 러시아 혁명의 끝을 나타낸다.
핀란드 내전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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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핀란드 내전은 1918년 1월 27일부터
5월 15일까지 벌어졌고 백핀란드와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붉은 핀란드) 사이에 벌어졌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지한 백핀란드의 승리로 이어졌다.
아일랜드 내전
(1922–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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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내전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끝낸
영국-아일랜드 조약(1921년)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대영제국 내에 독립적인 아일랜드 자유국을 만든
조약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갈등을 일으켰다.
중국 내전
(1927–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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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족주의자들과 중국 공산당의 세력들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난 중국 내전은
장제스 휘하의 민족주의자들이 타이완 섬으로
피난하여 중화민국으로 이어진 반면,
마오쩌둥 휘하의 공산주의자들은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하면서 끝이 났다.
22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의
전투원들과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입헌주의 혁명
(1932)
©Public Domain
때때로 파울리스타 전쟁 또는 브라질 내전이라고도
불리는 입헌주의 혁명은 브라질 상파울루 주 사람들이
게툴리우 바르가스 연방 정부에 대항한 것이다.
전쟁의 원인은 경제 불황의 결과로 무너졌던 브라질의
가장 큰 두 주 사이의 전통적인 힘의 균형에 있었다.
처음에는 연방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결국
다른 주들 대부분이 상파울루의 편에 서서 반란군이 승리했다.
구 공화국은 전복되었고 제헌 의회가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
(1936–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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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3년 동안의 갈등인
스페인 내전은 약 45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것은 1975년 그가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 내전
(1946–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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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실제로 그리스 내전이 발발하여
영국군이 아테네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1947년 초 영국은 공식적으로 그리스에서 철수했지만,
그리스 왕국의 기존 정부에 대항하여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전면적인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158,000명이 사망했지만, 결국 정부가 승리했다.
나이지리아 내전
(1967–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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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나이지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분리주의 국가인 비아프라 공화국과 나이지리아
사이의 싸움인 나이지리아 내전은 이그보 사람들의
복지를 보호하기 보다는 연방 정부가 중요한 해안
석유 시설을 되찾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약 3만 명의 비아프라인들이 내전에서 사망했으며,
추가적으로 2백만 명의 비아프라인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캄보디아 내전
(1967–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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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캄보디아 내전은
캄보디아 왕국의 정부군에 대항하여
캄푸체아 공산당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의해 지원된
크메르 루즈로 알려져 있음)의 세력 간에 벌어졌다.
이 갈등은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캄보디아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에티오피아 내전
(197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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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9월, 에티오피아 내전은 마르크스주의자 데르그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며 시작되었다.
반란군들의 연합체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이
정부를 전복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다.
50만 명이 전투 중 사망했고,
또 다른 120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레바논 내전
(1975–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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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발발한 레바논 내전은 이 나라를 찢고
약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다면적인 무력 충돌이었다.
이 내전은 또한 레바논에서 백만 명의 사람들이
탈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앙골라 내전
(1975–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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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앙골라의 독립이
임박해지면서 내전이 촉발되었고,
이전의 반식민지 게릴라 운동으로 인한 권력 투쟁 또한
소련과 미국 사이의 냉전 경쟁으로 발전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약 50만 명에서 80만 명의 앙골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1989–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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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에 의해
사무엘 도 대통령이 전복된 8년간의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동안 민간인을 포함하여 최소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지속되었고 여전히 잔인했다.
르완다 내전
(1990−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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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내전 중 하나인
르완다 내전 동안정부를 대표하는 르완다 군대와
반란군 르완다 애국 전선 (RPF) 사이에 일어난 싸움은
르완다 내에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오래된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RPF가 승리를 주장하기 전에
약 100일 동안 50만에서 100만 명 사이의
투치족과 후투족이 살해되었다.
시에라리온 내전
(199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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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리온 내전은 라이베리아의 반군 지도자 찰스 테일러와
그의 단체인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의 지원 하에
포데이 산코가 조지프 모마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했을 때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특히 잔인했는데, 양쪽 모두
노예 노동을 사용하여 채굴된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의해
종종 자금이 지원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 콩고 전쟁
(1996–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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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콩고 전쟁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끊임없는
죽음으로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기억된다.
이 전쟁은 수단과 우간다와 함께, 주로 자이르에서 일어났다.
이 내전은 자이르의 대통령 모부투 세코(사진)를
반군 지도자 로랑 데지레 카빌라로 대체한 외국
침공으로 끝이 났다. 불안정한 새 정부는 1998년부터
2003년 사이의 제2차 콩고 전쟁의 발판을 마련했다.
예멘 내전
(2014-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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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내전은 2014년 후티 세력이 수도 사나를 점령하고,
후티가 정부를 빠르게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후티는 현재 홍해에서 국제 선박을 목표로 하는 것을
둘러싸고 더 많은 갈등에 휘말려 있다.
출처:
(The National WWII Museum)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