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써서 시간적 여력이 있을 때에 좌파 이론의 특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말이 민망하도록 '폼나는 강연'의 연발로 기회도 없었다. 이젠 그럴 여력도 마음도 없다. 다만, 뉴라이트 같이 '뉴라이트와 대한민국파와 만남'이란 구호로 여전히 우파 본질과 거리를 두려는 측면에서, 좌경사상의 모든 스타일을 가지면서도 우파에 줄을 서려는 포기하지 못하는 가증스러운 집념에 대해서 여러 차례 비판할 뿐이다.
희망의 점진론 !
우리는 대가족 제도에서 이것을 알았다. 장남을 밀어주고 차남을 밀어주고 순번이 될 때까지 참아내는 것은, 가족에서 가정의 재정적 여력이 한계가 있음을 너무나도 알았기 때문이다. 좌경유물론 사상의 북한버전은 유물사관을 이러한 타입으로 깨어 냈다. 나는 조갑제 기자 추종 파벌들의 '무한전진'이 김정일의 '고난의 행군론'을 연상시키지, 박대통령의 어휘와 전혀 다른 의미를 보인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의 경제발전의 무한전진은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전술적인 측면이 전혀 아니다.
나는 조갑제 기자줄에 선 좌경운동했다는 인간들을 '텐 스트라이크 아웃'이 아니라 '트웬티 스트라이크 아웃'수준으로 보아서, 이제는 '퇴장'을 하라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좌경운동을 했다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디제이 민주당이 궁지에 몰렸을 때에, '정권탈취'가 가장 우선시되었음을 잘 안다. 학생운동권의 90년대 내내 그 소리였다. 그런데, 조갑제 기자 줄에선 좌경운동했다는 이들은 너무나도 잘 알았을 이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중스파이로서 봉사의혹과 의심을 알아서 자제하는 할아버지를 믿는 바탕이 참으로 가증스럽다.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강화시켜야 한다. '화력'을 집중시킨다는 투의 말장난이 아니라, 우파 본연의 개인성찰의식을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북한핵을 완전 폐기하도록 주장하고 나머지 북한동포 타령에는 "입닥쳐라 이 인간아! 또! 또!"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박대통령은 경제발전에서의 국민의 이익에 최대공약수 측면을 주장해서, 소수주장에는 강하게 압박했다. 그 수준은 아니래도, 북한핵이란 남침용 무기가 온전하는 상황에서도, 국민은 핵무기에 피해 보건 말건 외골수로 북한동포 타령하는 것은, 이중간첩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식사 전후에 '기도하는' 기독교도가 너무 없다. 즉, 반대 이유로 조갑제 기자의 통일론에 담긴 몽유병 수준의 환상론에 대해서, 되도록 앞뒤 안가리고 밀어붙이면 된다는 투는, 정신병원에 정확하게 보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말해야 한다. 박대통령을 높이면서 박대통령 때에 일의 점진적 처리로서 미루어진 소수의견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리고 그 바탕이 기독교 정신과 얼마나 맞물렸는가를 되새겨 주장하고 싶다.
우선적으로, 북한의 북핵 위기가 벗어지고 한나라당 박대표의 정권쟁취가 되도록 하며, 그 전제로서의 내용을 판단해야 한다. 우파 시민단체의 주장을 다 들어줄만큼 우파 시민단체를 보호하고 품어주면서 나아가는 한나라당이 아니라, 한나라당 박대표의 정권쟁취와 북핵위기 탈출의 방향에 나머지 차원이 봉사하는 식이 되어야 한다.
대가족 시대가 멀어졌다 해도, 대가족 시대에서의 사고관을 정확히 기억한다면 오늘의 문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조갑제기자식의 '신우익'(레닌좌경이론장착하고 그 틀에 우파단어몇개 얹어 놓은)의 한나라당 박근혜대표 비판은, 다소 유교적 권위주의정치를 했던 박정희대통령 시대와 동시성인 대가족 제도에서 아버지에 대항하면서, 그 이상의 어떠한 대안을 가지지 못했던, 모든 이를 위한 대안 보다는 사회를 무조건 까보고서 제 하나만을 위하는 생각만을 하는 이들의 생각일 것이다.
6자 회담에서 미국에 북한핵폐기에 비타협적이 되도록 하며, 미국이 되도록 오랫동안 우리곁을 머물도록 여론형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경이 의미있음은 본질적인 요소는 그 시대에 걸맞는 방식으로 되살아난다는 점에 있다. 그 방식이 뭔가의 성찰은 개개인의 몫이다.
서구 선진국가의 꿈을 바로 꾸지 말라면서, 현실을 직시하라고 '한국적'이란 딱지를 붙이던 박대통령의 고뇌를, 그 시대에 '팽이치던'소년보다도 더 모르는 기성세대는 이렇게 밖에 해석되지 않으며, 지금이라도 박대통령 때에 그 방식대로 되도록 박대통령이 뿌리째 불신한 그시대 젊은 세대인 지금 세대를 압박해 나가는 게 온당하다고 본다.
대가족제도는 대가족이 무너질 수준의 자유는 늘 허락하지 않았다. 희망의 점진론과 희망의 한계론은 지금 더 없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