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래사랑 클릭☆─━
"무술의 완성은 곧 인격의 완성이다"라고 한 그의 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최배달은 파이팅 아티스트로 간주되었고 신의 손(God hand)이라 불리웠다.
"나는 단 한번도 최고라 생각한적 없다.
단지 나보다 강한적수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 최배달 (1922-1994)
*키:173cm *몸무게85kg (그 당시에 큰체격)
본명 최영의. 일제 강점기, 온갖 수모와 차별을 겪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일본 가라데 선수권 대회를 재패하고 일본 전역의 고수들을 차례차례 제압했으며
그에 대한 공개처형을 선언한 일본 무도계가 고수들을 총출동시킨
무사시노 대결에서 30대 1의 싸움을 완승했다.
일본 청소년이 뽑은 위대한 인물 10걸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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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배달
"최영의란 분이 계셨지. 전 세계를 구름처럼 떠다니면서, 맞짱을 뜨신 분이야. 그 양반은 황소 뿔도 여러 개 작살내셨다. 이런 식이다. 딱, 아...아...앞에 딱 서. 너 소냐? 나...나...니, 최영의야! 그리고 뿔을 딱 잡어. 그리고 내..내리쳐. X나게 내리치는 거야...X나게. 소뿔이 부러질 때까지…"
코미디계의 국민배우 송강호를 발굴한 영화 <넘버3>에서 그가 가장 힘주어 연기한 대사는 <바람의 파이터>의 주인공인 극진공수도의 창시자 최배달의 소개다. 여관방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뜰 날을 기대하는 건달인 영화 속 그에게 '최배달'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었고, 가장 든든한 우상이었다.
최배달(본명: 최영의)은 1922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했다. 16세에 도일, 야마나시 소년항공학교에 재학하던 1939년 공수도(가라데)에 입문, 1947년 24세에 전후 최초로 열린 전 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를 제패했다. 1948년에는 키요즈미산에서 18개월 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몸을 단련하였는데, 폭포수 밑에서 좌선을 하고 야생동물과 싸우고 맨손으로 나무와 바위를 치는 고행 끝에 극진 공수도를 완성했다. 이후 세계를 돌며 중국의 쿵푸, 프랑스의 사바테, 브라질의 카포에라, 발리송 권법, 미국의 프로레슬러, 태국의 킥복서 등과 실전을 벌여 무패행진을 계속해 나갔다. '신의 손'이라 불리기 시작한 그는 150연승을 달리던 美 프로레슬러 톰 라이스가 한국계 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을 이기자 대결을 자청, 삼각 점프킥 한방으로 눕혀 버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진검(眞劍)을 든 상대와도 맨손으로 대결, 승리한 적도 있다.
초인적인 스피드로 허공에 떠 있는 종이에 구멍을 뚫었으며 맨주먹으로 20cm의 자연석을 격파하고, 한주먹에 맥주병 14개의 목을 날리는 등 도저히 믿기 어려운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 47마리의 황소와 맨손으로 대결, 4마리를 즉사시키고 나머지 소들의 뿔을 꺾기도 했다. 1961년, 극진회를 창립했으며 1959년과 1962년에 시카고 뉴욕 캘리포니아 등지에 분관을 설립, 30개의 기왓장을 박살내는 등 격파술 시범이 전파를 타면서 미국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최배달은 70년대 이소룡 이전 가장 명성을 날린 무도가였다. 스페인 국왕, 요르단 왕실, 영화배우 숀 코넬리 등의 무술 사범을 역임하였으며 전세계 140개국 1200만명 수련인구를 자랑하는 국제가라테연맹의 총수, 극진회관의 관장이 되었다.
세계가 인정한 절대신화의 주인공 최배달. 그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과 무시 속에서 가슴 속 울분을 수련의 에너지로 삼아 일본을 놀라게 하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승부를 가릴 때마다 두려움에 머리가 한움큼씩 빠지면서도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으며 도전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 어지러운 정국을 맞이한 조국은 그를 단지 싸움꾼이라고 치부했으며 소를 때려잡는 미치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만든 극진 가라데가 태권도라며 원조를 운운했으며 일본에 협조한 변절자로 지목해 멸시를 보내기도 했다. 최배달은 한국국적을 포기, 일본에 귀화했다. 오래 전부터 청소년의 우상이었던 그가 '일본의 위대한 영웅 10걸' 중 한명으로 뽑히자 극진회를 후원하던 사토 전 일본총리가 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끌어안지 못한 영웅은 배달민족의 뜻이 담긴 최배달, 일본명 오야마 마스터쓰(大山倍達)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최배달에게 조국은 대한민국, 하나였다. 이에 대해 그는 귀화가 아니라 단순한 일본국적 취득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또한 전세계의 극진가라데 수도인들은 일정한 단수가 되면 유단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일본 도쿄에 있는 극진회관에 가서 단체합숙과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최배달은 "...극진회관은 국적을 가리지 않지만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94년4월 그는 평생을 그리워하던 조국을 품에 안은채 이국땅 일본에서 사망했다.
"가난해도좋다 단지 하나의 목표에 목숨을걸고 정진하는 인간은 정말로 아름답고 훌륭하다.
그런인간은 진정숭고하게 보인다"
<바람의 파이터>는 우리가 몰랐던 영웅 최배달, 포기를 모르는 한국인의 근성 최배달, 불패신화의 주인공 최배달에 대한 대한 영화다. 평생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던 최배달. 세계를 제패한 거인이자 영웅이며
일본열도를 무릎꿇인 최초의 한국인이다
*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의 인생연표
1923년 7월 전북 김제 출생
1932년 4월 소학교 입합, 십팔기의 중국권법수련
1941년 3월 소년항공학교에 입학
1945년 9월 도쿄 에이와 공수도 연구소 창립, 맨손 연구에 정진
1946년 1월 최배달 최초의 입산수련 시작
1947년 9월 전 일본공수도대회 우승
1948-1950년 신공수로 전국의 가라데도장 순례, 격파
1948-1950년 (교토-니조 10걸, 나라-극진공수 원조 사카하라
1948-1950년 (고베-가미소리(면도날) 모리, 나고야-닌자 미와 노부오,
1948-1950년 (요코하마-관동의 금색 호랑이 가네토라...)
1951년 1월 유도의 달인 니노 이글, 대륙낭인 검객 료마와 대결, 승리
1951년 3월 무사시노 벌판에서 40:1로 목숨을 건 결투
1953년 3-11월 시카고 프로레슬링협회 초청으로
1953년 3-11월 전미 32개소에서 데몬스트레이션과 가라데 지도.
1953년 3-11월 전미레슬링 챔피언 등과 목숨을 건 대결을 여러 번 치르다
1954년 1월 하와이에서 역도산과 첫만남, 역도산에게 가라데를 가르치다
1954년 3월 하와이에서 붉은 전갈 톰 라이스와 대결, 승리
1954년 4-6월 다큐멘터리 <소와 싸운 가라데>를 찍다
1954년 4-6월 47마리의 소 중 4마리 즉사, 나머지는 뿔을 꺾다
1956년 4월 동남아시아 원정, 권법 연구
1957년 6월 유럽 원정.
1957년 6월 프랑스에서 사바트의 제왕 보몬과 결투, 승리.
1957년 6월 칼잡이 루이와의 결투, 승리
1957년 6월 지하레슬링의 마와 무이슈킨과 사투, 승리
1957년 9월 태국에서 무에타이 챔피언 블랙 코브라와 대결, 승리
1957년 11월 발리에서 카포엘라의 고수 세올로와 대결, 승리
1958년 4월 멕시코시티에서 투우소와 결투, 부상당하다
1959년 7월 미국, 유럽 원정
1961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장 열다
1966년 9월 배우 숀 코넬리 내관
1968년 8월 요르단 왕실 초청으로 왕가에 가라데 지도
1978년 4월 남미 공수권선수권대회 개최
1979년 11월 요르단 왕실로부터 훈장 수상
1984년 1월 브라질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상 수상
1994년 4월 사망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암것두 안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