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집을 나온 송익필‧한필 형제는 어렵게 윤씨 집안의 추적을 피해 다니던 끝에 황해도의 한 산골에 은신처를 마련했다. 70여명의 일족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고 있었다. 송익필 형제는 조씨로 성을 바꿔 몰락한 양반행세를 했다. 선조 22년 봄이 되자 형제의 형편이 조금씩 풀리면서 새 제자들도 쪼매썩 생겼다. 송익필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관상도 봐주고 글도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송익필의 제자들은 여전히 그를 흠모하여 은밀하게 정보와 재물을 전해주었다. 송익필은 한시도 재기와 반전의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
선조 22년 5월, 정여립이 고향 전라도에서 대동계를 만들어 청년들을 모아놓고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송익필은 일찍이 정여립의 관상에서 역모의 기질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정여립은 이이의 천거로 홍문관 수찬(정5품)에 제수되었지만, 이이가 죽자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동인들에게 빌붙었다. 이 일로 정여립은 선조의 눈 밖에 나 있다가 의주목사 서익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낙향하는 길에 이발의 집으로 찾아와, ‘서익이 송익필의 사주를 받아 상소를 올렸으니 반드시 송익필을 죽여달라’며 간곡하게 당부했다.
송익필은 곧 해주에 사는 제자 변승복 일당을 정여립에게 밀파하여 그의 수하가 되도록 사주했다. 이때 정여립은 「정감록」을 변조하여 전라도에서 정씨 왕조가 일어난다는 참언으로 추종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분명한 모반 준비였다. 변승복은 전라도와 황해도를 오가며 정여립의 움직임을 낱낱이 송익필에게 보고했다. 송익필은 구월산의 중 의엄을 시켜 황해도 재령군수 박충간에게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했지만 박충간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송익필은 안악군수 이축에게 정보를 흘렸다. 이축은 정여립의 제자를 자처하며 선동하고 다니는 조구의 뒤를 밟아 그의 집을 급습했다. 집에서는 정여립의 친필문서를 필두로 100여점의 증거물이 나왔다. 이축은 황해도관찰사 한준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이축과 한준의 장계가 잇달아 조정으로 올라갔다.
장계를 받은 선조는 한밤중에 3정승을 비롯한 중신들과 사관을 비상소집했다. 그러나 중신들은 정여립의 모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선조는 그들을 강하게 질타한 뒤 황해도와 전라도로 군사를 급파하여 관련자들을 모조리 잡아오라 명했다. 10월 7일,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보고에 이어 자결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실은 성혼의 제자인 민인백이 정여립을 죽였다.
한편 황해도관찰사의 장계가 올라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송익필은 즉시 상경하여 정철을 찾아가 선조를 알현하고 정여립의 모반을 미리 고하라고 조언했다. 당장 군사를 보내 역적 무리를 체포하고 대궐 수비를 엄히 하라는 정철의 상주에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 이이의 죽음과 함께 숙청되어 5년 가까이 야인으로 지내는 정철이 찾아와 귀중한 정보를 올리니 기특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전말을 전해들은 송익필도 주상의 신뢰를 회복했다며 반겨주었다.
10월 15일부터 벌어진 국문(鞠問)장에서는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잡혀온 관련자 10여명이 고문 끝에 죄를 실토하고 처형되었다. 19일에는 선조가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 등 관련자들을 친국하여 능지처참에 처했다. 모두 20여명을 처형한 끝에 선조는 10월 27일 정여립을 복주(伏誅)한 일을 종묘에 고하고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송익필로서는 일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정철의 집에 은거하고 있는 송익필에게는 비장의 결정타가 따로 있었다.
오래지 않아 전라도 출신 생원 양천회의 상소가 올라왔다. 물론 송익필의 기획이었다. 첫째, 정언지와 우의정 정언신 형제는 정여립과 9촌간으로 가까운 친척인데다, 정언신은 국문 책임자로 수사와 심문이 공정하지 못했으니 처벌해야 한다. 둘째, 조정 중신인 이발‧이길‧백유양은 정여립과 함께 죽기를 맹세한 가까운 자들로서 오히려 장계를 올린 한준 등을 처벌하고자 획책했으므로 엄벌해야 한다. 셋째, 조헌은 순수한 충정에서 정여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하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으니 즉시 해배해야 된다. 11월 3일, 선조는 1차로 조헌의 유배는 과인의 뜻이 아니었다며 풀어줄 것을 하명했다.
동인들도 명운이 걸린 일로 판단하고 이산해를 정점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조참판 정언지가 양천회의 상소에 거명되었다며 사직상소를 올렸다. 선조의 뜻을 살피려는 간보기였다. 선조는 정언지를 즉각 파직했다. 11월 7일에는 우의정 정언신을 파직했다. 선조는 11월 8일 정철을 우의정에, 성혼을 이조참판에, 최항을 대사헌에 제수하는 등 서인들을 한꺼번에 화려하게 복귀시켰다.
우의정 정철은 위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위관이란 죄인을 추국하는 별정직의 명칭이다. 정철은 정여립의 조카인 정집이 역당의 실상을 가장 소상히 알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송익필이 인맥을 총동원하여 얻어 보내준 정보였다. 정철은 부임하자마자 정집을 잡아들여 국문을 시작했고, 정집은 곤장 몇 대에 간단히 입을 열어 정여립과 비밀연락을 하고 있던 70여명을 술술 불었다. 정철은 국문 결과를 선조에게 소상히 진언했고, 선조는 이미 파직된 정언지‧정언신 형제와 이발‧이길‧백유양을 비롯하여 관련자 전원을 원지로 유배했다.
이제 동인 가운데 중신으로는 좌의정 이산해만 남았다. 송익필은 한때 자신을 돌봐준 이산해마저 치기로 했다. 그러나 워낙 하자가 없고 온건한 인물이라 글을 통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할 심산이었다. 송익필은 시를 한 수 지어 이산해에게 보냈다. 당나라 중신들이 양귀비에게 잘 보여 황제의 신망을 얻으려고 했던 고사에 빗대어,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 김귀인에게 줄을 대고 있는 이산해를 은근히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모욕이 지나쳤다. 아무리 흉허물 없는 벗이지만 남자로서 자존심마저 짓밟힐 수는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이산해는 김귀인의 오라비 김공량을 찾아가 ‘서인들의 핍박이 지나치므로 더 이상 가만뒀다가는 신성군의 앞날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겁을 줬다. 신성군은 김귀인이 낳은 선조의 차남으로서 지난해 장남 의안군이 요절한 뒤 선조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신성군의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산해의 말에 김공량은 기겁을 했다. 내친 김에 이산해는 서인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인물이 송익필이며, 저번에 동인들을 공격했던 조헌도 송익필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공량은 그길로 누이 김귀인에게 달려갔다.
12월 7일, 우의정 정철은 좌의정 이산해와 함께 선조를 알현하고 조헌을 성균관 전적에 추천했다. 높은 직급은 아니지만 관리들의 동향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요직이었다.
“경솔하게 조헌을 성균관 전적에 제수할 수 없다.”
이산해가 김귀인의 베갯머리송사를 통해 선조로 하여금 서인들에게 등을 돌리게 한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정철은 선조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그저 의아하게만 생각했다. 정철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은 송익필은 경악했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산해가 그 시 한 수에 이리도 빨리 반응했단 말인가?’
첫댓글 참 답답하네
사람을 모함해서 죽이는 일이 쉬운 일인가?
정철 송익필 같은 사람들이 당파를만드는 사람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