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계란 / 이화은
까르르 까르르 아래층 베란다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덩굴째 올라오니 마리아가 또 알을 낳은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학교 앞에서 산 삐약이가 저만큼 자라 알을 낳는 어엿한 어미 닭이 되었다 그 닭이 마리아다 지 어미의 세례명을 마리아 마리아 장난치듯 부르다가 마리아가 정말 마리아가 된 것이다 아이는 한 번도 아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쉬! 쉬! 속에 숨은 아빠가 궁금하지 않다 아이가 심심해지면 마리아가 알을 낳는다 마리아가 알을 낳으면 아이는 뚝 울음을 그친다 마리아가 낳은 알을 가슴에 품고 아이는 목화꽃처럼 명랑하다 아빠가 없어도 아이의 종아리는 한 뼘씩 쑥쑥 자란다 그 뽀얀 종아리로 온 동네를 계란처럼 굴러다닌다 아이가 덩굴째 끌고 다니는 명랑이 골목마다 자욱하다 베란다가 세상의 전부이지만 바깥세상 이치를 다 알고 있다는 듯 명랑한 알을 낳아 명랑한 아이를 키우는 마리아 마리아가 키운 아이를 성모 마리아가 키운 아이라고 말할 뻔했다
– 시집 『절반의 입술』 (파란, 2021.10)
--------------------------------- * 이화은 시인 1947년 경북 경산 출생, 인천교육대학교 및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 『미간』 『절반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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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곳은 지어진 지 20년이 넘는 소형 주공아파트다. 역세권과도 상관이 없고, 자랑할 만한 경관과도 거리가 먼 전형적인 서민형 아파트다. 아파트가 전형적으로 서민형이라는 말에는 툭하면 엘리베이터나 수도 배관 등이 말썽을 부리는 낡고 허름한 건물이라는 점 외에, 주민들 간에 간섭이 지나치고 주차 문제가 심하다는 등의 단점이 포함돼 있다. 해서인지 세입자들은 거의가 신혼이거나 자녀가 어린 젊은 부부들이고, 자가(自家)로 살아가는 주민들은 중년을 훌쩍 넘긴 이들 아니면 허리가 굽고 얼굴엔 검버섯이 핀 노인들이 대다수다.
젊은 사람들이 평수를 넓혀 이사 가기 전에 정거장처럼 머물다 가는 곳답게, 이사철이 되면 아직은 쓸 만하다 싶은데도 폐가구 등이 쏟아져 나온다. 개중에서도 눈에 띄게 흔한 건 손때가 묻지도 않은 채 나와 앉은 아동용 전집들이다. 주인이 컸거나 새집으로 데려가기엔 천덕꾸러기라 버려진 책이나 가구들은 어딘지 측은한 구석이 있다. 말 못하는 사물도 버려진 것들은 아프다. 아프고 슬프다.
이화은의 시를 읽으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는 ‘아이’의 처지를 생각한다. 심지어 엄마를 대신해 마리아라는 이름의 닭이 키울 정도지만, 아무도 아이를 향해 혀를 차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 눈치다. 위층의 화자를 비롯해서 마치 마을 전체가 품어주는 아이 같다. 아빠가 없어도 종아리가 한 뼘씩 쑥쑥 자라는 아이가 온 동네를 계란처럼 굴러다니려면 아무래도 내가 살고 있는 이런 서민형 아파트가 있는 동네라야 안심이지 않을까?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따뜻할 거라는 건 물론 나의 편견이다. 그렇지만 나의 편견에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겠다. 아파트가 전형적으로 서민형이라는 말에는, 아직도 인심이 훈훈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정붙이고 살아간다는 커다란 장점이 포함돼 있으니 말이다.
- 신상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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