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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節 濯纓文學의 文體的 特色
(김주곤)
1. 序論
濯纓은 세조 10년(1464)에 경북 청도군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영민하여 4 ․ 5세부터 배우는 글을 한 번만 들으면 다 기억했을 정도였다. 8세에 소학을 배우고 15세에 太學에 입학하였으며, 16세에 漢城府 進士 初試에 합격, 17세에 佔畢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영남좌도의 監試와 初試 兩場에서 1등으로 합격하여 生員, 進士가 되고 文科와 殿試 등에 장원급제한 후 承文院正字兼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그 후 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 春秋館記事官 및 晋州牧學敎授를 지냈고 遼東質正官 書狀官 司憲府監察 司諫院獻納 經筵侍講官 兩館應敎 春秋館編修官 忠淸道事 綱目校讎 吏曹正郞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사관으로 있을 때는 直筆을 생명보다 중시했다. 그래서 성종은 그의 인품을 사랑하여 史官職을 계속 겸하여 맡겼는데 李克墩과 柳子光 등은 이러한 직필에 怨恨을 품게 됐다. 史草에 탁영이 실은 점필재의 弔義帝文이 연산군에게 탄로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됨에 따라 그는 연산군 4년(1498) 35세의 나이로 慘禍를 당했다. 그러나 중종이 관직을 복직시켰고 현종 때는 都承旨를, 순조 때는 吏曹判書를 追贈하고 文愍이란 諡號를 하사했다.
宋尤庵이 쓴 文集序에 程伊川과 朱子보다 더 후세에 태어나서 金宏弼, 鄭汝昌 같은 老先生과 학문을 연마하고 도의를 함양했으므로 그 선택함이 청결하여 잡박스럽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書狀官의 중임을 띠고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의 名儒인 禮部員外郞 程愈는 전송하는 글에서 韓愈와 歐陽修 같은 문장가이며 周敦頤와 程顥 程伊川같이 학문의 연원이 있는 분이라 극찬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정유로부터 『集說小學』을 구해 돌아와 국내에 처음으로 刊布한 바 있다. 이는 그의 현실에 대한 실천적 자각과 함께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탁영은 散文 분야에 우둑한 위치를 점학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松溪 權應仁은 탁영의 文을 높히 평가. 그는 『松溪漫錄』에서 金濯纓先生은 문장으로 이름이 났었다. 南止亭이 항상 말하기를 “把翠軒의 詩와 濯纓의 文은 절등하다고 할 만하다.”라 했다.
林塘 鄭惟吉은 “宗直의 학문이 精微하고, 詩와 文이 다 좋으며, 李荇의 詩가 좋고, 박언의 詩와 金馹孫의 文 역시 비할 자가 드물다”라고 했다.
탁영의 문집은 세상에 널리 퍼저 있으나 詩는 전하는 것이 드물다.
“탁영의 詩와 文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지는 보는 사람이 잘 알 것이다.”라는 여운이 있는 말을 덧붙였다. 권응인의 이 진술은 ‘탁영의 詩도 文 못지않게 우수하다. 그의 詩가 어느 면에서는 文보다 더 우수하다.’ 탁영이 후대에 文章家로서만 칭송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文이 詩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수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死後에 대부분의 詩들이 散佚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35년이라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詩를 남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權應仁이 『松溪漫錄』에서 탁영의 詩를 그토록 높이 평가한 이유는 탁영이 실제로 詩를 잘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탁영은 높은 학문과 고매한 인품을 지니고, 史官의 직에서 직필로써 일관하면서 당대 현실의 심각한 문제점을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이같은 그의 건강한 현실 감각은 살아있는 당대 지성의 표본이 되었음은 물론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탁영의 정신을 문학의 창을 통해 파악해 보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生涯와 文學
◎1464년 甲申(세조 10년)
春 1月 7日 午時 : 淸道 上北面 雲溪里 少微洞(今 伊西面 書院洞) 옛집에서 출생하다.
◎1471년 辛卯(성종 2년, 선생 8세)
春 : 龍仁 임시거처(寓舍)에 살다.
秋 9月 : 본가에서 처음으로 小學을 배우다.
◎1478년 戊戌(성종 9년, 선생 15세)
春 2月 :泮宮에 들어가 독서하다.
春 3月 壬午 : 湖西 丹陽 舍人洞에서 丹陽 禹氏를 부인으로 맞아 들이다.
秋 8월 甲辰 : 淸道에 가는 도중 善山을 지나다가 漁隱 鄭仲虔(字 敬夫) 耕隱 李孟專(字 伯純) 두 분을 뵙고 辛亥日에 雲溪에 도착했으며 나복산에 있는 祖墓를 성묘하다.
◎1480년 庚子(성종 11년, 先生 17세)
秋 9月 辛卯 : 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受學을 시작하다.
◎1481년 辛丑(성종 12년, 先生 18세)
春 2月 癸亥 : 밀양에 다시 가서 佔畢齋 先生을 뵙고 韓文 즉 昌黎 韓愈의 文著를 받다.
◎1486년 丙午(성종 17년, 先生 23세)
9月 戊辰 : 式年 庭試 文科 初試 3場에 연달아 수석으로 합격하다.
冬 10月 丙戌 : 覆試 大中興策에서 제1명으로 합격하다.
11月 甲子 : 甲科 제2인으로 及第, 증서를 받고 出身하다.
11月 己巳 : 承文院 소속의 務功郞 權知副正字에 제수되다.
12月 甲戌 : 正字 兼 春秋館 記事官으로 승진하다.
◎1487년 丁未(성종 18년, 先生 24세)
春 1月 甲子 : 弘文館 正字 兼 經筵典經, 春秋館 記事官으로 옮겨 보임되다.
◎1488년 戊申(성종 19년, 先生 25세)
春 3月 丁卯 : 晋州牧使 慶太素 및 遊宦 21인 등이 더불어 촉석루에서 修稧했는데 先生이 그 서문을 지었다.
◎1489년 己酉(성종 20년, 先生 26세)
3月 癸酉 : 宣敎郞 藝文館 檢閱 兼 經筵典經, 春秋館記事官으로 제수하고 독촉하는 교지가 있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冬 10月 丁亥 : 탄핵을 받아 金寧(김해)에 유폐되었으나 甲辰日에 王恩을 입어 방면, 고향집으로 귀환하다.
◎1490년 庚戌(성종 21년, 先生 27세)
秋 7月 丙辰 : 홍문관 博士 겸 經筵 司經, 春秋館記事官, 世子侍講院 說書로 승진되고, 그대로 注書 檢閱은 兼帶하라고 했다. 고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閏月 丁亥 : 또 다시 翰苑의 겸직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月 丙辰 : 朝散大夫 사헌부 監察이 겸직으로 제수되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月 己丑 : 本職으로서 進賀使 書狀官으로 보임되어 明나라 서울에 가다.
◎1491년 辛亥(성종 22년, 先生 28세)
丁卯日 : 奉列大夫, 홍문관 修撰으로 겸직을 제수하자 종전과 같이 모친 병환으로서 固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고사하는 소를 올렸다.
5月 辛巳 : 北征都元帥 從事官으로 부름이 있어 상경하는 도중에 면직을 청하는 글을 연이어 올리고 서울에 이르러 또 힘써 고사하다. 己丑日에 龍驤衛 司正으로 遷職되자 삼가 章疏를 올리고 곧 귀임했다.
秋 8月 庚午 : 兵曹佐郞의 겸직을 제수하고 校讎綱目은 종전대로 하라고 하므로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壬申日 拜命하였다.
◎1494년 申寅(성종 25년, 先生 31세)
5月 庚寅 : 弘文館校理 知製敎 守藝文館應敎 겸 宣傳官으로 다시 제배하자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月 丙申 : 吏曹正郞 知製敎 겸 승문원 校理, 경연 侍讀官, 춘추관 記注官으로 제수하고 역마를 타고 속히 부임하라는 命이 내려 庚戌日에 배명하고 癸丑日에 사임코자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495년 乙卯(연산군 1년, 先生 32세)
夏 5月 庚戌 : 時局에 관한 利益과 病弊 26조목을 上疏하였으나 아무런 批答이 없었다.
◎1498년 戊午(연산군 4년, 先生 35세)
春 1月 壬子 : 遊月宮賦를 짓다.
辛丑日 : 義禁府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밤에 대궐 뜰에서 국문을 받은 다음 진술서(供狀)를 올리다.
柳子光과 李克墩은 이 옥사가 저희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죄인들을 학대하고 괴롭힐 구실을 밤낮으로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弔義帝文을 제멋대로 註를 달아 풀이하고 임금으로 하여금 알기 쉽도록 하여 보이고 아뢰기를, “金宗直은 우리 世祖를 흉보고 헐뜯었으며 金馹孫의 죄악은 모두 宗直에게서 배운 바이므로 마땅히 大逆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운운”했다.
戊午(27日) : 禍를 입다.
◎1506년 丙寅(중종 1년, 先生 사후 8년)
秋 9月 戊寅 : 寃罪를 벗겨주고 官爵을 회복케하라는 교지 내리다.
어려서부터 文才가 뛰어나 文科와 殿試에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오랫동안 翰苑에 있었다. 따라서 濯纓이 남긴 글은 대단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화를 입어 원고가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여 現傳作品이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4대 사화에 연루된 선배들 문헌조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탁영의 경우도 무오사화 때 많은 작품이 散逸되고 문집 6권 3책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賦 6편, 詩 20편, 詞 4편, 雜著 8편, 序 8편, 跋, 書1편, 跋 1편, 記 10편, 辭 2편, 祭文 7편, 墓碣 1편, 銘 7편, 策 1편, 錄 1편, 碣銘 2편, 墓誌 1편, 題 1편 등 유형별로는 비교적 다양한 작품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서도 辭, 賦의 작품은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을 볼 수 있다.
3. 文體的 特色
가. 詩
탁영은 詩作에 있어서 聲律 때문에 시가 병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형식보다 내용을 더욱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律詩는 당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그 법이 점점 치밀해졌으므로 시를 짓는 사람들은 비록 잘 짓고 못 짓는 차이는 있으나 그 법규에 얽매여 시가 병들었다고 하면서 시경의 國風과 大小雅에 의거한 내용 위주의 문학론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탁영의 시는 실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생각되나 인멸되어 문집에는 적은 양이 전한다. 탁영이 화를 예측하면서 한강을 건널 때 지은 「渡漢江」을 본다.
一馬遲遲渡漢津 필마로 느릿느릿 한강 나루 건너는데
落花隨水柳含嚬 꽃잎은 물결 따라, 버들은 찡그린 듯
微臣此去歸何日 이제 가면 이 몸은 언제나 돌아오나
回首終南已暮春 終南山 돌아보니 봄이 이미 늦었구나
“느릿느릿” 한강 나루를 건너간다는 것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미련은 부귀와 영화에 대한 미련이 아니다. 昏主가 다스리는 조정 걱정으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강가의 버드나무도 수심에 잠겨 “찡그린 듯” 보이는 것이다. “이제 가면 이 몸은 언제나 돌아오나”라는 탄식에는, 지금은 기약없이 떠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는 다짐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서울을 떠나면서 “終南山을 돌아보는” 탁영의 가슴 속에는, 벼슬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신하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인식이 착잡하게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 이듬해 1월에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나아갔으나 昭陵復位를 강력히 청원하는 疏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母夫人의 병환을 이유로 2월에는 다시 사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이후 그는 다시 入朝하지 않았다. 이 시기 그의 시에는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晩泊沙汀葉葉舟 저물녁 물가에 조각배 매였는데
紛紛去馬與來牛 가는 말 오는 소 분답하도다
江山萬古只如此 江山은 萬古토록 이와 같은데
人物一生長自休 人物은 한 번 나서 길이 가버리네
西日已沈波渺渺 서쪽에 해는 지고 물결은 아득한데
東流不盡思悠悠 끝없이 흘러흘러 생각도 유유하다
停舟獨立曛黃久 황혼에 배 멈추고 홀로 서 있는데
掠水飛回雙白鷗 한 쌍의 백구가 물결 차고 날아오네
숨막히는 조정의 일로부터 벗어나 물가에서 모처럼 存在論的 명상을 하고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강산과 한 번 태어나서 죽게 마련인 인간을 대비시킴으로써 그는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연의 “독립”과 “쌍백구”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해가 뜨는 아침이 아닌 해가 지는 황혼에 오랫동안 홀로 서있는 그의 모습에는 외로움, 쓸쓸함, 슬픔, 우수가 깃들어 있다. 아마도 물결을 차고 나는 한 쌍의 백구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탁영의 「賡進四十八詠」은 성종이 안평대군의 「匪懈堂四十八詠」을 차운해 짓고 문신들에게 차운을 명한데 따라지은 應製요 賡載이다. 탁영의 사십팔영은 花, 木, 鳥의 地門類와 風, 月, 雲등의 天門類의 경물을 성종작품에 和韻을 하는 법도와 응제의 예에 따라 읊은 것이나, 성종의 玩物喪志를 경계하는 諷諫詩이다.
더러워진 마음 씻어 淸心을 지닐 것, 아이들에게 勸學을 강조하고 예쁜 물건에 마음을 쏠리게 하지 말 것, 아름다운 장미에 현혹되지 말 것, 임금에 대한 신하의 의리, 충절을 지킬 것, 파초의 새잎에서 日新의 지혜를 생각할 것, 소나무의 萬古常靑, 못에 뛰는 고기를 보고 道體를 생각할 것, 서리를 능멸하는 국화에서 幽香의 군자적 고결을 배울 것, 琪花瑤草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 것 등을 시로 諷諫했다. 아름다운 경물을 접하면서도 항상 道體를 생각하고 心志를 잃지 않는 면이 매 작품마다 잘 나타나 있다.
「賡進四十八詠」의 의미는 「四十八詠跋」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작품과 관련 지어 살펴보면 사십팔영의 의미는 드러난다. 탁영의 사십팔영의 의미는 결과적으로 사물의 오묘한 모습을 꿰뚫어 보고 이치를 밝히며, 사물을 통해 교훈을 얻고 절실함을 체득하며, 聖學의 원리를 이해하여 誠敬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서의 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탁영이 생각한 도학적 문학의 실현인 것이다. 나아가 應製, 賡載로서 諷諫詩의 한 형태를 남겼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나. 詞
『濯纓文集』에는 「詞」라는 篇題아래 「送李評事子伯胤赴平安兵營賦滿江紅侑別」 1편이 실려 있고 「詞」라는 篇題아래 「奉和元 霧巷昊歎世詞」, 「次曹靜齋尙治子規詞」, 「追賡魯陵御製子規詞」등 3편이 실려있다. 「詞」에 포함되어 있기에 외형적으로는 同質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滿江紅」은 詞牌가 幷書되어 있어, 보는 즉시 詞로 인정이 되지만 나머지 작품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형식 및 내용을 통한 문체적 성격을 규명해야 변별력이 생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작품 분석을 통해 동질적인 면과 이질적인 면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문체적 성격을 구명하고자 한다. 외형적으로 宋詞에 塡入한 詞와 그렇지 않은 樂府형태의 詞로 나누어 살펴본다.
1) 詞
「送李評事子伯胤赴平安兵營賦滿江紅侑別」은 제목이 밝혀주듯이 평장사인 李子伯(名은 胤)이 평안도 병영에 부임할 때 어머니 생각을 하기에 滿江紅 1편을 지어 이별에 부친 것이다.
이 詞는 幷序文에서 詞牌인 滿江紅이라고 밝혔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宋詞 滿江紅의 형식에 塡入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조선시대 詞는 대부분 宋詞의 塡入形式이다. 소재, 내용, 표현에서만 자율성이 주어지고 형식은 엄격한 詞牌의 형식을 따랐다. 그러면서 위의 작품처럼 창작된 제목을 붙이고 그 밑에 만강홍 등과 같은 詞牌名을 幷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탁영의 이 작품은 宋詞의 詞譜와 맞지 않다. 현재 가장 존중하고 의지하는 詞譜는 청대 康熙년간에 칙명으로 王奕淸 등이 편찬한 『欽定詞譜』이다. 이 흠정사보에는 만강홍의 詞牌 13종류가 있는데 탁영의 작품은 그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글자가 빠졌는지 아니면 형식을 잘못 알고 전입시켰는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이 詞를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한 연구에서는 前段 은 잘못 되었다고 하여 구두를 미결한 채 後段만 구두를 했다. 그 뒤에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계속 句讀의 잘못과 번역의 잘못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검토하여 시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만강홍의 諸體와 대비를 해보면 後段은 詞譜와 일치한다. 그런데 前段은 한 두 곳에 글자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작품인용은 생략한다.
2) 樂府
「奉和元霧巷昊 歎世詞」도 제목에 창작동기가 밝혀져 있듯이 1481년 8월 탁영이 原州 酒泉山中에서 元昊(호 霧巷)를 뵙고 이틀을 묵는 사이 원호의 歎世詞에 화답한 것이다.
漢之水兮滾滾 한강물 출렁거리며 흐르는데
越之山兮蒼蒼 영월산은 푸르기만 하네,
鵑哭兮一聲 두견새 우는 소리
愁人兮斷腸 근심싸인 사람 창자를 끊는구나.
霜滿地兮 喬林變色 땅 가득한 서리에 큰 숲이 변색하고,
雲遮天兮 白日無光 하늘가린 구름으로 해도 빛을 잃었네.
若有人兮頎然 키크고 인품있는 사람이
表獨立兮山之陽 우뚝히 산남쪽에 서 있네.
嗟一去沒身而不悔兮 아! 한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노니.
我欲從之而徜徉 나도 따라 하고파 머뭇거리네
이 작품은 사의 기본구법이 다르고 사패가 없기에 형식상 詞가 아니다. 그러나 작품 제목에 詞가 붙어 있기에 詞로 분류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구체적 성격을 살펴야 한다. 兮자 사용 등 句法의 표현만 보면 辭賦와 같다. 그러나 辭賦에도 이런 短形의 작품이 드물다. 표현에 서사성이 없고 서정위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사부와 거리가 있다. 광의의 辭賦는 詩, 楚調, 楚歌, 楚辭, 漢賦, 律賦, 文賦를 두루 포괄한다고 할 수 있으나 협의로는 楚辭의 유풍을 지닌 辭와 漢賦의 유풍을 지닌 賦를 합친 것이다. 위의 작품은 서사성이 강하며 직설법으로 쓰여지는 賦와는 거리가 멀고 서정성이 강하다는 辭와는 다소 가깝게 보이나 제목에 辭가 아닌 詞가 쓰인 점, 악부시에서도 ‘兮’자 등 허사가 쓰이고 사부 표현의 작품이 흔하다는 점, 사건전개가 없다는 점 등으로 보아 사부에서와 같은 장편의 詞로 인정할 수 없다.蒼, 腸, 光, 陽, 徉(陽운)의 정연한 운법과 長短의 율조와 단편의 편법, 넘쳐흐르는 서정을 종합해 볼 때, 노래시 즉 고악부시의 한 형태인 詞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元稹의 「樂府古題序」에서 다룬 詞에 포함되는 작품의 일종이다. 일정한 형식이 없는 자유로운 악부시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는 원호의 原韻과 탁영의 和作이 운자만 길게 했을 뿐 句法과 표현에서는 상이하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사패에 따른 사보가 없어 宋詞계열의 詞로 보기는 어렵다. 자유로운 형식, 소재의 자율성, 표현의 자유로움 등이 악부로 규정짓는 근거가 된다. 宋詞의 원류를 악부라 할 수 있기에 같은 사의 범주에 편입시킨 것 같다.
「次曹靜齋尙治子規詞」은 1490년 金時習과 朴鍍(渡)가 曹尙治의 작품에 화답하고 김시습이 탁영에게 誦傳하기에 탁영이 조상치의 자규사를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子規啼 子規啼 자규가 우네 자규가 울어,
永夜窮山空自訴 긴밤 깊은 산에서 공연히 호소하길,
不如歸 不如歸 ‘돌아가지 못하네 돌아가지 못하네’.
蜀嶺連天那可度 촉땅 고개 하늘에 닿았는데 어찌 넘으리.
花枝染看色殷紅 꽃가지 붉은 색으로 물든 건
萬事傷心心血吐 세상일에 마음상해 피를 토해 그랬구나.
啾啾百鳥共爭春 온갖새 봄을 다투어 지저귀는데,
爾獨哀呼頻四顧 너만 홀로 슬피울며 사방을 돌아보고 있구나.
已而參橫月落聲轉悲이윽고 별이 기울고 달이 지니 소리는 슬퍼지고,
懷佳人兮 가인을 생각하니,
目渺渺 氣激激 눈물나고, 기운이 격해져,
孤臣寡婦哭無數 외로운 신하 과부 수 없이 우네.
이 작품도 宋詞와 같이 詞牌에 의해 지은 것이 아니다. 앞의 탄세사와 마찬가지로 노래시로서의 사이다. 3 ․ 3, 7°3 ․ 3, 7°7, 7°7, 7°9, 4, 3 ․ 3, 7° 언의 句法은 宋詞에 없다. 讀을 활용한 3 ․ 언 句法이 詞의 句法과 일치하는 점이 많은데 詞의 이러한 句法도 古樂府의 유풍을 받은 것이기에 詞만의 특성으로 볼 수 없다. 子規啼, 不如歸의 반복적 표현도 宋詞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이나 악부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며 하나의 특성인 것이다. 3 ․ 3언과 7, 7언은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송사가 아니기에 악부시 일종으로서의 詞이다. 운자 訴, 度, 吐, 顧, 數는 조상치의 운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제1구의 3 ․ 3언과 제3구의 3 ․ 3언도 조상치의 표현을 그대로 따왔으나 노래시로서의 율조와 의성어로서의 감각을 잘 나타냈다. 詞牌와 詞譜가 없어 객관적인 음악성도 결여되어 있다. 반면에 형식의 開放性, 표현의 자유로움, 운률의 자유로움으로 볼 때 악부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 전반부에서는 자규에 얽힌 전설을 토대로 怨恨과 悲嘆의 풍격을 강하게 나타냈다. 작가는 마지막 두 구에서 佳人(단종)을 생각하며, 억제할 수 없는 눈물과 기운을 수 없이 발산하는 詩的自我를 통해 戀君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다음에 다룰 작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追賡魯陵御製子規詞」는 단종이 지은 子規詞를 보고 미루어 賡韻한 작품이다.
血吻紅 竟夜啾 붉은 피 토해 밤새도록 우니,
哀聲苦 故垂頭 슬픈 소리 쓰라려 머리 숙이네.
向風說 落花怨 바람향해 말함은 떨어진 꽃의 원한이요,
憑雨傳 芳草愁 비를 의지해 전함은 방초의 근심이다.
寄語老地荒天羈旅人 임금 죽이는 거친 세상 나그네에게 말하니,
愼莫登三更月子規樓 삼경의 달밤에 자규루에 오르지 마시오.
단종의 작품 운인 啾, 頭, 愁, 樓를 그대로 빌어서 섰고 句法도 3.3°3.3°3 ․ 3, 3 ․ 3°9, 9°의 형식을 그대로 빌었으며 마지막 구는 단종의 작품을 그대로 인용했다. 이 작품도 사패가 없고 송사의 일정한 형식과 부합되지 않으며 자유로운 형식과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宋詞는 아니다. 악부시의 일종인 사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曺尙治 작품을 차운한 것과 함께 ‘자규’를 ‘단종’에, ‘단종’을 ‘자규’에 비유해서 원한과 한탄을 노래한 것이다. 피를 토하며 밤새도록 우는 蜀子規처럼 영월에 갇혀 청령포를 향해 밤마다 자규루에 올라 눈물지은 단종을 추모한 것이다. 자규는 ‘杜鵑’, ‘杜宇’, ‘歸蜀道’, ‘不如歸’ 등의 異稱이 많고 다양한 傳說을 지니고 있어 詩의 소재로 많이 등장된다. 특히 禽語體인 송대 梅堯臣의 작품이 유명하다.
다. 辭賦
1) 辭
栢谷書堂本 『濯纓文集』의「辭」편에는 두 편이 실려 있다. 「朴希仁哀辭」와 「趙伯玉哀辭」가 그것인데, 辭라는 항목아래 실었지만 哀辭이다. 문집 편집자는 哀辭도 辭에 포함된다는 인식아래 辭로 간주했다.
1925년 서울에서 간행한 본에는 哀辭에 편입되었고 東文選에 실려있는 「趙伯玉哀辭」도 哀辭로 편입되어 있다. 吳訥의 문장변체와 서사증의 문체명변에는 辭의 항목은 없고 哀辭를 別項으로 설정하여 하나의 독립된 문체로 보았다. 애사는 죽음을 슬러하는 글이기에 哀文이라 하기도 한다. 漢 班固가 처음으로 「梁氏哀辭」를 지은 것이 애사의 시작인데, 후대 사람들이 따라서 짓게 되었다. 애사는 죽은 이를 슬퍼하는 글이기에 誄辭와도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誄辭는 世業을 많이 서술하는데, 위진시대 작품을 모방하여 4언구를 주로하고, 애사는 슬퍼하는 정을 나타내기에 長短句 및 초사체와 다른 점이 있다. 애사는 죽은 모든 사람에 대해 짓는 글이 아니라 재주가 있어도 쓰이지 못한 사람 또는 덕이 있어도 오래 살지 못한 사람에 대해 짓는 글이다라는 견해를 종합하면 애사는 ‘재주가 있어도 쓰이지 못한 사람, 덕이 있어도 오래 살지 못한 사람을 슬퍼하는 정을 나타내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리된다.
이와 같은 애사의 개념 규정은 후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탁영의 실제 작품을 보기로 한다.
朴希仁哀辭는 탁영이 1492년에 동갑인 朴希仁이 29세로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것이다. 序文과 本文인 哀詞(辭)로 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朴希仁의 가계, 덕행, 출사등 생애와, 작가 탁영과 박희인과의 관계, 애사를 쓰게 된 동기 등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 서문은 사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幷序文으로 본문 이해에 도움을 준다. 본문은 짧기에 인용한다.
太空茫茫 하늘은 아득하여
无有窮己 끝이 없으니,
本无生兮 본래 태어남이 없거늘
孰有死 죽음이 있으랴.
八百年之彭祖 800세의 팽조도
不能長存乎此 이 세상 오래 살지 못했고,
廾九年之希仁 29세 희인도
同歸於是 이 세상을 떠났구나.
蜉蝣出沒兮 하루살이처럼 태어났다 죽으니,
萬古一視 만고의 이치는 하나일뿐.
4, 4, 4, 3, 6, 6, 6, 4, 5, 4, 4언의 10구의 구법에 已, 死, 此, 是, 視를 韻으로 한 偶句隔脚韻의 운법의 형식을 지녔다. 표현에서도 兮, 之, 乎, 於 등의 허사를 써서 실제로 3언 5언 4언인 句를 4언(제3구), 6언(제5, 6, 7구), 5언(제10구)으로 하여 사부체가 지니는 고유한 율조의 맛을 느끼게 하였다.
구성에 있어서도 짧지만 서사 본사 결사의 3단 구성을 하고 있다. 제 1, 2구는 망망한 높은 하늘은 무궁하고 무한하여 우리 인간처럼 태어나서 죽는 유한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내용을 나타내었다. 3,4구는 한 구로 볼 수도 있겠으나 己, 死, 此, 是, 視의 紙(寘 통운)운이라 偶句隔句脚韻法 규칙에 의거해 볼 때 두 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늘(허공)이란 상징과 ‘生’과 ‘死’의 용어를 통해 다음으로 이어질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제 5, 6, 7, 8구는 本辭로서 오래 산 팽조와 짧게 산 희인을 대비해서 읊었다. 특히 800과 29란 숫자의 대비에서 희인의 죽음을 哀悼하였다. 제 9,10구는 結辭로서 인생의 무상함과 누구나 죽는다는 만고의 이치를 긍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냈다.
이렇게 볼 때 序, 本, 結이 하나의 논리를 지니고 있어 사부의 성격의 하나인 說理性도 공유함을 알 수 있다. 탁영의 이 작품은 사부의 형식가운데서는 짧은 편이다. 짧은 말 속에서도 깊은 정을 함유하고 곡진한 哀悼의 모습까지 연상하게 한다. 이 작품은 서정성이 강하고 서사성이 적으며, 漢賦보다는 楚辭쪽에 가깝기에 辭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초사에서의 명랑, 화려한 표현과 같은 점은 보이지 않는다. 辭가운데서도 앞에서 언급한 哀辭의 개념에 부합되는 성격을 지녔기에 哀辭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구체화, 세분화된 문체의 개념으로 볼 때는 哀辭로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哀辭도 賦보다는 짧지만 시보다는 길어지는게 일반적인 篇法인데 이 작품은 보기드문 短篇이기에 「朴希仁 哀辭」는 애사의 형식 연구에도 좋은 보기가 될 만한 작품이다.
趙伯玉哀辭는 『續東文選』에 실려 일찍부터 그 가치가 인정된 것이다. 앞의 작품처럼 서문과 본문이 哀辭로 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趙伯玉의 생애와 탁영이 애사를 짓게 된 동기를 산문인 幷序文 형태로 서술하였다. 이 작품의 句讀부터 보자. 국역 『속동문선』원문 편에는 제 5구부터 제 12구까지에서는 2구를 1구로 끊었다. 제 13, 14구는 4언씩 2구로 끊은 뒤 다시 두구를 1구로 끊었고 마지막 제 20구를 두구로 끊었다.
이렇게 할 경우 押韻法이 불규칙하게 되어 전체가 每脚, 混脚으로 뒤섞이게 된다. 이 작품은 본고에서 끊은대로 句讀을 처리해야 옳다고 본다. 그렇게 해야 韻字가 採(賄), 載(賄), 宰(賄), 悔(賄), 在(隊), 賄(賄), 彩(賄), 待(賄), 倍(賄)로서 제 12구 끝 在(隊)만 통운을 했고 나머지는 一韻到底格 偶句隔脚韻의 규칙적 운법임이 잘 드러난다.
국역 동문선과 같이 바깥짝 안짝을 붙여 長句로 볼 경우, 바깥짝과 안짝의 운률과 호응이 잘 맞지 않게 된다. 吾誰咎乎造物之罪와 善如可贖吾欲往賄가 그런 경우이다. 앞 구는 두 구로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은 序, 本, 結의 뚜렷한 구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과 재주를 크게 펴보지 못한 조백옥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조물주와 眞宰를 원망하고 있다.
서문을 보면 조백옥은 居喪기간에 哀慼으로 죽어 탁영은 ‘사람의 자식으로 居喪을 잘 하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하고 하늘을 원망하였다. 그 내용이 위의 제 17, 18구에도 나타나 있다. 표현수사에서도 奇句末의 兮字사용으로 吟詠의 운률적 기능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나타냈다. 앞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哀悼의 감정이 발휘되어 있기에 명랑, 화려한 표현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哀辭가 아닌 辭의 원류가 된 「離騷」「九章」의 화려한 가운데 悲哀를 표현한 점, 「九歌」「九辯」의 화려한 措辭에 傷心을 의탁한 점과는 다르다. 이것이 초사 계열의 辭와 哀辭의 차이인 것이다. 탁영의 두 작품 모두 措辭에 哀悼와 傷心이 함유되어 있지만, 일반 시에서 느낄 수 없는 句와 句사이의 넘쳐흐르는 슬픔과 탄식을 느끼게 한다.
탁영의 辭 두 편은 형식과 표현에서도 사부의 특성을 잘 드러냈고 내용에 있어서도 덕이 있으면서도 오래 살지 못했거나, 재주를 지니고도 발휘되지 못한 朴希仁, 趙伯玉의 죽음을 哀悼한 哀辭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는 辭이고, 辭 가운데서도 哀辭의 文體를 지니고 있어, 하위 장르에서는 哀辭라함이 사실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2) 賦
賦도 시경의 수사에서 근원하여 초사로 발전한 것이지만 부란 말이 제일 먼저 붙인 작품은 荀子의 禮 ․ 知 ․ 雲 ․ 蠶 ․ 箴賦 5편이다. 일반적으로 초사의 부 즉 굴원이나 송옥의 작품은 ‘騷賦’라 하고 漢代의 작품을 ‘古賦’라 하며, 六朝의 작품은 ‘排賦’라 하고 唐代에는 엄격한 형식과 율조를 지녔다고 하여 ‘律賦’라 하기도 하고 과거제도에 응용되었다고 하여 ‘科賦’라 하기도 한다. 송대의 부는 ‘文賦’라 한다. 이러한 賦의 異形態는 시대를 지나오면서 형식과 내용이 변모한 것이다.
한대에는 초사의 형식을 모방한 서정성이 강한 擬騷形과 서상성이 강한 문답형이 유행하였고 육조시대에 와서는 한대 고부의 전후의 문답 부분을 없애고 중간의 압운과 대구를 주로하여 서정성을 강조한 것으로 변모하였다. 唐代의 律賦는 명칭 그대로 형식의 운률성을 강조하여 압운이 한정되고, 제목 글자를 압운으로 하는 등 엄격한 형식을 지녔으며, 송대의 문부는 한대의 고부에서 전후의 대화체를 주로 발전시켜 說理的인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탁영문집 賦편에는 6편의 부가 게재되어 있다. 3편의 문체적 특색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秋懷賦」는 1493년 9월에 지은 것으로 탁영집과 속동문선, 『海東辭賦』, 姜渾의 『木溪文集』부록에 실려 전한다. 일찍이 靜菴 趙光祖는 문장 품격뿐만 아니라 천고에 뛰어났으며 그 뜻이 강개하고 굳세고 우뚝하여 기운이 크고 구속되지 않아 작가의 평생 마음의 자취를 나타냈다고 하였다. 따라서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탁영의 「秋懷賦」의 서술 방식은 事理의 전개에서 說理的인 면이 강하면서도, 옛날 荀況의 賦에서 볼 수 있는 循環的인 論法을 썼다거나 宋玉과 같은 화려한 談論을 쓴 것이 아니다. 가을이란 자연의 節候的 섭리와, 가을을 맞이하여 이에 감응한 心懷의 상관성을 吟詠한 것이기에 직설법과 상징법을 혼용한 전개방식을 썼다.
또 하나의 특색은 작가의 말보다 대화 상대자 즉 강혼의 말을 더 많이 작품화한 점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가을을 맞아 슬픈 이유를 끝까지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이 추회부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 悲慨한 마음과 구속되지 않은 문장의 기운이 함융되어 있어 개결한 작가정신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형식과 내용을 지닌 추회부는 압운법의 규칙성과 구법에서 볼 때 六朝의 排賦형식을 닮았지만 對話體의 說理的인 면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송대의 文賦의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遊月宮賦」는 1498년 1월에 지은 것이다. 宋나라 徽宗이 道士林靈素의 말을 듣고 月宮에 올라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道敎의 허구성을 諷刺를 통해 나타낸 작품이다. 총 73구로서 일반적인 부의 편법보다 짧은 단편에 속한다. 이「遊月宮賦」는 앞에서 다룬 부와 달리 압운법이 일정하지 않은 불규칙 운법을 썼다.
奇句偶句에 국한하지 않고 압운했으며, 일반적인 隔句法을 벗어나 때로는 每句, 때로는 偶句隔, 때로는 混句법을 썼다. 따라서 每脚, 隔脚, 混脚이 뒤섞여 있어 운을 의식한지 않는 듯 자유로운 압운을 했다. 用韻에 있어서도 앞에서 본 一韻到底格이 아닌 轉韻法, 通韻法을 자유로이 구사했다. 내용은 宋 徽宗의 秕政을 주로 읊은 것으로 서사보다 결사의 구별이 비교적 뚜렷하다.
서사는 제 10구까지인데 宋나라를 상징하는 신령, 霹靈火仙과 金나라를 상징하는 水德眞君이 구름타고 하늘에 올라가 上元달의 恒娥를 만나고 천하를 내려다보며 천하를 두고 내기 바둑을 두는 내용이다. 본사는 제 11구부터 68구까지이다. 제 47구까지는 水德眞君이 이기게 되자 송 휘종은 금나라에게 천하를 넘겨준 내용으로 휘종의 신선 사모, 도술을 빌려 원중에 온 일, 巫風, 淫風, 亂風을 경계하지 못한 일, 나라 잃은 슬픔과 恨을 서정성이 강하게 나타낸 것이다. 48구부터 68구까지는 서사성이 강한 단락으로 작자 탁영이 宋史를 읽고 느낀 점과 사건을 관련 지어 순차적으로 說理的으로 나타냈다.
「疾風知勁草賦」는 1495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형식에서는 앞의 유월궁부와 유사하다. 처음 4언구로 시작하여 제 5구부터 6언으로 변화한 뒤 제 9구부터 다시 4언구로 이어지다가 제 15구부터는 4언, 6언, 7언, 8언이 혼용되어 자유로운 율조로 바뀐다.
서사는 처음부터 제 8구까지이다. 저물어가는 궁벽한 집에서 밖의 요란한 바람소리를 듣고 의아해 한다. 본사는 제 9구부터 101구까지이다. 갓옷을 입고 문을 열고 살펴보니 바람에 모든 풀들이 누워버리는데 앞 언덕 풀포기 하나가 바람을 업신여기면서 꼿꼿이 솟아 있었다. 작가는 이 풀을 보면서 周公, 張巡, 許遠, 文天祥, 謝枋得, 陶潛, 張綱, 許由를 연상하고 그들의 행위와 눕지 않은 풀의 절의를 대비해서 묘사했다.
결사는 제 102구부터 끝까지로 자신의 힘으로 억센 바람을 이겨낼 수 없음을 한탄하며 회상에 잠기는 내용이다. 작가가 당시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가장 번민했던 정감이 나타난 작품이다. 이 작품도 현실과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송대의 문부와 排賦가 혼융된 유형에 속한다고 보겠다.
라. 散文
탁영의 산문으로는 序文, 雜著, 祭文 등이 있으나 「管處士墓誌銘」과 「續頭流錄」과 「記文」이 유명하다. 이것의 대강을 다룬다.
1) 管處士墓誌銘
管處士墓誌銘은 19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전문의 분량은〈愁城誌〉보다 길지마는 〈수성지〉처럼 假文소설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敍事적인 이야기 부분은 4분지 1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모두 序頭 人定記述에서 조상에 관한 기록이 차지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설적 구성이 아니라고 해서 가문의 가치가 감소될 수는 없다.〈心史〉나 〈天君演義〉나 〈天君實錄〉등은 중편소설 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지마는 가문적 滑稽性에 있어서는 이 〈관처사 묘지명〉에 미치지 못한다.
韓愈의 〈모영전〉이래 文房四友에 관한 假文은 가끔 나타난다. 麗末 李詹의 〈楮生傳〉을 비롯하여 南有容의 〈毛潁傳補〉와 李奭行의 陳玄傳, 趙載道의 陳玄傳, 魏伯珪의 楮伯傳, 陳玄傳, 毛元鋒傳, 石坦中傳 등과 李德懋의 〈官子虛傳〉, 釋應允의 硯滴傳, 韓星履의 〈管城子傳〉 및 崔鉉達의 〈硯滴傳〉등이 발견되어 있다. 獨創性에 있어서는 〈연직전〉이 우수하고 文房四友를 각각 독립한 傳으로 창작한 점에서는 魏伯珪의 四種傳을 따를 수 없으나 한 작품 안에 四友를 종합한 면에서는 이 〈관처사묘지명〉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伏羲씨로부터 宋代에 이르기까지 붓과 관련된 고사들의 인용이 매우 참신하다. 대개의 문방사우에 별명들은 管城子, 會稽 楮先生, 陳玄, 陶泓 등으로 일컫는데 비하여 楮紙白, 易玄光, 石虛中등의 용어도 참신하려니와 편철하는 솜씨 또한 기지가 있다.
탁영은 18세 때에 그의 스승 점필재로부터 韓愈의 문장을 공부하라는 지시를 받고 〈昌黎文集〉을 천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그가 이 〈管處士 墓誌銘〉을 짓게 된 動機가 바로 한유의〈毛潁傳〉에 감동을 받은 것이 가장 큰 動機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毛潁傳〉이 붓의 생전에 관한 글이라면 〈管處士 墓誌銘〉은 붓의 사후에 관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탁영이 지은 「管處士墓地銘」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를 통해 탁영은 당대의 현실을 일종의 假傳의 형식을 빌어 비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動機는 그의 愛物思想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문장 속에 10편이나 되는, 그가 평소에 愛用하던 器物에 대하여 지은 글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物性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疑視하고 있는 듯 하다.
2) 續頭流錄
탁영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풍부한 감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이 벌이는 교감을 그의 투철한 유가적 태도로 그려내었다. 이 또한 그의 이상이 그가 호흡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탁영이 자연을 통해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심성을 탐구한 것을 작품화한 것은 여럿 있으나 「속두류록」은 그 대표적이다. 「속두류록」에서는 시종일관 그의 풍부한 감성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인간과 자연의 교섭양상을 문학적인 필치로써 그려내고 있다.
「속두류록」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탁영은 선비가 태어나 한 지방에 매여 사는 것을 운명으로 보았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그 경계를 마음속에 간직하지는 못할망정 국내의 산천은 마땅히 두루 탐방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는 頭流山을 구경하고는 두류산 기행문인 「속두류록」을 지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대자연의 신비를 유려한 필치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두류산에 입산하면서부터 자연의 신비함과 위대함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자연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대비시키면서 자탄하고, 자연을 통해 인간이 지녀야할 수양적 측면을 내면화 하였다.
탁영이 두류산의 頭龜寺에 당도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절에 도착하여 잠깐 낮잠을 자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비가 개여 두류산이 보인다고 하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한편으로는 구름이 걷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구름이 모이고 하는 두류산의 모습이 그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 당시의 감동을 탁영은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다.
새파란 세 봉우리가 비스듬히 창문 앞에 다가서 있고 구름을 산머리에 걸치고 있어 검푸른 산이 보일 듯 말 듯 하였다. 잠시 후 다시 비가 내리었다. 나는 농담 삼아 ‘조물주도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일까? 산의 형상을 숨기어 우리를 시샘하는 것 같다.’고 하자, 백욱은 ‘산신령이 오랫동안 시객을 가둬 둘 계획인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푸른 산 모습이 모두 드러나 많은 골짜기에는 仙人, 羽客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다시 백욱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나 밤 기운이 이 지경에 이르면 모든 찌거기라곤 없어집니다.’라고 하였다. 나의 조그마한 하인이 자못 피리를 볼 줄 알므로 그를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다. 그 소리는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대하여 놀다가 밤이 깊은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탁영은 산이 구름에 가린 모습을 보면서 조물주가 자신들이 맑은 산의 모습을 보고 시를 지을까 시샘하고 있다고 하자 일두 정여창이 탁영의 그 말을 받아 시객을 가두어 두고 싶은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일두가 이것을 ‘夜氣’와 관련시키면서 심성수양의 원리로 이해한 것에 탁영은 주목하였다. ‘夜氣’란 『孟子』「告子」上에서 말한 밤에 휴식과 더불어 싹이 다시 자라게 하고 그것으로 새벽에 맑게 생기를 북돋아 주는 氣로, 인간의 선한 본성을 지켜주는 가장 본질적인 기운을 말한다. 낮에는 혼잡하게 사느라고 양심이 흐려질 수도 있으나 깊은 밤에는 조용히 쉬면서 다시 싹트고 또 새벽의 청명한 기에 의해 흐려진 양심이 맑게 씻겨 본연의 심성이 다시 돋아나는 것을 이 ‘夜氣’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였으므로 탁영은 일두의 말을 빌려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찌거기가 없어질 수 있다고 했다.
한편 탁영은 현실에서 떠나 자연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면서도 백성의 곤궁에 대하여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두류산에는 감나무와 밤나무와 잣나무가 많아서 가을바람이 불면 열매가 떨어져 계곡에 가득 차므로 스님들이 그것을 주어다가 요기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허망한 말이다. 다른 초목도 나서 자라지 못하는데 하물며 과일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매년 관가에서 잣을 바치라고 독촉하면 주민들은 도리어 다른 고을에서 나는 잣을 사들이어 공물을 충당한다고 하였다. 모든 일에 있어 귀로 들은 것이 눈으로 보는 것과 같지 않다는 점이 이런 예이다.
이 글은 탁영 이해를 위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시사하고 있다. 하나는 탁영이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는 점이다.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을 비교하여 후자를 중시한 것이 그것인데, 사람들은 두류산에 잣이 많아서 가을바람이 불면 잣 열매가 떨어져 계곡에 가득하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가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탁영이 애민정신에 입각하여 당대의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공물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할 것인데, 관가에서 주민들에게 잣을 바치라고 독촉하면 백성들은 다른 곳에서 사서 공물을 충당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객관적 진실을 추구한 점이라든가 당대의 부조리를 비판한 점은 탁영이 자연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객관적 현실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 부조리한 현실을 개혁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탁영의 작가정신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3) 記文
記文은 유기체와 필기체로 나누어지는데 작가가 붓 가는데로 생활 속의 느낌을 기술하기 때문에 풍격이 질박하고 강건하며 情調가 절실하고 자연스러워서 형식보다 내용이 우세한 글이다. 그 특징으로는 일정한 작법이 없이 자유로이 쓰는데, 설리는 사실에 촉발되어 片言으로 설파하고, 서정은 승화된 감정을 펼쳐내고, 작가가 조금도 창작의지가 없기 때문에 도리어 심후한 온축이 있으며, 지식추구의 취향과 취미추구의 취향이 있다.
조선전기의 관각문인들의 시기와 별로 멀지 않은 시대라면 과문이나 공식 외교문서 등은 어느 정도는 관각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문처럼 사적인 감정을 자유로운 형태로 써내려갔다면 그 글에는 위에서 언급한 기문의 자유로운 형식에서 오는 장점들이 잘 드러날 것이며, 또한 그 내용면에도 새로운 시대정신이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탁영집에는 모두 10편의 記가 실려 있다. 「癡軒記」, 「涵虛亭記」, 「二樂樓記」, 「靈山懸監申澹生祠堂記」, 「會老堂記」, 「臨錦堂記」, 「機張縣館記」,「梅月樓記」, 「重修淸道學記」, 「釣賢堂記」이다. 여기에 등장한 癡, 虛, 樂, 會등의 개념은 당시의 초기 사림들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그 중 「치헌기」의 주제의식과 표현양식의 특징, 구성은 다음과 같다.
「癡軒記」의 주제는 癡의 역설적 설정이다. 일반적으로 癡라는 글자는 부정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다. 어리석고 미련하여 보통이하여서 그 능력을 쓸 곳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한 개인의 정신내지는 그 지향점을 집약하여 놓은 軒의 命名에 그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蘇洵의 「名二子說」이나 柳宗元의「愚溪詩序」에서처럼 많은 文人들이 자신의 넘치거나 모자라는 부분을 깎아내거나 보충하기 위해, 혹은 겸양의 뜻으로 名 ․ 樓 ․ 軒등을 命名할 때 부정적이거나 쓸모없어 보이는 글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처럼 처음부터 역설적인 의미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쓰인 경우는 드물게 보인다. 표현은 句法의 다양성이다. 구성은 변화 ․ 반복되는 주제를 이룬다. 이 글은 주제를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펼치고 있고 뒷부분의 ¹/₂은 癡와 慧의 대비를 통해 中庸의 도를 펼치고 있고 뒷부분의 ²/₃는 癡를 愚와 拙로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고 나머지 ¹/₃에서는 다시 變으로 그 주제의식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결국 이글의 주제는 中庸의 도와 變化의 논리로 요약되어진다.
이상은 탁영의 記에 대한 몇 가지 분석이다. 역시 초기의 사장파 사림의 일원으로서의 문장의 특징이 면면이 드러나 있다.
첫째, 주제적인 면에서는 당시의 훈구파를 공격하기 위한 하나의 역설적인 개념으로서의 癡를 아주 적절히 사용하여 훈구파의 폐해를 드러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 개념은 중용의 도와 변화의 논리까지 포함한 것으로 결론 내리면서 진정한 의미의 彗로 탈바꿈된다. 虛는 성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太虛로서의 철학적 사유나 논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자연에 대한 심미안으로 확대되어 당시 신진사류들의 자연에 대한 감상이나 자연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보다 검소하고 소박한 미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仁 ․ 智의 성품으로 與民同樂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요산요수의 개념이라고 하여 요가 단순히 심성수양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치민의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는 이미 사림들의 사회적인 목표와 그 지향점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둘째, 표현양식의 특징으로는 억양, 대비, 열거, 참치등의 구법과 보다 세밀한 묘사를 이루기 위해 원근을 의식하여 각각 다른 호흡으로 구별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다.
셋째, 구성상의 특징으로는 癡↔彗를 통해 중용의 도를 도출해 내고 다시 그 癡를 愚와 拙로 변환시키면서 變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대하면서 끊임없이 그 주제를 변화시키면서 반복하는 구성을 하고 있다. 마치 서양음악에서 주제에 대한 변주를 계속 반복해나가듯이 아주 리드미칼한 구성을 하고 있다. 사치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사물들의 이름을 빠른 필치로 열거하고 이어서 잔잔한 호흡으로 소박한 자연에 대한 심미안을 펴 보여서 그 차별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문장 구성상의 대비를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각각의 문의 주제에 따라 다양한 표현과 구성을 구사하여 자연스러운 감동과 재미를 주고 있는데 이는 보다 치밀한 문장작법의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탁영의 記를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뛰어난 사장능력인 것이며, 또한 다른 類의 문에서도 그 文體的 特色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4. 文學世界
가. 藝術論과 文學觀
탁영의 예술론은 書畵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서화는 작가의 정신을 통하여 그 오묘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면서 書畵와 詩文은 모두 마음속에 있는 정신의 표현이라는 예술에 대한 일정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시․서․화에는 작가 정신의 오묘함이 나타나 있다고 보았다. 시․서․화의 오묘한 경지를 삼절이라 표현하면서 서화와 시문은 모두 마음 속에 있는 정신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탁영은 옛부터 사람들이 흔히 거문고를 간직하는 것은 거문고가 사람의 性情을 다스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로 보아 탁영은 거문고가 성정을 다스린다고 확실하게 믿고 여기에 기반 하여 心性을 수양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순임금은 五絃을 즐겨 사용했고, 文王은 七絃을 사용했다고 하면서 그 역시 거문고를 즐겼음은 물론, 거문고의 역사적 변모양상에 대한 일정한 견해도 갖고 있었다.
탁영의 문학관은 기본적으로 道本文末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道란 性理學的 개념의 道일 것이다. 士林들에게는 형이상학적인 이론으로서의 道本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