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동기와 규율이 필요하다.”
- 안조르 아스테미로프(아미르 세이풀라)
샤밀 바사예프가 죽은 뒤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가 죽은 지 두 달 뒤인 2006년 9월 11일, 북오세티야 수도 블라디카브카즈 근처에서 수송헬기 MI-8이 추락하여 중장 2명, 소장 1명을 포함한 러시아군 12명이 사망하였다. 러시아측은 악천후로 인한 추락, 북오세티야 반군은 맨패드 지대공 미사일을 이용한 격추를 각각 주장했다.
추락 기종과 같은 MI-8 헬기
러시아군도 체첸반군에게 이에 상응하는 손실을 입혔다. 2006년 7월 아브튜리에서 러시아 GRU 스페츠나츠를 기습했던 지휘관인 이사 무스키에프와 아브 하프스를 그해 9월, 11월에 죽였다. 아브 하프스는 하타브, 아브 알 왈리드의 계보를 잇던 체첸 내 아랍 무자헤딘의 3번째 지휘관이었다. 그의 후임은 2001년부터 체첸전에 참가한 무하나드였다. 러시아 정보부에 따르면 요르단 공군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체첸에 오기 전에 이미 아프가니스탄, 보스니아, 코소보, 필리핀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었다.
왼쪽 2번째가 무하나드
다음 해인 2007년 4월 5일, 람잔 카디로프가 수상 직함을 던지고 체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법에 정한 대통령 당선 연령인 만 30세가 되어 합법적으로 권좌에 오른 람잔 카디로프는 자신의 취임 당일에 체첸 반군 동부지역 사령관인 술레이만 이무자에프(아미르 헤이룰라)를 사살하였다. 이무자에프는 그 해 3월에 도쿠 우마로프가 부수상으로 임명할 정도로 유력한 지휘관이었고, 친러시아 체첸 정부에서 꼽은 가장 영향력 있는 반군 3명 중 1명이었다. 다른 2명은 도쿠 우마로프와 다게스탄 반군 사령관인 라파니 카리로프였다.
왼쪽이 술레이만 이무자에프, 오른쪽이 아브 하프스
이 중 라파니 카리로프는 2007년 9월 17일 다게스탄 노비 술락 마을에서 러시아 FSB 빔펠 특수부대와 내무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당시 카리로프와 반군 1명은 러시아군 전차 1대와 장갑차 7대, 헬기 1대, RPO-A(열압력탄)의 공격 속에서도 무려 12시간을 버티며 싸우다 죽었다.
라파니 카리로프
이제 3명 중 마지막 1명은 체첸 이치케리아 공화국 5대 대통령인 도쿠 우마로프였다. 우마로프는 같은 장소에서 이틀을 머물지 않는 조심성과 위험을 감지하는 천부적인 감각으로 러시아군과 람잔 카디로프의 촘촘한 그물망을 피해 다녔다. 2005년 4월에는 수도 그로즈니의 레닌스키 거리에 있는 9층 건물에서 5명의 반군과 같이 러시아군에게 포위되었다. 러시아군은 헬기까지 동원하여 5명의 반군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우마로프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마로프는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다게스탄 반군 소탕 중인 러시아군
도쿠 우마로프는 그 외에도 위기를 몇 번 모면하였지만, 단순히 살아남는다는 것으로는 전쟁을 승리하기 어려웠다. 체첸 땅에서는 경쟁자를 제거하며 실권을 잡아가는 람잔 카디로프가 대통령 직위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점차 반군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바사예프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는 지휘관의 전사는 전쟁 수행을 점점 어렵게 만들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람잔 카디로프
반면에 코카서스의 다른 공화국에서는 반군의 활약이 차츰 거세지고 있었다. 2007년에만 다게스탄 내무부 장관인 아딜기레이 마고메타기로프 중장에 대한 2번의 암살 시도(3번째인 2009년 6월에 다게스타 수도 마하칼라에서 암살당한다)가 있었으며, 잉구세티야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도 그해 7월에 있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공화국 정치계에는 람잔 카디로프와 같은 수완가가 없었기 때문에 반군에 대한 대응이 다소 취약한 상태였고, 활동의 여지가 넓었다.
다게스탄 반군들
이에 따라 반군 진영에서도 점차 체첸인이 아닌 사람이 중요 지휘관에 올랐다. 대표적으로 잉구세티야 반군 지휘관인 마고메드 예블로에프(아미르 마가스)와 카바르다 발카리아 반군 지휘관인 안조르 아스테미로프(아미르 세이풀라)가 있었다. 예블로에프는 2007년 7월 샤밀 바사예프의 공식 직책이었던 ‘야전 사령관(military amir)’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아스테미로프는 2007년 9월 샤리아 법정 의장에 임명되었다. 반군의 2개의 중심축인 ‘군사’와 ‘종교’의 핵심 직위에 체첸인이 아닌 다른 코카서스인이 임명된 것이다.
마고메드 예블로에프, 본명은 알리 타지에프
그리고 2007년 10월 7일, 도쿠 우마로프는 체첸 이치케리아 공화국의 폐지를 선언하고, 북코카서스 전역을 아우르는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도쿠 우마로프, 뒤의 깃발은 코카서스 에미레트 깃발
코카서스 에미레트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공화국’과 ‘헌법’을 배제하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따라 운영되는 일종의 연방이었다. 기존의 코카서스 공화국을 대신하여 ‘윌라야 노흐치초(체첸공화국)’, ‘윌라야 다게스탄(다게스탄 공화국)’ 등의 아랍식 행정구역을 만들었고, 도쿠 우마로프 스스로 초대 ‘아미르(수장)’에 올랐다.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각 행정 구역. 노가이 스텝까지 포함하였다.
각 지역 반군들은 지역별 자마트(Jamaat)로 재편되었고, 체첸은 동부 전선과 남서 전선으로 나뉘고 각각의 전선 밑에 마을 단위의 자마트로 편성되어 전투를 수행하기로 하였다. 동부 전선 사령관은 아슬란벡 바달로프, 남서 전선 사령관은 타르한 가지에프였다.
왼쪽이 타르한 가지에프, 오른쪽이 아슬란벡 바달로프
갑작스런 공화국의 폐지와 이슬람 국가로의 전환은 당연히 반발을 불러왔다. 체첸 이치케리아 공화국 외교부 장관이자 서방측 대사인 아흐마드 자카예프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과거 와하비 강경파들의 다게스탄 침공으로 1차 체첸전의 승리가 파국을 맞았던 것을 상기하며, ‘체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정당한 투쟁을 국제 테러리즘으로 변질’시키려는 또다른 시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러시아 정보부가 배후에서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아흐마드 자카에프
이에 맞서 반군 대변인이자 정보부장이었던 모브라디 우두고프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프카즈 센터’ 사이트에 안조르 아스테미로프가 쓴 장문의 글을 올렸다. 아스테미로프는 이미 전쟁이 북코카서스 전역에 확대되었는데, 어떻게 ‘체첸 이치케리아 공화국’의 깃발로 모두를 통솔할 수 있냐고 반문하였다. 또한 명확한 전쟁 목표와 확고한 조직 체계가 없으면 전쟁을 지속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 체첸땅이 러시아 정부의 간접 통치로 전환된 시점에서, 이슬람 율법의 실현이라는 확고한 동기가 없으면 전쟁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안조르 아스테미로프.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아스테미로프는 ‘에미레트’의 선언으로 잃는 것은 그 존재조차 불분명한 서방측 지원과 동정뿐이며, 이슬람 이념의 강한 통솔력으로 얻게 되는 이익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다고 하였다. 동시에 서방식 민주주의는 신의 율법인 샤리아를 우선할 수 없으며, 그걸로 승리해봤자 러시아의 꼭두각시 정부에서 서방의 꼭두각시 정부로 전환될 뿐이라고 하였다.
이에 맞서 아흐마드 자카예프는 단순한 반대에 그치지 않고, 도쿠 우마로프를 대신하여 자신이 ‘체첸 이치케리아 공화국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체첸 공화국 의회 의원들 41명의 ‘전화 투표’에 따른 과반수 동의로 3명의 후보 중에 선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체첸 공화국의 모든 무장 세력들은 도쿠 우마로프와 손을 끊고 고립시키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체첸 땅이 아닌 안전한 영국 런던에 머물면서 주장하는 자카예프의 말은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다. 도쿠 우마로프는 모든 북코카서스 반군에게 자신과 코카서스 에미레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고, 대부분의 반군들은 이에 복종하였다. 물론 전직 샤리아 법정 의장이었던 아르비 요브미자에프(아미르 만수르)처럼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세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코카서스에 자신의 손발이 될 군사 조직이 없었던 자카예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미르 만수르
결국 긴 시간 체첸 반군 내에 존재했던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은 최종적으로 강경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유일한 민주적 선출 대통령인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죽음 이후로 온건파 쪽에는 전쟁 승리를 위한 비전이 남아있지 않았고, 베슬란 사건 이후로 서방의 외교적 지원은 더 기대할 수도 없었다. 승리의 돌파구를 위해 전장을 다른 공화국으로 확대하였으나, 그들을 하나로 연결할 동기 역시 온건파에는 없었다. 결국 이슬람 국가 수립을 원하는 강경파의 주장을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체첸 독립을 위한 투쟁은 이 시점에서 끝났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북코카서스 공화국에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게 된 체첸 반군들은 보다 전쟁터를 넓게 쓸 수 있는 결과가 되었고, 그만큼 전쟁은 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다.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Caucasus_Emirate
https://en.wikipedia.org/wiki/Dokka_Umarov
https://en.wikipedia.org/wiki/Akhmed_Zakayev
https://ctc.usma.edu/posts/the-caucasus-emirate-from-anti-colonialist-roots-to-salafi-jihad
http://www.eng.kavkaz-uzel.eu/articles/11635
첫댓글 오래간만의 연재네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슬슬 연재가 처음 시작됬던 2008년이 가까워지는군요.
저도 그 시점에 도달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우 복잡하네요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올리신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글 작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연재가 끊겨서 러시아에 잡혀가신줄 알았습니다. ㅎㅎㅎ (농담이에요)
다음글 쓰기가 많이 어려웠네요;;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좋은 연재 잘보았습니다 오래 걸려도 또 올라오길 기대합니다
다음글 올렸는데, 그 다음은 좀 빠르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래기다렷습니다ㅠㅠㄱㅅ
더 빠르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재 좀... 기다리겠습니다
이제 간신히 올렸습니다;;
오랫만에 접하는 연재글.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다음글을 그나마 빨리 접하게 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