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호시은
 
 
 
카페 게시글
각종 사전 서적 스크랩 전국시대.. 여불위와 진시황..
한라짱 추천 0 조회 145 08.06.18 20: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불위(呂不韋: ?-235 B.C.)는 위(偉)나라 복양(濮陽: 지금의 하남성 복양 서남) 사람으로 조(趙)나라  양적(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강대국인 진(秦)나라가 중원 진출을 하기 위해 조(趙)나라를 침범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秦) 소왕(昭王) 40년에 진나라 태자가 죽자, 소왕 42년에 소왕의 차남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옹립하였다. 안국군에게는 자녀가 20여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정실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안국군에게는 이인(異人, 후에 자초-子楚라는 이름을 개명을 함.)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인의 어머니 하희(夏姬)는 안국군의 총애를 얻지 못하였다.

 

이인(異人)은 진나라를 위해서 조(趙)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그때 진나라가 조나라를 자주 침공하였기 때문에 조나라에서는 인질로 와 있던 이인을 매우 박대했었고, 이인은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매우 곤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불휘는 애첩 조희(춤을 추는 무희였다.)를 총애하였고 사랑을 했었다. 어느날 조희와 사랑을 나눈 후 잠자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웠는데, 꿈을 깨고 난 뒤에도  너무 기묘해서 잊혀지질 않았다. 내용은 용이 자신의 붉은 구슬을 뺏어 갔다, 이에 불휘가 용에게 큰 소리로 따지자 용이 구슬 대신 여의주를 주는 것이었다

 

곤히 옆에 자고 있는 조희를 보면서 꿈에서 용이 자신의 구슬을 빼았가 간 것이 "혹시 '조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용의 여의주의 내용이 무엇을 뜻하지는 잘 알지 못했다.  

 

여불위는 상인이기에 상단을 이끌고 이나라 저나라를 돌면서 장사를 하였다. 한번은 조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장사 차 들렀다가 진나라 공자 이인이 몰모로 잡혀있다느 이야기를 듣고, 이때 이 장사꾼의 머리에는 기발한 영감이 번뜩였다.

 

"이것은 정말로 얻기 힘든 소중한 보물이다! 지금 투자를 하면 훗날 큰 이보다 더 큰 장사는 없을 것이다.- 기화가거(奇貨可居)"라고 생각했다.

하고 집에 돌아와 부친에게 물었다.


“농사를 짓는 이익은 얼마나 됩니까?”


“열 배는 될 거다.”


“값진 보물을 사서 파는 이익은 얼마나 됩니까?”


“그것도 열 배는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을 도와 한 나라의 왕이 되게 한다면 어떻습니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정말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불위의 부친은 껄걸 웃었다. 여불위는 이인을 통해 모든것을 올인 할것을 결단한다. 불위는 즉시 황폐한 삼간 초가에 어렵게 살아가는 이인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귀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머지않아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빈(正嬪)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귀공을 포함하여 20명의 서출(庶出) 왕자 중에서 누구를 태자로 세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귀공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소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소생에게는 천금(千金)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하여 환심을 사고, 또 널리 인재를 모으십시오. 소생은 귀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그리로 귀공과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로 책봉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인에게 "나는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부귀한 천자로 만들어주겠소."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인은 웃으면서, "당신은 먼저 자신부터 부귀해진 다음에 나를 부귀하게 하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여불위는 "당신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부귀는 당신이 부귀해진 다음에 실현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인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불위는 말했다.


"진나라 왕은 늙었으며 안국군이 지금 태자입니다. 듣자하니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가장 총애하지만, 화양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후계자를 추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화양부인 뿐입니다.

 

당신은 20여명의 형제들 중에서 서열이 중간인데다가 타국에서 오랫동안 인질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안국군의 중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설령 소왕이 돌아가신 후 안국군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해도 당신은 다른 공자들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인은 깊이 공감하면서 말했다.

"그러면 선생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불위가 대답했다.

"당신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데다 타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친구들에게 줄 재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문하에 식객을 들일 수도 없습니다. 나는 비록 부유하지는 못하지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당신을 후계자로 지목하도록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인은 급히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말하였다.


"선생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진나라를 나누어 선생과 함께 영화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뜻이 통한 이인과 여불휘는 서로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이인은 모든것을 여불위에게 맞겼다. 여불위도 이인의 King Maker가 되었다.

 

여불위는 이때부터 진나라의 공자 이인에게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주었다. 우선 불위는 금 500근을 자초에게 주어 생활비와 빈객을 받아들이는데 쓰도록 하고, 다시 금 500근으로 진귀한 보석을 마련하여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에 들어간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과 그녀의 친지들을 두루 만나면서 많은 보석을 선사했다. 화양부인의 마음을 흔들게 하였다. 그리고 부인의 마음에 이인이란 이름이 세겨졌다.

 

조나라로 돌아 온 불위는 자기 생일이 되자  이인을 자기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술이 몇잔 오가는 중 여흥을 더 신나게 하기 위해 불위의 애첩인 조희가 춤을 추었다 그녀는 원래 무희 출신이라 이인은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불위에게 조희를 자신의 숙소에서 아까 추웠든 춤을 한번 더 보면 어떻겠냐고 하여 불위는 허락을 하였다. 불위의 계획대로 이인까지도 척척 발을 맞추고 있었다.

처음부터 불위는 믿을 수 있는 조희를 이인의 곁에 두어싶었다. 그리하여 이인을 안밖으로 조정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불위가 얼마전에 꾸웠든 꿈의 내용이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분명 용은 나의 구슬을 뺏았아 갔고, 자신의 여의주를 나에게 주었지 않았든가? 그렇다 구슬은 주희였고 용은 이인이다."라고 생각한 불위는 조용히 조희를 불러 앞으로 자기의 앞날에 비젼을 설명하자 조희도 불위에게 그뜻에 동참을 하였다. 

 

그날 이인의 방에가서 조희는 아련한 조명과 사람 마음을 사로 잡는 향이 가득하게 만들어 이인을 춤으로써 유혹을 하였다. 그리고 이인에게 수면제를 먹여 같이 동침을 하게 되었고, 불위는 이인에게 책임을 물어 조희를 이인의 여자로 허락하였다. 이인 역시 처음에는 황망했으나, 조희를 얻어 너무 좋았다. 

 

이때 조희에 배 속에는 여불휘의 자식을 임신한 지 2개월이 되었다. 조희와 불위는 이 사실을 자기들만의 비밀로 붙혔다. 

 

그리하여 그녀는 진나라 공자 이인의 여인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개월 후 조희는 아들을 낳게 된다. 이렇게 태어난 이인의 아들 이름은 영정(嬴政)이다. 그가 바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가 된다.


하편 불위는 또 진나라로 가서 화양부인을 만났다. 화양부인에게 진귀한 보석을 주면서, 조나라에 있는 이인의 재능과 덕망을 칭찬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이인이 천하의 어진 선비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도, 항상 "화양부인이 나의 정신적 지주이며 나는 밤낮으로 부왕과 화양부인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는 말을 한다고 전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화양부인은 아주 기뻐하였다. 게다가 이미 여불위에게 매수된 화양부인의 언니가 화양부인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미색으로 총애를 얻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미색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총애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부인은 안국군을 모시고 계시니, 이러한 때에 부인이 후계자를 지목하십시오. 그러면 안국군이 왕위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안국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가 왕위를 이어받으면 그때에도 영원히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백대(百代)의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총애를 잃었을 때를 대비해 두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하여 사랑이 시든 후에는 이런 말을 하여도 안국군이 들어주겠습니까? 지금 여러 공자들 중에서 이인이 가장 어질고 효성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서열이 중간이어서 국법에 따라 작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그 어미도 총애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부인에게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부인께서 이러한 때에 이인을 후계자로 내세우신다면, 부인은 진나라에서 평생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화양부인은 이 말을 듣고 깊이 공감했다. 어느날 화양부인은 안국군을 모신 자리에서 조용히 이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가 비록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지만 공자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효성스러워 조나라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울면서, "저는 대왕의 과분한 사랑을 입어 대왕을 곁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지만, 불행히도 슬하에 자식이 없으니 이인을 후계자로 삼아 자식이 없는 천첩의 한을 씻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안국군은 화양부인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도록 승낙했다.

 

진 소왕 50년, 진나라는 대장 왕전(王翦)을 보내어 조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공격하였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조나라에서는 인질인 이인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인은 여불위와 상의한 끝에 진나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황금 600근의 뇌물로 감시자들을 매수한 후 조나라를 탈출했다.

조나라로 탈출한 이인에게 화양부인과 안국군은 너무 기뻐했고, 안국군 부부는 이인의 이름을 자초(子楚)라고 개명을 하여 기쁨을 나누웠다. 

 

이인의 탈출의 사실을 알게 된 조나라에서는 다시 이인의 부인과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불위가 재빨리 이인의 부인(조희)과 아들(영정)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급히 숨겨 모자의 목숨을 살렸다.

 

진 소왕 56년, 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위를 이어받자, 화양부인은 왕비가 되고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조나라에서도 진나라와 화평을 위해 태자가 된 자초에게 그의 부인과 아들 을 진나라로 돌려보내 주었다.


안국군 효문왕(孝文王)은 즉위한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 자초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의 어머니 화양왕후는 화양태후(華陽太后)에 봉해졌으며, 생모 하희는 하태후(夏太后)로 추대되었다.

 

장양왕 원년에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后)에 봉한 다음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십만 호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장양왕은 왕위에 오른지 3년 후에 세상을 떠난다. 조나라 볼모시절에 많이 쌓였있든 스트레스를 술과 조희에게 푹빠져 살다가 죽었다. 이때 장양왕은 여불위에게 모든 조정의 일을 맡겼고 주색잡기를 하다가 왕에 오른지 3년만에 아들 영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것이다. 

 

영정(嬴政: 후세의 진시황)의 나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미성년자) 영정 뒤에는 조희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실은 여불위가 모든 대소일을 처리하였다. 불위는 영정의 22살이 되기까지는 계속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중부(仲父)라는 존칭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유지하였다.

 

이 당시에는...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당시 많은 어진 선비들을 예로써 대우하고 그들을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여불위는 자신의 명성이 그들 4군자에 미치지 못하자 그들을 따라가기 위하여 널리 천하의 선비들을 초빙하여 후한 선물을 주고 식객으로 삼았다.

 

이러한 일은 전국 시대 제나라에서 위왕, 선왕, 양왕 대에 걸쳐(4세기 중엽-BC 3세기 중엽 B.C.) 특히 성행하여, 이른바 직하(稷下)의 학문을 이루었다. 제나라가 쇠퇴한 이후 직하의 지식인들은 흩어져서 여러 나라의 제후들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한 지식인들을 다시 끌어 모은 것이 바로 여불위였다.

 

그리하여 여불위의 식객은 무려 3천여명에 다다랐다. 이는 제나라의 맹상군의 식객의 수와 견줘도 떨어지지 않았다.

 

식객 중에는 순자(荀子)와 같이 변설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그들의 책이 크게 유행하였다.

 

여불위는 자기의 식객들에게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술하게 하여, 그것을 하나로 묶고 ≪여씨춘추(呂氏春秋)≫라 하였다.

 

<여씨춘추는 총 26권.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여불위(呂不韋)가 빈객(賓客) 3,000명을 모아서 편찬하였다. 도가(道家)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 유가(儒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형명가(刑名家) 등의 설(說)도 볼 수 있다. 또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시사(時事)에 관한 것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론서이다.

내용은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 으로 나누어, 십이기 는 춘하추동 4계절을 맹(猛) ·중(仲) ·계(季)의 3기로, 팔람 은 유시(有始)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으로, 육론 은 개춘(開春) ·관행(慣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으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이것이 완성되자 여불위는 셴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놓고,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여 완벽한 내용을 과시하였다.>   


진시황이 장성하였으나 태후의 음욕이 그치지 않았다. 태후(조희)는 자기의 음욕을 채우기 우해 불위를 자기의 침소로 불러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불위는 자기와 태후(조희)그 사실이 발각되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여불위는 성기가 크기로 유명한 노애라는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그에게 음탕한 짓을 하게하고 성기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걸고 다니도록 했다.


이 일이 태후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여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연 이 이야기를 들은 태후는 그를 얻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를 태후에게 바치고 사람들에게 노애가 죄를 지었으니 부형(腐刑: 성기를 거세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헛소문을 내게 하였다. 여불위는 태후에게 몰래 말했다.


"노애에게 부형을 가짜로 시행하면 그를 매일 궁궐에 둘 수가 있습니다."


태후는 형을 집행하는 관리를 매수하여 가짜로 부형을 실시하게 하여, 노애의 수염과 눈썹을 뽑고 그를 내시로 발탁했다. 태후는 그를 가까이 두고 그와 사통하면서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얼마 후 태후는 임신을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궁을 옹(雍)으로 옮겨 피신하였다.


노애는 매우 많은 상금을 하사 받고 태후를 곁에서 모시면서 모든 대소사를 관장했다. 그리하여 노애의 집에는 하인이 천여 명이나 되고 식객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진시황 9년(22살), 누군가가 노애가 환관이 아니고 태후와 사통하여 아들을 둘이나 낳았으며, 진시황이 죽은 후 그녀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였다.


진시황은 즉시 당사자들을 모두 붙잡아 진상을 밝혀내고, 상국(相國) 여불위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해 9월, 노애의 3족을 멸하고 태후의 두 사생아를 죽인 다음 태후를 옹(雍)에 거처하게 하였다.


진시황은 여불위도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는 선왕을 보좌한 공이 너무도 많아 그 죄를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다.


다음해인 진시황 10년 10월, 여불위를 상국에서 해임시켰다. 그리고 태후를 옹에서 함양으로 돌아오게 하고, 여불위를 하남의 봉지로 돌려보냈다.


그해 말, 각 제후국들의 사신과 빈객들이 엄청나게 몰려와서 여불위의 죄를 용서할 것을 청하였다. 진시황은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렇게 썼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로를 세웠기에 진나라에서 그대에게 하남의 10만호를 식읍으로 내려주었소?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연분이 있기에 중부(仲父)라는 존칭을 가지게 되었소? 이에 여불위와 그 가족들은 촉(蜀)으로 이주할 것을 명하노라."


이에 여불위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주살될 것이 두려워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였다.


진시황이라고 하면 어지러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종말을 고하고, 중국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루고 만리장성, 분서갱유, 불노초, 아방궁 등을 생각하게 한다.


여불위는 자신의 애첩 조희(훗날 태후가 되는 趙나라 舞姬출신)를 장양왕(이인)에게 바쳤다. 그때 벌써  조희는 장왕왕을 속여서 8개월(실은 10개월) 만에 난 아들이 장양왕의 씨라고 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영정'(瀛政)이었고, 이아들이 후에 진시황이었다.


진시황제는 B.C 259년(진소양왕 48년) 정월 趙나라 수도 한단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政이며 어린 시절을 조나라에서 성장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태자는 안국군(安國君 후에 효문왕))이었는데 정부인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다른 많은 비첩들 사이에서 태어난 공자가 20 여명이 있었다.

 

자초(이인)도 그 공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불위가 화양부인에게 온갖 뇌물을 받쳤고, 서공자인 이인(자초)을 소개하여 화양부인의 양자로 만들었다. 효문왕1년에 그는 죽었고,  자초가 왕위를 이었다. 그가 바로 진 장양왕인 것이다.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따라서 진시황 모자(母子:조희와 영정)는 진나라에 송환되고 3년 후(B.C 247년) 장양왕이 죽으니 시황제는 13세의 나이에 진왕으로 즉위한다.

 

시황제의 나이가 연소하였기에 정치는 어머니인 태후의 섭정과 여불위에게 일임되었다. 여불위는 상국(相國)에 임명되고 중부(仲父)로서의 존경을 받아 秦나라 정치의 전권을 그 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황제의 어머니인 태후는 남몰래 여불위와 밀회를 거듭하고 있었다.

시황제가 성장함에 따라, 여불위는 태후와의 관계를 계속하는 데에 불안을 느껴, 항상 뒤일이 불안하였다.  

 

때마침 수도 함양성 밤무대를 주름잡는 제비로서 성기가 거대하기로 유명하다

는 노애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내용은 노애는 음탕한 재벌 사모님들이 거액을 주고 동침을 하곤 했다. 자신의 대타로 노애를 태후에게 시중을 들게 하면 되

겠다 라고 생각한 불위는 노애를 자신이 주체하는 연회장에 그를 불러 그에게

자신의 거대한 성기로 보여 줄 수있는게 있냐고 물으니, 곧 그는 수레바퀴 번쩍

들어 자신의 큰 성기를 세워 바퀴의 살과 살 사이에 끼워 바퀴를 들고 돌아다

녔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자 감탄을 하였다.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태후

에 귀에도 들어 갔고, 이를 눈치를 챈 불위는 노애를 환관으로 위장시켜 태후의

궁에서  태후인 조희랑  동침시키니 태후는 만족하였고 항시 그를 옆에 두기로

하였다. 이에 불위는 내시의 장에게 노애를 환관으로 하되, 성기를 거세하지

말고 태후전에 배속을 시켜라고 하여  내시장도 그렇게 하였다.

 

노애는 태후의 총애를 얻어 장신후(長信候)로 책봉되고 대소의 정무까지도 간섭했다.  환관 노애와 태후의 적절치 못한 관계가 태후의 임신이란 결과를 가져 오게 되고 이를 핑게로 모든 정사를 불위에게 맡기고 그년는 수도 함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물론 노애도 따라 갔었다. 5년 동안 돌아 다니면서 그녀는 노애의 두 아이를  낳게 되었다. 

 

B.C 238년 20세가 된 시황제는 진나라의 전통에 따라 성년식을 거행하고 친정을 하게 된다. 시황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자 시황제를 제일 두려워한 사람은 노애였다.


그는 자신과 태후와의 관계가 폭로된걸 알고, 태후를 꼬득여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난을 이르켰다. 그는 진왕의 옥새를 위조하여 군사를 모으고 선수를 써서 왕을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영민하고 과단한 성격인 시황제는 이 위기에 처하자 휘하의 창평군과 창문군의 군사를 파견하여 함양에서 반군을 쳐부수고 노애와 그의 일당을 잡아 차열효수(車裂梟首)라는 극형에 처하였다. 태후도 이에 공모하였으므로 옹(雍)의 이궁에 유폐시켰다.


“노애의 난”이 평정된 지 일 년 후에 여불위도 이일에 무관하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시황은 불위를 상국의 관직을 파직당하고 그의 봉읍(封邑)인 하남 땅으로 은퇴하도록 명을 받았다. 이에 여불위는 함양성을 떠나 하남 땅에 가서 살았다. 그러자 모든 나라가 사신을 하남 땅으로 보내어 문신후 여불위에게 자기 나라에 와서 정승으로 있어 달라고 서로 청했다.


이 소문을 들은 시황제는 여불위가 다른 나라에 가서 정승이 되는 날이면 진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다 생각하고, 여불위에게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촉(蜀) 땅으로 이주할 것을 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시황에게 주살 될 것을 두려움과, 후세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하였다. 그리고 여불위는 자신의 운명이 다함을 탄식하고 짐새의 독을 넣은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였다. 이때가 B.C 235년의 일이다.


여불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시황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보수적인 관료들을 배제하고 초(楚)나라 사람 이사, 한(韓)나라 사람 정국, 위(魏)나라 사람 위료 등을 중용하였다.


진나라의 통일과업은 B.C 230년~221년 사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B.C 230년에는 六국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약했던 韓나라가 진의 장군 내사승(內史勝)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燕나라는 진의 세력이 바로 자기 나라를 압박할 것을 두려워하여 시황제를 암살할 목적으로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냈으나 실패했다.


B.C 228년에는 시황제가 조나라 수도 상단을 쳐서 조왕 천을 사로잡고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B.C 225년에는 장군 왕분(王賁)이 대량(大梁)의  도성을 쳐서 위(魏)를 멸망시켰다.

 

B.C 224년, 장군 왕전은 楚의 장군 항연을 격파하여 이를 죽이고,

 

B.C 225년, 초왕을 사로잡아 초를 멸망시켰다.

 

B.C 222년에는 왕분에 의해서 연나라도 멸망하였으며,

 

B.C 221년에는 최후까지 남았던 齊나라도 왕분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全中國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시황제는, 통일된 대제국의 기초를 든든히 하기 위하여 수도 함양에서 대회의를 소집하였다.

 

대회의에서 제일 먼저 문제된 것은 통일제국의 왕에 대한 칭호 문제였다.

회의의 결과 시황제의 업적은 고대(古代)의 삼황오제(三皇, 五帝)의 업적에 견줄 만하다하여, 삼황의 황(皇)과 오제의 제(帝)를 따서 황제(皇帝)라 일컫고, 황제가 자신을 말할 때는 짐(朕)이라 칭하고, 모든 신하는 황제를 말할 때 폐하(陛下)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황제는 이제까지의 관습이었던 시호(諡號)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시호라는 것은 왕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사후에 명명하는 것이다.

시황제는 이러한 제도는 아들이 아버지를 신하가 임금을 평가하는 것이므로

천만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황제는 자신에게서 황제란 명칭이 시작되니 자신은 시(始)황제요, 황제의 자손을 말할 때는 二세, 三세로 계속하여 진나라가 영원무궁하도록 하였다.


황제의 아래에는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승상 최고의 중앙 군사 지도자인 태위 문무백관을 감찰해 다스리는 어사대부의 삼공을 정점으로 한 관료조직이 정비되어, 지방의 최말 단까지 황제의 명령이 하달되게 되었다.


시황제는 모든 중요 정무는 자기 자신이 재결을 내렸으며, 그는 매일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에 쓰인 상주문을 120근씩 읽지 않으면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황제는 전국을 36郡으로 나누어 이를 중앙정부의 직할 아래 두고, 다시 군  아래에 縣, 鄕. 정, 리 등의 행정구역을 마련하여 중앙집권적인 행정제도를 수립하였다.


시황제는 또 효율적인 문서행정을 위하여 文字를 통일했고, 경제적인 유통과 통제를 위해서 화폐와 度量衡을 통일 시켰다. 물자의 운송이나 문서행정의 면에는 원활한 교통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도로의 폭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 수레바퀴의 폭도 통일하였다. 그래서 전국에 치도(馳道)를 마련하였다.


즉, 수도인 함양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로 통하는 관용 대 도로를 만든 것이다. “한서(漢書)에 동(東)은 연(燕), 제(齊)의 끝에 이르고, 남(南)은 오(吳), 초(楚)의 끝에 이르다.” 라고 하였으니, 천하에 도로가 닿지 않는 지방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로의 폭은 50步, 좌우에 소나무를 심고 그 바깥쪽에는 다시 벽을 쌓았다고 한다. 시황제는 이 대도로를 이용하여 치세  기간 중 5차에 걸쳐 넓은 영토를 순행하였다.


순행정치의 목적은 천하통일의 대업과 황제권의 위세를 과시함으로써 동방 육국민(六國民)의 반항을 차단하는 동시에 그들의 반감을 무마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요컨대 지배의 정당성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다.


순행은 항상 봄에 길을 나섰다.

시황제는 통일된 천하를 순행하면서 명산에 대한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상고(上古) 제왕의 사적지를 들렀으며 태산을 비롯한 일곱 군데의 산에 거대한 석비에다가 자신의 업적을 찬양한 송덕비를 세웠다.


B.C 218년 제3회 순행 때는 박랑사에서 장량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함과 동시에 각국의 성새(城塞)를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는 곧 전국의 무장 해제이며 그와 동시에 각국의 무기를 몰수하여 함양에 모았다.

 

당시의 무기는 대개가 청동제였으므로 시황제는 이를 녹여 옹중(翁仲)이라고 이름 지은 동상을 주조하여 궁중에 두었다. 그 무게는 각각 千石(약 30,000kg)이었다고 한다.


시황제는 B.C 213년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분서(焚書)를 명하여 의약이나 복서 농업 등 실용적인 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찾아내 불사르게 했고......

다음 해에는 갱유(坑儒)를 명하여 학자 460여 명을 생매장 시켰다.

이 사건이 이른 바 焚書坑儒이다.


수많은 영웅이 그러했듯이 시황제도 호장 웅대한 건설사업을 좋아했다. 통일 이전부터 한 나라를 멸할 때마다 그 나라 궁전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그와 똑같은 것을 함양 부근 위수 북안에 세웠다.


그리고 이들 궁전에 각국으로부터 얻은 미인과 악기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통일 다음 해에는 위수 남쪽에 장신궁(長信宮)이라는 커다란 궁전을 세우고 다시 감천전전(甘泉前殿)을 만들고 함양으로부터 황제 전용의 도로를 만들었다. 이곳은 양쪽에 담을 쌓아올려 밖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한 길이었다.


B.C 212년에는 함양의 궁전이 너무 작다고 하여 위수 남안의 상림원(上林苑)이라는 정원 속에 대규모의 궁전을 건설할 것을 계획하고, 먼저 전전(前殿)인 아방궁(阿房宮)을 건립하였다. 동서가 약 700m, 남북이 약 120m나 되고 이 궁전에는 일만명이 앉을 수 있으며, 지붕의 높이는 11m의 기를 세울 수가 있었다. 궁전의 주위에는 회랑을 만들었으며 이를 통하여 남산으로 갈 수 있었고, 남산의 정상에는 문을 세웠다.


또 이중의 도로를 만들어 아방궁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에서 자유로이 왕복할 수 있었다. 아방궁은 이세 황제 때에도 계속해서 축조되었으나 항우가 관중에 쳐들어왔을 때 불타 버리고 말았다.


아방궁과 함께 유명한 것이 시황제의 여산릉(驪山陵)인데 시황제가 진왕이된 다음 해(B.C 246년)부터 축조를 시작했다.


B.C 215년 시황제는 장군 夢恬(몽념)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케 하였다.

이에 몽념은 30만 군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무찌르고 황하에 연하여 34개의 현성을 취하여 이에 수비병을 두고 다음 해 유목민이 기마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세를 이용하여 길게 연결된 장성을 쌓았다.

이것이 유명한 萬里長城이다.


원래 전국시대에는 열국이 각각 그 경계에 장벽을 쌓아 한편으로는 영토권의 미치는 범위를 명확히 하고,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방어를 위하여 사용하였었다.


제나라는 산동의 평음 부근에서부터 태산 밑을 지나 황해에 임하는 고밀 부근까지 장성을 쌓았다.

초나라는 하남의 노산 부근에 장성을 쌓았다.

위나라는 하남의 밀 부근에서부터 황하를 건너고 산서 남부를 달려서 유림 부근에 이르는 사이에 장성을 쌓았다.


새외 민족이 북방으로부터 쳐들어오면 북변의 여러 나라는 또 이를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았다.

조나라는 무령왕 때 대동 부근으로부터 인산산맥을 따라 고궐에 이르기까지에 장성을 쌓았다..

연나라는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사이에 장성을 쌓았다.

진나라도 소양왕 때 오르도스에 장성을 쌓았다.


몽념은 이들 낡은 장성을 증축하고 원래의 누벽을 수리했으며, 중간에 없어진 부분을 신축하여  하나의 연속된 장성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 공사를 위하여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들이 동원되었다. 이때의 장성의 길이는 동쪽 발해만(渤海灣)의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 감숙성(甘肅省)의 가산욕관(嘉山谷關)까지 1만2천7백 리였으며 미터법으로 따지면 6천3백50㎞가 된다.


대제국의 건설과 함께 영원무궁토록 불로장생을 기원했던 진시황제.

그는 불사의 신약을 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끝내 단념하지 못하고 B.C 210년 5차 전국 순행 길에  자신이 산동의 평원진(平原津)이란 곳까지 갔었으나

그러나 여기에서 병을 얻어 귀경 도중 사구평대(沙丘平臺)란 곳에서 49세의 나이에 죽고 만다.


시황제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부소(扶蘇)는 황제가 하는 일에 여러 번 반대한 적이 있어 시황제는 멀리 북쪽의 상군 지방으로 부소를 보내 군대를 감독하게 했다. 당시 상군 지방의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은 명장 몽념이었다.


병세가 악화되자 시황제는 그래도 믿을 건 장자(長子)뿐이었는지, 부소에게 (군사는 몽념(蒙恬)에게 맡기고, 나의 관을 함양으로 맞아 장사지내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으나 환관인 조고(趙高)가 이 편지를 보내지 않았었다.


시황제는 이 때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았으므로 조고는 승상인 이사(李斯)와 의논하여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함양으로 귀경한 후 자기를 신임하는 皇子 호해(胡亥)를 승상 이사와 도모하여, 승상인 이사가 황제의 조서(詔書)를 사구에서 받았다고 속여 호해를 태자로 하였다. 이어 시황제의 죽음을 발표함과 동시에 태자인 호해가 즉위하였다.  이가 2세 황제이다.


시황제의 시신은 9월에 여산릉에 안장 되었다.  시황제의 장자 부소와 장군 몽념에게는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죽음을 내리라고 알렸다. 거짓 조서임을 알지 못하는 부소는 자살하였으며, 장군 몽념은 거역하였으나 잡히는 바람에 결국 독을 마시고 죽었다. 몽념의 아우 몽의(蒙毅)도 죽음을 당하였으며,  계속하여 12명의 공자(公子), 10명의 공주도 형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


시황제의 죽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인망이 있었던 황자와 공로가 있는 장군 대신들이 계속 죽음을 당한 것은 진제국의 권위를 동요케 하였고, 인심의 불안을 몰아오기에 충분하였다....

이어지는 각국에 반란,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이 통일중국을 걸고 한 시대를 누빈다.


진시황릉(여산릉)은 섬서성 서안시 림동 려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사마천의 史記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릉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황제가 즉위하면서 여산에 능을 만들기 시작했다.

통일 후에는 70만명을 동원하여 땅을 깊이 파고 구리를 부어 곽의 둘레를 메웠으며, 지상의 궁전과 관청 각종 기이한 물건들을 옮겨와 가득 채웠다.

 

장인에게 명령하여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을 만들도록 하여 이 곳을 파내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쏘게 했으며,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장치가 이것들을 흐르도록 하였다. 위에는 하늘 별자리를 갖추고 아래에는 땅의 형세를 갖추었다."


말하자면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에 지상의 세계를 옮겨 놓고자 했다.

병마용갱을 비롯하여 진시황릉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배장갱도 지상의 군대 관청 정원등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결국 진시황릉의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구조는 지상의 거대한 도시를 본 딴 것이다.


그의 왕통이 대대손손 이어지라는 뜻에서 자신을 황제의 '시작'이란 의미로 진시황(秦始皇)라고 하였지만, 결국 3대 16년 만에 멸하고 말았다.

 

==============================================================


* 여씨춘추

 

여불위의 식객으로 있던 지식인들의 숫자는 3,000명에 달했다고 하며, 여불위는 그들에게 각자의 식견을 발휘하여 저술을 하게 했다. 그 결과 기원전 239년에 탄생한 것이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불위의 주도로 편찬된 춘추'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집필한 논문을 모은 논문집에 가깝다. 이 책이 완성된 이후 몇 년 뒤에 여불위는 진나라의 궁정 내분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해임된 끝에, 사형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러 학자들이 집필한 글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무척 다양하며, 내용상의 일관된 체계성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도가, 음양오행가, 소설가, 묵가, 법가, 유가, 종횡가, 농가 등, 사실상 선진 시대의 다양한 학문 유파들의 사상을 모두 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절충주의적, 제설혼합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그 서문에 의하면 {여씨춘추}의 의도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여러 현상을 폭넓게 살펴보고, 하늘의 질서, 땅의 확고부동함, 올바른 인간 관계 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통일 제국의 군주를 위하여

 

{여씨춘추}는 천하를 통일할 군주를 위한 치술의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태자 정(나중의 시황제)이 장차 왕위에 올라 천하를 통일할 것을 예비하는 여불위의 주도면밀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에 대해 {여씨춘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주는 성심을 다하여 만민, 만물의 삶을 도와 소중히 하는데 힘써야 하다. 또한 천하의 여러 군주들을 평정하고 봉건제를 시행하며, 사람을 잘 관찰하여 인재를 널리 구하고, 백성에 대해서는 공평한 상벌을 집행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바탕 위에서 공업 생산과 상업 유통에도 힘을 써야 한다.

 

또한 능력이 뛰어난 선비의 말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협력을 널리 구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민심을 모아들이고 백성들의 힘을 결집시킬 때 비로소 커다란 업적을 이룰 수 있으며,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면 나라가 전복되고 만다.


*다양성의 포용과 획일적 통일성

 

다양한 사상 유파의 장점을 취하여 통일 제국 시대를 예비하고자 했던 여불위의 뜻은 현실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시황제는 오히려 다양한 사상 유파를 제거하고 오로지 무력, 강제, 법에 의한 통치를 시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다양성의 포용과 종합이라는 여불위의 지향점과 획일적 통일성의 확립이라는 시황제의 지향점의 차이. 여불위의 죽음은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시황제는 획일적 통일성을 강조한 법가 사상가 이사(李斯: ?-208 B.C.)를 중용하여 통일 제국 진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게 했다. 봉건제를 말하는 {여씨춘추}와는 달리, 이사가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군현제를 시행했던 것에서도 그러한 지향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직하의 학자들은 제나라 도읍의 서문인 직문(稷門) 근처의 건물에 머물렀다. 맹자, 추연, 신도, 순자 등도 직하의 학자로서 활동한 바 있다.


%EA%B8%80%EC%9D%98%20%EB%82%98%EB%A8%B8%EC%A7%80%20%EB%B6%80%EB%B6%84%EC%9D%84%20%EC%93%B0%EC%8B%9C%EB%A9%B4%20%EB%90%A9%EB%8B%88%EB%8B%A4.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