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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제 8 구간(발산재~한치재)
( 발산재 찍고 미산령에서 출발, 한치재 산행 종료 )
1. 산행일시 및 출발 장소
[1] 출발일시: 2011년 9월 5일(일) 00시
[2] 출발장소: 수원시외버스터미널
2. 산 행 지 :
○ 여항산(744m), 서북산(738.5m), 대부산(△649.2m) - 경남 고성, 마산, 함안
3. 날 씨: 시원한 바람이 불고 약간 흐린 날씨로 산행하기에 최적의 날씨였음)
4. 참 가 자 :
○ 김명자, 박봉하, 박상호와 사모님, 안상경, 이용준(6명)
5. 회 비: 80,000원
6. 준 비 물:
[1] 전 체-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비닐봉투, 간식 등 개인용품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및 시간
○ 총 산행 약 22.5km, 11시간 정도 소요
[2] 산행 길잡이
발산재 휴게소에서 오곡재 까지는 지형도에 표시된 이름 있는 산이 없다. 능선도 험하지 않고, 높낮이도 심하지 않아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길을 따라 비교적 쉬운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마루금 오른쪽 아래로 마산시 진전면 고사리 구월산 마을에서 시작된 임도가 큰정고개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힘들 경우 이 임도를 따르면 된다.
아직 옛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발산재에서 큰정고개까지는 약 3시간 걸리며, 오곡재 까지는 527봉 지나 약 1시간 걸린다. 오곡재에서 비포장도를 버리고 오른쪽 계곡 길 따라 15분 내려서면 한적한 산골마을 오실골이다.
오곡재는 마신시 진전면 여양리의 오실골 마을에서 15분이면 닿는다. 약 45분이면 630m봉에 오르고, 오른쪽으로 꺾여 15분 내려서면 꼬불꼬불한 콘크리트 포장도가 지나는 미산령이다.
미산령에서 20여분 오르면 전망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부터 주변 풍광이 아주 좋아진다. 다시 10분가면 지형도상에 표시된 삼각점을 찾을 수 없는 솔숲에 가린 743.5봉이다. 여기서 네 개의 바위봉이 늘어선 조망 좋은 암릉 지나 7분가면 10여 기의 크고 작은 돌탑이 서 있는 봉우리에 닿는다. 여기서 여항산 까지는 해발 700m의 배능재와 헬기장 지나 25분이면 된다.
여항산은 함안의 주산이다. 양옆이 깎아지른 바위절벽지대로 남해가 잘 보이는데, 마치 대양으로 항해를 떠나는 큰 배 같다.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바위구간으로 줄이 매어져 있다. 40여분 더 가면 잡풀이 자라는 헬기장이 나오고, 다시 20분이면 바위 우회구간 지나 706봉에 닿는다. 15분 더 가면 '별천학생야영수련원'(왼쪽)으로 내려서는 이정표가 나오고, 철쭉나무 많이 자라는 능선 따라 18분이면 한국전쟁 격전지인 서북산이 나온다.
서북산 바로 아래에 무덤 1기가 있고, 그 앞에 멋진 조망 터가 나온다. 20분 내려서면 임도를 만나는데, 그곳부터 일본잎갈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10여분 더 가면 정맥길은 임도를 따른다. 약 20분 가면 임도가 끝나고, 억새가 많이 자라는 이곳에서 조금 오르면 오른쪽으로 송전탑이 지난다.
약 20분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능선에 닿고, 왼쪽으로 꺾여 20분 더 가면 삼각점이 있는 대부산 정상이다. 8분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곧장 가면 봉화산(676m)으로 향하고, 정맥은 오른쪽으로 꺾어 내린다.
가파른 길을 따라 30분이면 안부에 닿는다. 79번 국도가 지나는 한티재는 여기서 작은 봉우리(약 35m)를 하나 더 넘어서야 하며, 25분 걸린다. 한티재엔 휴게소가 있다.
<퍼온글> 산행 길잡이는 「사네드레 산행정보」낙남GPS제6, 7구간의 산행 길잡이를 우리 산행 구간에 맞춰 편집한 것입니다.
<출처> 「사네드레 산행정보」
[3] 구간 거리
발산재(140m,2번국도)--1.0km--△326봉--3.6km--363봉--2.5km--큰정고개--0.9km--527봉--1.3km--오곡재(비실재, 360m)--0.7km—557봉--1.1km--미산령(610m)--0.6km--743.5봉--0.9km--여항산(744m)--2.7km--706봉--1.6km--서북산(△738.5m)--1.5km--감재고개--2.0km--대부산(△649.2m)--2.1km--한치(150m, 67번도로 )
[4] 산행일정
(1) 산행지 이동
① 교 통 편 : 마산행 심야 시외버스
② 이동경로 :
수원(00:00) ∼ 심야버스 ∼ 마산시외버스터미널(04:00/아침식사/04:40) ∼ 2번도로, 택시 ∼ 발산재(05:10)
(2) 산행코스 및 시간
발산재(05:30)→임도(06:30/06:40)→임도끝(07:40)→527봉(08:20/08:30)→오곡재(09:00)→557봉(09:20/09:30)→미산령(10:00)→743.5봉(10:25)→여항산(11:00/점심/11:40)→706m봉(12:55/13:05)→서북산(13:35)→감재고개(13:55/14:05)→대부산(15:10/15:20)→한치(16:30)
(3) 산행 후
진고개휴게소(16:40/식사/17:30) ∼ 마산시외버스터미널(18:00/18:25) ∼ 수원(22:30)
8. 탈출로 및 편의사항
별천갈림길, 감재고개(버드내방향)
함안개인택시(055-585-3366),
진고개휴게소(055-583-1219)
마산시외버스터미널(055-256-1622)
9. 산 행 기
[1] 산 행 전
(1) 會員 動靜
2011년 8월 22일 카페에 낙남정맥 8구간(발산재~한치재) 산행 계획이 게시되었다. 9월에는 정맥산행 계획이 없는데 9월 정맥 산행을 하게 된 것은 지난 7월 산행 때 폭우로 8구간 산행을 하지 못하고 9월 첫 주 일요일로 연기를 하고 대신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일대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산악대장 曰, 「참가 신청은 추석을 1주일 남긴 주말로 차량 예약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신청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댓글에 添言을 해 놓았다.
윤사장은 응봉산 산행 때 다른 일정과 겹쳐 참여할 수 없다고 했으며
장부장(핑크)도 「아이 수시 원서가 그 주에 시작되고 아무래도 수능 끝날 때까지는 집에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2011. 08. 22, 20 : 15)」라고 하여 산행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김명자부장(민들레꽃)은 참가(2011. 08. 23, 11 : 08), 노승애부장은 응봉산 산행 때 다친 무릎 상태와 오른손소지를 하루만 지켜보고(2011.08.28. 11:09) 참가 여부를 밝히겠다며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산행일도 임박해 오고 차표도 예약을 해야 하는데 평소 함께 산행했던 박사장, 안교장 黙黙不答이라 가나마나로 은근히 갈등이 생긴다.
2011. 08. 30일 안상경교장선생님 참가 신청 / 나도 신청(2011.08.30. 10 : 48) / 2011.08.30. 13:35분, 「제 양쪽 무릎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불편하지만 신청합니다.」 라고 노부장도 결심을 했고 박사장도 사모님과 함께 참여하겠다고 댓글(11.08.30. 13:50)을 올렸다. 드디어 盛況은 아니지만 산행보조를 맞출 수 있는 成員이 되었다.
(2) 발산재 찍고 미산령으로
▶ 9월 3일 저녁 식사 후 산행 준비.
▶ 9월 3일 23시 35분, 수원시외버스터미널 도착, 노부장 산행을 할 수 없다고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 9월 4일 00 : 00시, 마산행 심야버스 승차 및 출발. 輾轉反側(輾轉不寐)하며 馬山으로
▶ 9월 4일 04 : 00시에,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터미널 뒤에 있는 돼지국밥집에 들려 돼지국밥과 순대국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며 일정과 방법을 논의했다.
발산재에서 한치재까지 도상 거리 22.5km로 11시간 정도 산행을 해야 하는데 원거리 장시간 산행이 무리라 생각되 산행속도와 체력을 감안해 발산재와 미산령 출발 팀을 나누어 한치재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식사하는 동안 예약해 둔 「짐엔 콜」 기사 도착.
▶ 04 : 40분, 식당을 나와 발산재로 출발했다. 그런데 기사분이 나이가 지긋하고 지역 지리도 어눌하고 도로가 텅텅 비었는데도 달구지 속도다.
[2] 발산재 ~ 미산령 구간 참고자료
도상 거리 22.5km로 11시간 산행에 지레 겁을 먹고 발산제에 대장을 내려주고 미산령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발산재에서 미산령까지의 마루금과 주변 경관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답자들의 산행 기록과 진주, 함안, 창원시 등의 홈페이지 자료를 토대로 마루금상의 산과 고개, 마을, 사찰, 문화유적 등을 정리한 것인데 추후 이 지역을 산행할 기회가 있으면 참고자료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발산재 출발 → 완만한 오르막 → 평평한 턱(좌) → 묘2기 → 완만한 오르막(9~10분) → 평평한 턱 → 완만한 내리막 → 묵묘 → 완만한 내리막 |
[ 발산재 / 발산리(鉢山里)]
○ 발산재는 진주시와 마산시의 경계로 국도 2호선이 지나는 곳으로 400년 전 임왜란당시 김준민 장군과 고종후 장군 등 선열들이 왜적에 맞서던 역사의 현장이다.
http://blog.daum.net/shwkdrns5353/32
○ 발산마을 : 이 마을은 창원군과 경계 지점이고 국도가 고개를 넘는 곳으로 동명을 발산이라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크게 발대를 막고 승패를 짓는 곳이라고 하여 인위적으로는 대단위 호수를 막고 살아야만 지명과 전설이 일치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맞은 산과 산 사이를 높게 제방을 쌓아 대단위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용수 및 항구적인 한해 대책으로 인근 길성, 가산,대천, 반성, 사봉, 진성면에 이르기까지 큰 혜택을 보고 있다.
<출처> 진주시 이반성면 홈
http://www.jinju.go.kr/county/banseong2_08.htm
임도 → 오르막 → 묵 묘 → 완만한 오르막 → 영봉산 갈림길 |
[영봉산(靈鳳山, 395.2m)]
○ 고성군 구마면 저연리(모시골) 동쪽에 있는 산. 산신령이 계신 산이라 하여 상봉에 기우제를 지내는 무지터가 있음
1914년, 진주군 이반성면 용암동(龍岩洞), 간동(間洞), 하서동(荷西洞) 각 일부로서 용암리(龍岩里)라 하였다. 용암리의 행정 리동은 용암, 모곡, 하동 등으로 분류한다.
영봉산 갈림길(우) → 완만한 오르막 → 봉 → 완만한 내리막 → 묵묘 2기 → 큰정고개 → 봉 → 오봉산 갈림길(오봉산 2.14km」푯말) |
[큰정고개]
○ 진주시 사봉면 장안리와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를 연결하는 비포장도로인 큰정고개
[오봉산 갈림길]
○ 오봉산 갈림길 : 진주시와 마산시 그리고 함안군의 3개 시군의 경계지점이다. 갈림길에서 보이는 마을은 여양리와 원산 저수지다.
[오봉산 ①]
○ 높 이 : 오봉산 525m ○ 위 치 : 경남 함안 군북면, 진양 이반성면 ○ 특 징 : 오봉산은 경전선의 평촌에서 하차하여 산행이 시작된다. 철길을 건너고 시골동네를 지나 정자나무 밑을 통과해 논길로 들어서 산으로 오르면 성전암에 닿는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성전암은 조망이 빼어나며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정상에는 쉰길 바위가 있으며, 서쪽의 제산령을 거쳐 명지골로 내려 원복역 까지는 조용한 시골길이다.
오봉산 산행은 평촌역- 장안- 성전암- 정상- 제산령- 새터- 원복역으로 경전선의 평촌, 원북 두역으로 이어지는 철도산행지이다. <출처>
http://cafe.daum.net/dolmenkr/SUd/1794?docid=1P2W|SUd|1794|20041114171942&q=%C7%D4%BE%C8+%BF%C0%BA%C0%BB%EA
[오봉산 ②]
함안군 군복면과 진주시 이반성면과의 경계선상에 있는 「오봉산(524.7m)」은 낙남정맥의 「여항산(770m)」서쪽의 527봉에서 서북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는 산으로, 고찰 성전암(聖殿庵)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산이다.
성전암은 인조대왕이 능양군으로 있을 때 잠시 피신하여 국난타개 100일 기도를 올린 곳으로, 후에 인조는 조선조 16대 왕으로 등극해 이곳이 더욱 유명해졌다. 인조대왕을 기리기 위해 인조대왕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올린다고 한다.
성전암 아래 마을인 장안마을은 임금이 계셨던 곳이라서 장안리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http://cafe.daum.net/hanmimed/Ls0T/1737?docid=10nIa|Ls0T|1737|20100515194633&q=%C1%F8%C1%D6+%BF%C0%BA%C0%BB%EA
[성전암(聖殿菴)]
본 사찰은 약 일 천 일 백년(1100年) 전 통일신라 49대(代) 헌강왕 5년 퐁수지리학의 開山祖이신 道詵國師께서 백두산의 정기는 東海를 끼고 남북으로 뻗은 지맥이 漢水以北엔 삼각산에 머물다가 漢水以南에서 굳어진 곳이 남강물(南江水)을 먹이 할 수 있는 여기 艅航山에 맺혔다 하고 성인이 계시는 대궐로서 聖殿庵이라 이름하여 창건하셨다 한다. 역사적으로는 이조 仁祖께서 능양군으로 계실 즈음 국난을 타개코저 본 암자에서 백일기도를 성취하심으로 이씨조선 16대 仁祖大王으로 등극하시고 임금이 계셨다하여 지금도 아랫마을을 長安里 라 불려오며 仁祖閣엔 대왕의 영령으로 위패를 모시고 있는 영남명지의 기도처로서 현존하고 있습니다.
병인하지 성전암 주지 석반야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長安里)]
○ 장안리의 유래는 인조대왕이 능양군으로 있을 때 고성에 있는 심부원군 배알차 미복으로 장안산을 지날 때 산세가 수려하여 산중 암자에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다.그 후 동명을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장안리」하고 하였다.1914년, 진주군 이반성면 후촌동(後村洞), 장안동(長安洞), 반덕동(反德洞), 사령동(沙寧洞),평촌동(坪村洞) 각 일부로서 장안리(長安里)라 하였다. 장안리는 사령, 반덕, 검정마을로 분리되었다.
○ 성전암 : 신라 헌강왕때 창건된 암자로서 조선시대 인조가 능양군으로 있을 때 백일기도처라 하여인 조각이 세워져있다.
○ 어석령 :함안군과 진양군의 경계지점에 있는 고분군(古墳群)이다. 옛날 인조대왕이 쉬었다 간 곳이라 하여 어석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주변에는 5 ~ 6세기경의 고분군이 있는데 곳곳을 살펴보면 도굴된 구덩이가 여러 곳에 보인다. 이곳에서 발굴된 굽다리접시 3점과 뚜껑 1점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오봉산 갈림길 → 완만한 내리막 / 오르막 → 527봉 / 삼각점(함안 414) → 완만한 내리막 → 안부 → 완만한 오르막 / 내리막 →오곡재(비포장 흙길 산길[임도]) |
[오곡재/비살재]
○ 경남 함안군 함안면 오곡리와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를 연결하는 1029번 지방도로 옛날에 보부상들이 많이 넘나들던 고개라고 함. 비포장 임도로 「비실재」라고도 함
http://blog.daum.net/shwkdrns5353/32
○ 오곡재 까마귀가 많이 날아 든다하여 불려진 이름.(국토포탈)
○ 오곡(烏谷) : 함안군 군북면 오곡리 / 오곡[烏谷] 둔덕 서북쪽에 있는 마을
[오곡(烏谷)]
○ 경남 함안군 군북면 오곡리
○ 군북면 소재지에서 약 6km 정도 동남쪽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오곡동(烏谷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재(嶺)를 넘어 비실 골짜기를 지나 의창군 진전면 국도(國道)와 통하는 옛길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당초에는 오실(奧室)이라 불리어져 오다가 신라말엽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이 어린 시절 어머님을 모시고 이곳을 지나던 중 피로가 겹치고 배도 고파 오곡 뒷산에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까마귀가 날아와 하늘위로 빙빙 돌더니 선생 앞에 사뿐히 내려앉아서 닭다리를 물어주고 날아갔다고 전한다. 최치원 모자(母子)는 그 닭고기를 먹고 허기를 면하여 목적지인 통영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하여 그 후부터 오곡(烏谷)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한 오곡 뒷산의 생김새가 까마귀 두 마리가 깃을 펴고 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오곡은 많은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가장 먼저 형성된 부락을 “골마을”이라하고 맨 나중에 형성된 부락을 새마을(薪村)이라 하는데 골마을은 원래 고마을(古村)이었다고 전한다.
<출처> 함안군 / 문화관광 / 함안 역사
http://tour.haman.go.kr/03culturalassets/11_01_04_10.asp
○ 비실마을 :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의 옛 이름
◆ 낙남정맥 8차 발산 재 구간 ◆
烏谷鉢山岾兩間:오곡발산재양간 / 忠魂賢跡有相關:충혼현적유상관
孤雲崔士驅身苦:고운최사구신고 / 勇將金公逐島蠻:용장김공축도만
蟬語迎秋凉氣益:선어영추양기익 / 松濤遮日老炎刪:송도차일노염산
精神一到何難也:정신일도하난야 / 縱走笻跫數數還:종주공공삭삭환
오곡 재와 발산 재 두 재를 사이해서 / 충절 혼과 현인 자취 서로 관계있음이라.
고운 선생 최 선비가 몸의 고통 몰아내고 / 용감한 김 장군이 섬 오랑캐 몰아냈네.
매미 소리 가을 맞아 서늘함을 더해주고 / 솔파도 해를 가려 노염을 덜어준다.
정신 한번 모아지면 무엇이 어려우랴 / 종주하는 발과 지팡이 도리어 잦아지네.
2010. 8. 5. 松亭(정자 솔) 朴載鎬
* 孤雲崔士 : 고운 최치원이 모친과 고개를 넘다가 허기를 만났을 때 까마귀가 닭다리를 물어다 주어 오실재가 오곡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함
* 勇將金公 : 김준민 장군이 발산 재에서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림.
http://cafe.daum.net/jhopak140/I0Wy/852?docid=UL5n|I0Wy|852|20100907190634&q=%B1%BA%BA%CF%B8%E9%20%BA%F1%BD%C7%B8%B6%C0%BB
오곡재 → 작은 봉우리 → 완만한 오르막 → 봉(여항산 2.3km 이정표) → 내리막 →미산령(시멘트 포장길, 동물 이동통로) |
[3] 미산령(眉山嶺) 가는 길
05 : 20분경, 발산재 도착, 산악대장만 내리고 미산령으로 이동했다.
발산재 ---> 2번 국도 ---> 마산시 진전면 봉암리--->1029번 지방도 ---> (양지)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잿담, 돌담)--->여양 저수지 --->여양리 둔덕 마을회관(아스팔트 길) 앞 도착
이곳부터 미산령 오르는 길은 협소한 시멘트 포장길로 도로 굽이굽이 돌아 4km(둔덕~미산령)을 올라 가야하는데 급회전 모롱이 길에서 後進, 前進을 몇 번 거듭하여 오르다보니 운전기사가 겁을 먹었는지 못가겠다고 버틴다. 차 삯도 곱을 내란다. 간신히 설득을 하여 미산령으로 향했다. 기사의 마음만큼이나 차도 힘이 드는지 굽이진 오르막을 힘겹게 오른다.
[4] 미산령
06 : 25분경, 드디어 미산령에 도착했다. 해발 610m, 嶺 아래로 굽이굽이 돌아 오르던 길과 둔덕마을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미산령(眉山嶺)』 은 「미산(함안면 파수리)」 서남쪽에서 여항면 여양리 「둔덕」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정한강 선생이 함안고을이 南高北低여서 그 地勢를 누르기 위해 눈썹 밑에 들게 「眉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국토포털)
「여양리 둔덕마을」을 조망하고 돌아서 동물 이동 통로를 빠져나가 보니 산들이 감싸 안은 푸른 들과 마을, 그리고 마을로 내려가는 협소하고 굽이진 시멘트 포장길이 조망된다. 함안면 파수리 미산마을이다.
「파수리(巴水里)」는 본래 함안군 상리면 지역으로 시내 셋이 「巴」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흐르므로 「파수리(巴水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패합에 따라 下巴里, 남의리 일부를 병합하여 「파수리(巴水里)」라해서 함안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한지총 10, p 312>
[5] 아라가야(阿羅加耶)의 터전「함안」
〈삼국유사〉 오가야조에 경상남도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아라가야(阿羅加耶)」가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기록에는 「아라가야(阿羅加耶)」를 「아야(阿耶) · 안라(安羅)」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말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고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弁韓) 12국 중의 하나로 나오는 안야국(安耶國)이 그 모태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아라가야(阿羅加耶)」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연맹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낙랑 · 왜 등과의 교류를 독자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6세기 이후 가야사회의 중심지가 경상도 내륙인 고령지역(대가야)으로 옮겨가면서 후기 가야연맹이 성립되자 아라가야도 새로운 연맹의 일원으로 편입해 들어갔으나, 대가야가 쇠퇴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의 갈등관계를 이용해 가야의 새로운 맹주국으로서 지위상승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531년 백제의 침공을 받아 크게 타격받은 후로 서서히 소멸되어갔다.
함안지역의 말이산(末伊山)에 남아 있는 상당 규모의 가야시대 무덤들은 그들의 세력이 강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4a0773a
[6] 배능재와 여항산성(艅航山城)
파수리 미산마을을 굽어보며 「아라가야(阿羅加耶)」의 興亡盛衰에 대한 상념도 잠시, 다시 동물 이동통로를 빠져나와 산행 채비를 한 후 미산령 정상에 세워 놓은 이정표(←함안파수, ↑여항산정상, →둔덕,녹색농촌체험마을4.0km)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통나무계단으로 올라섰다.
07 : 00시,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지나온 사방이 툭 터진 전망바위가 나온다. 첩첩이 이어진 하늘에 구름이 그려 놓은 산을 보며 휴식.
07 : 15분, 넉넉한 휴식을 가진 후 통나무 계단을 따라 쉬엄쉬엄 걸어 너덜지대 돌탑 여러 基를 쌓아 놓은 봉(743.5)에 올랐다. 도착하여 사진촬영을 하며 휴식. 가파른 산을 오르면서도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산행이 한결 수월하다.
돌탑 봉을 뒤로하고 걷기를 10여분, 삼거리 이정표(미산령 1.3 , 여항산 0.5 / 돋을샘 1.2, 미산 2.7)와 119 구조 표지목(배능재, 현위치 번호 : 함안군 1-다, 경남 소방서)을 세워 놓은 『배능재』에 도착(07 : 29)했다.
『배능재』는 함안면 미산에서 오르는 고개로 『여항산』이 배를 의미하니 배가 넘는 곳이라 하여 『배능재』라 하지 않았나 싶다.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룬 『배능재』를 지나 약 6분여를 진행하니 산성 흔적의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여항산성」인 모양이다.
「운곡기행(http://blog.daum.net/ungok44/7355587)」에 「여항산성(艅航山城)」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해 놓았다.
[여항산성(艅航山城)]
○ 위치 :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산 142-1
좌촌에서 여항산 등로 3코스가 산릉에 오르면 이내 널따란 헬기장이 있다. 여항산정이 얼굴을 내미는 헬기장으로 가지 않고 반대로 미산령쪽으로 급하게 산릉이 내려앉기 전 옛 성벽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석성의 길이는 짧아 흔적이지만 확실한 성 쌓음이 옛 아라가야의 성은 아니었을까? 문헌을 뒤져도 여항산에 성은 기록되어 있질 않아 성 쌓은 돌을 헐어 돌계단으로 등산로를 열었나보다. 이를 어이하랴. 흔적 속에 숨 쉬는 한 가닥 역사의 조명이 아쉬울 뿐이다. 상고시대 함안은 변진(弁辰) 12국 중 안야국이었다가 후에 가야국의 아라가야의 고토(古土)임을 三國遺事나 朝鮮史略의 五伽倻條에 기술하고 있음으로 미루어 이 시대 어디쯤의 함안 지킴의 성은 아니었을까?
다행이도 함안군지에 여항산성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크고 작은 모자성식 석축산성으로 큰성은 여항산 정상부 자연 암릉인 곽바위까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고, 동쪽은 능선 정상에서 50~60m 동쪽 아래에 축성되었는데 동문지로 추정되는 석축에서 남쪽 마당바위까지는 성의 흔적이 희미하고, 산성 중앙에 만들어진 헬기장이 산성지의 보존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배넘기도랑(배능재) 위의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높이 3,2m, 폭 4.3m의 협축성석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 750여 m로 성내에는 우물터가 있으며 성내에서 신라 토기편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짐작되지만, 이 산성이「신라가 아라의 파사산에 성을 쌓아 일본에 대비하였다.」는 일본서기 흠명기 22년조의 파산산성이라면 가야시대의 산성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7] 여항산(艅航山)
여항산성을 뒤로하고 잠시 진행하니(07 : 37) 삼거리에 여항산 300m 전 이정표(미산령 1.5 / 좌촌[3코스] 2.5 / 여항산(정상) 0.3, 서북산 4.2)를 세워 놓았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넓은 헬기장이 있는데 등산로(계단)를 만들기 위한 자재를 잔뜩 쌓아 놓았다. 아마도 여항산 정상 암봉 위험 구간에 계단을 설치할 모양이다.
헬기장을 뒤로한지 3분(07 : 40분), 여항산 정상 0.2km 전 삼거리 이정표(미산령 1.6 / 좌촌[2코스] 2.3 / 여항산 0.2)를 지나
07 : 46분, 여항산 암봉 우회로(서북산 3.9km 이정표)로 진행,
07 : 50분,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분기된 낙남정맥이 지리산 권을 빠져나온 후 낙동강을 만나기까지 가장 높게 일군 봉우리요 함안의 鎭山인 『艅航山, 770m』 정상에 올랐다. 一望無際로 眺望의 壓卷을 이룬 곳이다.
암봉 정상에는 「여항산 770m (1997년 2월 16일 함안산악회)」정상석과 「무릉산(568m), 청룡(작대)산(647.8m), 천주산(640.3m), 투구봉(724m), 무학산(767m), 광려산(720m), 봉화산(649.2m)과 여항면사무소, 봉성저수지, 좌촌, 대촌, 대산, 감현 등의 위치 및 낙남정맥에 대한 해설을 해 놓은 「조망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자료] 조망 안내도
○ 洛南正脈 : 한반도 13정맥의 하나인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옥녀산(玉女山), 무량산(無量山), 대암산(大巖山) 등으로 이어져 분성산에 이른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하동, 진주, 함안, 마산, 창원을 지나 마지막으로 김해의 낙동강 하류인 매리마을에서 그 맥이 다하는 한반도 최남단의 산줄기다. 도상거리는 약 228km이고(함안군 17.7km) 지리산군을 제외하고는 함안 여항산(770m)이 최고봉으로 대부분 낮은 산으로 이어지지만 남해바다와 인접해 시야가 확 트이기 때문에 남녘의 산 특유의 멋을 즐길 수 있다.
○ 구간 거리(도상거리)
광려산 2.4km 한치 2.7km 봉화산 3.5km 서북산
서북산 3.9km 여항산 1.8km 미산령 1.9km 오곡재
오곡재 1.5km 낙남정맥 갈림길)」
함안군청 문화관광 홈(함안관광 / 함안 자연)에 「해발 770m에서 바라본 지리산과 남해의 푸른 물결」이라하여 『여항산』에 대해 소개를 해 놓았다.
『여항산(艅航山)』은 덩치가 남해바다로 떠가는 형상이라 여항산(艅航山)이라 부른다. 갓을 쓴 사람이 요강에 오줌을 누는 형상이라 「요강산」으로 불렸고 그래서 산아래 봉성저수지가 생겼다고 한다. 미군들이 「GOD DEMN산」이라 부른다는 “갓덤”은 거대한 암괴로 되어있어 조망이 좋다. 정맥을 따라가는 길은 중간중간 전망 좋은 바위가 나타나 쉬어가기 알맞다. 경사도 완만하여 재미있고 중간에 하산루트도 있어 체력에 맞춰 산행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낙남정맥(落南正脈)의 한 산이기도 하다.해발 770m로 6ㆍ25의 격전지이며 「갓바위」로도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여항산의 본래의 지명은 알 수 없지만 조선 선조 16년(1583) 한강 정구가 함주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와서 풍수지리학적으로 남고북저(南高北低)한 함안의 지명을 배가 다니는 곳은 낮은 곳을 의미한다고 하여 남쪽에 위치한 이 산을 배 「여(艅)」배 「항(航)」자로 하여 지은 이름이라 전하는데 이곳에서는 「각데미(혹은 곽데미)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계곡의 맑은 물과 산허리를 감싸는 운무, 산중턱의 원효암과 칠성각, 의상대, 서리봉, 피바위 등으로 유명하며, 6·25전쟁 때는 낙동강방어선으로 격전을 치른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20~30명이 앉을 수 있는 넓고 큰 마당바위(곽바위)가 있으며, 마당바위에서 남쪽에는 상여바위,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배넘기 도랑이 나오는데 노아의 홍수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이산을 오르는 등산코스는 대략 일곱군데의 등산로가 있는데 어느 길이든 하루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하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한 발자국 하늘이 낮아 보이고 쾌청한 날이면 지리산이 저 멀리 안개 속에 떠 있으며 ,남해의 푸른 물결위에 한가로운 어선들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출처> 함안군청 문화관광
http://tour.haman.go.kr/program/tour/tourinfo/outTourInfo.asp?cate=T0100&idx=1
[참고자료] 갓데미산
여항산은 「갓데미산」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전쟁때 격전지였던 이곳은 당시 미군들이 많이 희생돼 미군들이 이 산을 보고 「갓뎀」이라는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사실 당시 낙동강 전투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는데 지금도 여항산과 서북산이 함락됐더라면 마산지역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역민들은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들이 내뱉은 욕설을 그대로 산 이름에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갓처럼 생긴 산(갓더미산 또는 갓데미산)」을 유래로 보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출처>
http://www.haman.go.kr/program/publicsil/board/outBoardDoc.asp?hdnPage=1&SString=&SType=Bod02Name&T=736&Bod01Code=98&Kwa01Code=Yeohang&Bod02Code=500000000
[참고자료] 여항면(艅航面)
여항면(艅航面)은 여항산(艅航山)을 경계하여 산동(山東)과 산서(山西)로 구분되고, 산동을 병화곡리(竝火谷里), 산서를 비리곡리(比吏谷里)라 했다. 병화곡은 1586년 정한강(鄭寒岡)에 의해 병곡(竝谷)으로 고쳐졌고, 비리곡은 후에 비실(比谷)로 불리워 지는데, 함주지(함주지)는 「比里谷」,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比吏谷」, 영남읍지(嶺南邑誌).여지도서하(輿地圖書下)?우도 영지선하(右道 嶺誌選下)?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등은 「比谷」으로 기록하고 있다. 「比史」는 「比吏」의 오자(誤字)로 간주되며,「比谷」은 조선 후기에 와서 불리워진듯 하다.
병곡리와 비곡리는 조선 후기에 와서 다같이 면(面)으로 독립하며, 병곡면(竝谷面)은 외암리 688-2번지에 사무소를 두고 외암(外岩) 내곡(內谷) 주동(主東) 주서리(主西里)를, 비곡면(比谷面)은 고사리 거락동에 면소(面所)를 두어 평암(平岩) ?금암(金岩) ?고사(姑寺) ?여양리(艅陽里) 등 각각 4개를 관할하다가 1914년 3월 1일 부군면(府郡面)의 통폐합시, 마산부(馬山部) 양전면(良田面)의 봉암리(鳳岩里) 일부와 병곡(竝谷) ?비곡(比谷) 양면(兩面)을 병합, 여항산의 산명을 따서 여항면(여항면)이라는 면으로 출범하며, 청사(청사)는 병곡면청사(竝谷面廳舍)를 그대로 사용했다.
여항산명(艅航山名)에 있어 각종 읍지(邑誌) 및 지리지(地理誌)등 문헌 마다 「艅航」으로 쓰고 있고, 단지 교남지(교南誌)만이 「艅航山」,「艅航面」으로 쓰고 있으되, 교남지에서도 단묘조(壇廟條)에는 「艅航山壇」으로 적고 있는 모순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앞서 천하지지세(天下之地勢)에서 설명했듯이 뛰어 넘는다는 뜻의 방언인 남을 「餘」자가 나룻배 「艅」자로 바꾸어진 확실한 연유를 알 길이 없으나, 단지 일제 때 「餘」자가 「艅」자로 바꾸어져 버렸다는 점과, 「艅」자가 아니라 「餘」자로 써야만 옳은 것임을(여항산편 참조) 부언 해 두며, 기회가 있을 때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1944년 5월 10일 군조례(郡條例) 제172호로 비곡면(比谷面)의 고지(故地)인 고사리 538-5번지(원산동)에 산서출장소(山西出場所)를 개설하고, 1984년 1월 28일 동소(同所) 512-2번지에 출장소를 신축 이전했다가 1989년 1월 1일부터 산서출장소(4里 10洞)가 진전면에 편입되고 만다.
본면(本面)과 산서(山西)는 면적, 인구, 리동(里洞) 등이 엇비슷하긴 했어도 재원(재원) 등 모든 면에서 산서가 우위였으며, 특히 일제 때 비실광산(比谷鑛山)이 성업을 이루어 학교도 본면보다 휠씬 먼저 들어섰고, 본면에 없는 중학교, 우체국, 단위농협 등이 산서에는 있었다.
1987년 5월 29일 외암리 705번지에 현대식 2층 청사(건평****㎡)를 신축 이전하였으나, 산서가 떨어져 나간 지금 여항은 반쪽 면으로 전락, 앞으로 존폐의 귀추가 주목되며, 1989년 11월 현재 가구(가구)355호, 인구 1,244(남 607, 여 637)명, 총면적은 28,01㎢이다.
<출처> 함안 문화관광 홈 / 함안역사 / 여항면
http://tour.haman.go.kr/03culturalassets/11_01_11.asp
[8] 서북산(西北山) 가는 길
산행 시간도 넉넉하여 표지석과 조망안내판이 세워진 정상에서는 여항산 주변의 원근 경관을 조망하고 사진 촬영을 하며 20여 분 간 휴식을 가진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08 : 15분, 山頂 남쪽의 암벽은 거의 直壁에 가까운 수준으로 굵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로프를 꽉 잡고 내려오니 암봉 중간쯤에 소나무 한 그루가 돋보인다.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다시 조심을 하며 암봉 아래로 내려섰다.
이정표(←미산령 2, 여항산 0.2 / 서북산 3.7 → 좌촌[1코스] 1.8 ↑) 삼거리를 지난다. 또 하나의 암봉, 우회길이 있어 돌아 나가니(08 : 30분)「이곳은 급경사 지역으로 등반 중 추락사고가 생길 수 있어 위험하오니 돌아가십시오 <함안군>)」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08 : 50분, 아름드리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전망대 바위에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며 크게 숨 한 번 들여 쉬고 계속 진행.
09 : 05분, 오리 약수터 산장 안내판(582-6311)이 있는 바위를 올라서니(09 : 07) 「←여항산(미산령) / 서북산 →」라 방향만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렇게 촘촘히 이정표를 세워 놓았으니 오늘 산행은 알바할 일은 없겠다.
09 : 16, 서북산 1. 9km지점 삼거에 세워 놓은 이정표 (←여항산 2 / 서북산 1.9→ /대촌(나뭇골) 3.1 , 별천(상별내) 2) ↓)를 지나
[참고자료] 함안군 여항면 주동리 별천(別川), 금계동(錦溪洞)
여항면 주동리 주서리
여항면 주동리에 있는 주주골(主主谷)이라 부르는 골짜기 제일 끝 부분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 별천(別川)이다. 이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정한강(鄭寒岡)선생이 이곳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별천지(別天地)라고 불리운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또한 여항면 주서리를 옛날에는 금계동(錦溪洞)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조선 영조 때 선무랑 벼슬을 지낸 금계(錦溪) 강유환(姜有煥)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선생은 어렸을 때 종이를 사서 붓글씨를 연습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여 시냇가에 나와 종이 대신 자연석에다 글씨 연습을 하였다 한다. 학문에 열중한 결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말년에는 이곳에 서원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전해지며, 그 때 선생이 커다란 자연석에 "(錦溪洞)"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그 이후 사람들은 주서리를 금계동(錦溪洞)이라 불렀고, 주서리 앞에 흐르는 개울을 금계천(錦溪川)이라 했다. 선생이 쓴 비석은 현재 주서리 교회 옆에 남아 있다.
<출처> 함안 문화관광 홈 / 함안의 역사 / 여항면
http://tour.haman.go.kr/03culturalassets/11_01_11_16.asp
[참고자료]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생애
한강 정구(1543~1620)는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라 했고, 본관은 청주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자 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이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했고,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에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1563년(명종 18)에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수학했다.
한강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1573년(선조 6) 동강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여러 지방 수령에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1580년(선조 13)에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관직에 나아가 1584년 동복 현감을 역임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 교정랑에 임명돼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 군수를 지내던 중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 1594년부터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성천 부사, 충주 목사, 공조 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광해군 즉위년(1608)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하기 위해 상소했고 그 후 벼슬을 단념하고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렸다.
<출처> 벽진산악회
http://cafe.daum.net/uboksil/GvJ2/708?docid=oc99|GvJ2|708|20110322123913&q=%C7%D1%B0%AD%20%C1%A4%B1%B8%BC%B1%BB%FD
09 : 34분에, 서북산 0.6km 지점(이정표 : 여항산 3.3 / 서북산 0.6 / 별천(적십자 수련원) 3.5 / 약수터 산장 30분)을 통과하는데 이쯤이면 앞서가는 안교장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보이지 않는다. 안교장의 산행 속도가 예전에 비해 刮目相對할 정도로 빨라졌다. 부단히 노력을 한 모양이다.
[9] 韓國戰爭의 現場 西北山 頂上에 오르다.
09 : 45분, 정북산 삼거리(방향표시 코팅지 : ☜ 여항산 / 서북산 ☞)를 지나
09 : 53분,「서북산 전적비」를 지나 5, 6m를 더 진행하면 서북산 정상 표지석과 삼각점(함안 11), 그리고 이정표(←여항산 3.9 / 봉화산 3.5→)를 비롯하여 낡은 등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 헬기장에 올라섰다.
서북산 정상도 여항산 정상과 마찬가지로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진동 앞바다가 건너뛰면 손에 닿을 듯 지척에 있고 산에 둘러싸인 진동 앞바다가 잔잔한 호수 같다.
『서북산(西北山, 738.5m)』은 여항산에서 뻗어 내린 남릉이 진북면과 진전면의 경계를 따라 흘러내리면서 이룬 산봉이다. 진동면의 서북쪽에 위치한 산이라 『西北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역사의 현장으로 정상에는 당시 「서북여항지구전투」에서 희생된 미군들을 기리기 위한 戰績碑가 세워져 있다.
「西北山 戰鬪」는 지난 1950년 8월(8월 1일∼8월 13일) 이 지역 방어임무를 맡았던 미 제25사단 제5연대가 진주,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우회공격을 하려던 북한군 제6사단을 맞아 6백61m의 고지를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며 賊 1천여 명을 사살하는 사투 끝에 승리, 낙동강 방어전투의 반격 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했던 戰鬪다.
전적비의 뒷면에 「이곳 서북산 전투는 6.25 한국전쟁 중 낙동강 방어전투가 치열하였던 1950년 8월에 미 제25사단 예하 제5연대 전투단이 북괴군을 격퇴하여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을 가능케 하였던 격전지이며, 이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중대장 티몬스 대위 외 100여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 아들 미 8군 사령관 리챠드 티몬스 중장과 제39사단장 하채평 소장을 비롯한 사단병 및 지역주민들이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1995. 11월」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0] 山에서는 山海珍味가 따로 없다.
서북산 정상에 올라 정상석과 전적비를 비롯하여 환상적인 진동 앞바다의 풍광 등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한 후 그늘을 찾아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을 가졌다.
10 : 00시, 후미 도착.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가자고 한다. 각자 준비해 온 찬과 아침 식당에서 준비해 온 밥을 꺼내 놓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시장이 반찬이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맛난 식사를 한 후, 물 한 모금으로 입을 가시니 생기가 돋아난다.
[11] 감재고개
점심 식사 후 대장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마루금에서 약 1km 벗어나 있는 『봉화산』을 둘러보기로 하고 곧바로 배낭을 챙겨 일어섰다.
진동 앞바다로 난 내리막길로 진행, 약 300여 m를 내려갔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길을 잘못 들어선 모양이다. 가던 길 멈추고 비지땀을 흘리며 서북산 정상으로 되돌아 와 좌측 억새풀 사이로 들어섰다.
『봉화산』을 들려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지도나 정맥 표지기를 확인도 하지 않고 직진을 해 잠시 알바를 했다.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의 결과다.
11 : 13분, 산 정상에서 감내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급비탈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 중심이 자꾸만 앞으로 쏠린다. 발로 버티고 스틱에 힘을 주며 내려오기를 10여 분, 간신히 안부 임도에 내려섰다.
이정표(←서북산 0.9km / 봉화산 2.6km→ / 버드내 1.5km, 미천 5.3km↓)를 세워 놓았는데 『감재고개』로 좌측 여항면 주동리와 우측의 진북면 영학리를 연결하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산행이 힘들거나 어려운 처지를 당하면 이곳에서 「버드내」로 탈출을 하면 된다고 한다.
1.5km 떨어진 「버드내(뻐든, 상벌내, 하벌내)」는 여항면 주동리 별천에 속한 마을로 「별천」마을은 「버든내(뻐든), 상벌내, 하벌내」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마을을 옛날에는 유천(柳川)마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을 주변에 개울이 흐르고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은 동네를 버들동네, 비들내, 버드내, 뻐든으로 불렀고 버들이 있는 윗동네라는 뜻으로 상버들내, 상뻐든네, 상벌내로 되었으며, 위와 같은 버들이 있는 하천 아랫동네를 하벌내라고 하였다.
<출처> 함안군 여항면 홈
http://www.haman.go.kr/program/publicsil/condition/lstDetailCondition.asp?Con01Code=85&Kwa01Code=Yeohang&T=73
[11] 베틀산 분기봉(594m)
임도를 횡단하여 쉬엄쉬엄 걷기를 7, 8분, 앞서가던 박사장을 만나 임도 삼거리에서 후미(김명자, 박사장 사모님)를 기다리며 휴식(11 : 28)
느긋한 휴식을 가진 후 출발. 6, 7분 임도를 따라 진행하니 임도는 산허리를 돌아나가고 정맥 표지기는 좌측 가파른 峰 쪽으로 매달려 있다.
완만한 오름 임도를 걷다 급 오름 길을 대하니 잠시 오르는데도 숨소리가 거치러 지고 이마에서는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린다.
12 : 12분, 철탑이 있는 삼거리 峰에 도착했다. 대부산(좌측)과 평지산, 베틀산(우측)으로 분기되는 봉(594m)이다.
[참고자료] 베틀산과 베틀바위의 전설
마산시 진북면 괴정리 마을 앞에는 베틀산이 있다. 이 산의 높이는 해발 600미터. 이 베틀산은 여항산줄기로 진북면 대티리와 금산리, 부산리 등의 삼각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베틀산의 정상에는 약 20여 평 넓이의 평평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베틀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를 베틀바위라 부르게 된 연유는 괴정마을에서 바라보는 바위의 형상이 꼭 한대의 베틀을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하고, 또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전설에는 어떤 아낙네가 이 바위에서 사시사철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짯다는 설도 있다.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 이 세상에는 천지개벽이 일어나 이 부근이 온통 바닷물에 잠긴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바닷물은 마을을 덮고 점점 불어나서 마침내 베틀산의 정상에까지 차오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정상의 베틀바위에는 그 아낙네가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었는데 정상에 까지 차오르던 바닷물이 웬일인지 그 이상은 더 불어나지를 않고 베틀바위 근처에서 찰랑거리다가 차츰 빠져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바위에는 그때의 흔적으로 조개껍질이 더러 붙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베틀바위에서 마주 건너다 본 산이 「광려산」인데 표고 800미터 되는 이 산의 정상부근에는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앉아있다. 사람들은 또 이 바위를 가리켜 삼형제 바위라 부른다. 산 아래의 괴정마을에서 바라보면 이 바위의 모양 또한 마치 삼형제가 나란히 앉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folder=43&list_id=7547390&uid=sanbut
[12] 대부산(貸付山)
쉼 없이 정맥 표시기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 분기 봉을 지나면서 평지 수준의 편안한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싶더니 또 하나의 가파른 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인 『대부산』인 모양이다.
12 : 30분, 다리에 힘을 주고 숨을 몰아쉬며 한발 두발 걸음을 옮겨 정상에 올랐다. 잡초가 무성한 정상은 약간의 넓은 공터로 사방이 나무에 가려 眺望이 전혀 없는 곳이다. 정상에는 頂上石 대신『대부산(649.2m)』표지판을 설치해 놓았고 표지판 바로 앞에 삼각점이 풀 속에 묻혀 있다.
『대부산(貸付山, 649.2m)』은 함안군 여항면 버드내 우측에 있는 산으로 국유림을 대부(貸付) 받았다 하여 『대부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2] 봉화산(烽火山)
『대부산』에서의 머무름도 잠시, 능선 평지 길을 약 6, 7분 걸어 나가니『봉화산』갈림길 이정표((서북산 2.6 / 봉화산 0.9, 청암 3.3 / 한치 1.8)가 세워져 있다. 『봉화산』0.9km라 표시되어 있다. 쉬엄쉬엄 걸어도 왕복 한 시간이면 족히 다녀 올 수 있는 거리고 12 : 52분이라 바쁠 것도 없는데 안교장, 그냥 『한치』로 내려가자고 한다. 다소 지친모양이다.
파산(巴山=봉화산, 해발 675.5m)은 여항면 내곡리(內谷里) 봉곡동(峰谷洞), 주동리(主東里) 감현동(甘峴洞) 뒷산으로, 서(西)에는 서북산(西北山), 동(東)에는 생동산(生童山)이 솟아 있고 남(南)은 창원군(昌原郡) 진북면(鎭北面)이 된다.
파산(巴山)을 봉곡 뒷산, 감현 뒷산 또는 파봉산(巴峰山),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부르는데 함주지(咸州誌) 산천조(山川條)에 「巴山 : 在郡城南一十五里(竝谷里)屹立千 聳出雲 西封餘航南壓鎭海爲郡關防上有烽燧」라 하였고, 봉수조(烽燧條)에는「巴山烽燧 : 在郡南竝谷去城十五里許南應鎭海縣加乙浦北應宜寧縣可莫山, 別將二人, 監考二人, 軍六人, 甕五, 沙五石, 馬糞五石, 五石, 木椎五石柄」이라 하였다.
산중턱에는 고려 때 충신이었던 이방실장군(李芳實將軍)의 시거지(始居地 )가 있으며, 산정에 폭4m 높이 3m 가량의 돌로 쌓은 봉수대와 봉수대를 관리하던 집터가 남아 있다.
이 봉수대는 전국 봉화로(全國烽火路)중 간봉(間烽)으로서 초기(初起)인 거제의 「가라산(加羅山)」부터 7번째이며, 서울 까지는 다시 23개의 봉수대를 거쳐야만 했는데 옛날 남해안에 자주 출몰했던 왜구의 침입을 중앙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봉수로서 3·1운동 때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파산(巴山)을 한때 군명(郡名)으로도 사용되어 함안에 본관(本貫)을 둔 함안조씨(咸安趙氏), 함안이씨(咸安李氏)를 옛날에는 파산조씨(巴山趙氏), 파산이씨(巴山李氏)라고 했다.
<출처> 함안군청 / 문화관광 / 함안의 역사 / 여항면
http://tour.haman.go.kr/03culturalassets/11_01_08.asp
[참고자료] 「咸安 巴山 烽燧臺」 안내판
○ 경상남도 기념물 제220호
○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밤에는 횃불(熢)로 낮에는 연기(熢)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봉수제는 기록상으로 고려 중기(12, 3세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1이 극심해진 고려말 이후부터 조선 초기에 들어서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야가 확 트인 산꼭대기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하나의 불꽃이나 연기(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둘, 적이 해안에 접근해 온면 셋, 바다에서 적과 접전이 이루어지면 넷, 적이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개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조선 전기에 설치된 이곳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곳의 중심 봉수로중에는 동래에서 서울로 이르는 제2봉수대로 속하였다. 이곳 파산(해발 675.5m) 꼭대기는 남쪽으로는 진동방면의 남해안과 북쪽으로는 함안군 일대 및 의령방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봉수대로는 최적이다. 현재 남북 39m, 동서 15m 정도 규모의 봉수대 터와 2곳의 건물 터가 확인되고 있다.
봉수대 터에는 높이 2.3m, 둘레 8m 정동의 돌로 쌓은 煙臺 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봉수시설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남쪽으로 마산시 鎭東 에 있는 加乙浦 봉수대와 부쪽으로는 의령의 可莫山 봉수대와 서로 연결되어 소식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출처> 운곡기행에서 자료 퍼 옴
http://blog.daum.net/ungok44/7355589
[13] 335m 봉
13 : 00시경 봉화산 갈림길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봉화산 방향의 길을 나뭇가지로 막아 한치재로 향한다는 표시를 해 두고 급 내림 길로 들어섰다.
13 : 20분, 마당바위를 지나 이정표를 세워 놓은 안부에 도착했다. 이정표에「봉화산 1.9 / 한치 휴게소(진고개) 0.8 / 봉곡 0.8 」되어 있고 가파른 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대부산』을 극복하면 『한치』까지 룰랄라 내림 길로 생각했는데 가파른 산을 대하니 다리 힘이 쭉 빠진다. 800m만 더 가면 느긋한 휴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다리에 힘을 모으고 스틱에 의지해 가파른 봉을 오르기 7분,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인 335m 봉 정상(13 : 27)에 올랐다.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을 쏘이며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오늘 산행을 잠시 더듬어 본다. 발산재 찍고 미산령에서 출발한 산행이었지만 산행 전부터 여항산, 서북산, 대부산을 꼭 올라보고 싶었는데 소원 성취를 한 산행이라 마음이 후련하다.
[14] 한티재
느긋한 휴식을 가진 후 급경사 내림 길을 조심을 하며 335봉 끝자락에 도착했다. 『한치재』에 자리 잡고 있는 「함안 아시랑 보리 한우」식당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티재』는 마산시(현재 통합 창원시)와 함안군의 경계지점인 내곡리 봉곡마을 고개를 『한티재(限峙)』라 부르는데 이곳은 마산시 진동면에서 약30리, 함안군 가야읍에서도 약 30리 지점으로 감포선의 중앙에 위치한 고개다. 예부터 이 길을 이용하던 행인들이 많이 쉬어갔던 곳인데 이 고개에 올라서면 진동 앞바다가 한눈에 확 트이게 보인다는 뜻에서 『한티재』라 불렀다고 한다.
[15] 산행 뒤풀이
13 : 50분, 79번 국도를 횡단하여 「함안 아시랑 보리 한우」휴게 식당 마당 평상에 배낭을 내리고 화장실에 들려 땀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후 후미의 도착을 기다렸다. 약 40여 분 후 후미 도착, 대장이 오는 동안 식당에 들려 한우와 이스리를 시켜 잔을 부딪치니 산행 후의 뒤풀이가 그저 그만이다.
15 : 40분경 대장 도착, 다시 한 번 8구간 완주를 축하하는 祝杯를 들고 마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18 : 25분 수원행 버스에 승차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 일정을 마무리 했다.
2011.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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