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사체 처리! 멘탈 붕괴의 현장은?
프레시안 /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 <하느님 끌기>(김보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라는 제목이 어떤 은유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틀렸다.
반면 지금까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별 생각 없던 평범한 선원들은 처음에 하느님의 사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이것이 네스 호의 괴수, 실패한 정부의 생물학 실험물, 고무 덩어리, 공룡, 외계인, 큰 바다뱀, CIA의 음모, 부풀려지는 마네킹, 영화의 소도구, 공산주의 마지막 몸부림, 해저에서 출몰한 로도스의 거상, 미국 유럽 일본의 3자 위원회가 꾸민 유인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불현듯 하느님이 없어도 "하늘이 까맣게 변하지 않고 바다가 마르지 않고 태양은 깜빡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심판도 처벌도 없다는 자각에 이른다. 하느님의 시선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들은 뒤늦게 자신들이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재는 오히려 하느님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한다. 하느님의 사체를 끌고 가는 도중 기이한 안개에 뒤덮이고 통곡하고 절규하는 온갖 바다생물에 둘러싸이고 인간의 더러운 폐기물과 이교도적 상징으로 뒤덮인 섬에 좌초하는 시련을 겪는 상황은 카오스 이론의 핵심인 '이상한 끌개'와 맞물린다. "오랜 이교도적인 질서가 특히 이런 끌개로 활성화되었을 겁니다. 하느님의 시신이 바다 위를 지나가자, 이 세계가 자연스럽게 그에 반응하여 다시 한 번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죠." 하나의 질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되는 세력들이 힘을 겨루고, 있음이 없음을, 없음이 있음을 입증하면서 이 세계는 그 옛날부터 아주 거대한 차원에서 엔트로피의 최대치에 이르지 않게끔 스스로를 지탱해왔다. 제임스 모로는 솜씨 좋게 구약 속 분노하는 하느님과 신약 속 사랑의 하느님을 뒤섞으며, 신약과 구약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갈구하던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현대판으로 되살려낸다. 그들은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욥이자,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통곡하는 요나이자, 하느님으로부터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라고 주어진 벌을 감내하는 모세다.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인간 예수이자,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다가 불현 듯 하느님의 음성과 눈부신 빛에 눈이 멀어버린 사울/바울이다.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을 받아먹으라"라는 비유를 문자 그대로 실감하게 되는 사도들이며, 감히 자신의 모습을 떳떳이 드러내지 못하고 예수를 훔쳐보다가 구원받는 밉살스런 세리 삭개오다. 이들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절망에 울부짖는 순간을 거치지만, 기실 하느님이 누구보다 아끼던 존재이자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선택한 존재들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시피, 인간에게도 그런 신성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제 하느님이 사라진 상태에서, 인간들은 하느님처럼 사랑과 분노의 극단에서 비틀거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 신부 토머스의 입을 빌려 되풀이되는 '타고난 윤리 의식',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머리 위에반짝이는 별, 내 안의 도덕률"을 의식하고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신과 믿음을 다루는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하듯, <하느님 끌기> 역시 인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주인공은 신이 아니다. "사악한 미치광이였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우리의 창조주"였던 '그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되뇌는, 연약하지만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한 인간이 중심이다. 역병, 기근, 전쟁, 죽음의 네 기사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묵시록의 예언 앞에서도 서로에 대한 연민과 공감과 자비와 사랑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인간 말이다. 신만큼이나 인간도 위대하다는 믿음이 <하느님 끌기>에서도 여지없이 되풀이된다. 노파심에 덧붙인다면, 여기서 '하느님'은 반드시 기독교상의 하느님만이 아닐 것이다. 제임스 모로는 의도적으로 <하느님 끌기>에서 기독교의 중추에 덧붙여 그리스 신화의 설정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각종 종교의 모습을 뒤섞는다. 미궁 속에서 실타래를 감는 테세우스, 헥토르의 주검을 이끌고 트로이 성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는 아킬레우스, 각각 술주정꾼과 대식가와 아편쟁이와 남색가를 상징하는 화강암 우상들.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 인간의 형상을 본 따 만든 신들. 그렇게 신과 인간은 서로를 닮아간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신화학이라고 해야 할까. 하드코어와 하드고어와 야만과 신성이 난무하지만, 건조한 유머와 예기치 않은 눈물이 곳곳에서 출몰하는 놀라운 판타지 소설이다. 덧붙임 <하느님 끌기>를 다 읽고 나면 예전엔 별 생각 없이 훑어내려 갔던 출애굽기의 이 구절들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33장 18절~23절) |
출처: 새날이 올 때까지 닥치고 쫄지마!!! 원문보기 글쓴이: 타는 목마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