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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공의 세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숙당 총제공 (摠制公 = 우군첨총제공 右軍僉摠制公)의 배위가 되시는 숙부인 (淑夫人) 강릉김씨 (江陵金氏)는 병조판서 (兵曹判書, 정2품)를 지낸 김천익 (金天益)의 1남1녀중 1녀요, 지문하사 (知門下事, 종2품)를 지낸 충절공 (忠節公) 김사혁 (金斯革)의 손녀요, 부사 (府使, 종3품)를 지낸 경주인 (慶州人) 김세진 (金世珍)의 외손녀이십니다. 부인은 당대 명문가에서 귀하게 자라신 외동 따님이셨습니다.
숙부인의 조부님이 되시는 김사혁 (金斯革, 1320-1385) 충절공은 고려말의 대표적인 무신 (武臣)중 한 분으로 강릉김씨 충북 진천의 입향조 (入鄕祖)가 되시는 분이시며, 목은선조 (牧隱先祖)와는 한 세대를 공유하셨던 역사속의 인물이십니다. 공의 아드님 김천익 (金天益) 병조판서공, 즉 숙부인의 친정아버님과 함께 진천군 백곡면 (栢谷面) 석현리 (石峴里)로 옮겨오면서 후손들이 진천에 세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후손들이 그 후 4대사화를 겪으며 이에 연루되는것을 피하기 위하여 강릉김씨에서 분적 (分籍)하여 관향을 진천으로 삼아 진천김씨 (鎭川金氏)로 수백년을 내려오다가 광복이후에 대부분의 진천김씨들은 강릉김씨로 복귀하였습니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와 이월면 (梨月面 ) 사곡리 (沙谷里) 사지 (沙地) 마을은 현재 600여년된 유서깊은 진천김씨의 동성 (同姓) 마을입니다.
[참고: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 유명한 한산이씨의 집성촌이 있으니 휘 종학 (鍾學) 인재공 (麟齋公) 계열의 후손들이 조선 초기에 입향하여 자리잡은 500여년 역사의 동성 마을입니다.]
“충”자 (“忠”字) 왕조 6대를 거쳐 공민왕대 (恭愍王代)에 들어서서는 원의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고려가 벗어나는 시기이나 북쪽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紅巾賊) 의 침입과 함께 왜구 (倭寇)의 침입 또한 심각한 현안 (懸案)으로 대두 (擡頭)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기록상 고려말 왜구의 침입은 도합 471건의 사례가 나타난다고 하며, 그 침입은 영남-호남과 함께 충청지방이 특히 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충남의 경우만 53건이 기록되고 있으며, 왜구의 피해를 입은 충남 지역은 서천 (舒川), 한산 (韓山), 결성 (結城), 안흥 (安興), 태안 (泰安), 서산 (瑞山), 면천 (沔川), 홍성 (洪城), 보령 (保寧), 아산 (牙山), 온양 (溫陽), 천안 (天安), 목천 (木川), 청양 (靑陽), 공주 (公州), 연산 (連山), 금산 (錦山) 등 전도 (全道)에 걸칩니다.
금강 (錦江)의 중류에 위치한 부여 (扶餘)의 경우 또한 왜구의 중요 침입지역에 해당하였습니다. 외적 (外敵)이 침입하여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면 나라를 구하는 명장 (名將)들이 출현하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충절공이 그에 속하는 분입니다. 충절공은 고려에 침입한 홍건적및 왜구와 맟서 싸우며 그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지키시는라 애쓰신 충신으로 지금까지 우리 기억속에 남아계신 고마운 분입니다.
공은 1345 (충목왕 1)년 26세에 음서로 대관서승 (大官署丞)이 되어 관계에 입문하여, 1359 (공민왕 9)년에는 동북면 (東北面) 행영도 병마부사 (行營都 兵馬副使)가 되셨습니다. 1361년 홍건적이 고려에 두 번째로 침입하였을때, 개경 (開京)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는데, 홍건적은 이때에 남녀노소, 짐승인 소-말 가릴것 없이 모두다 무자비하게 도륙 (屠戮)하였다 합니다. 이때에 목은선조를 비롯한 호종공신 (扈從功臣)들이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魯國大長公主)일행을 무사히 모시고 청주 (淸州)등을 거쳐 남행 (南行)하며 복주 (福州; 지금의 안동)에까지 피신하였다는 것을 일찌기 알고 있습니다. 복주에서 약 3개월 정도를 머물던 일행은 개경이 수복 (收復)되었다는 기쁜 소식 등 전세가 호전함에 따라, 이듬해 2월경부터 다시 북상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데, 중간에 잠시 들린곳이 충북 보은 (報恩)지역입니다. 이때 속리사 (俗離寺=법주사, 法住寺)를 거쳐 일행은 원암역 (元岩驛)에서 열흘정도를 체류합니다.
동문선 (東文選)에 실린 목은선조님께서 묘사한 당시 일화가 하나 있는데, 그 때 일행은 속리사에 거둥한 적이 있었습니다. 허나 이틑날 큰 비가 내리므로, 이에 일행은 다시 원암역으로 되돌아와 하루를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때 공민왕을 호종하고 따라간 일곱 노신들—곡성부원군 (曲城府院君) 염공 (廉公= 염제신, 廉悌臣), 철성부원군 (鐵城府院君) 이공 (李公=이암, 李嵒), 칠원부원군 (漆原府院君) 윤공 (尹公=윤환, 尹桓), 회산부원군 (檜山府院君) 황공 (黃公= 황석기, 黃石奇), 당성부원군 (唐城府院君) 홍공 (洪公=홍빈, 洪彬), 수춘군 (壽春君) 이공 (李公=이수산, (李壽山), 계성군 (啓城君) 왕공 (王公= 왕재, 王梓) --일곱 원로대신들이 편안하게 몸을 자처하고, 웃고 놀며 도성 (都城)에 돌아가는 길이 가까워짐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에 술을 들고 서로 권하며 노래로 흥을 돋구는데, 대장군 (大將軍) 김하적 (金何赤)이 젓대를 불고, 충절공께선 쟁(箏)을 타셨고, 창안백발 (蒼顔白髮)한 노신들의 웃음과 말을 건네며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합니다.
이때 회산부원군 황석기가 부르는 시에 모두 따라 화답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황석기는,
"푸른 옥잔은 깊고 술맛은 아름답구나. /거문고 소리는 느린데 피리소리 길다./ 그중에 가느다란 노래소리 들리니/ 일곱 늙은이 서로 즐기는데 수염은 서리같네."라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전의 위인들은 운치있게 풍류를 즐기며 고상하게 노셨던 것 같으시고, 현대 우리에겐 노래방이 있겠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공민왕 일행은 정세가 계속 어수선해서 개경환도전에 청주로 가서 5개월정도를 더 머무러야만 했습니다.
이 난을 맞아 충절공께선 개경에서 홍건적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우셨고 1363년에 공훈으로 이등공신에 녹훈되시며 부모님과 부인도 봉작을 받고 전토와 노비를 하사받으셨습니다. 장남께는 칠품의 관직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1376 (우왕 2)년에 부여지역에 왜구가 대거침입하였는데 이때 왜구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 부여, 석성 등을 치고, 나아가 공주를 함락하고 연산 개태사 (開泰寺)를 도륙 하는 등, 금강 연안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당시 공주목사 (公州通判)로 계셨던 공은 부여를 경유하여 침입해오는 적을 정현 (鼎峴: 공주 탄천면 정치리로 추정됨)에서 맞아 싸우다 참패하셨고, 양광도 도원수 (楊廣道 都元帥) 박인계 (朴仁桂)는 석성에서 연산 으로 향하는 왜구를 차단하기 위하여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사살 당하는 낭패를 보았습니다. 왜구의 세력이 그만큰 강하였지만, 결국 최영 (崔瑩) 장군이 전력을 재정비하며 마지막에 전세를 뒤집으며 왜구를 무찔러 적을 거의 모두 대파 (大破)하여 잡거나 사살 (射殺)하였다 합니다. 이것이 역사에 유명한 홍산대첩 (鴻山大捷)입니다. 충절공은 왜구에게 설욕 (雪辱)할 기회를 다시 얻는데 그때가 4년뒤인 1380(우왕 6)년 7월의 전투에서 입니다.
당시 왜구는 500척이나 되는 유례 없는 선단 (船團)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였는데, 진포 (鎭浦 ), 서천-금강 어구에 입구하여 큰 밧줄로 배를 묶어 놓고는 연안에 올라가 갖은 살략 (殺掠)을 자행하였다 합니다. 1380년 당시 공은 양광도 도순문사 (楊廣道 都巡問使)를 거쳐 양광도 병마대원수 (楊廣道 兵馬大元帥)로 계실때입니다. 왜구가 서천을 침략하고 부여 (扶餘), 정산, 운제, 고산, 유성 등 현에 침입하여 계룡산 (鷄龍山)에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당시 약한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로서 적을 피하여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살해 와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양광도 병마대원수 충절공께서 이 방면의 적을 공격하여 격퇴하며 쫓아냈습니다. 왜적은 패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악랄하게 잔학성을 보이며 청양, 신풍, 홍산에서 약탈하며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때의 공훈 (功勳)으로 충절공께선 병부상서 (兵部尙書), 판추밀원사 (判樞密院使) 겸 문하부사 (門下副事)로 승진하셨습니다. 당시에 무시무시한 해전 (海戰)이 벌어졌는데 도원수 (都元帥) 심덕부 (沈德符), 상원수 (上元帥) 나세 (羅世) 및 부원수 (副元帥) 최무선 (崔茂宣) 등이 부원수 최무선이 만든 화통 (火桶)과 화포 (火砲)로 무장 (武裝)한 100척의 전함 (戰艦 ) 과 병선 (兵船)을 이끌고 왜선 500척을 공격 (攻擊)하여 왜구선 전부를 섬멸 (殲滅) 하였다 합니다. 이때에 왜구의 배는 불에 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배를 지키고 있던 괴수 (魁首) 손시라(孫時喇)를 비롯한 왜적들은 태반이 불에 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상당했다 합니다. 이때에 육지로 도망간 왜적들도 있었는데, 납치한 남녀(男女)를 모조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러 시체가 산같이 쌓였으며 통과하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저 전라-충청-경상 3도(三道)의 주 (州)-군 (郡)은 왜적이 지나가는 길마다 방화 (放火), 살인 (殺人), 약탈 (掠奪) 등으로 연안 (沿岸)의 각지 (各地)는 폐허화 (廢墟化) 되었으며, 왜적의 환 (患)이 있은 이래 이러한 일은 일찌기 없었다 합니다.
몇년후 왜구가 또 출현하였을대 양광도 상원수 (兩光道 上元帥)가 되셔서 축산도 (丑山島)에 침입한 왜구를 또한 격파하고, 그 공훈으로 지문하사가 되셨습니다.
공은 말년 (末年)에 진천 석현리로 낙향하여 느티나무 앞 공터에 정자를 짓고 아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시는 일로 소일하셨는데, 1385 (우왕 11)년 12월 20일날 향년 66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시호는 충절 (忠節)입니다.
석현리 느티나무는 수령 800년정도 되었으며 2000년 2월 14일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현재 후손 김동권씨가 관리하고 있음. 전국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나무라 하고 그 아래에 1984년에 세운 '충절공 김사혁선생 절정 유허비 (忠節公 金斯革先生節亭 遺墟碑)”가 있다. 충절공이 세운 정자는 임진왜란 전란중에 아쉽게도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음.
충절공은 아드님 셋을 두셨는데 부인의 친정 아버님 되신 병조판서 김천익 선생은 3형제중 막내이시고, 위의 형제 두 분과 함께 일찌기 목은선조의 문하 (門下)에서 학문을 연마 하셨습니다. 1368년 보위위주부 (補衛尉注簿)로 출사 (出仕)하신 뒤 여러 관서를 거쳐, 1381년 밀직대언 (密直代言), 다음해에 민부전법 이부총랑 (民部典法 吏部摠郞))에 승진 (陞進)하고, 1388(우왕 14)년에 전리총랑 (典理憁郞)과 외직인 서주목사 (西州牧使)에 재직하셨습니다. 이해 5월달에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꾼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威化島 回軍)이 있었는데, 공은 위화도 회군이후 승진 (陞進)하여 내직으로 신호위랑장 (神虎衛郞將)를 거쳐 판봉상사 (判奉常寺事)에 임명되었습니다. 1390년 무렵 가우 (家憂)로 복거(卜居)하셨으며, 1392 (공양왕 4)년에 고려가 멸망하자, 당시 송도판윤 (松都判尹)의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백곡면 석현리 추자 (楸子) 마을로 낙향하셨습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어찰 (御札)로 새왕조에 입조할 것을 간곡히 청하는 바, 이에 선생은 응하여 예부전서 (禮部典書)에 임하였고, 1395년에는 전리사판서 (典理司判書)를 거처 서경유수 (西京留守)을 지냈습니다. 이어 황해도 관찰사 (黃海道 觀察使) 를 거치어 병조판서, 1403년에는 검교한성판윤 (檢校 漢城判尹) 겸 공조판서 (工曹判書)를 역임하였습니다.
반면에 숙부인의 친정아버님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숙부인의 백부되신 송오 (松塢) 김승로 (金承露, 1359 ~ 1438) 선생은 고려망조에 불사이군 (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끝까지 절의를 지킨 두문동 72현 (杜門洞七十二賢)의 한 분이신데, 생육신 (生六臣) 매월당 (梅月堂) 김시습 (金時習) 김삿갓 선생과 함께 강릉김씨의 대표적인 절의파 (節義派)로 후세에 추앙받는 충신열사 (忠臣烈士) 이십니다. 나중에 순흥안씨 (順興安氏)와 혼인을 하셨는데, 부인은 주자학 (朱子學) 을 고려에 보급시킨 고려말의 명신 (名臣) 안향 (安珦)의 증손녀이셨습니다. 일찌기 송오선생은 형제 두분과 소시적에 태학(太學)에서 목은선조님 및 포은 (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에게 글을 배웠는데, 원래 학문을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날로 글이 진보되었으며 목은선조와 포은선생이 고려의 앞날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원천석(元天錫), 서견 (徐甄) 등과 함께 송악강사 (松岳講舍)에서 강론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쓰셨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강론을 하던 동지들과 함께 관복을 찢어 동문 밖에 걸고,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는 통곡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조선 개국 후 태종이 그 청절 (淸節)을 가상히 여겨서 사헌부 대사헌 (司憲府 大司憲)에 제수하고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송악 강사에서 함께 강론을 하던 동지가 읊은 시에는 송오선생의 이와 같은 청절에 대하여, 라며 선생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충남 전동면 청남리)에 장사지냄으로써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439년 숭록대부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의 (忠義)입니다. [참고: 송오선생의 손자대에서 현 북한으로 입북한 자손들이 있었는데, 그 이후 그 후손들은 누대로 함경도 홍원 (洪原)-종성 (鐘城)-곡산 (谷山) 지방에 집중세거하면서 살았다 합니다. 1930년대에만 하더라도 함경북도 종성군 용계면 종산동에 무려 239호가 살고 있었는데, 전국에서 진천김씨가 가장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 또한 종성군 풍곡면 동포동에는 40호가 살았으며, 함경남도 홍원군 경포면 일대에는 122호가 있었다 합니다. 함경북도 종성군 남산면 삼봉동 등에도 집성촌을 이루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숙부인의 오라버니는 한산군수 (韓山郡守)등을 지낸 김덕숭 (金德崇; 1373 , 공민왕 22∼1448, 세종 30) 모암 (慕庵) 선생인데 놀라운 효행으로 유명하며 백원서원 (百源書院)에 휘 종학 (鍾學) 인재공 (麟齋公), 휘 여 (畬) 송애공 (松厓公), 이부 (李阜) 행원 (杏園) 선생과 함께 배향된 훌륭한 분입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할 때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글이 나오면 몇 번이든지 되풀이하여 읽으셨으며, 특히 효경 (孝經)을 좋아하였다 합니다. 선생의 부인되시는 분은 양성이씨 (陽城李氏) 인데, 진주목사 (晉州牧使) 이빈 (李贇) 의 따님으로 이빈은 바로 휘 종학 인재공의 둘째 처남이 되시는 분입니다. 인재공의 다섯째 처남 삼사우윤 (三司)右尹) 이징 (李徵)의 장남인 첨중추 (僉中樞) 이백상 (李伯常)은 휘 종선 (種善) 양경공 (良景公)의 맏사위가 되었다고 일찌기 알고 있습니다. 모암선생은 21세에 추천되어 진선 (進善)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장령 (司憲府掌令)을 비롯하여 사헌부집의 (司憲府執義), 온양군수 (溫陽郡守)를 지냈으며, 1401년 목천 현감으로 계실 때 군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셨기에 모두 편안하게 지냈다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 병이 위독하시어 벼슬을 다 버리고 귀향하여 부모 봉양에 힘쓰셨습니다.
1426 (세종 8)년에 한산군수 (韓山郡守)에 제수되었지만 부모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소홀해짐을 염려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더욱더 효성을 다하였다 합니다. 선생께서 62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조석으로 부친께 드리는 문안인사에 소홀함이 없으셨습니다. 이에 1444 (세종 26)년에, 세종은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가상히 여겨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며, 충청감사 (忠淸監司)에게 명하여 쌀 10섬을 주라고 하였다합니다. 사후에, 선생은 이조참의 (吏曹參議)에 증직되셨고, 또한 세종은 어제시 (御製詩) 3수를 내렸고 선생의 효행을 삼강행실 (三綱行實)》에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정려 (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습니다.
선생이 돌아가신 그 다음해인 1449 (세종 31)년 6월에는 선생의 두 아드님 김귀식 (金貴識)과 김귀시 (金貴試)에게 벼슬을 내렸습니다.
살아생전 선생의 효성이 얼마니 지극하셨는지 엄동설한 (嚴冬雪寒)에도 모친의 병환을 위하여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니 여계소(女溪沼)란 곳에서 잉어 두 마리를 낚을 수있었다 하며, 일화 속의 여계소에 선생의 21대손 김동휘 (金東輝) 선생이 백원정 ( 百源亭)을 지었서 선생의 효성을 널리 기렸습니다.
선생의 부친 즉 병조판서공이 돌아 가셨을 때 선생은 벌써 72세였는데도 불구하고 한사코 부친의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여막살이를 정성껏 하였다 합니다. 선생의 나이가 너무 많은 것을 염려한 고장 사람들이 선생에게로 가서 아무리 말려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하며, 오히려 말리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묻혀 계신데 자식으로서 어찌 집안에 편안히 있겠는가? 나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선생은 그렇게 삼년상 (三年喪)을 마치고 집에 돌아 와서도 부모님이 평소에 앉아 있던 자리를 보고는 슬피우셨습니다.
모암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진천 김덕숭 효자각 (鎭川 金德崇 孝子閣). 강릉김씨 모암공파 소유 관리.
숙부인의 친정집인 “진천김씨”는 조선조에 문과에서 1명, 무과에서 2명, 사마시에서 10명의 급제자를 내어,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근래에 강릉김씨로 복귀한 까닭에 “진천김씨”의 정확한 인구는 파악하기 어렵고, 오히려 남한보다는 북한에 상당한 수의 후손들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숙부인께선 총제공과의 사이에 3남을 두셨는데 장남은 휘 사 (思) 현감공 (縣監公)으로 휘 숙휴 진목공께 출계하셨고, 2남은 휘 외 (畏) 예조정랑공 (禮曹正郞公) 이요, 3남은 휘 괴 (魁) 경력공 (經歷公) 입니다. 부인께선 어려운 시절 한산이문에 시집오셔서 총제공과 다복한 가정을 이루시고 후손들이 번영하는 터전을 이루는데 이바지하셨습니다. 총제공께서도 인재공의 뜻을 받들어 한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시고, 세종대에 들어서 출사하셨습니다. 이상 내 멋데로 풀어 본 우리 할머님네집 이야기 였습니다. |
첫댓글 다음에는 휘 숙무 양도공 선조님 배위 전주이씨편이 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