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답하라 1982. (1편)
82년 봄 석조관 옆길 따라 벚꽃 흐드러진 날 오후 우린 후문길 따라 지친 걸음 터벅이며 막걸리집을 향했다.
한쪽 귀에 리시버 꽂고 잔디밭에 앉아 있는 머리 짧은 녀석들과 중정 벤치에서 오가는 머리 긴 우리를 바라보는 낯선 얼굴들을 경계하며 우린 후문길 따라 처진 어깨 서로 격려하며 막걸리집을 향했다.
남산에 핀 개나리 진달래 벚꽃은 한껏 봄 내음을 발산하고 있었지만 우린 차가운 바람 부는 겨울을 사는 냥 웅크린 가슴 펴지 못한 채 막걸리잔 기울이며 참았던 욕을 패악질하듯이 쏟아냈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었던 갓 스물의 나이. 풋기 가시지 않은 얼굴 한 가득 미소만 띠기에도 부족했던 젊은 우리 갓 스물의 나이에 취기 가득 얼굴에 채울 냥 술을 마셔댔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단어에 영원성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철부지처럼 생각했던 갓 스물의 나이에 우린 폭력에 항거하듯이 막걸리 트림에 도리질하면서도 술에 취해만 갔다.
대학신문의 광고에는 “셰익스피어에게 F학점을 받아도 그녀에게 A학점을 받는다면”이 실려 있었지만, 우린 연애를 몰랐고, 낯설어했으며, 또 거부하기도 했던 철부지 갓 스물의 나이에 “자유는 이런 것이야”라고 외치듯이 우린 젓가락 두드리며 목청껏 노래 부르는 것으로 빼앗긴 자유를 되찾곤 했다.
그리고 시간의 노예를 자청하면 살아온 35년의 시간. 우리 어제 그렇게 만나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부둥켜안으며, 갓 스물의 나이로 돌아갔었다.
▶ 응답하라 1982(응답파리) 2편
요즘 우리 아이들은 잘 모르는 연예인이 됐지만 이덕화와 임예진이 요즘의 핫한 '아이돌'처럼 청춘의 아이콘이던 시절이 있었다.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은 두 사람이 사회를 본 환영회를 통과의례처럼 치루면서 대학생이 되는 첫걸음을 띄었다.
지금이야 TV로 보든 실물로 보든 큰 감흥 없는 일이지만 갓 스물 우리들에겐 연예인을 눈 앞에서 보는 일은 마음 설레기에 충분한 이벤트였다. 우상다운 우상도 없었고, 또 찾지도 못했던 시절. 철모르고 들었던 “부탁해요~~”라는 특유의 이덕화 선배의 멘트에 귀 기울이며 대학을 배워가고 있었다.
접하는 모든 것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하기만 했지만 갓 스물 청춘들은 ‘백상’ 밴드의 응원가 연주를 들으며 조금씩 대학이라는 울타리로 들어갔으며, 화려한 의상을 차려 입은 치어리더 선배들의 몸짓 큰 율동을 따라하며 우리 속에 담겨 있던 어색함을 한 꺼풀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운 "창창한 남산 기슭"은 야구장에서 목청껏 부르던 우리들의 영원한 응원가가 되었으며, '아리랑목동'의 "내 사랑만 하오리까"는 처음 만난 옆자리 동기들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어깨동무가 되어 주었다.
청춘은 강렬한 비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스피커의 검은 색 공명판과도 같은 것. 82년 우리는 야구장에서 '백상'의 그룹사운드 음악에 반응하며 젊음을 불태웠으며, 치어리더들의 거친 몸짓에 응답하듯 응원가를 있는 힘껏 불러 제꼈다.
강렬한 쇳소리와 감미로운 멜로디가 교합하듯 연주되는 일렉트릭 기타의 기계음은 그렇게 스무살 청춘들의 가슴에 깊숙이 찔러 들어왔고, 때론 천둥이 되고 때론 우박이 되어 묵직하게 울려대던 드럼 소리는 우리 청춘들의 심장 고동소리를 닮은 듯 친숙해지고 있었다.
아직 김광석은 없었지만, 김창완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있었고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가 있었던 갓 스무살 청춘들은 그렇게 그룹사운드에 익숙해지면서 기성에 반항을 준비하는 제임스 딘이 되어가고 있었다.
▶ 응답파리 3편
여름하늘처럼 변화무쌍한 젊은 청춘들의 감성은 레코드판에 담긴 음악에 따라 끓어오르는 붉은 태양이 되기도 하고 더위에 찌든 아스팔트를 식히는 소낙비가 되기도 했다.
들려오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갓 스물 우리들의 발걸음은 82년의 거리를 활보하며 꽃보다 아름다운 젊음을 만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레코드 몇 장, 야전(야외전축)과 함께 챙겨 해변 모래사장에 둘러앉아 “해변으로 가요”를 목청 터져라 부르기도 했고, 키보이스의 “해변의 추억” 속으로 그 또는 그녀를 생각하며 빨려 들어가기도 했다. 올리비아 뉴튼존의 “피지컬” 리듬에 몸을 맡길 때면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처럼 가슴마저 뜨거워졌고, 그 해 가수왕이 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들을 때면 사그라지는 모닥불에 못내 안타까워하던 우리가 되곤 했다.
그렇게 갓 스물 우리는 설익었지만 서서히 단맛을 채워가던, 때 이르게 딴 사과처럼 상큼하기만 했다.
지금은 사라진 추억 창고 ‘레코드 가게’는 82년 갓 스물 우리들처럼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지만, 주인장 취향에 따라 흘러나오던 음악은 여전히 우리의 귓가를 맴돌 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퇴계로 대한극장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있던 레코드 가게는 그래서 갓 스물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진 추억 한 조각이 되었다.
바쁜 걸음으로 시간을 잡아챌 듯 걷다가도 음악에 일부러 발목 잡히며 즐거워했고 명동으로 이어지던 스카라극장 앞 ‘장고웅레코드’를 지날 땐 ‘라노비아’을 흥얼거리고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상상하기도 했다.
그 시절 레코드 가게는 여름날 탄산 가득 머금은 청량음료였고 눈 내린 겨울 날 두 손 따뜻하게 덥혀주던 진한 커피와 같았다.
그러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이라도 듣게 되면 그 자리에 선채 망부석이 되었던 갓 스물의 우리. 쇼윈도 건너에서 레코드를 만지는 주인장의 배포에 경탄하며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작은 미소를 배우면서 한 여름 작렬하는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는 모습을 상기해 내곤 했다. 그리고 광야의 삶이 얼마나 거친 지도 모르면서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82년 갓 스물 우리들은 싱클레어가 자신인지 모르고 좌충우돌 이리 저리 찿아다니며, 금기에 도전하는 법을 배워가던 데미안이었다.
▶ 응답파리 4편
-하얀집-
요즘 분식집 라면에서 바지락을 발견할 수는 없다. 또 그런 이야기를 하면 2~3000원 하는 음식에 뭔 바지락이냐고 타박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82년 갓 스물 우리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얀집’ 라면에는 바지락이 들어 있었다.
그냥 봉지라면이 100원, 그리고 학교 안 다향관 라면은 150원이었던 시절, 하얀집 라면은 그 두 배인 300원이었다. 쉽게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의 주머니가 두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숙비 올라오거나 용돈 받은 날이면 삼삼오오 우리는 그렇게 두런두런 모여 하얀집 라면으로 점심 요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 기분 내키면 환상의 맛을 자랑하던 ‘고갈비’와 ‘계란말이’ 안주 삼아 막걸리로 이어졌고, 끝내는 수업시간에 맞춰 강의실로 올라가는 일보다 ‘휘청거리는 오후’를 즐기는데 익숙해져갔다. 그렇게 갓 스물 우리들의 82년은 연두 빛에서 푸른빛으로 서서히 짙어져갔다.
바지락 국물 맛에 자주 찾았던 하얀집은 후문에서 내려와 짜장면 집 ‘강서’를 지나 교회와 만나는 삼거리지만 좁은 골목 하나로 사거리처럼 보이는 길 바로 그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락방이 있는 단층건물 외벽은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옥호는 당연히도 ‘하얀집’이었던 그런 분식집이었다.
약간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걸걸한 말투를 지닌 주인아주머니는 그렇게 퉁명스럽지도 까칠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친밀하게 말을 건네는 분도 아니었다. 특히 외상이라도 할라치면 눈빛은 차가워졌지만, 그렇다고 야박하게 인상 쓰며 쓴 소리 하시는 분은 더욱 아니었다.
선배들 따라, 또는 동기들과 걸음이 잦아질수록 외상의 규모는 커져갔지만, 그래도 그때는 학생증도 도서열람증도 모두 우리에게 술 몇 잔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갓 스물 청춘들의 신용카드가 되어 주었다.
지금은 그 모퉁이에 ‘하얀집’은 없지만 제일병원 골목길 어디쯤엔가 ‘다시열린 하얀집’이라는 옥호의 분식집이 있는 듯하다.
추억은 빛바랜 사진에 머물러 있는 정물이 아니라 기억의 창고에서 언제든 뛰쳐나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생물이다. 그런 추억을 우리는 앨범 안에 가두려하고 가로줄 선명한 노란 접착제 묻은 셀로판지 안에 넣어두는 메모종이의 크기에 한정시키려 한다.
82년 갓 스물 우리의 ‘하얀집’이 2016년 ‘다시열린 하얀집’으로 연장되듯이 우리들의 추억은 또 다른 이벤트와 함께 모아져 기억의 강을 만들어갈 것이다. 풋기는 사라져 주름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기억의 강은 82년 갓 스물의 추억들이 살아 숨쉬는 우리들만의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줄 것이다.
▶ 응답파리 5편
-신입생환영회-
사회가 술을 권해 매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처럼 80년대의 소시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갔다. 그 덕에 갓 스물 청춘들이 입학한 대학도 술로 출렁거리기만 했다.
개학과 함께 시작되는 음주 시즌은 동문회와 향우회를 알리는 게시판 글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퇴계로에서 후문을 거쳐 학교로 오르는 길은 굳이 등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체력 약한 사람에겐 한 번쯤 쉬어줘야 오르는 산행 길과도 같았다. 그 쉬는 장소가 대략 발끝을 보며 오르던 계단 끝 학생회관 앞.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각종 알림 글에는 긴 방학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을 보고자 하는 선배들의 욕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느 조직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기대감은 긍정의 힘을 한껏 발휘하는 법. 새로운 사람의 등장은 변화를 의미했고, 그 변화는 겨울 끝에서 만나는 가지에 돋은 새순과도 같았고, 오랜 익숙함을 떨쳐내는 기성에 대한 탈출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술은 학과와 서클로 이어져, 방학 동안 파리 날리던 학교 앞 술집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힘차게 퍼덕였으며, 웃음 잃었던 주인장들의 얼굴은 꽃 본 나비처럼 화사하게 살아났다.
넘치듯 따르는 막걸리와 소주, 그것으로도 부족해 소막에 소막맥까지 등장하던 82년의 술자리는 갓 스물 청춘들에게 반드시 치러야하는 통과의례였다.
'새로운 출발'을 환영하는 의례는 모두 구속적이며 때론 기괴한 절차도 지니는 법. 술잔도 필요 없어 신고 있던 고무신이나 구두에 술을 채워 건네주던 선배가 있었고, 소막맥에 남은 안주꺼리와 재털이의 담배꽁초까지 꼼꼼하게 챙기듯 술잔을 채워주던 선배들도 있었다.
그렇게 수컷들의 힘겨루기 같은 의례의 끝은 항시 그랬듯이 마신 술잔의 수만큼이나 많은 상흔을 남겼다.
이기지 못할 만큼 마신 술은 흔하게 토악질로 이어졌고, 다리 풀린 친구들 깨우다 지쳐, 택시 잡아 짐짝 부리듯 태워 보내기도 했으며, 무슨 서러움이 그리 많은 지 손수건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쏟던 친구들 뒤치다꺼리도 해야 했다.
심한 경우에는 토사광란하는 친구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 링거를 꽂아주기도 했고, 시비 끝에 길거리 몸싸움도 벌였으며, 경찰서에 끌려가 “너 동대생이야”하며 큰 소리 치면서도 편의 봐주던 선배를 만나기도 했던 것이 거칠지만 그래도 순수했던 갓 스물 우리들의 82년 봄이었다.
군바리 각설이가 돌아갔고, 대령 중령 소령은 권총 도둑놈이 되어야 했고, 인천의 성냥공장 순희는 매일 성냥을 가지고 나와야 했던 우리들의 술에 전 82년은 젓가락 장단에 모서리가 모두 패어진 볼품없는 상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엔키두와 젊음을 불태우며 세상을 배우던 우르의 길가메시였으며 청새치를 잡겠다고 깊은 바다를 향하던 아바나의 산티아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