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시 아라동 구산로에 머문지 벌써 4개월이 되어간다. 지난해 10월 24일 제주도에 와서 12월 중순 올레1코스를 걷다 말목을 다쳤다. 제주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깁스를 푼 것이 지난 1월 28일이었다. 깁스를 푼 후부터 꾸준히 발목 재활훈련을 하였다. 발목재활훈련은 목발을 이용하여 걷는 것이다. 처음에는 10분 정도 걷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4일부터는 범위를 넓혀 1시간 정도 걸었다. 이때부터 아내와 같이 걸었다. 내가 거주하는 마을 주변의 귤 밭길을 걷기도 하였고, 또 마을 앞의 큰 차도도 걸었다. 병원에 가는 날에는 제주대학병원까지 걸어서 갔다. 내가 움직일 수 없었을 때 아내가 혼자 개척하여 걸었던 길(?)을 대부분 걸었다.
그런 어느 날 아내가 혼자서 걷기에 무서워 걷지 못한 길이 있다고 하였다. 이 길이 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길이다. 길의 개요를 먼저 말하겠다. 구산마을 복지회관 앞 마을길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나가면 아연로를 만난다. 아연로를 건너면 아란서길이 시작된다. 아란서길로 10m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과일선과장이 있다. 여기서 500m 정도 걸어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대원길이다. 대원길에서 500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영도그린힐이 있다. 영도그린힐을 지나면 삼거리가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간다. 이 길도 대원길이다. 여기서 500m 정도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또 삼거리가 있다. 왼쪽은 푸른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150m 정도 가면 개천이 나온다. 개천길을 따라 300m 정도 가면 오장교가 나오고 아연로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차도이다. 차도로 따라 1km 정도 걸으면 처음 출발하였던 구산마을 복지회관으로 가는 마을길을 만나게 된다.
내가 이 길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이 길을 걸으면서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2월 중순에 이 길을 처음 걸었다. 그 후 아내와 매일 이 길을 걸었다. 매일 이 길을 걸었던 이유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을 때는 아픈 발목을 쩔뚝거리면서 걸었기 때문에 먼 곳은 보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것만 보았다. 폭 4m 정도의 길 양쪽에 돌담이 이어진다. 지나다 보면 귤 밭도 있고, 묵정밭도 있다. 아란서길을 가면 집이 가끔 한 채씩 만난다. 처음 만나는 집은 마당이 멋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돌로 마당을 장식하고, 나무도 보기 좋게 심어 놓았다. 아내와 마당을 바라보면서 멋있다고 이야기 했다.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있고 또 집이 한 채 있다. 이 집은 단순하면서도 멋이 있다. 복잡성을 뛰어 넘은 단순성이라 할까?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집이 한 두 채 보이지만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없었다. 무밭도 있고 귤 밭도 있다. 이 길도 제주도의 풍경을 느끼게 한다. 조금 더 가면 영도그린힐을 만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마을이다. 길 양쪽으로 집들이 이어진다. 약 500m 정도의 거리에 집이 20여 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띄엄띄엄 집이 있다. 시골 산림 속에 묻혀 있는 마을이다. 마을도 제주도의 풍취를 느끼게 한다. 모든 집들은 다 돌담을 쌓았다. 돌담을 따라 가다보면 동백도 있고 제주도 특유의 멋진 나무들이 키를 뽐내며 위로 솟아 있다. 어떤 돌담은 5m 정도 안쪽으로 움푹 파지게 쌓은 돌담도 있다. 그곳은 자동차 차고지다. 얼마나 소박하고 멋있는 차고지인가? 그리고 푸른어린이집으로 가는 삼거리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개천을 만난다. 이 곳은 제주도의 다른 개천보다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개천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높이 3-4m에 폭 20m 정도, 그리고 바닥은 다 돌이다. 이렇게 큰 개천을 보면, 폭우가 쏟아질 때 세차게 내려오는 물을 보는 것 같다. 이 길을 걸으면 제주도의 시골 마을과 농경지의 멋을 느낀다. 그래서 싫증이 나지 않았다.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 19일에는 제주도에 17cm정도의 폭설이 왔다. 등산화를 신고 이 길을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먼 곳을 처다 보았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길에도 밭에도 지붕위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신이 그려놓은 그림이다. 멀리 한라산이 보이고, 돌담과 함께 밭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삼나무들이 물결과 같이 겹겹이 보이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구산마을회관 가는 길에 들어서니 멀리 제주도 앞바다가 보였다. 이 날 오후 구름은 약간 있었다. 하지만 낮은 곳에서는 구름이 없었다. 따라서 가시거리가 아주 좋았다. 제주도 앞바다에 길게 연결된 섬들이 보였다. 4개월 정도 여기에 있으면서 처음 보는 섬들이다. 그 섬들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한라산 백록담과 아라동과 직선으로 연결되는 이 섬들은 어떤 섬들일까? 전라남도의 보길도와 청산도가 아닌지 모르겠다. 21일인 오늘은 눈이 많이 녹았다. 길을 가다 멀리 바라보았다. 같은 길이었지만 멀리 바라보이는 광경은 이전에 느끼지 못하였던 것을 느끼게 하였다. 눈은 없지만 귤나무와 한 두 채의 집들이 멀리 펼쳐져 있다. 그 사이사이에 삼나무들이 물결과 같이 겹겹이 이어져 있다. 제주도가 아니고는 느낄 수 없는 그림이다.
내가 오늘 이 길에 관한 이야기를 쓴 이유는 오늘 이 길을 걸은 것이 마지막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 26일 제주도를 떠난다. 그 사이는 다른 계획이 잡혀 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제주도가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표현하였다. 내가 문학적 소질이 없어 아름다움을 이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느낀 것은 같은 길을 10일 정도 매일 걸으면서 아름다움을 다르게 느꼈다는 것이다. 눈이 온 것을 제외하고는 10일 동안 내가 걸었던 길은 같은 길이었다. 집이나 밭이나 나무나 풀이나 모두 그대로였다. 그런데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매일 달랐다. 어느 날은 어느 집의 마당이 좋았고, 어느 날은 밭 사이의 돌담이 멋있었다. 또 어느 날은 멀리 바라보이는 광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나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옛 성현들은 방심한 마음을 단속하라고 한다. 이것은 욕심에 이끌려 몸 밖으로 나간 마음을 단속하여 몸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하라는 것이다. 마음이 몸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사욕에 이끌려 돈이나 권력을 탐하거나, 아니면 외부 어떤 것에 분노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의지와 관계없이 마음이 외부 사물에 의해 움직이고 조종된다. 마음을 몸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한다는 것은 마음을 평정하게 하여 사욕에 흔들리지 않고 감정에도 휩싸이지 않아 자신이 마음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제주도 길을 걸으면서 느낀 마음은 이것과 다른 것이다. 그러면 어떤 마음일까? 내가 느낀 마음은 몸 밖으로 나간 마음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마음이다. 옛 사람들이 수양할 때는 마음을 공경히 한다. 이것을 경(敬)이라 한다. 경(敬)이란 전일(專一)하다는 뜻이다. 수신이라는 것, 하나에 마음을 모아 본성을 함양한다. 이 때는 마음을 집중한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마음을 하나로 집중할 수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자연을 음미하고 인간세상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마음은 하나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편안하게 놓아두어야 한다. 이 때 마음은 몸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바깥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깥이 마음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보고 느끼는 바에 따라 외부세계가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고 참된 느낌이다. 내 자신의 마음에서 내 자신이 느끼는 참된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행복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가끔 이런 여유를 갖는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첫댓글 밭에서 갖 뽑은 무우를 써억 옷소매로 문질러 한입 깨물다
깨물은 무우 속에서 고향의 냄세를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