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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잠들었는데 일찍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았습니다.
아내와 큰아들은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베란다 유리창에는 새해 첫날이라는 희망보다는
일상의 휴일이 흐릿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가 “어머 벌써 열시네.” 하며
작년의 느긋함으로 아점 준비를 시작합니다.
지금 나는 마음이 조금 상해있습니다.
어제 오후, 아내와 아이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내년에는 더 건강하고 서로서로 더 사랑해서
더욱 더 많이 행복하자’
맨 먼저 큰 아들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넵/////ㅋ’
조금 후에 작은 아들에게서도 답장이 왔습니다.
‘네.*^^*’
늘 부족한 정액요금제인 녀석들, 월말이니
답장이 간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내에게서도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자기가 있어 늘 고마워 ♥ 내년에도 더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만들자 ♥’
문자와 함께 오늘은 좀 일찍 오라고 전화까지 왔습니다.
늘 밖에서만 바쁜 나를 그래도 멀리하지 않는
소중하고 소중한 나만의 가족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올 해는 더욱 가족에게 미안합니다.
업무상 저녁 열시나 되어야 집에 들어오는 나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휴일, 일요일엔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었는데
특히 올 해는 시 모임이다, 동문동창모임이다, 골프다
주말과 휴일까지도 밖에서만 바쁜 남편, 아버지였습니다.
퇴근할 때 큰맘을 먹고 삼십만 원을 준비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가족과 함께 좋은데 가서 식사나 하라고
종무식 끝나고 사장님께서 슬쩍 건네주신 봉투입니다.
내심 “잘 됐다, 탐나던 유틸리티(골프채) 하나 장만해야지’
했다가 그래 가족에게 풀어야지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그야말로 큰맘 먹고 준비한 것일 뿐입니다.
십만 원은 아내 용돈으로, 아들 둘에게는 오만 원씩
나머지 십만 원은 근사한데 가서 둘러앉을 생각이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을 했습니다.
더 일찍 퇴근을 할 생각이었으나 사장님에게 잡혔습니다.
아니, ‘스크린이나 한 게임 하고 가지’ 골프에 잡힌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보다 행동이 많이 늦은 것입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와 아들 둘 모두가 집에 있었습니다.
오늘은 학원도 송구영신을 하러갔나 보다, 잘 됐다 싶었습니다.
현관에 들어섰는데 아내가 많이 서두릅니다.
뭔가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게 있구나 싶었는데
가족축복기도 시간이 약속보다 많이 늦었다는 것입니다.
얼른 다녀와서 저녁을 챙겨주겠다고 합니다.
거실에 밥상이 펼쳐져있는 걸 보면 많이 기다린 듯 합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동태찌게까지 있는 것을 보면
날 위해 신경 써 준비한 저녁이 분명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아내의 동태찌게는 단연 최고입니다.
“너무 배고픈데 요기는 하고 가야지”내가 시간을 끌어봅니다.
이때부터 생각지도 않은 신경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난 교회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 주여, 주여’
오직 예수만을 인정하는, 그래서 사람은 온데간데없는
그 유일신의 논리가 좀 거북합니다.
아내와 나의 몇 안 되는 이견 중의 하나입니다.
그때마다 아내가 많이 서운해 합니다.
물론, 아내의 그 서운함은 내가 자신의 유일신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예전에는 나도 교회에 다녔습니다.
아내와 내가 서로 첫사랑으로 만나서
결혼까지 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도 교회의 힘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특별한 날에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가곤합니다.
팔짱 끼고 외출하자는데 마다할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자꾸 심퉁을 부려봅니다만
아내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니 이길 필요 없습니다.
하여튼, 이래저래 쑥스럽게 가족축도가 끝났습니다.
근데 조금 늦춰진 줄만 알았던 내 계획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아들이 교회에 남아 송구영신예배를 본답니다.
할 수 없지 하고 아내와 작은 아들과 교회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아내가 누군가와 덕담을 나누며 인사를 하더니
“송구영신 예배 성가대 연습 안 해요?” 하는 말에
“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요?” 하며 나를 쳐다봅니다.
또 할 수 없지 나와 둘째만 골목길을 빠져나옵니다.
저 성가대원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아내는
집에까지 따라와 따뜻한 밥상을 다시 차려주고
예배시간에나 슬그머니 지각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골목길을 거의 빠져나올 쯤 작은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나 오늘 친구 집에서 자도 돼요?”
“연말인데, 친구 부모님도 가족과 보내고 싶지 않을까?”
“친구 아빠는 해외출장 갔고, 친구 엄마가 그러라고 했어요.”
친구들끼리 이미 약속했다는데, 허락도 받았다는데
또, 또 할 수 없지 혼자 집에 가야지 했습니다.
다행히 아들 녀석 집까지는 동행했다 간다고 합니다.
뭔가 가져가야 할 것이 있구나 싶었지만
혼자 집에 가는 아빠 때문이란 걸 녀석, 나갈 때 알았습니다.
거실에 앉아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연기대상, 가요대상 이곳저곳을 번갈아 가며 기웃거리다가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혼자 보았습니다.
하여튼, 어제의 계획은 말하지 않은 채
양복 안 주머니의 봉투를 꺼내지 않은 채 아점을 먹었습니다.
예전의 휴일처럼 노곤하게 커피를 마시고
또 텔레비전의 이 채널 저 채널을 기웃거립니다.
오후가 되자 모든 방송이 다 재방송입니다.
어제 밤 혼자서 본 연기대상, 가요대상의 부산함이
그대로 재방송됩니다. 재방송이 아닌 건 옆에 앉은 아내의 첨언 뿐
내가 무척이나 무료해 보였나 봅니다.
“운동이나 좀 하고 오지 그래?”
“뭐, 할 거 없어?, 왜 이런 날 운동하러 가라고 해?”
“빨래도 해야 하고 냉장고 청소도 해야 하고...”
기대와는 다르게 아내는 아주 일상적인 답변입니다.
“평소엔 안하드만 이런 날 웬 냉장고 청소?”
서운함이 날카롭게 돋친 말에도 아내는 그리 느러져 있지 말고
얼른 운동이나 하고 오라고 등을 떼밉니다.
양복 호주머니 열어보라는 말에 아내가 고맙다며 다가옵니다.
가끔 그런 적이 있었으니 웬 돈이냐고는 묻지 않습니다.
작은 애 오면 저녁이나 먹으러 나가자며
그 동안 연습장에 가서 운동이나 하고 오라고 합니다.
이 봉투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내의 말은 처음부터 진심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처음 운동하고 오라는 말에 그럴까도 싶었지만
새 해 첫날이라 문을 닫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책임자를 겸하고 있는 우리회사 스포츠클럽도
오늘은 신정이라 문을 닫았거든요.
또 새해 첫날인데 가족과 함께 보내야지 생각했습니다.
못이기는 척 평소 가끔 다니는 인도어 연습장에 왔습니다.
휴장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웬걸요 1,2,3층이 다 꽉 찼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엊그제 일요일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두 시간 동안 볼을 치고 집에 왔습니다.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물으니 마음대로 하랍니다.
생각 끝에 아내가 성수동 이마트에 다녀올 때 보곤 했던
샤브샤브 집에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네 가족이 차에 올라 성수동 샤브샤브로 향합니다.
이 때 제 마음 속에 뭔가 스치며 동하는 게 있습니다.
그래. 기왕 가는 거 회사 간부급 회식 때 갔던 그 집으로 가자
핸들을 잠실 회사 방향으로 돌렸습니다.
근데 이상합니다. 평소에는 손님이 제법 많았는데
그 큰 전문 샤브샤브 집에 우리가족들 뿐입니다.
다들 맛을 의심하는 듯 합니다.
메뉴판을 보며 아내는 다른 곳으로 가자는 눈치입니다.
“그냥 여기서 먹자, 우리 식구끼리 회식 한번 하는 거야”
하기야 법인카드 아닌 개인카드를 꺼내 긁기에는
솔직히 많이 부담스러운 가격입니다.
그렇다고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먹고 나면 아내가 기겁을 할 것이 불보 듯 뻔합니다.
가격의 절반은 품위유지비라고 해야 맞는 곳
뻐꿈 아내가 눈치 못 챌 리 없습니다.
엉덩이 들썩거리는 아내를 간신히 눌러 앉히고
“언니, 여기 특선 샤브샤브 4인분요, 맥주도 한 병만요”
허, 허 고일 큰아들은 벌써 맥주도 마실 줄 압니다.
자리에 따라 한 잔 정도는 한답니다.
너도 이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구나 하는 생각에
잘 할거란 신뢰을 더하니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배부르게 먹었답니다.
맛있게 먹었답니다. 분위기 아주 좋았답니다.
2008년 1월1일 우리 네 가족 단란하게 회식을 하였습니다.
회사에서 수치적으로 어떤 성과가 있을 때나 그것도
간부급이나 와서 수고했다며 먹었던 그 음식점에서
우리가족 올해 큰 성과 분명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미리 땡겨서 건배!를 하였습니다.
“올해는 더 건강하고 서로서로 더 사랑해서
더욱 더 많이 행복하자, 건배!“
그 사이 '내년에는' 이란 단어가 '올해는'으로 다가와
우리 곁에 감사하게 서 있었습니다.
개인카드 한번 속 시원하게 팍- 긁었습니다.
-2008.1.2-
첫댓글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군 ㅋㅋ 올 한해도 아름다운 시간들 만드셔
한목사님, 새해 축복 많이 받으시고...나눠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