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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3년 여름호
【김현경의 회고담 18】
김수영 시 읽기 (8)
일시 : 2023년 3월 3일. 4월 21~22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오늘 읽어볼 작품은 「눈」에요. 이 작품은 1961년 1월 3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문이나 잡지 등에 발표되지는 않았어요. 마포구 구수동에서 사실 때 눈을 많이 보셨는지요?
김현경 : 겨울에 눈이 오면 온 밭에 하얗게 쌓였어요. 산이 없고 밭이 펼쳐진 동네이기에 눈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한강이 가까워 장마가 지는 때는 우리 집 양계장 밑까지 물이 찼어요.
맹문재 : 이 시를 쓴 동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6․25전쟁 때 포로 생활을 했고, 헤어졌던 아내가 돌아와 가정을 이룬 뒤 아들을 낳고, 양계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등 생활이 안정되었지요. 전쟁을 무섭게 겪은 사람으로서 시간이 안정되니 마음이 편안해졌지요. 이 작품은 그러한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쓴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이 작품에 “‘빅’ 차도/지프차도/파발이 다 된/시골 버스도” 등의 표현이 나와요. ‘빅’차는 어떤 차인지요?
김현경 : ‘제무시’(GMC) 같네요. 힘이 좋은 트럭이에요.
맹문재 : 제가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 트럭은 1940년대 미국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Company)가 생산한 차종이네요. GMC를 일본식 발음으로 ‘제무시’로 불렸네요. 다음으로 “파발이 다 된”이라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김현경 : 다 망가졌다, 다 부서졌다 등의 의미로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이에요. “파발이 다 되었어”라고 하면 피곤이 극치에 이르렀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맹문재 : “맴을 도는 판이니”라는 구절의 뜻은 무엇일까요? ‘맴’이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짓”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네요.
김현경 : 그래요.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모습이지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이제 저항시도 필요가 없고, 용감한 시인도 소용이 없다고 다소 포기하고 있어요. 4․19혁명 후 기대했던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으로 보이네요. 그러한데도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라고 민중을 내세우고 있어요.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김 시인은 겸손했어요. 뻐시는 것을 못 보았어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김 시인의 강의를 듣고 감동해서 기립 박수를 쳐도 오히려 무안해서 가만히 서 있다가 강의실에서 나왔다고 했어요. 김 시인은 민중을 그러한 자세로 대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연꽃」이에요. 1961년 3월에 쓴 작품인데, 역시 발표되지는 않았어요.
김현경 : 이 작품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시에요. 김 시인이 이 시를 쓰고 나서 나에게 설명을 해주기도 했어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을 정권이 탄압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 김 시인이 위안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맹문재 : 이 작품은 사회주의 동지들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고 있어요. 그 근거는 연꽃이나 흙 같은 자연이 있고, 형제나 아주머니나 아들 등의 사람이 있고, 그리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작품의 마지막에 ‘해골’이 등장해 결의도 느껴지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이 6․25전쟁 때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을 정도로 아주 발가벗었잖아요. 시에 대해서도 그렇구요. 그래서 다른 문인들이 김 시인에게 접근을 잘 못 했어요. 사회주의자로서 내색을 못 한 것이지요. 김 시인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자로 평가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언제나 외로웠어요. 유정 씨하고 자주 어울렸지만, 술친구에 가까웠지 사상적인 동지는 아니었어요. 유정 씨는 일본에서 오래 있었고, 셰익스피어 전공자로서 와세다대학 교수였어요. 일본어를 똑 부러지게 잘했어요. 함경도 분이었는데, 수수하면서도 성실해 늘 취직을 하고 있었어요.
맹문재 : 위의 작품을 읽으니 사회주의를 지향한 해방기의 시인들이 떠오르는데, 혹시 이병철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물론 만나기 전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요. 술을 좋아하는 시인이었어요.
맹문재 : 오장환 시인에 대해서는 언젠가 자세하게 말씀해주신 적이 있는데, 이용악 시인을 만난 적은 있으신지요?
김현경 : 한두 번 김순남 작곡가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오빠네 집에는 늘 김남천, 함세덕 등 젊은 문인들이 들끓었어요.
맹문재 : 김병욱을 한국전쟁 동안 만난 적이 있다고 언젠가 말씀하셨지요.
김현경 : 김병욱 시인이 월북했다가 6․25전쟁 때 내려와 혜화동 로터리에서 만났어요. 김 시인의 실력을 굉장히 탐내었어요. 언더우드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혀 갔다가 월북했어요. 연희대 교수였어요. 김 시인이 의용군에 끌려갔다고 하니까 같이 이북으로 가서 찾아보자고 했어요. 이북에 김순남도 있으니 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황혼」이에요. 1961년 3월 30일자 『민족일보』에 발표했어요. 원제는 「숫자」였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은 20대에 6․25전쟁을 겪었고, 30대에는 충돌이 많았어요. 글을 쓰다가도 그랬지요. 그런데 40대에 들어서니 점잖아졌어요. 술도 덜 마시고, 생활 전체에 밀착해 왔어요. 나를 무척 깊이 사랑하는 모습도 보였어요. 애처가의 마음을 가지고 생활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시장에 쫓아와 장바구니를 들었고, 나를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할 때는 꼭 차가 떠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어요. 두 사람의 호흡이 빗나가지 않고 맞았어요. 그 무렵에 쓴 작품이에요.
맹문재 : 이 작품에 나오는 ‘지아이 가리’는 미국 부대원 식으로 머리를 깎는 것이지요? 사전에 찾아보니 GI는 ‘Government Issue’로 미국에서 특별한 일에 쓰려고 소집한 병사를 의미하네요.
김현경 : 미국 군인들이 머리를 짧게 자른 모양을 말하는 것이지요. 김 시인은 자기 모양새에 대해 민감했어요. 내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구제품 시장에 가서 김 시인의 옷을 사드렸어요. 곤색을 많이 샀고, 브라운색도 샀어요. 넥타이도 사드렸어요. 김 시인이 세상을 뜬 뒤 유정 시인에게 옷을 많이 드렸어요.
맹문재 : 작품이 “들오리가 서투른 앉음새로/병아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나의 주변에 말짱 ‘반동’만 앉아 있어/객소리만 씨부리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고 한 위의 연과 연결해보면 방금 말씀하신 김 시인의 생활 변화를 볼 수 있네요.
김현경 : 닭들을 키우면서 병아리를 품는 모습을 본 것이지요. 어미 닭의 그 모습은 소중하고도 숭고하지요. 좀 전에 말한 대로 김 시인은 40대에 들어 생활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먼 곳에서부터」예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데, 소개해볼게요. 김수영 시인이 몸이 아파 늘 신경을 쓰신 것 같네요.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먼 곳에서부터」 전문
김현경 : 천식으로 기관지가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래를 뱉기 위해 타구가 옆에 있어야 했어요. 결핵성 치질을 앓고 있었고, 위산 과다였어요. 빈속에 술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에요. 김 시인이 고무신을 신고 마을에 나가면 얼굴이 하얘서 마을 사람들이 환자로 생각할 정도였어요. 김 시인은 늘 건강에 신경 썼어요. 좀 전에 말했듯이 40대가 되니 자기 몸을 아꼈어요. 술도 덜 먹고, 담배도 끊으려고 했고, 명동에도 자주 나가지 않았어요. 과음이나 폭주를 하지 않으니 당연히 주사도 심하지 않았지요.
맹문재 : 위의 작품에서 능금꽃이 나오잖아요. 사과와 다른 종인지요?
김현경 : 사과와 비슷하지만 다른 종이에요. 사과를 축소해놓은 것 같은데 이쁘지요. 자하문 밖이 다 능금 밭이었어요. 사람들이 자루에 한 접씩 담아 사 갔어요. 현진건 소설가의 집 일대가 모두 능금 밭이었어요. 현진건의 딸이 있었는데, 진명여고 1년 선배였어요. 현진건의 집에는 양계장도 했는데, 보기가 참 좋았어요.
맹문재 : 위의 작품에 “여자”가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에게 여자 문제는 없었겠지요?
김현경 : 그럼요. 여자 문제가 전혀 없었어요. 그 당시 연말에 신문사나 큰 출판사에서는 인기 작가를 모시고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김 시인도 한두 번 초대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 자리에 가면 술을 먹고, 여자를 불러준다고 김 시인이 말한 적이 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아픈 몸이」이에요. 1961년에 창작했는데, 역시 미발표 작품이에요. 이 작품에 “베레모”가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이 실제로 쓰고 다녔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베레모를 쓰지 않았고 대신 벙거지를 쓰곤 했어요. 베레모는 김이석 소설가가 썼어요.
맹문재 : 위의 작품에는 “골목을 돌아서”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 마포구 구수동에 골목이 많았는지요? 그리고 김수영 시인이 골목을 잘 다녔는지요?
김현경 : 마포구 구수동 동네에 골목이 많았고, 김 시인이 산책 삼아 잘 다녔어요. 배인철 사건 이후 김 시인과 데이트를 할 때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뒷골목을 다녔지요. 봄에는 구멍가게에서 파는 말린 새우를 사서 김 시인에게 간식거리로 건넸고, 알타리무를 사서 입으로 깎아 드리기도 했어요. 김 시인이 나에게 선물로 사준 클로버 시계며 상아로 된 거울 등도 길거리를 다니다가 사서 온 것이에요. (웃음)
맹문재 : “신이 찢어지고”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김 시인이 외출할 때 무슨 신을 신었는지요?
김현경 : 집에서는 흰 고무신을 신었어요. 외출할 때는 구두를 신었지요. 그 당시에는 흰 고무신을 신고 명동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맹문재 : 왜 “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라고 했을까요? “저 말[馬]도 절망의 소리”를 낸다고 들었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절망에서 출발하고, 절망에서 연애하고, 절망에서 살아야 했지요. 김 시인이 살아온 시대적인 상황도 그러했지요. 그 당시에 서울에 마차가 있었어요. 전차가 있었지만, 마차도 교통수단의 한 가지였어요.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녔어요. 나도 돈암동에서 을지로 4가까지 걸어 다니곤 했어요.
맹문재 : 위의 작품에서는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고 하고 있는데, 왜 “온갖 적들과 함께”라고 했을까요?
김현경 : 실제의 마음과 다른 표현이에요. 적이 속 다르고 겉 다르기에 김 시인도 그렇게 대응한 것이지요.
맹문재 : 위의 작품은 “무한한 연습과 함께”라고 마무리 짓고 있어요. 김 시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인지요?
김현경: 그럼요. 책을 많이 읽고,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메모를 자주 했어요. 같이 길을 가는 동안에도 딴 생각하는 때가 많았어요. 시를 생각한 것이지요. 뼛속까지 시인이었어요. 헌책방에도 자주 들렀는데, 책을 다 읽으면 팔아 버렸어요. 나하고 살려고 왔을 때 책을 가지고 왔는데, 몇 권 되지 않더라고요. (웃음)
맹문재 : 번역하는 일도 꼼꼼하고 성실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연습을 많이 하는 편에 속하는 일이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큰 번역거리가 들어오기 전에는 『애틀랜틱』이나 『하퍼스』에 실린 글들을 번역해서 출판사에 팔았어요. 제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이야기 등 일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들이었어요. 『희망』이나 『아리랑』 등에 갖다 주었어요. 미도파 옆 뒷골목에 외국 잡지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사이에서 김 시인의 별명이 ‘애틀랜틱’이었어요. “애틀랜틱이 부탁을 했는데”, “애틀랜틱이 왔다 갔어” 등으로 김 시인을 부른 것이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은 번역한 글들을 본명으로 쓰지 않고 가명으로 썼어요. 그러자니 이름을 짓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했지요. 그래서 다른 집의 문패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어요. ‘윤이상’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적도 있어요. 물론 작곡가 윤이상을 모르는 상태로 쓴 것으로 동명이인이지요.
맹문재 : 귀한 정보네요. 앞으로 『희망』이나 『아리랑』 잡지를 유심히 살펴봐야겠네요. 김수영 시인이 번역한 글들이 가명으로 많이 발표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네요.
다음으로 읽을 볼 작품이 「시」에요. 1961년에 창작한 작품으로 매체에 발표되지는 않았네요. 이 작품의 첫 행이 “어서 일을 해요 변화는 끝났소”라고 시작하는데, ‘변화’는 무슨 의미일까요?
김현경 : ‘변화’는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4․19혁명이 끝났다는 것으로 보여요. 5․16쿠데타도 포함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물소는 호남 지방에서는 못 보았는데”라는 구절이 나와요. 김수영 시인이 호남을 몇 번이나 다녀왔는지요?
김현경 : 1953년 문학강연이 있어 다녀온 적이 있어요. 이병기 시조시인의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분이라고 했어요. 그곳에서 고은 시인을 처음 만났어요. 고은 시인이 김 시인에게 시를 보여주었대요. 재주는 있는데 공부가 좀 더 필요하다고 나에게 말했어요.
김 시인이 1961년에 소록도를 다녀온 적도 있어요. 「소록도 사죄기」라는 수필도 있지요.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고 왔어요. 5․16쿠데타 이후 김종필이 착상해 문화인들을 이용한 것이었어요.
맹문재 : 제가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김수영 시인이 군산에 간 날짜는 1953년 1월 26일이었고, YMCA에서 초청한 문학강연이었네요. 또한 소록도는 전남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데, 섬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해서 소록도(小鹿島)라고 불린다고 하네요. 이 작품에는 “편지 봉투 모양으로 누렇게 결은/시간과 땅”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결은’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김현경 : “편지 봉투 모양으로 누렇게 결은”은 편지 봉투가 오래되어 누렇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결은’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의미에요.
맹문재 : ‘결은’은 그런 의미도 될 수 있지만, 사전적인 의미로는 ‘겯다’의 활용형으로 “기름 따위가 흠씬 배다. 또는 그렇게 하다.”이네요. 이와 같은 의미로 읽으면 “시간과 땅”의 구절이 잘 이해되네요. 땅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김수영은 거기에 “기름을 주라”라고 한 것이지요. 마치「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라고 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네요. “대숲 사이로 침입하는 무자비한 푸른 하늘”은 참으로 여실한 묘사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의 시들은 참으로 예리하면서도 델리커시해요. 섬세하지요.
맹문재 : “미친놈 본으로 어서 또 가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미친놈 본’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김현경 : ‘본’이란 ‘본질’이라는 뜻으로 읽히네요. “미친놈 본질”이라는 의미이지요. 이 말을 보니 문득 간토에서 지진이 일어나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일이 생각나네요. 그때 일본인과 조선인이 외모도 비슷하고 입은 옷도 비슷하니 구분이 잘 안 되었어요. 그래서 일본놈들이 밥주걱을 내보이며 일본말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사모지(しゃもじ)인데, 대부분 잘 몰랐어요. 그래서 많은 조선인이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맹문재 : 작품에 나오는 “타마구”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석탄을 건류할 때 생기는 기름 상태의 끈끈한 검은 액체네요. 아스팔트 도로포장에 사용되는 아스콘이기도 하네요. 그리고 “짜장”이란 말은 ‘말 그대로 틀림없이’의 뜻이네요. 이 작품에서 보면 “감기가 가도 감기가 가도”라는 구절이 나와요. 김수영 시인이 감기를 자주 앓았는지요?
김현경 : 늘 감기를 달고 있었어요. 기관지가 나쁘니까 가래도 많이 나왔어요.
맹문재 : “사전을 보며 쓰는 나이와 시”라는 구절이 나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존경하고 싶은 것 중 한 가지는 한눈을 안 팔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집안 식구들이 김 시인의 서재 근처에서는 늘 조심하고 다녔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전향기」에요. 작품의 1연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소련을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했었다”예요. 당시 지식인들은 소련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가 봐요.
김현경 : 그럼요.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러시아 문학을 미국 문학보다 더 높게 생각했어요. 미국 문학이 향락주의라면 러시아 문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있듯이 보다 진지했지요.
맹문재 : 2연에는 “소련을 생각하면서 나는 치질을 앓고 피를 쏟았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무슨 의미인지요?
김현경 : 소련을 이상으로 삼고 열정적으로 공부한 것을 비유한 것이지요. 김 시인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진지하게 다 읽었어요. 김 시인은 러시아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인류에 대한 고뇌를 배웠다고 보여요.
나는 안톤 체호프에 빠져 있었어요. 이화여대에 박노경 교수라는 분이 있었어요. <문학개론>을 강의했는데 명치시대의 개론을 그대로 번역해서 강의 교재로 사용했어요. 나는 벌써 다 읽었기에 아주 따분했어요. 그래서 참다못해 학교에 투서를 했어요. 지나간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박 교수가 다음 강의 시간에 들어와 학생들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어요. 내 순서가 되었을 때 강의 시간이 다 되었어요. 그래도 말해보라고 해서 요즘 이태준, 이광수 등의 우리 문학작품을 읽고 있으며 체호프의 소설에 빠져 있다고 말했어요. 작품을 비교해보니 체호프의 인생 경험의 두께가 이태준의 작품보다 두껍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박노경 교수가 나를 칭찬하면서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친구로 추천했어요. 내가 학교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어요. (웃음) 그때 학생들 사이에는 소위 좌익과 우익이 분명했어요. 진보적인 학생들은 독서회라는 것을 했어요. 한번 참석해보니 『자본론』을 읽고 있었어요. 삐라(전단지)를 주기도 했어요.
맹문재 : 작품에는 “일주일 동안 단식까지 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실제로 김수영 시인이 단식을 한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단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김 시인은 꼭 세 끼를 드셨어요. 건강을 챙겼어요. 상차림이 매우 까다로워 반찬을 대충 올리면 안 되었어요.
맹문재 : 작품에는 “새삼스럽게 소화불량증이 생겼다”라는 구절도 나오네요.
김현경 : 술을 많이 먹어 위가 망가졌기 때문이에요. 과음해서 위산 과다가 있었어요. 두통까지 있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작품에서 “내가 너무 자연스러운 전향을 한 데 놀라면서/이 이유를 생각하려 하”고 있어요. 그리고 “5․16 이후” “복종의 미덕!/사상까지도 복종하라!”는 것에 저항하고 있어요. “치질도 낫기 전에 또 술을 마”신 행동이 그 모습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자연스럽게 전향했어요. 본질적으로 좌익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자였어요.
맹문재 : 작품에서는 “중공(中共)의 욕을 쓰고 있”다고 했어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데 소련에 비해 중공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네요.
김현경 : 당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는데, 그에 비해 중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적」이에요. 『신사조』 1962년 7월에 발표한 작품이네요. 이 작품에 “김해동”과 “정병일”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아시는지요?
김현경 :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김 시인은 바깥에서 만난 사람들을 잘 얘기하지 않는 편이었어요. 김 시인이 말하는 적에는 나도 끼어 있었어요. (웃음)
맹문재 : 작품에는 “순사”도 적으로 호명하고 있네요.
김현경 : 그렇지요. 성북동에서 살 때 어느 날 김 시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통금이 있던 때이지요. 그래서 다음 날 새벽 길가에 있는 파출소를 거쳐 종로 4가에 있는 파출소에 들어가니 김 시인이 있었어요. 상황을 들어보니 다른 데는 깜깜한데 왜 여기만 불이 환하냐며 파출소 앞에 방뇨를 해 붙잡힌 것이에요. 인민가도 불렀대요. 그래서 내가 사과를 하고 김 시인을 풀어 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빨갱이 새끼여서 안 된다고 하며 경찰서로 넘긴다고 했어요. 그러고 있으니, 김 시인이 갑자기 엉엉 울었어요. 파출소가 난리가 났어요. 그랬더니 파출소에서 귀찮다고 여기고 빨리 데려가라고 했어요. 아침 6시쯤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 시인이 “나 잘했지?” 하는 것이었어요. 연극을 한 것이었지요. (웃음)
맹문재 : “땅 주인”도 적으로 여기고 있네요.
김현경 : 우리 집의 집문서가 확실하니 으레 우리 땅으로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땅 주인이 나타났어요. 예수쟁이였어요. 땅이 넓으니 살 수가 없어 도지세를 내었어요. 우리가 양계장 등 약 5백 평 정도 사용했어요. 김 시인이 땅 주인을 대놓고 욕을 하지는 않았지만, 미워한 것은 사실이지요.
맹문재 : “과속을 범하는 운전수”도 적으로 여겼어요.
김현경 : 버스 종점이 서강에 있었어요. 우리 집에서 서강까지 가는 길이 약간 경사가 져 버스 등 차들이 과속을 했어요. 김 시인이 차 조심을 많이 했는데,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셨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워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생각하는 적은 순사, 땅 주인, 과속하는 운전사, 여편네 등인데 또 누가 있을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의 의지에 반대되는 대상은 모두 적인 셈이지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절망」이에요. 이 작품에는 “일본”과 “이북”이라는 장소와 더불어 “삼랑진”이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이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모르겠네요. 김 시인이 지방을 다녀온 적이 드물었어요. 그때는 교통수단도 좋지 않았어요.
맹문재 : 작품에는 “천수천족수(千手千足獸)”가 나오는데 불교와 관계된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우리 시어머니가 불교에 매우 심취되어 있었어요. 내가 큰아이를 낳을 때 불경을 소반에 놓고 읽으셨는데 무척 힘이 되었어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어요.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그리고 산파로 온 마을의 할머니와 함께 애를 써서 새벽 6시쯤 아이를 낳았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미인”이 나오는데 언젠가 말씀하신 유 여사가 떠오르네요.
김현경 : 유덕화 씨가 홍사중 씨와 결혼했어요. 신라호텔에서 했는데, 정말 멋있었어요. 주례는 송지영 선생님이 하셨어요. 송 선생님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인가 맡고 있었어요. 송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이 중국에 편지를 보낼 때 대필할 정도로 아는 것이 많은 석학이었어요. 김 시인을 인정하는 분이었어요. 홍정희라는 추상화가 있었어요. 대전에서 첫 전시회를 해 내가 송지영 선생님께 홍 화가 전시회 홍보를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장소와 일정, 그림의 새로운 선과 빛깔의 특성 등을 상세하게 신문에 소개해주었어요. 내가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몇 점 구입했어요. 홍 화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할 정도로 그림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대단했어요. 홍 화가의 남편이 원정일 법무부 차관이었어요. 원 검사는 아주 미남인 데다가 검사 같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열려 있었어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놀랄 정도로 미남 미인이었어요. 대전 지청에 검사로 있을 때 전시회를 열어 내가 가서 구입한 것이었어요. 그 뒤에 나를 초대해서 아들 우를 데리고 몇 번 놀러 가기도 했었어요. 톨게이트에서 통행료 표(티켓)를 잃어버린 일화가 생각나네요. 홍 화가는 우리 둘째 시누인 김수련의 친구의 친구였어요. 둘째 시누이의 남편인 채현덕 씨가 강릉에서 병원을 하고 있을 때, 홍한표라는 검사와 가까웠는데 그 부인이 박 여사였어요. 그 박 여사의 친구가 홍 화가였어요. 박 여사가 나에게 옷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서 서로 알게 되었어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브라더미싱을 박 여사가 준 것이에요. 숙대 출신인데 부산에 극장을 다섯 개나 가지고 있는 집안의 딸이었어요. 홍 검사는 고시 합격한 뒤에 생모를 찾기도 했어요.
맹문재 : 귀한 말씀이네요. 작품에는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찾던 만년필은/처의 백 속에 숨은 듯이 걸려 있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어떤 상황인지요?
김현경 : 내가 김 시인의 만년필을 남대문 시장에서 사다 드렸어요. 파카 만년필인데 똑같은 것을 사려고 애썼어요. 김 시인은 잉크 빛깔에도 굉장히 예민했어요. 파일롯 잉크로 진한 곤색을 썼어요. 지금도 김 시인이 쓰던 파카 만년필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맹문재 : “문표”, 즉 문패 얘기도 나오는데 구수동 집의 문패이겠지요.
김현경 : 구수동 집의 문패를 박일영 화가가 만들어주었어요. 박일영 씨가 문패를 가지고 온 날, 김 시인은 외출하고 집에 없었어요. 두 개를 만들어 왔는데, 하나는 집 주소이고, 다른 하나는 김수영의 이름이었어요. 한문으로 쓴 도안 글씨로 참 잘 썼어요. 못을 박아 달아주고 갔어요. 김 시인이 문패를 보고 매우 만족해했어요. 김 시인보다 박일영 씨가 더 좋아했어요. 술을 많이 마시고 한심하게 보이기도 한 김 시인이 집을 마련하고 자식을 두고 가정을 영위하고 있으니 매우 대견하게 여겼던 것이지요. 그 문패를 떼서 잘 보관하고, 사진이라도 찍어두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쉬움이 드네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파자마 바람으로」이에요. 『한양』 1962년 10월호에 발표되었네요. 작품에서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어떤 의미인지요? 작품의 전문을 인용해볼게요.
파자마 바람으로 우는 아이를 데리러 나가서
노상에서 지서의 순경을 만났더니
“아니 어디를 갔다 오슈?”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파자마 바람으로 닭모이를 주러 나가서
문지방 안에 석간이 떨어져 뒹굴고 있는데도
심부름하는 놈더러
“저것 좀 집어와라!” 호령 하나 못하니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파자마 바람으로 체면도 차리고 돈도 벌자고
하다 하다 못해 번역업을 했더니
권말에 붙어나오는 역자 약력에는
한사코 xx대학 중퇴가 xx대학 졸업으로 오식(誤植)이 돼 나오니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파자마 바람으로 주스를 마시면서
프레이서의 현대시론을 사전을 찾아가며 읽고 있으려니
여편네가 일본에서 온 새 잡지 안의
김소운의 수필을 보라고 내던져준다
읽어보지 않으신 분은 읽어보시오
나의 프레이서의 책 속의 낱말이
송충이처럼 꾸불텅거리면서 어찌나 지겨워 보이던지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파자마 바람으로」 전문
김현경 : 그와 같은 꼴을 보이니까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부끄러워한 것이지요. 놈팽이로 보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했지요. 파출소가 우리 집 뒤 언덕에 있었어요. 김 시인은 여름에는 옥양목을, 겨울에는 솜바지 한복을 즐겨 입었어요. 김 시인의 장례 때 국회의장이며 서울시장이 조화를 보내오니 동네 사람들이 김 시인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고 놀랐어요.
맹문재 : 2연에 나오는 “심부름 하는 놈”은 양계 일을 돕던 만용이인지요?
김현경 : 만용이지요. 김 시인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안 했어요. 만용이가 몰래 계란을 갖다 팔아도 눈을 감아주었어요. 남의 집에 살면서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레 나에게 무안을 주었어요.
맹문재 : 3연에 “권말에 붙어나오는 역자 약력에는/한사코 xx대학 중퇴가 xx대학 졸업으로 오식(誤植)이 돼 나오”는 것을 밝히고 있어요.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지요. 출판사들이 저자의 학력을 높여야 독자에게 신뢰를 주고 책 판매에도 유리하다고 여기고 일부러 썼을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자기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는데 출판사에서 대학 졸업으로 약력을 쓰는 것을 싫어했어요. 어떤 출판사에서는 김 시인을 동경상과대학 입학이나 졸업으로 쓰기도 했어요. 언젠가 현대문학사에 다니던 수명 시누이에게 전화가 왔어요. 어떤 출판사에서 오빠의 약력을 동경상과대학 졸업으로 했는데, 확인하려는 것이었어요. 김 시인이 이 작품에서 자기 학력에 대해 확실하게 밝히니 내 마음이 다 시원해요. 학력을 좀 올려도 그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김 시인은 뭐든지 투명했어요.
맹문재 : 4연에서는 “김소운의 수필”을 소개하고 있어요. 김소운 수필가에 대해 아시는 면이 있는지요?
김현경 : 김소운 선생은 수필도 좋고 번역도 뛰어났어요. 우리나라 민요를 일본어로 번역한 『조선민요집』은 기가 막혀요. 진짜 실감이 날 정도였어요. 우리나라 문학을 일본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어요. 시도 좋고, 인물도 좋았어요.
김소운 선생하고 나하고 친했어요. 김 시인이 세상을 뜬 뒤 무슨 전람회에 가서 처음 만났어요. 내가 일반적인 축하 인사가 아니라 “좋다”라고 방명록에 썼는데, 그 옆에서 보고 차 한 잔 하자고 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어요. 그날 당신의 집에 가자고 해서 내가 차가 있으니까 우이동 집까지 모셔드렸고, 저녁을 사주시기도 했어요. 내가 사는 동부이촌동에도 몇 번 오셨어요. 아주 명필인데, 나에게 글씨도 선물로 주셨어요. 김소운 선생은 번역 등으로 수입이 꽤 많은 인기 작가였어요. 부인은 부산에서 유치원 원장이셨고, 딸과 아들을 두었어요. 아들은 좀 괴짜였고, 딸은 서강대에 다녔는데 운동권 학생이었어요. 출소하는 날 엄마가 한복을 입혀 신문에 나오기도 했어요. 김소운 씨 부인이 보통 분이 아니었어요.
멩문재 : 위의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김소운의 수필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은 읽어보시오”라고 했어요. 김소운의 수필에 호감을 가진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그럼요. 집에 문예지가 오면 내가 먼저 읽어보고 읽을 만한 작품이 있으면 김 시인에게 권했어요. 남정현의 「분지」, 박순녀의 「어떤 파리」, 전병순의 「국가」 등이 떠오르네요. 박순녀의 작품은 동베를린 사건을 다룬 것인데, 아주 잘 썼어요.
맹문재 : 프레이서의 『현대시론』을 소장하시고 계시는지요?
김현경 : 글쎄요. 한 번 찾아보지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는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를 반복해서 나타내고 있어요. 김수영 시인은 체면을 중시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체면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어요. 체면을 안 내세웠어요. 본인이 체면을 안 차리니까 이런 내용을 시로 쓴 것이지요. 가끔 동네 떡집 있는 데에 나가 할아버지들에게 술을 사드리고 어울리기도 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만주의 여자」예요. 이 작품 1962년 11월에 간행된 『사상계』 문예증간호에 발표되었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이 작품을 세 통이나 써놓았어요. 한 통은 1, 2, 3으로 표기했고, 다른 한 통은 A, B, C로 표기했고, 나머지는 ㄱ, ㄴ, ㄷ으로 표기해놓았어요. 이 작품은 김 시인이 세상을 뜨신 뒤 알게 되었어요. 나에게 작품을 쓰라고 한 적이 없어요. 세 통의 작품 중에 한 통은 이영준 교수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다른 한 통은 윤석남 화가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이영준 교수가 하버드대학에서 김수영 시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강의를 해 감사한 마음으로 주었고, 윤석남 화가에게는 김수영 시인 조각을 선물로 줘서 답례로 준 것이에요. 윤석남은 윤백남 소설가의 딸이에요. 윤석남 화가가 선물로 준 시를 변하지 않게 표구를 해서 가지고 있었는데, 김혜순 시인이 달라고 해서 주었대요. 두 사람이 친한 사이였어요. 김혜순 시인은 멋쟁이였고, 딸은 대단한 화가였어요. 오징어로 만든 작품이 기가 막힐 정도로 신비했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하는 신순남 화가가 있었어요. 한인 3세인데, 동양의 피카소로 불릴 정도였어요. 내가 그 사람의 그림에 반해 꼭 만나고 싶었는데, 2006년에 세상을 떴어요.
맹문재 : 신순남 화가의 그림을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정말 뛰어나네요. 김수영 시인이 만주의 여자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요? 실제의 인물인 것 같은데요.
김현경 : 김 시인이 만주의 여자에 대해 얘기한 적은 없어요.
맹문재 : 작품에 등장하는 만주의 여자에 대해 정리해볼게요. 김수영 시인이 만주에 있을 때 술집에서 만난 여자예요. 김수영 시인은 그녀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준 일이 있고, 더러 싱거운 충고를 한 일이 있어요. 그녀에게 애정을 느꼈다기보다는 고생하는 모습에 다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를 18년 만에 서울의 다방 건너 막걸릿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어 아주 반갑게 술을 마시고 있는 상황이에요. 술을 마시면서 그동안의 사연을 들으니 그녀는 만주에서 해방되어 고향인 평양으로 갔다가 인천으로 왔는데,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었고 큰아이도 잃었어요. 지금은 남은 딸아이 둘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요. 김수영 시인은 그녀를 보면서 시대의 여자로 인식하고 있어요.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김수영 시인이 “한 잔 더 주게 한 잔 더 주게”라고 부탁하는데, “여자는 술을 안 따른다”라고 섭섭해하고 있어요? 왜 그 여자는 술을 안 따를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이 돈이 없어 보인 것이지요. 그래서 술값을 못 받을까 봐 술을 안 따른 것이지요. 같이 간 친구가 내는 외상술이잖아요. (웃음)
맹문재 : 김 시인이 술을 끊은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한 두세 달 끊었다가 다시 마셨어요. 담배도 끊은 적이 있어요. 어떤 날은 머리도 빡빡 깎고 집에 들어왔어요.
맹문재 : 작품에는 “피안도 사투리”나 “평안도 사랑”이라는 구절이 나와요. 김수영 시인은 평안도를 비롯해 북한 사람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모습을 띤 것 같아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이북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어요. 특히 여성들을 좋아했어요. 여성들이 아주 주체성이 강한데, 그 점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맹문재 : 작품에 “상제보다 복재기가 더 섧다”는 표현이 나와요.
김현경 : 상제(부모의 상을 입고 있는 사람)보다 복재기(친척의 복을 입은 사람)가 더 서럽다는 뜻이지요. 일에 직접 관계가 있는 사람보다 관계가 없는 사람이 더 많은 걱정을 한다는 뜻이지요.
맹문재 : 귀한 말씀 감사해요.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은 「장시 1」이에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 『먼 곳에서부터』(공저)가 있다.
■ 맹문재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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