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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실 스크랩 희망의 힘
아름다운사람 추천 0 조회 50 07.11.07 15: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희망의 힘

제롬 그루프먼 지음 / 이문희 옮김

넥서스BOOKS / 2005년 5월 / 308쪽 / 13,000원







▣ 저자  제롬 그루프먼(Jerome Groopman)

컬럼비아 의대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생리학 및 외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했으며, 하버드 의대 산하의 시드니 파버 암 센터 및 소아병원, 캘리포니아 의대(UCLA)에서 혈액학과 종양학 전문의가 되었다. 국립 심장․폐․혈액 연구소의 에이즈 자문 위원, 식품 의약품 안전청(FDA) 산하 기관인 생물 평가 연구센터(CBER)의 자문 위원, 국립 과학 학술원(NAS) 산하의 의학 연구소 초대 회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부속병원인 베스 이스라엘 디커니스 종합병원의 실험의학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뉴 리퍼블릭》《워싱턴 포스트》《뉴욕 타임스》《뉴요커》《보스턴 글로브 선데이 매거진》 등에 의학․생물학 및 의료 정책에 관련된 글 150여 편을 기고해 왔으며, ABC 방송의 난치병 환자 관련 연속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저서로 『우리 시대의 기준(The Measure of Our Days)』(1997), 『못 다한 이야기들(Second Opinions)』(2000) 등이 있으며, 홈페이지는 jeromegroopman.com이다.


▣ 역자  이문희

1970년 춘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3년 동안 출판사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쓰레기 소탕 대작전』『그래, 나 못된 여자다』『자살의 이해』『커피 위즈덤』『천지창조』(인챈티드 월드 시리즈)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질병 치유에 있어 마음의 능력은 오랫동안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병이 회복될 거라 스스로 믿는 환자들에게 실제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종양학 전문의이자 현재 하버드 의대 교수로 있는 제롬 그루프먼은 오랜 임상 경험과 자신의 만성 질환의 치유 과정을 통해 희망이라는 감정이 갖는 치유력의 진정한 의미와 효능을 알게 된다.


제롬 그루프먼은 《라이브러리 저널》 선정 ‘최고의 책’이자 2004년 초에 아마존닷컴 종합 1위를 차지했던 『희망의 힘』에서 병마와 싸운 환자들과 자신의 극적인 실화를 풀어놓으며 감정이 병의 증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준다. 그는 희망이 치유의 진정한 근원이라 믿고 있으며 그것을 보여주는 생물학적, 의학적 근거를 풍성하게 제시한다. 또한 의사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중소설만큼이나 높은 감수성이 배어 있는 글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긴다.


저자는 의대 본과 4학년 시절부터 몇 년 전까지 30년간의 이야기를 때로는 환자의 입장에서 간절하게, 때로는 의사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들려주는데, 그는 다른 ‘희망 전도사’들처럼 ‘희망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으로 허위, 과장 광고하지 않는다. 질병의 진행 단계, 개인별 신체적․정신적 특성, 주변 환경 등에 따라 희망을 갖고도 병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고 거짓말처럼 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제 환자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인간의 질병 치유에 생물학적 효력을 발휘하며, 우리는 희망의 치유력에 대해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의 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 차례

머리말 - 희망 이야기를 시작하며


1장  준비되지 않은 시절

2장  진실된 희망, 거짓 희망

3장  희망의 권리

4장  한 걸음씩 차근차근

5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계속된다

6장  고통의 미로를 빠져나오며

7장  희망의 생물학

8장  희망을 해체하다


맺음말 - 나는 무엇을 배웠나


 



희망의 힘

제롬 그루프먼 지음 / 이문희 옮김

넥서스BOOKS / 2005년 5월 / 308쪽 / 13,000원



머리말 : 희망 이야기를 시작하며


왜 어떤 사람은 중병에 걸리고도 희망을 품는데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할까? 과연 희망은 실제로 병의 경과를 바꿔 병을 낫게 할 수 있을까? 지난 30년간 의사 생활을 해오면서 만난 아주 특별했던 몇몇 환자들의 삶을 통해 나는 이 물음의 답을 찾고자 했다. 희망과 낙관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통 “앞으로 일이 잘 풀리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낙관이다. 하지만 희망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남의 말이나 눈을 현혹시키는 장밋빛 청사진에서 나오지 않는다. 낙관과 달리 희망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뿌리를 둔다. 희망이란 마음의 눈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을 볼 때 경험하는 상승 감정이라는 것이다. 희망은 미래로 향한 길에서 만나는 중대한 장애물과 깊은 함정까지 인정한다. 진실한 희망에는 망상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희망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그 현실을 뛰어넘을 능력을 준다.


나는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혈액종양학 의사로서 암, 혈액질환, 에이즈, 간염 환자들을 치료해 왔다. 그런데 병상을 돌며 환자들을 치료하고 실험실에 앉아 연구에 몰두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보냈건만, 환자의 질병에 희망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거치며 그런 닫힌 마음이 열렸다. 척추 수술을 잘못 받은 뒤 19년 동안 나는 계속 재발되는 통증과 장애의 미로 속을 헤맸다. 그러던 중 몇몇 우연한 사건을 겪으면서 출구를 발견했다. 오직 희망만이 내 병을 고칠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불붙은 희망은 내게 통념을 거스르는 힘겨운 치료프로그램을 시작할 용기와 끝까지 견뎌낼 탄력성을 주었다. 내 속에 희망이 일기 시작하자 내 몸의 생리 작용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과연 희망이라는 감정이 실제로 병을 고치는 데 어떤 작용을 하는지,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를 알아보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찾은 희망, 그 희망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하려 한다.


1장.  준비되지 않은 시절


1975년 7월 뉴욕, 나는 컬럼비아 대학교 의과대학에서의 마지막인 4학년 과정을 시작했다. 내가 들어간 수술 팀은 윌리엄 포스터 선생이 이끄는 팀이었다. 수련 병원의 관례대로 포스터 선생의 모든 환자는 의대생들에게 배정되었고, 학생들은 병상을 돌며 진단과 치료의 기초를 배웠다. 실습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나 역시 의대생의 자격으로 에스더 와인버그라는 환자를 맡게 되었다. 왼쪽 가슴에 종괴가 있는 젊은 여자였다. 29세. 결혼한 정통파 유대교 여신도들이 정숙함의 상징으로 쓰는 파란 머리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종교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안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대교 전통 인사를 건넸다. 환영의 미소가 돌아오는 대신 에스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환자의 양쪽 가슴을 만져보고 움찔 놀랐다. 왼쪽 가슴에서 만져지는 덩어리가 보통 큰 게 아니었다. 암 덩어리가 이 정도로 커지고 부근의 림프절에까지 퍼지려면 수년까지는 아니라도 수개월은 걸린다. 멀쩡한 젊은 여자가 어찌 이지경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단 말인가? 하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우리의 역할은 관찰하고, 배우고, 포스터 선생의 지시를 따르는 것까지였다. 포스터 선생은 환자의 손을 잡으며 수술에 관해 궁금한 점이 없느냐고 물었고, 에스더는 수술이 끝나고 깼을 때 내가 있어주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당혹스런 포스터 선생의 눈길이 순간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 역시 혹시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해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으나 헛일이었다.


6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포스터 선생은 에스더에게 종양의 크기가 너무 큰 데다 전이된 림프절 수만도 열두 개가 넘기 때문에 암이 곧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화약 요법을 실시하여 몸 속에 남은 암세포들을 죽일 것이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내가 혼자서 다시 에스더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말했다. “제가 암에 걸린 건 하나님이 내린 벌이예요. 남편과 함께 지내는 집 안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과 불륜을 저질렀어요. 저희 회당 사람들 눈으로 보면 저는 창녀입니다. 화학 요법을 받지 않겠어요.” 성경에서는 병을 곧 죄에 대한 형벌로 간주하곤 한다.


암의 징후가 처음 나타났을 때 병원을 찾지 않음으로써 에스더는 의심할 바 없는 죽음의 길로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포스터 선생을 만나면서 그 발걸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치료를 거부한다는 건 곧 자멸의 길로 돌아감을 의미했다. 포스터 선생이 다시 에스더를 설득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원 실습이 끝나고 보스턴으로 옮겨갔으므로 나중에서야 에스더의 소식을 들었다. 암이 재발했고 처음에는 뼈로, 다음에는 간으로, 마침내 폐까지 전이되었다고 했다. 결국 에스더는 서른넷에 세상을 떠났다.


의대에 들어가 처음 이 년동안 나는 강의실에 앉아 해부학, 생리학, 약리학, 병리학에 걸친 수많은 지식들을 빨아들였다. 새로운 지식을 그득 채운 나는 이제야 비로소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시작할 준비를 온전히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지식과 통찰력을 혼동했다. 과학적 지식은 제대로 갖추었는지 몰라도 안타깝게도 영혼을 위한 준비는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에스더 일을 좁은 눈으로만 보았다. 그녀의 원리주의적인 신앙은 병을 죄의 심판으로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모든 현재와 미래가 돌이킬 수 없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견뎌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탈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생지옥이었다.


나중에서야 나는 내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깨닫기 시작했다. 실제로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고 자신에게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희망은 가능하다. 내가 뭔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내 행동들이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불러올 수 있다고 믿을 때 희망은 자랄 수 있다. 희망이란 내 능력에 대한 믿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통제할 만한 능력이 내게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 희망을 가져야만 우리는 자기 바깥의 힘에게 운명을 내맡기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이런 사실을 깨달을 만한 통찰력이 없었고, 그렇게 눈을 가린 채 긴긴 세월을 보냈다. 포스터 선생이 에스더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식으로 마지막 결심을 이끌어 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배웠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그 일의 보다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수업은 몇 년 뒤에야 시작되었다.



2장.  진실한 희망, 거짓 희망


1978년,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한 시골 읍내인 러셀에서 리처드 키스 선생의 일을 대신하는 당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유난히 뜨거웠던 8월의 어느 날, 키스 선생이 프랜시스 워커라는 환자를 소개했다. 4기 결장암 말기. 당시 나는 여전히 환자와 그 가족에게 나쁜 예후를 전달하는 방법을 몰라 더듬거리는 중이었다. 키스 선생은 말했다. “암이 당신의 목숨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 봤자 남은 시간만 훨씬 더 비참하게 만들지. 아니면 완전히 공포로 몰아넣어 완화 치료조차 거부하게 만들거나. 물론 의사마다 다 자기 스타일이 있고, 일을 풀어 가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지. 이런 상황에 처한 환자들이 사실을 너무 많이 알면 감당하지 못할 걸세.” 나는 더 이상 키스 선생을 압박하지 않았다. 절대 진리란 없다. 난 이 사람의 방식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암이 급격하게 성장하여 고통이 심해지고 나서는 결국 프랜시스와 외동딸 샤론에게 사실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샤론이 물었다. “왜 진작 이렇게 말씀해 주지 않으신거죠?” “키스 선생님도 최선의 노력을 하셨다고 생각해.” “제 생각에 그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진실에 대처할 만큼 똑똑하지 않던지, 아니면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데 샤론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울렸다. 수치심과 죄책감이 나를 옥죈 채 떠나질 않았다. 진실을 포기함으로써 키스 선생과 나는 프랜시스를 포기했고, 거짓을 말함으로써 샤론을 소외시키고 쓰라림을 맛보게 했다. 프랜시스가 죽은 뒤 키스 선생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며 눈이 흐려졌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그를 향한 분노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분노로 그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몇 년 후 어느 날 키스 선생이 쓰러졌다. 담관암이었다. 일반적으로 예후가 아주 나쁜 상태에서 진단이 나왔을 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키스 선생은 치료를 위한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앤드루스 선생님이 정말 선생님을 속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모든 게 다 뻔한 수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키스 선생은 내 물음에 완고한 침묵으로 답했다. 키스 선생이나 나 같은 의사들은 환자들의 능력을 의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희망의 능력도 의심했다. 우리는 환자들에게서 선택의 기회를 박탈했다.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선택권을.


회피, 애매한 답, 말 속의 미묘한 뉘앙스들은 전부 희망을 지속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공허했다. 그것은 거짓 희망, 유혹적이지만 순간의 만족을 위한 환상이었다. 환자에게 거짓말을 한 의사는 비록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해도 다시는 신뢰받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병이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진실은 드러난다. 이와 동시에 환자의 거짓 환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 남는 것은 오직 분노뿐이다. 프랜시스와 샤론도 그랬다. 이쯤 되면 의사가 그 어떤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해도, 그것이 아무리 진실된 희망일지라도, 그저 거짓 희망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앤드루스 선생이 의식적으로 키스 선생에게 희망의 여지를, 희미하지만 진실한 희망의 여지를 남겨 두고 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고, 저녁에 다시 돌아와서는 완치의 가능성에 더욱 힘을 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자네 저 사람을 믿나?” “네, 믿습니다.” 이후 키스 선생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암의 그림자는 수년 동안 키스 선생 내외를 따라다녔다. 담관암 같은 종양의 경우 보통 오 년 내에 재발이 없으면 완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육 년이 지난 뒤 나는 선생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담관암을 떨쳐 냈으니 이제 안도감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하지만 직접 환자가 돼 본 경험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네.” 나는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으나 의사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키스 선생이 진실과 희망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 지대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3장.  희망의 권리


1987년 어느 여름날 오후, 나는 또 다른 동료 의사의 병실을 찾았다. 하버드 의대 병리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존경과 사랑을 함께 받아 온 조지 그리핀 선생이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지 선생만큼 위암의 악성과 예후에 정통한 사람은 없었다. 조지 선생은 고용량의 화학 요법과 집중적인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는 공격적 치료를 받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속으로 혹시 조지 선생이 죽음을 너무 잘 알아서, 의사인 자신이 스스로를 그런 고문 속으로 몰아넣을 만큼 그런 극단적인 저항을 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익한 치료 속으로 뛰어드는 저 고집스러운 결정에서 조지 선생을 보호하고, 또 그의 아내를 보호하는 게 의사의 역할이 아닌가? 고문과 다름없는 이 치료를 당장 끝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맡은 역할은 그런 개입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당혹함과 연민을 숨긴 채 두 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2000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조지 선생이 위암 진단을 받은 지 십삼 년째 되던 그 해 나는 병원의 안뜰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선생님은 저를 비롯해 사실상 모든 의료진이 그 치료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알고 있었지. 환자들 중에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신의 예후가 얼마나 나쁜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네. 앞으로 가망이 어떻다고 의사들이 정확히 얘기를 해 주지 않으니까. 나는 물론 내 병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할지는 내 ‘권리’였어. 사실 기대는 안 했네만 그래도 그때 나한테는 그 길밖에 없었네. 가슴 깊이 나는 정말 살고 싶었고, 그러니 싸워야 했지. 그래야 스스로한테 나는 노력을 했다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후회가 없지 않겠나.”


진정한 자유인의 정신, 자기 운명의 결정자로 스스로를 정면으로 내세우는 자의 정신이 여기 있었다. 이것은 생존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노라며 결심하고 버텨 나갈 만큼 강인한 힘, 희망이었다. 의사는 마치 재판관인 양 절박한 환자를 내려다보고 앉아 당신이 앞으로 살날은 이제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밖에 남지 않았노라고 선고를 내려서는 안 된다. 그 환자가 그럴 줄 알고 있어도 그래서는 안 된다. 나도 조지 그리핀 선생의 일을 겪고 나서야 생사의 주관이 어느 한 의사의 권한 내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의사들은 어떤 환자라도 미리 단념해서는 안 된다. 최초 진단 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막아 놓고 선택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은 성급하고 그릇된 처사다. 최악의 상황에서 희망한다는 것은 저항, 곧 조지 선생의 설명처럼 내 삶의 조건은 내 스스로 정하겠노라는 저항의 몸짓이다. 견디며, 오래 견디며 기적이 일어날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한 얼굴인 것이다.


4장.  한 걸음씩 차근차근


1980년대에는 내 환자들 거의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많은 죽음들 앞에서 희망을 지켜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0년 초, 임상에 중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내 환자들 중의 훨씬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기보다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갈 때마다 희망이 점점 현실화되었다. 조지 선생을 통해 나는 모든 환자들에겐 설혹 가망이 아주 낮을지라도 희망할 권리가 있으며, 그 희망을 키우게끔 돕는 일이 바로 내 역할임을 배웠다. 의학이 점점 발달하자 내 자신 스스로 희망을 믿게 되고 이로써 환자들이 희망을 바라고 그 희망을 끝까지 지켜내게끔 돕는 일이 한결 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댄 콘래드라는 환자를 만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희망이 진정 현실이 되기까지는 과학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댄은 보스턴 시내의 한 건설 현장에 일하던 인부로, 어느 늦은 오후 시멘트 반죽을 들어 올리던 중 호흡 곤란을 느꼈다. 결과는 ‘공격형 비호지킨 림프종’이었다. 이러한 악성 림프종은 성장 속도가 빠르고, 종양이 기관지를 막거나 혈관과 내장을 압박할 위험이 있었다. 치료가 시급했다. 나는 댄과 이야기하면서 일부러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시작부터 의도적으로 완치의 가능성을 거론했다. 실제로 종양의 크기와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완치의 가능성은 존재했다. 하지만 댄의 얼굴은 내가 의도적으로 드러낸 투지에도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죽음의 문턱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그랬고 그 뒤에도요. 지금 제 속 깊숙한 곳에서 그 죽음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안 됩니다. 제가 압니다. 속에서 그렇다고 하니까요.”


얼마 후에야 댄 씨가 왜 그동안 치료를 거부해 왔는지 알아냈다. 군대 동료였던 가장 친했던 친구가 암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댄 씨가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댄을 진정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이해하는 데, 그리고 그의 세밀한 삶 속을 깊이 들여다보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한 걸음씩 차근차근 갑시다. 일단 첫 걸음만 떼고, 그 다음 일은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는 언제든 세울 수 있는 기차라고 생각하십시오. 댄 씨 자신이 책임자, 최종 결정자가 되시는 겁니다. 댄 씨는 분명 싸울 만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 눈에는 보이니까요.” “좋습니다.” 마침내 댄의 대답이 떨어졌다. 중간중간에 고비가 많았지만 댄은 퇴원해서 통원치료를 받았다.


댄의 치료가 끝난 지 거의 십 년이 되었다. 댄은 완치되었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씩 댄을 만나고 있으며, 그날이면 나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선다. 임상의학이란 공통 분모를 지닌 퍼즐들의 연속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해 준 이가 바로 댄이었다. 의사들은 학교에서, 레지던트 과정에서, 연구원 과정에서 자신들이 그러한 퍼즐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탐정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모든 진단 방법들 중 그 어느 것도 실마리를 줄 수 없는 제2의 퍼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왜 어떤 이는 희망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어떤 이가 희망을 찾도록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부디 그 상대를 진정으로 깊이 알아야 한다. 제2의 퍼즐을 푸는 실마리는 바로 그의 지나온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5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계속된다


수십 년 의사 생활을 하면서 제각각 특정한 질환을 앓는 수천 수백 명의 환자를 만나다 보면 자연 각종 질병들의 다양한 증상들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을 아는 일만큼은 절대 끝이 안 보인다. 이것은 의사로서 누리는 귀한 특권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환자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가 미래의 환자들을 진료하는 데 도움이 됨은 물론이거니와 내 스스로 앞날에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의 어느 날 바버라 윌슨이라는 환자를 만났다. 유방암이었다. 바버라는 나보다 한 발 앞서가 있는 환자였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가능한 한 오래, 제 인생에 가치가 남아 있는 한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치료의 한계를 정하는 문제는 보통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긴 대화와 환자의 오랜 고민 뒤에야 등장한다. 그런데 바버라는 이미 그 한계를 정할 작정으로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그 어떤 전망에도 바버라는 두려움도 불안도 드러내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인 죽음에 대한 그 깊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일이 과연 가능한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치료가 계속 되었다. 간으로 전이된 종양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제 한계선이 어디까진지 아시죠? 제 목표도 아시리라 생각해요. 난 아직 포기할 준비가 안 됐어요.” 나 역시 포기할 준비가 안 됐노라고 했다. 바버라는 다시 세 차례의 화학 요법을 받았으나 간과 뼈로 전이된 암은 점점 증식해 갔다. 이제 바버라에게 말할 때가 왔다. “바버라,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여기까지 오면서 우린 매 순간마다 서로에게 솔직했어요. 지금 이 시점에선 이제 제가 처방해 드려서 도움이 될만한 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버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리. 있어요. 당신에겐 우정이라는 약이 있죠.” 얼마 뒤 암은 결국 바버라의 생명을 앗아갔다. 나는 의학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러면서 나는 동시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바버라는 과거 그 어떤 환자한테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녀 자신을 내게 열어 보였다. 환자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느낌과 생각을 보여 준다는 건 의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임종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부정’의 단계, 이것은 진단의 충격에서 비롯된다. 부정이 지나고 이어 ‘분노’가 찾아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길 수 있단 말인가?”하며 분노를 터트리던 환자는 명백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이른바 ‘협상’ 단계로 들어간다. 그 무엇이란 대개 약속이다. 종교적으로는 교회에 나가거나 착한 일을 하겠다는 약속, 세속적으로는 모든 검사나 진료에 순순히 응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래도 나아지는 기미가 없으면 ‘우울’ 단계가 시작된다. 환자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고 이어 다섯 번째 단계인 ‘수용’이 시작된다. 하지만 퀴블러 로스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수용 단계에 들어서더라도 여전이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병이 낫고 죽음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떨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한 믿음을 일컬어 퀴블러 로스 박사는 ‘희망’이라 했다.


죽음을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를 깨는 데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직업상 죽어가는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하는 이들은 퀴블러 로스 박사의 패러다임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또 나는 무엇보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정의 내린 희망에 동의할 수 없다. 프랜시스 워커의 사례는 내게 그 반대의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바버라가 보여 준 그녀만의 침착함과 수용의 태도는 처음부터 존재했다. 바버라는 결코 미래의 비전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랬다. 바버라가 내게 보여준 희망은 퀴블러 로스 박사가 얘기한 희망과는 많이 달랐다. 바버라의 희망은 현실에 근거한 희망, 그러면서도 꺼지지 않는 강한 희망이었다.



6장.  고통의 미로를 빠져나오며


1979년 가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을 위한 훈련을 하던 중에 나는 요추 디스크가 탈출하는 부상을 입었다. 통증이 즉시 가라앉지 않아 디스크 절제술을 받았는데, 수술 뒤에도 나는 이전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반년 뒤 다시 쓰러져서 척추유합술이란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서 깨어나니 나는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마취 기운이 점점 사라지면서 난생 처음 겪어 보는 뼈를 깎는 듯한 통증이 하체를 뒤틀었다. 더더욱 무서운 사실은 두 발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몇 달씩 비교적 통증이 덜한 휴식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잠잠하다가도 어느 순간 분명 별 무리가 없었을 동작이었음에도 요추에 격렬한 통증 발작이 일어나곤 했다. 그렇게 십구 년을 살았다. 내 삶의 벽은 마치 감옥 하나를 가운데 두고 사방을 둘러친 전기 울타리 같았다.


점점 깊어지는 통증에 막막해진 나는 현재 일하고 있는 의료 센터 전문의에게 소견을 요청했고 재활의학 전문의인 제임스 레인빌 박사를 소개받았다. 레인빌 박사는 말했다. “지금까지 고통을 피했기 때문에 선생의 삶의 영역은 이렇게 좁디 좁은 공간으로 줄어들었소. 고통을 무시하시오. 선생의 허리 근육들은 정상 긴장도의 30퍼센트에 불과하오. 인대와 힘줄도 오랫동안 쓰지 않아 수축된 상태요. 계속 척추와 근육과 인대를 사용하면서 힘을 길러 그런 기억을 지우시오. 그러면 과거에 입은 손상을 보상하고 다시 정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소.” 병원을 나오는데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의사로서 나 역시 희망의 필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희망을 포기했었다. 나에게는 외부의 목소리, 나를 이끌어 줄 강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만일 레인빌 박사가 틀렸다면? 박사의 혹독한 재활 프로그램이 결국 통증만 떠안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잃어 버린 활동들을 다시 시작하는 내 모습을 그려 보았다. 가능성의 위력은 저항하기엔 너무 컸다. 재활 훈련을 하는 동안 통증과 피로가 최고조에 달하고 의심이 고개를 들면서 귀에 거슬리는 강한 목소리로 레인빌 박사의 말은 다 헛소리였다고 외쳐댈 때마다 나는 장밋빛 미래의 그림을 애써 떠올렸다. 이런 상상을 할 때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에너지의 물결이 내 몸 속으로 쏟아지듯 흘러들어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내 척추는 고통의 불협화음 속에서도 눈에 띄게 조용해 갔다. 이러한 몸의 반응에 스스로가 바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묘한 호기심도 동했다.


재활 치료가 점점 편해지고 열정도 점점 붙었다. 새로운 단계에 도전할 때마다 며칠씩 경련과 통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럴 때마다 레인빌 박사한테 배운 대로 지금 내 몸은 낡은 기억을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중이라는 주문을 계속 외면서 모든 고통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내 선택들과 관련해 어느 정도의 지배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로부터 일 년이 조금 지나자 일상의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두려움 없이 아침을 맞았고, 하루 종일 편안히 돌아다녔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기적만 같았다.


7장.  희망의 생물학


통증에서 해방된 뒤 나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내가 과연 무엇을 배웠는가를 생각했다. 그 경험을 통해 어떻게 내 환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었는지, 또 과연 어떤 식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물론 내 상황과 환자들의 상황은 분명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유사점들이 있었다. 내 환자들의 경우 대개는 고통스럽고 사람을 녹초로 만드는 치료를 통과해야 비로소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키스 선생과 댄 콘래드의 경우가 그랬듯 가장 힘든 부분은 바로 첫 발을 딛는 일이다. 두려움 때문이다. 많은 경우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무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 두려움을 이길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그리고 고된 치료를 끝까지 견뎌내도록 날마다 의지를 북돋워 주는 게 바로 희망이다.


나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물었다. 과연 희망이라는 감정에 환자의 회복을 돕게 만드는 어떤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 만일 그 같은 희망의 생리 작용이 존재한다면 그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아니면 희망이란 단지 특정 생리적 변화들을 동반하기는 하되 그것들과 아무런 인과 관계는 없는 감정일 뿐인가? 내 환자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나의 탐색은 재활 프로그램이 끝난 그 다음 해에 시작되었다.


연구 초기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그 사람들 중에 브루스 코언 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정신 치료 및 연구 계통으로 미국 내 가장 유명한 병원으로 꼽히는 맥린 병원의 원장이기도 했다. 코언 박사는 희망의 생리 작용에 대한 탐구라면 그 무엇보다 위약(플라시보) 효과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믿음과 기대, 이 두 가지 희망의 주성분은 플라시보의 생물학적 효과에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플라시보’라는 말은 ‘I shall please(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원래는 죽은 자를 위한 가톨릭의 저녁 기도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애초의 의미대로 의사는 당의정이나 식염수 같은 플라시보를 지나친 요구를 하거나 절박한 상황의 환자를 달래기 위해 처방한다.


이것이 과연 희망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는 천연 모르핀이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엔도르핀’과 ‘엔케팔린’으로 불리는 화학 물질이다. 희망의 두 가지 주성분인 ‘믿음’과 ‘기대’가 뇌에서 엔도르핀과 엔케팔린이 분비되게 하고, 이들이 모르핀 효과를 흉내냄으로써 통증이 차단된다는 것이다. 결국 뇌는 통증 메시지를 수신하지 못한다. 이런 결과는 건강한 자원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뿐만 아니라, 통증과 활동 제한을 유발하는 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 실험에서도 나타났다. 희망의 주입이 재활 치료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만큼 충분한 통증 완화 효과를 끌어 냈음을 증명한 것이다.


뇌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제 육체가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19세기의 저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신체 조직의 물리적 상태에 대한 신경 정보가 인간의 긍정적, 부정적 감정의 주요 조절자라고 주장했다. 댄 콘래드의 경우가 이런 식의 뇌와 몸의 상호 작용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다. 몸의 쇠약으로 고통이 오고, 그 고통은 절망감을 증폭시킨다. 절망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뇌의 엔도르핀과 엔케팔린의 분비량은 점점 줄어들고 통증을 배가하는 콜레시스토키닌의 분비량은 점점 늘어난다. 이러한 신경 화학 물질들의 변화로 고통이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그만큼 희망을 더더욱 느끼지 못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게 문제의 열쇠다. 희망의 첫 불꽃으로 이를 끊을 수 있다. 희망이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8장.  희망을 해체하다


생리 작용의 복잡성을 생각하게 되자 이제 플라시보 효과 너머에 존재하는 긍정적 감정들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리처드 데이비슨 교수를 만나기 위해 한겨울 눈보라를 뚫고 위스콘신 주 매디슨으로 갔다. 데이비슨 교수는 실험심리학자이자 긍정적 감정의 생리 작용을 연구하는 세계적 전문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연구 목적으로 삼은 것은 인간의 뇌가 어떤 방식으로 긍정적 감정들을 생산해 내며,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삶의 도전들에 대응해 가는지를 이해하는 거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지식이 언젠가는 곤경에 처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기술과 치료법 개발에 이바지하리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저는 희망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뤄진 감정으로 봅니다. 인식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이죠. 우리는 뭔가를 희망할 때 일정 정도의 인식력을 사용해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사건과 관계 있는 정보와 데이터를 수합합니다. 만일 선생의 환자분들 중 어느 한 분처럼 제리 선생이 현재 중병에 걸렸는데 증상이 나아지기를, 아니 완치까지 바란다고 합시다. 그러면 선생은 자신의 현 상황과는 다른 비전을 마음속에 그려내야 하죠. 그 그림은 부분적으로 선생이 걸린 병과 가능성 있는 치료법들에 관한 정보를 흡수함으로써 그려지는 겁니다. 하지만 희망에는 또 이른바 정서적 예측, 그러니까 마음속에 밝은 미래를 투사할 때 경험하는 그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들뜨는 듯한 ‘느낌’도 동반됩니다. 이런 느낌이 들려면 뇌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태와는 다른 종류의 정서적, 혹은 감정적 상태를 만들어 내야 하죠. 희망의 두 가지 요소인 인식과 느낌은 뇌 속에서 각각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서로 엮이면서 서로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나는 과연 진정한 희망과 거짓 희망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했다. 거짓 희망은 위험과 위협들을 보지 못하지만 진정한 희망은 본다. 때문에 거짓 희망은 도를 지나치는 선택과 잘못된 의사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정한 희망은 엄연히 존재하는 실제적인 위협을 고려하고 그 위험을 둘러가는 최선의 길을 걷고자 한다. 희망은 지각과 사고에 베일을 드리우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희망은 맹목적 낙관과 다르다. 오히려 희망은 현실을 집중 조명한다. 희망이 두려움을 논리적 사고의 과정 속에 녹여 놓기 때문에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고 사고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반면에 고삐 풀린 두려움은 마치 해일처럼 처음의 희망을 집어삼키면서 정보의 인식을 가로막고 다른 모든 감정을 쓸어버린다.


데이비슨은 희망을 끌어 올리고 유지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는데, 그건 바로 기억이라고 했다. 희망은 현재 상황의 정보와 감정을 통합할 뿐만 아니라, 또 과거의 경험에도 의존하며서 고통스런 상황을 견디고 넘어서고, 낮은 가능성을 극복한 다른 사람들을 모델로 삼고 지침을 구한다는 것이다. 이때 또다시 마음속에 떠오른 이는 댄 콘래드, 그에겐 군대 친구와 관련한 끔찍한 중환자실의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기억은 어떻게 끌어내 지는가? 뇌의 해마라는 부위가 기억의 재생에 중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마는 이처럼 의식적으로 과거의 경험들을 더듬을 때 외에도 우리 주위의 사물들과 사건들을 과거의 경험과 연결시키는 일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희망이라 부르는 그 크고 복잡하고 다면적인 과정들 속으로 차근차근 파고들어 가는, 데이비슨을 비롯한 진지한 연구자들은 현재 우리가 가장 넘기 어려운 이해의 봉우리를 앞에 두고 있으며 그 봉우리를 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십 년의 보다 깊은 탐구의 길을 가야 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탐구를 도와주는 도구와 기술이 점점 우리 손안에 들어오고 있다. 신경 회로들과 신경 전달 물질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암호를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속속 밝혀지는 가운데 과학자들은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유전 형질과 삶의 경험이 희망의 생리 작용에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평가하고 이것이 우리의 삶에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맺음말 : 나는 무엇을 배웠나


처음 에스더 와인버그의 병실에 들어선 그날 이후로 어느덧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요즘 새로운 환자를 만나면 면담과 이학적 검사에 이어 각종 검사치를 검토하고 엑스레이 필름을 읽으면서 임상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는 것 외에 한 가지 빼놓지 않는 일이 있다. 바로 희망을 찾는 일이다. 이제 나는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만큼이나 삶의 중요한 요소라고 믿게 되었다.


내게는 이 책을 쓰는 동기가 된 궁금증이 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희망을 발견하고 희망을 놓치지 않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간단한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적어내려 온 경험들을 통해 나는 한 가지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희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조금도 통제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미래를 보는 눈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희망을 발견하도록 도우려면 무엇보다 리처드 데이비슨이 말한 감정의 두 가지 요소, 즉 ‘인식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을 돌아봐야 한다.


환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환자의 감정을 바꾸려면 단순한 말 이상의 보다 큰 뭔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댄 콘래드는 내가 얼마나 번번이 그 두 가지 요소의 과녁을 빗맞히는 의사였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나는 환자들이 내 눈 속에서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읽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오래전 그날 샤론이 진정 말하고 싶었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 의사가 진정한 희망을 제대로 나눠 주려면 먼저 스스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적 정보와 치유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는 한 가지 이상의 목소리가 존재해야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과 친구, 성직자와 사회복지사, 심리학자와 상담가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또 다른 환자의 목소리도 필요하다. 이들의 목소리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절망과 불신의 뿌리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인지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로 나눌 수 있지만 사실 이 둘은 서로 단단히 묶인 짝이다. 또 희망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두려움과 불안 같은 감정을 완전히 제거해야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시작되고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균형이다. 현실로서 존재하는 위협과 위험, 이것들을 이겨내기 위한 전략을 통합하는 균형이 필요하다. 오직 진정한 희망만이 자신의 동반자인 용기와 회복력과 끝까지 함께한다. 거짓 희망은 현실이 끼어들어 환상을 압도하는 순간 용기와 회복력을 약화시킨다. 나는 희망이 치유의 심장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중 일부에게 희망은 더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요, 그들 모두에게 희망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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