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 워터스>
1. ‘테플론’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요리에 사용하는 후라이팬의 ‘코팅’ 물질로 알려져 있다. 후라이팬을 물에 강하고 편리하게 쓰게 만들어주었던 이 기적의 물질이 전 세계 99% 이상 사람들을 치명적인 화학물질에 중독되게 만드는 주범이 되었다. 이 물질의 유독성은 21세기 초에서야 드러났다. 테플론에 사용된 복합 화학물은 일명 PFOA:C8로 탄소의 연속적 결합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군장비의 방수를 위하여 개발되었다, 산업용, 일상용품에까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C8을 이용해 테플론 가공이 된 제품은 미량의 C8이 나올 뿐 아니라 제조 과정에서도 부산물이 강물로 흘러들어 식수와 땅을 오염시킨다.
2. 미국의 다국적 기업 듀폰사에서 개발한 C8의 치명성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한 변호사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였다. 영화 <다크 워터스>는 이러한 투쟁의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치열하게 그리고 있다. 유명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 ‘롭 빌럿’은 할머니를 잘 안다는 웨스트 버지니아 농부의 방문을 받는다. 그로부터 듣게 되는 젓소들의 이상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수백마리의 갑작스런 죽음, 거기에는 듀폰 사에게 임대한 땅 속에 파묻힌 ‘폐기물’과 관련성이 있었다. 하지만 듀폰사 및 정부에 대한 수많은 청원에도 불구하고 무혐의로 나오자 마지막 수단으로 ‘롭’을 방문한 것이었다.
3. 영화는 20년간에 걸쳐 롭이 펼친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 롭이 농부의 청원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조사하고 소송을 준비하자 주변 변호사들을 비롯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한다. 정부 또한 기업의 로비에 넘어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를 지지해 준 것은 법무법인의 대표와 같은 변호사였던 아내였다. 듀폰사는 C8의 독성과 위험성을 확인했음에도 제품이 가져올 막대한 수익에 눈을 감고 60년대 이후부터 오랫동안 C8관련 제품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제조 과정에 있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고 그들의 자녀들은 기형아로 태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은 다양한 방식으로 은폐되었고 그 은폐에는 정부도 한몫했다.
4. 웨스트 버지니아 농부의 청원으로부터 촉발된 C8의 독성 조사는 듀폰사의 조직적인 은폐를 파헤치는 조사로 확대된다. 농부 또한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보상금에 집착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길 요구한다. 롭의 ‘진실’을 위한 싸움은 20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위기를 맞게 된다. 듀폰사 소송에 몰두하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수입은 줄어들었고, 가족들의 일에도 무관심하면서 일상적 삶은 파괴되었다. 더구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외부에 의한 위협은 롭을 쓰러뜨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듀폰사는 끈질긴 방법으로 소송을 끌어가며 자발적으로 소송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 과정을 통하여, 영화는 거대 권력과의 싸움이 어떤 방식으로 약자들의 힘과 의지를 빼앗는가를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싸움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일까? 어찌 보면 진실은 ‘인내력’과 동일한 말인 듯하다.
5. 원고(피해자)와 피고(듀폰사) 간의 합의에 의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자 집단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잡아진다. 연구가 진행되는 오랜 시간, 수많은 피해자들은 롭에 대한 불만을 극렬하게 드러내며 피해자 사이에도 갈등은 커지게 된다. 연구 결과를 기다리며 피폐해진 삶을 살고 있던 롭에게 기쁨의 연락이 온다. 연구 기관이 화학물질과 각종 병의 연관성을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모든 싸움이 끝났다고 기뻐할 때, 영화는 극적인 반전을 제공한다. 거대 권력과의 싸움이 쉽게 끝날 수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듀폰사는 연구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다시 개별적 소송에 들어간 것이다. 영화는 이후의 사건 전개를 자막으로 표시한다. 그 기록은 다행스럽게 원고들의 승리로 돌아가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마지막 반전의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씁쓸한 모습을 증언한다. 권력에 빌붙어 사는 존재들을 이용한 지속적인 압력이 바로 현실의 모습이라는 것을, 객관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팀으로써 오히려 피해자들이 포기하도록 만드는 힘의 불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6.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내내 집중하고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사용된 에너지는 마치 영화 속 롭의 투쟁 속으로 동참한 듯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이상적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변화의 현장으로 뛰어들길 두려워하고 있는 나를 반성하게 한다. 작은 갈등을 겁내 문제를 회피하거나 거대한 힘에 지레 포기하는 행태가 나의 일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를 변명하자면 라인홀드 니버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의 필요성이다. 지금도 거리에는 분노에 찬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목소리가 목소리의 진정성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진정한 목소리는 무엇이어야 할까? 어쩌면 영화 속, 롭이 보여주는 객관적인 데이터와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한 ‘진실’의 세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진실’에 대한 명백한 인식을 확신했을 때야 우리는 행동에 돌입할 수 있다. ‘행동’의 결정은 쉽지 않다. 영화 속 끝나지 않을 시간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신중하게 결정하고 결정된 것에 대한 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일에 나서야 한다. 우리의 삶은 길지 않으며 우리의 의지를 투영할 대상도 소수일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 이 말은 최대한 고민하고 행동한 후, 고민의 결과를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다크 워터스>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 ‘웨스트 버지니아’는 존 덴버의 유명한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소박하고 따뜻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이 ‘화학물질’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최소한 그것과 싸울 힘이 있다고 느꼈을 때 ‘롭’의 결정은 아름답다. 자신의 미래를 과거와 결합시킨 끊임없는 삶의 순환적 선택이다.
첫댓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고...
희생하는 사람들을 재물로 거대 기업의 횡포가 조금씩 벗겨진다는 공통적인 이야기가 아직도 계속이어지는 현실!
생태계 파괴를 알면서도 생계적 돈에 끌려가는 주위 사람들의 무관심이 항상 슬프게 나타나는 현실이다.
거대한 자본 + 정치 + 이익보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이겨내면서 폭로(정의)에 나서는 개인의 삶은 거의 피폐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길고 긴 싸움이라는 것, 달걀로 바위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나의 선택을 위해서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감내해야 한다는 신념이 깔려있어야 한다.
끈질긴 협박과 모멸감으로부터 견뎌내야 한다. 어쩌면 현실적 보상은 가질 수 없고(잃어버리게 되고), 정신적 보상만이 남게 된다. 거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 내 편은 없다.
옳은 일이기에 한다는 신념보다 빛나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 서민들이다. 사회는 생각보다 비열하다! 선악의 대결에서 선이 이기고야만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이 이기는 경우는 글쎄... 행동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겠지만.....
ㅡ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떠오르게 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