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님, 당신이 만든 천국을 몇몇 교회에서 생지옥을 만들고 있네요. 다시 한 번 현세하시기 바랍니다. 김교각(金喬覺) 스님이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응세(應世)된지 1200 여년이 지났다.
스님은 생전에 서원했다. “衆生度盡, 方證菩提, 地獄未空, 誓不成佛.”이다. “중생이 모두 제도한 후에 깨달음을 이룰 것이며, 지옥이 빌 때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 그는 거룩한 맹세(地藏大愿)를 실천했다. 중국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 구화산(九華山) 화성사(化城寺) 등신불(等身佛 : 실제 사람의 몸에 옻칠과 금을 입힌 불상)
이후, 이백(李白)이 그를 찬하는 시를 썼다. ‘지장보살찬(地藏菩薩讚)’ 本心若虛空 清淨無一物 焚蕩淫怒癡 圓寂了見佛 五綵圖聖像 悟真非妄傳 掃雪萬病盡 爽然清凉天 讚此功德海 永爲曠代宣 석가모니 열반에 드니 해와 달이 부숴지고 오직 부처님 지혜만이 생사의 어둠을 밝혀주네 보살의 대자대비 고해에서 중생들을 구해주네 큰 서원을 세우고 홀로 오랜 겁을 수행하여 중생을 구해주시니 지장보살의 큰 덕성이어라
이백이 754년에 쓴 시다. ‘地藏菩薩贊’은 김교각의 높은 덕행을 찬양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시에서 김교각을 지장보살에 비유하면서 “보살의 자비로운 힘 무변고해 구하나니, 하해같은 그 공덕 세세손손 빛내가리로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자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백은 김교각(金喬覺)이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응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3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어떠면 동시대에 살아서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구화산에 자리를 잡고, 구도 활동을 하다가, 구화산에서 75년을 수련하여 99세에 열반에 들었다. 794년 음력 7월 30일,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입적하였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개금[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열반할 때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산이 울리고 돌이 소리 없이 굴러 내렸으며 대지에 신광이 번쩍이고 새들이 구슬피 울었으며 법당의 서까래가 무너져 내리고 화성사의 종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석함 속에 육신을 넣고 닫은 지 3년 후에 열어보니, “용모가 살아 있는 듯 하고 피부는 유연하며, 근골(筋骨)을 건드리니 쇳소리가 났다[金鎖骸鳴].” 항아리 속에는 향긋한 향내가 구화산을 온통 수놓았다.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의 내용과 같은 현상을 보살의 응세(應世)라 했으므로 제자들은 그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응세한 것으로 여겨,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어 ‘육신보전(肉身寶殿)’을 세우고 7층탑 3층에 등신불(等身佛 : 실제 사람의 몸에 옻칠과 금을 입힌 불상)로 모셨다.
이후 구화산은 그 전체가 모두 지장보살의 성지로서 추앙받는 곳이 되었지만, 그 가운데 특히 화성사(化城寺)는 지장스님을 위하여 지어진 사찰이고, 지장스님의 등신불(等身佛)을 모신 ‘육신보전(肉身殿)’의 소재지로서 가장 중요하다. 명(明) 신종(神宗)은 그 탑을 ‘호국육신보탑(護國肉身寶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구화산(九華山) 화성사(化城寺)는 등신불(等身佛 : 실제 사람의 몸에 옻칠과 금을 입힌 불상) 즉 지장보살(地藏菩薩)을 경배하는 참배객들이 1년 1억 명 이상 방문한다. 입장할 때의 모습을 보면 황제 앞으로 갈 때 무릎을 바닥에 붙여 끌듯이 걷거나 오체투지로 다가간다.
아무도 오라고, 가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가는 종교의 표본이 되는 살아있는 장소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어떤가? 목사로서 예수가 된 자가 있는가? 목사가 될 때 서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서원한 것이 없으면 쉽게 소용없는 욕망이 부풀고 자기 합리화시키고 오만방자하다가 급기야 타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