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주의와의 투쟁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D323350509E4B1F)
야고보는 참된 믿음과 경건을, 즉 건강하고 생명 지향적인 기독교 영성을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1장 27절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
건강한 기독교 영성을 알고 싶으면 이 구절에 자신을 비쳐보면 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전통입니다. 율법에도 자주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성서시대에는 생존이 가장 취약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들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들을 돌보는 것은 분명히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오늘날 성서가 말하는 고아와 과부는 반드시 그런 이들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확장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가 누군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이들이 누군지를 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는 사회윤리적인 차원을 회복해야 합니다. 개인윤리는 나름으로 강조되지만 사회윤리는 관심 밖입니다. 부의 대물림, 가난의 대물림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둘째, 야고보는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세속주의와의 싸움을 가리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세속이 무엇일까요? 저 사람은 세속적이야, 하는 말들을 합니다. 이기적이거나 천박하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합니다. 세속, 또는 세속주의는 그렇게 부정적인 뜻만은 아닙니다. 세속적이라는 말은 종교적이라는 말과 대비됩니다. 세속이 없으면 종교도 없습니다. 세속을 세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세상은 수도원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가 따로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원리가 작동됩니다. 여기에는 경쟁, 쾌락, 소유, 폭력, 또는 인기, 연예, 돈벌이 등등의 단어들이 연상됩니다. 그게 인간 삶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수도승이 아니라 일반 사람으로 사는 한 기독교인 역시 세속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야고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속을 떠나라고 말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경험하다시피 이게 쉽지 않습니다. 세속주의는 강압적입니다.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나름으로 성취감도 줍니다. 우리의 세상은 그런 메커니즘으로 돌아갑니다.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도 이런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그런 세속을 떠날 수는 없지만 물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은혜 한번 받아서 해결된다면, 성령 충만으로 단번에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세속주의와 투쟁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구도적입니다. 투쟁은 곧 구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교양을 쌓는 방식도 아닙니다. 야고보가 명시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지만,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구도적인 태도로 천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바로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이자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들어간 깊이만큼 여러분은 세속주의에 물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싸움의 과정이 기독교인의 한평생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함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삶의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다면 성령께서 도우셔서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아멘.
http://dabia.net/xe/609121#0
정용섭(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