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5월 28일 새벽 6시 20분 수잔이 태어났다. 그때 당시 프랜은 체스터에서 부목사의 제안을 받았고, 그는 수락했다. 그로브 시의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헤으라인으로 기사가 났다.
“언약교회 목사 지난주일에 설교하다.”
F.A 쉐퍼 언약 장로교회 목사는 펜실베니아 체스터의 성경 장로교회에 가입되지 않았지만 요청에 의해 이곳의 목사로 부임했다. 체스터 교회는 66세의 여름 성경학교 설립자 A.L.래뎀 목사에게는 쉐퍼 목사는 성경 장로교회의 Great Lakes 노회의 중재자이다. 쉐퍼 목사는 가정 선교회의 회원이며 여름 성경학교 연합의 의장이다. 그는 언약교회의 첫 정식 목사였으며, 1938년 6월부터 그로브 시에서 있었다. 이것이 그의 첫 사역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과 특히 그와 함께 충실히 일했던 사람들을 두고 그로브 시를 떠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환송회 때는, 쉐퍼 목사가 한 달에 한번 설교했던 주일학교에서 그에게 10달러를 주었고 다과가 준비되었다…
그 해 여름 쉐퍼의 가족들은 체스터에 집을 구하는 동안 윌밍톤에서 레이어드와 함께 지냈다. 그들은 4개의 방이 있는 집을 구했다. 그것은 조금 가격이 비쌌지만, 쉐퍼의 아버지가 약간의 돈을 빌려주었다. 이디스는 너무 기뻤다. 그녀는 도배를 하고 인테리어도 할 수 있었다. 프랜은 이제 세보레(GM사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그의 전 자동차는 너무 낡았기 때문이다.(아마도 소시지 파티에 17명의 아이들을 싣고 온 이후로…) 프랜의 새 교회는 500명 정도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들은 오래된 공장 건물에 모였다. 프랜은 부목사로 주일 저녁 설교를 하며 66세의 목사 래뎀을 도왔다. 그는 또한 블루 칼라 노동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 일은 그에게 적격이었다. 프랜은 그들과 말이 잘 통했다.
“나는 목사님 설교가 정말 좋아요. 당신은 언제나 그를 이해할 수 있지요.” 이디스가 자주 들었던 말이다.
그 해 겨울은 아주 우울했다. 나치 주동자 히틀러가 런던 대 공습으로 유럽을 강타했을 뿐 아니라 1941년 12월 7일에는 독일과 연맹이었던 일본이 하와이에 주둔해 있던 미국 해군 함대를 공격했다. 그 소식은 주일 아침에 들려졌다. 이디스가 수잔과 프리실라와 놀아주고 있을 때, 그 공격에 대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미국의 전 해군이 무너졌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다음날 미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싸운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일본군을 막는단 말인가? 이 세계 대전은 1차 세계 대전 보다 더 크게 번지고 있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입니다.” 사람들은 우울하게 말했다.
1942년 가을, 야간 공습 비행 연습이 시작되었다. 집 밖으로는 전등을 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blackout(정전, 정지, 교신 두절 등 다양한 뜻이 있음)이라고 불렸다. 적들의 폭격기들이 공격을 당했다. 전등은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을 때만 킬 수 있었다. 이디스에게는 비참한 겨울이었다. 두 자녀가 모두 천연두 증상이 더 해갔다. 아파하는 어린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겨울에 프랜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1943년 6월의 일이었다. 그는 3일 동안 코마 상태였다 그러나 프랜과 이디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성경을 읽어주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아버님 입가에 미소가 스치는 걸 봤어요.” 이디스가 말했다.
프랜의 일은 끝나질 않았다. 당시에 체스터에 교회 건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교회를 위한 건물 계획을 감시 해야 했다. 물론 프랜이 그 일에 적임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낭비였다. 저녁 시간 내내 프랜은 새 건물에서 일해야 했다. 감독이 아니라 직접 연장을 들고 톱질하고, 배관 설치를 하는 등의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프랜의 인간관계는 균형적일 수 없었다. 그는 일하는 사람들과 폐쇄적인 관계가 되어갔다. 그러자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랜은 곧 그들이 영원하지 않은 건물에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온통 쏟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덤 목사는 건물이 잘 건축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그도 복잡한 마음이었다. 프랜은 그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 때문에 매우 곤혹스럽소.” 프랜은 이디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소.”
그래서 1943년 프랜이 세이트 루이스의 성경 장로 교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바쁘게 보낸 만큼, 그는 2년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반을 체스터에서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는 전쟁, 정전, 아버지의 죽음, 자녀들의 병, 교회 건축, 끝도 없는 목회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다운증후군 어린이를 위한 수업을 개설했다. 심지어는 거리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치료를 한 적도 있었다. 한 어린 여자아이의 의사가 그 아이는 혀질환 말기라고 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장로들에게 프랜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디스는 기름 한 병을 준비했다. 장로들과 함께 프랜은 아이의 집으로 갔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프랜은 야고보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야고보서 5: 13~15)
프랜은 어린이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모든 장로들이 아이에게 손을 얹고 아이의 회복을 위해 열심으로 기도했다. 야고보서의 약속의 말씀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소녀는 회복되었다! 이디스는 프랜 만큼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체스터에 있을 때는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다. 세인트루이스 사람들은 체스터 사람들 만큼 많이 말씀의 치료를 원했었다. 그러나 체스터는 떠난 것은 많은 면에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한번은 이디스가 증기 쿠션에 얼굴을 덴 일이 있었다. “오,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하나님,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구요. 제발, 제발 당신의 뜻을 분명히 해 주세요…”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을 알아가는 것.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미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일하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을 알아가는 것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는 당신을 알아가는 것.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프랑스 찬송가인 “나의 삶을 주께 드리네”라는 노래의 멜로디로 이 노래를 불렀다. 이런 기쁨에 순간에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 찬양이 나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사를 기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나의 삶을 주께 드리네”라는 찬양을 찬송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불렀던 가사는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에 이런 가사를 그녀의 입에서 나오게 하심으로 응답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그녀는 대답했다.
그녀는 미래의 선택이 몇 번이고 흐릿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여전히 체스터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그녀는 제니 고모로부터 받은 작은 유산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왔었다. 또한 체스터에는 물질적 유대관계도 있었다. 그녀는 신앙심이 두터운 여성들의 모임인 벧엘 선교 악단과 매우 친분이 있었다. 프랜은 떠나기 전까지 각 가정과 개인을 심방하며 보냈다. 마지막으로 그들과 모여서 기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부모를 떠나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디스에게 주신 선물은 오랫동안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곧 그녀는 세인트 루이스에서의 정돈된 삶에 동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쉐퍼 가족은 이디스가 스팀 다리미에 얼굴을 데었을 때, 세인트루이스로 옮겨가는 과정을 겪었다. 프랜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렸다. 의사는 2도 화상을 입은 그녀의 얼굴에 연고를 두껍게 펴 바르고 거즈로 감쌌다. 그녀는 눈과 입에 상처가 남았다. 그녀는 몇 년 전에 그들이 윌밍톤에 있는 페이스 신학교로 갈 때 겪었던 일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하나님은 그녀를 담금질 했었다. 그리고 그녀를 연단시키셨다.
“잘못했어요 주님. 다시는 당신의 뜻에 대항하지 않겠어요. 어떤 것이라도…”
세인트루이스에서 그녀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웠다. 동물원이 있는 울창한 나무 공원 근처에 그들의 빨간 벽돌로 된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 내부는 아주 거대했다. 나무의자와 파이프 오르간, 성가대 석이 있었다. 벽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대한 관이 높은 천장에 아치 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집은 동물원에서 걸어서 몇분 거리인 워터맨 길에 있었다. 그 집은 생각보다 좋았다. 13개의 방이 있었다. 3층에는 밖으로 내민 창과, 벽난로가 있었고, 벽난로 양쪽에는 책장이 있었다. 일광욕실에서는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할 수 있었고, 프랜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 꿈꾸던 집이 바로 이런 지이에요.” 이디스가 말했다.
프리실라는 해밀톤 그래이드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수잔은 아직 3살이었다. 프랜은 주일에 아침 저녁으로 설교하고, 오후에는 청년모임을 이끄는 일에 몰두했다. 수요일 저녁에는 기도 모임과 성경공부가 있었다. 물론 그는 주일학교회의와 다양한 위원회의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월요일 오후를 빼고는 매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디스는 집에 넓은 공간을 교회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하실에서 그녀는 유대교, 천주교, 기독교, 무교 등 취학 전 아동들을 모아 수업을 했다. 일주일에 한번 집에서 프랜은 자원봉사자들에게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지 강의했다. 나중에 이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20명이 그들의 집에서 수업을 했다. 성경공부의 대부분은 즐거운 활동들이었다. 프랜과 이디스 둘 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야에 있어서는 열성적이 되어 갔다.
“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해요.” 두 사람은 강조하며 말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의 첫해에 프랜과 이디스는 그들의 프로그램을 7가지로 확장했다. 나중에 그리스도의 어린이라고 불릴 것이었다. 집에서 하는 성경 공부 모임들은 그 프로그램 중에 하나에 초점을 맞췄다. 각각의 어린이들은 그리스도의 어린이 수료증과 물고기 모양의 배지를 받았다. 또한 아이들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 두 번째는 시간 제한 없는 수업이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일주일에 한시간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다. 세번재는 열린 활동으로 공원이나 해변가에서 어린이들을 만나 즐거운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네번째는 소년과 소녀들을 위한 Empire Builder Club이었다. 이것은 보이, 걸 스카우트와 비슷했지만 기독교 적인 활동에 강조점을 두었다. 프랜은 스카우트 교본과 비슷한 교본을 만들었다. 다섯번째는 쉐퍼가의 자랑인 여름 성경학교 사역이었다. 여섯번째도 역시 이디스나 쉐퍼가 많은 경험을 쌓은 여름 캠프 프로그램 이었다. 그 캠프는 성경학교 후에 이어졌다. 마지막 일곱번째는 1년에 한 번하는 규모가 큰 집회였다. 그 동안 어린이들이 배운 것들을 보여주고, 계속해서 그들을 격려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디스는 첫 해 행사때 그로브 시에서 여름 성경학교를 시작할 때 만큼 긴장했다.
“애들이 몇 명이나 올까요?” 이디스가 말했다.
첫번째 집회는 교회에서 열렸다. 이디스는 행사에 필요한 것들을 열심히 만들었다. 주제는 노아의 방주였다. 그녀는 마분지에 노아와 그의 가족, 방주 그리고 동물들을 그렸다. 봉사자들이 뒤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스크린을 만들었다. 집회가 시작될 때 그녀는 기대반 걱정반으로 지켜보았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성이 커질수록 더했다.
“아이들만 700명 정도 되는 것 같소.” 프랜이 말했다.
노아의 방주는 완벽했다. 이디스에게 집회의 클라이막스는 “성도들이 행진할 때”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고래 뱃속의 요나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어린이는 다른 교회와 다른 지역에도 퍼졌다. 그러나 프랜은 미국기독연합(ACCC)에 속한 교회들에는 이 프로그램의 사용을 제한했다. 칼 맥킨티어는 1941년 ACCC 설립의 최전선에 섰다.
ACCC의 회원들은 많지 않았지만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교회들만 모인 순수한 단체였다. 모더니즘은 특히 자유주의 신학으로 FCC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프랜이 말했다. “나는 우리의 주의깊고 정확한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 전시회를 모더니스트에 의해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ACCC에서 프랜의 활동이 많아졌기 때문에, 쉐퍼 가족들의 생활도 함께 바빠졌다. 프랜은 저녁시간에 좀처럼 쉴시간이 없었다. 이디스의 저녁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빨래 같은 집안일도 해야 했다. 프랜이 집에 돌아오면, 이디스는 벽난로 옆에서 그와 함께 오붓하게 식사를 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자정부터 시작되었다. 그 두 사람은 정말로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래에도 즉, 앞으로도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 일 것이다.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친해졌지만 그로 인해 평생을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었다.
프랜의 유일한 자유시간인 월요일 오후는 가족들과 소풍을 가는 시간이었다. 겨울에는 종종 미술관에 갔다. 아이들은 종이, 색연필, 목탄연필, 파스텔 등을 들고 나왔다. 프랜과 이디스가 전시장을 돌아보는 동안 아이들은 미술관 정원의 연못을 그리고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소풍을 가거나 동물원에 놀러갔다. 아니면 집에서 놀거나 보물찾기 식사를 즐겼다. 아이들이 먹는 핫도그나 수박조각에 보물을 숨겨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 있으면 교회 문제로 방해를 받을 때도 있었다.
쉐퍼가족들에게는 유대인 이웃들이 많았다.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학대 때문에 프랜은 성경 장로 교회가 이들에게 구체적인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써서 성도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뉴욕에서 들었던 다음과 같은 시로 글을 마무리 했다.
유대인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가
그러나 유대인의 하나님을 선택하고서 유대인을 미워하는 자들은
아이러니하다.
1944년 가을, 이디스는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 1945년은 많은 면에서 즐거운 해였다. 1944년 6월을 기점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들은 이미 항복했지만 독일의 파시스트들은 굴복할 줄을 몰랐다. 그 달에 미국과 영국은 나치가 정복한 유럽에 상륙했다. 독일 공군은 사실상 함락되었다. 미군과 영국군은 독일을 서쪽으로부터 밀어내고 있었다. 러시아는 독일을 동쪽에서부터 압박했다. 같은 달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일본 공군을 함락했다.
1945년 5월에 산달이 다 된 이디스가 그들의 집을 결혼식 장소로 빌려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색색의 크림이 들어간 샌드위치도 만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크림을 덮은 치킨 샐러드도 만들었다. 식이 시작되려고 할 때 그녀는 너무 지쳐서 결혼식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프랜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녀는 또 다른 출산을 경험했다. 이때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든 새벽녘이었다.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손을 비틀기 까지 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고통을 만든거야”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딸 드보라를 보고 나서는 찬양하기 시작했다. 5월 3일 진통이 시작된지 12시간 뒤의 일이었다. 셋째 딸의 셋째 딸이라면서 이디스는 좋아했다. 1945년 8월 6일, 세계는 첫 원자 폭탄 투하로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종류의 무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었다. 일본 북북의 대도시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지만 일본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도 원자 폭탄이 하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8월 9일에 두번째 원자폭탄이 나카사키에 떨어졌다.
8월 14일 밤 사람들은 세인트루이스 거리로 뛰쳐나와 “전쟁이 끝났다.”라고 외쳤다.
미국은 군대에서 나오는 백만이 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한꺼번에 나오게 되었다. 목사와 그 가족들에게는 더 바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랜은 없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해외 선교 위원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회의가 있을 때는 필라델피아로 가야했다. 이것은 프랜과 이디스에게 선교사로 나가고자 했던 과거의 다짐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들은 그물을 치는 낚시 꾼; 머리에 짐을 진 여인; 작은 배들; 논 등이 실린 아시아 매거진에 실리게 되었다. 이디스는 “그대들이여 온 세상을 향해 가라”는 문구를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까?
어느 날 프랜이 말했다. “이디스, 주께서 나를 위해 스코트랜드 에딘버러에서 더 공부할 길을 열어주신다면 세 아이들과 힘든 일들을 함께 해 줄 수 있겠소?”
“물론이에요.” 이디스가 대답했다.
프랜이 알았던 것을 이디스는 몰랐을까? 아마도 그는 단지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1947년 봄 회의에서 장로교 해외 선교 위원회에서 전후의 유럽 상황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자유주의 교회들이 확산되고 있었다. 보수 주의 교회는 어디로 갔는가? 왜 프랜의 그리스도를 위한 어린이 사역이 유럽에서도 맞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프랜은 유럽의 상황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노회의 허락을 받고서 3달 동안 유럽에 가 있었다.
엘머와 제인 스믹이 쉐퍼의 집에 와서 그들의 사역을 인수인계 했다. 쉐퍼의 가족들은 동쪽을 향해 갔다. 이디스는 세 자녀, 그리고 자넷 언니와 함께 메사추세츠의 브뤼스터로 갔다. 이디스와 자넷은 자가용이 없었지만 2마일 떨어진 해변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곤 했다. 브뤼스터의 삶은 불쾌하기 보다는 즐거웠다. 이디스보다 9살이나 많은 41살의 자넷언니에 대해서 이디스는 잘 몰랐었다. 이제는 언니에 대해서 많이 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6살, 3살짜리 두딸의 엄마인 엘사와도 2주 동안 만났다.
이디스는 이 여름이 아주 특별한 선물임을 알았다.
“나의 언니들과 함께 할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는 동안 프랜은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