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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士)의 조상들
"선비"라는 이름은 오직 우리나라 순수한 단어이다.
선비는 조선 사회에서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특히 유교적 이념을 적극 수용하여 사회에 적절히 구현함으로써 선행을 배푸는 인격체다. ( 자료는 위키백과를 참조하였다)
한편, 오늘날에는, 선비는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거나, 품성이 얌전하기만 하고 현실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위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까지도 선비는 유교적인 경향을 보이는 학식있는 사람을 지칭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도 쓴다.
이럴 경우 흔히 양반(兩班)과 혼효하여 쓰이기도 하는 단어이다(필자 설명)
이는 조선의 선비집단인 사림파가 조선의 중앙정계에 집권하여 정치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이론에 치우친 정책들을 추진하여 조선을 임진왜란, 병자호란, 삼정의 문란 등과 같은 치명적인 일들을 겪게했다는 점에서, 훗날에 선비에 대한 여러가지 부정적인 인식이 대두되면서 그 뜻이 일부 반영되었다.
어원
한국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학식있는 사람'이지만 선인들은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생명에 대한 욕심도 초월할 만큼의 무소유의 덕을 요구했다.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뜻 있는 사(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고 하였다. 장자도 “사(士)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사(士)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사(士)의 인격적 조건으로 지조를 꼽았다.
靑天常萬代 푸른 하늘은 만대에 푸르르고
玄鶴泳千年 현학은 천년을 헤엄치는데
世上浮單百 인생은 겨우 백년도 못 견디나
眞如尙億鮮 진리는 언제나 신선하다네 2244
이렇게 사(士)가 유교적 인격체로 파악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어의 ‘선비’가 지닌 성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는 역사 속에서 신분적 의미로 많이 쓰였다. 사대부(士大夫), 사군자(士君子), 사서인(士庶人) 등으로 쓰였던 것이 그 예다.
어휘 발생 배경
'선비'라는 어휘는 기록상으로 《용비어천가》(1447, 80장)에 ‘션□’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즉, 이 어휘는 세종 집권시기(1418~1450)에 처음으로 기록상으로 나타났다.
세종은 집권기간동안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학문을 적극 장려하고, 의례제도를 유교적으로 개편시켜 조선을 유교사회로 만들어간 인물이다. 이렇게 자신의 여러 유교적 정책들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학문에 밝고, 유교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인재를 원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당시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어진 인물'을 지칭하는 선비를 《용비어천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의미로 재정의하여 사회적으로 반포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의 주인공인 태종 이방원도 선비의 전형적인 표본, 정몽주를 사회적으로 추모하기 시작하면서 선비의 정의가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고, 지방에서는 정몽주를 따랐던 선비일파, 온건개혁파가 지방에서 사림파를 형성하여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태종의 정몽주 추모를 적극 뒷받침했던 점만을 본다면, 세종 이전에도 이미 선비에 대한 정의는 점차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세종이 적극적으로 조선을 유교화시키며 유교적인 인재들을 강렬히 열망하고, 이들을 적극 등용하면서 선비의 의미가 유교적으로 크게 개편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선비가 《용비어천가》를 통해서 최초로 기록상으로 등장했기때문에, 정치적ᆞ사회적인 방면에서 선비는 거의 전적으로 세종이 의도하는 유교적인 의미가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세종은 앞으로의 조선의 인재들에게 자신이 재정의한 선비를 이상향으로 삼도록 하였다.
당시 세종집권시기의 초기에는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인해, 무를 갖춘 인재보다 문을 갖춘 인재가 상대적으로 더 등한시되는 경향이 남아있었는데, 세종은 이를 해소시키기위해 문을 갖춘 인재들을 더 장려하는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세종의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선비라는 어휘가 위와 같은 정의로 쓰여왔던 점은 참고할만 하다.
역사
선비의 의미는 일찌기 고구려의 기록에서 볼 수 있디.
2세기 말엽인 고구려 고국천왕 때 을파소는 은둔하여 밭갈이를 하고 살다가 추천을 받아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재상의 책임을 맡고서 나올 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을파소는 자신의 처지를 선비로 자각하고 선비의 도리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선비의 개념은 신분을 뜻하기보다는 인격의 관념이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태학이 세워졌다. 여기서는 유교 이념을 교육하면서 선비를 양성하였다. 박사를 두어 인재를 가르쳤는데, 이 박사제도는 경전에 관한 전문 지식인을 키워냈다. 백제와 신라에서도 각각 태학과 국학이 세워졌다. 당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은 선비들의 임무였다.
고려 시대에는 교육제도가 한층 정비되어 국자감을 비롯해 지방의 12목에까지 박사를 두어 인재를 양성했다. 과거 제도가 정립돼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를 통해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고려 말엽 충렬왕 때 안향 등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이른바 도학 이념이 정립되었다. 도학 이념을 중심으로 선비들의 자각도 한층 깊어졌다.
조선 초에 들어와 유교 이념을 국가 통치 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들은 유교 이념의 담당자로서 그 존재 가치가 뚜렷해졌다. 조선 초 선비들은 고려 말에 절개를 잃지 않았던 정몽주를 추종하였고, 조선 왕조에 절개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통에서 선비 정신을 강화시켜갔다. 이들은 조선 왕조 건국기에 혁명 세력을 중심으로 고위 관리로서 문벌을 이룬 훈구파와 대비를 이뤘다. 이들은 절의를 존중하는 입장을 지닌 자신들을 ‘사림파’로 구분했다.
이때부터 훈구파와 사림파의 분쟁이 시작되는데 이를 ‘사화(士禍)’라고 한다. 사화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 시대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에 의한 관료제도가 정착되었고, 그에 따라 선비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층이 되었다.
1. 고구려(高句麗) 조의선인(早衣仙人)
고구려의 최고 군사통수자인 대모달 또는 대막리지가 될 수 있는 신분으로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선배는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조의선인의 눈부신 활약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안시성 전투였다. 당태종의 당군(唐軍)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勇士)들을 조의선인이라 부른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臧王)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2. 신라의 화랑도
신라의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지위의 화랑은 원화(源花)라는 여성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좋은 가문의 청년 중에 덕행 있는 자를 곱게 치장하여 화랑으로 만든 것에서 보듯이 외모와 몸치장을 중시하여 여성적인 반면 선배는 매우 남성적이다. 선배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숭상(崇尙)한 고려의 최영 장군조차 '당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라고 선배를 찬양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에 나오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선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삼국중에 제일 발전이 느렸던 나라 신라는 삼국시대에 가장 국력이 뒤쳐지는 나라였다.
결국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남의 힘(당나라)을 끌어들였고,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한 배신의 역사를 통해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어냈고,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 통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약했던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망하지 않고, 오히려 통합을 이룬데 큰 몫을 한 사람들이 바로 화랑(花郞)-즉 신라의 피끓는 젊은이들이었다.
신선도(神仙道)로 단련된 그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순수한 애국심이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화랑도는 신라에만 있었던 제도가 아닙니다. 똑같은 제도가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는데, 이를 각각 조의선인, 무절(武節)이라 불렀답니다. 신라 화랑도에서 낭도들의 리더가 화랑이었듯, 조의들의 지도자를 조의선인이라 했다.
조의선인이란 "검은옷(조복)을 입은 선인"이란 뜻에서 나왔지요. 즉 고구려의 상징인 검은색의 도복을 입고, 신선도를 수련하며, 몸과 마음을 닦았던 고구려의 젊은 인재양성 제도이다.
또 신라의 화랑들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듯, 고구려 조의선인 출신의 수많은 인재들이 고구려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습니다. 의외이겠지만 을지문덕 장군과 양만춘 장군, 연개소문도 조의선인 출신이다.
수나라 양제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을 때,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에서 이들을 대파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2,700인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이때에 을지문덕 장군이 이끈 병사들도 바로 검은옷을 입고 신선도로 단련되었던 20만의 조의군사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조의선인제도나 백제의 무절(武節)이 신라의 화랑도보다 후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패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승자인 신라의 역사를 강조하다보니 조의선인이나 무절을 비롯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 문화는 전해진 바가 별로 없다.
그러나 신라의 화랑도는 물론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조차도, 모두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天指花郞)을 이어받은 말하자면 "리메이크"된 제도이다.
단군조선의 국자랑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지요.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2,500여 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화랑들이 있었다.
그때 신선도로 심신을 단련하던 미혼의 자제들을 국자랑이라 했으며(11대 단군인 도해단제 재위 57년 -단기 3891년, 서기 전 1891년), 그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天指花(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도 했다합니다.(13대 홀달단제 20년- 단기 3763년, 서기 전 1763년). *** 자료출처: "한단고기"- 임승국 역(譯)***
그런데 단군조선의 정치, 종교, 사회, 문화 등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들은 그 윗대인 배달국과 더 윗대인 고대한국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다.
때문에 천지화랑의 기원이 지금부터 3888년 전인11대 도해단제때라는 것도, 그때 처음 기록에 나온다는 말일뿐이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고대 한국 연방의 수장이었던 한인할아버지들은 유라시아 대륙전체에 흩어져 살고있던 백성들을 1년에 한번 정도씩 방문하며, 도리와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을 가르치며 나라를 다스렸다.
이 제도를 순방(巡邦) 또는 순행이라 하였으며, 한웅 할아버지들도, 단군 할아버지들도 사해(四海)를 순행하셨다고 합니다. 이때 화랑들이 그분들을 수행하며, 운해주(지금의 중국 중원지역). 천산주(천산산맥 지역 ).
성생주(인도.동남아 지역). 월식주(중동 지역)들을 두루 순례하였다지요. (이 지역들을 연결하면 고대 우리민족의 강역이 됩니다.) 훗날 신라시대 화랑들이 명산대첩을 찾아다니며 수련하던 수행방식은 이렇듯 한단 시대 천지화랑들의 순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 자료출처- "영광과 통한의 한국사"-안재세 저(藷)***
한편 단군조선시대 화랑들의 총사령관을 국선(國仙), 여자낭도는 원화(源花), 남자는 화랑(花郞)이라 했으며, 단군으로부터 인정받은 화랑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습니다.(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가 스스로를 천왕랑이라 불렀다는 기록을 한단고기-북부여기에서 볼 수 있음 )
그들은 신선도를 닦음으로써, 하늘과 통하는 종교교육과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 군사교육을 한꺼번에 이루어낼 수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천주교 사제의 교육을 함께 받는 것을 연상해 보실 것)
제천기간동안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소도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평소에는 소도가 화랑들의 회의장소로 쓰여졌다.
이들은 신선도의 5상(五常)을 지켰는데, 5상의 내용은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으로, 이것이 신라 때 원광법사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세속오계의 원형이다.
***자료출처- "한단고기" 중 (단군세기)***
결국 알고 보면 신라의 화랑도는 단군조선 천지화랑의 표절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요. 단군조선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니까요. (그 점에서는 훈민정음도 마찬가지입니다.)이렇듯 신라 화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 무절의 기원은 모두 단군조선 시대의 천지화랑입니다. 그리고 효(孝). 충(忠)..도(道)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그들 모두는 우리한국 청년들의 유전인자 속에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그들의 정신과 기백을 오늘에 되살린다면, 국가와 민족 앞에 쌓여있는 오늘의 많은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모두가 바로 그 화랑의 후예들이다.
2의 -부록 * 신라의 화랑도에 대한 비판문서가 있다..
삼국시대에 신라는 가장 국력이 뒤쳐지는 나라였습니다. 결국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남의 힘(당나라)을 끌어들였고,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지요. 그러한 배신의 역사를 통해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어냈고,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 통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약했던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바로 화랑(花郞) 즉 신라의 피끓는 젊은이 들이었습니다. 원래 민간의 제도인 것을 진흥왕 37년(A.D576년)에 국가적인 인재양성 단체로 개편하여 관리하였다. 화랑도는 청소년 연령급 조직으로 당시 삼국통일을 위한 현실적 국가주의와 유불도의 사상을 고유의 풍류도의 보편적 정신세계를 융합, 건전한 청소년을 양성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는 200여명의 화랑이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화랑도는 그 조직과 수양과정을 통하여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대의(大義)를 존중하여 의에 어그러지는 일은 죽음으로써 항거하고, 병석에서 죽는 것을 꺼리고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함을 찬양하며, 오직 전진이 있을 뿐,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적에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됨을 수치로 아는 등 독특한 기질과 기풍을 연마, 함양하였다. 또한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 취항(鷲項)두 화랑 에게 주었다는 세속오계(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가 화랑의 정신적 기저(基底)를 이루었다. 신선도(神仙道)로 단련된 그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순수한 애국심이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랑도는 신라에만 있었던 제도가 아닙니다. 똑같은 제도가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는데, 고구려는 조의선인제도, 백제는 무절(武節 : 싸울아비)이라고 불렀답니다. 신라 화랑도에서 낭도들의 리더가 화랑이었듯, 고구려에서는 조의들의 지도자를 조의선인이라 했습니다. 조의선인이란 검은옷을 입은 선인이란 뜻에서 나왔지요. 즉 고구려의 상징인 검은색의 도복을 입고, 신선도를 수련하며, 몸과 마음을 닦았던 고구려의 젊은 인재양성 제도를 말합니다. 또 신라의 화랑들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듯, 고구려 조의선인 출신의 수많은 인재들이 고구려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습니다. 을지문덕, 양만춘, 연개소문도 모두가 조의선인 출신입니다. 수나라 양제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을 때,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에서 이들을 대파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2,700인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살수대첩이었지요. 이때에 을지문덕 장군이 이끈 병사들도 바로 검은옷을 입고 신선도로 단련되었던 20만의 조의군사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조의선인제도나 백제의 무절(武節)이 신라의 화랑도보다 후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패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승자인 신라의 역사를 강조하다보니 조의선인이나 무절을 비롯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 문화는 왜곡 축소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화랑도는 물론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조차도, 모두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天指花郞)을 이어받은 말하자면 리메이크된 제도입니다. 한단고기등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2,500여 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화랑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신선도로 심신을 단련하던 미혼의 자제들을 국자랑이라 했으며(11대 단군인 도해단제 재위 57년 -단기 3891년, 서기 전 1891년), 그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天指花(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도 한다.
(13대 홀달단제 20년- 단기 3763년, 서기 전 1763년) 단군조선의 국자랑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라 화랑제도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무사도정신(武士道)를 만들었으며 일본 또한 한 장군(쇼군將軍)밑에 많은 사병(사무라이 또는 랑인郞人)들을 두고 각 쇼군들의 영토확장을 위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라 화랑제도의 화랑은 일본의 쇼군(將軍)이며 그들의 사병(私兵)즉 사무라이들은 료진(郞人)이라 불리웠다.
그런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조선의 정치, 종교, 사회, 문화 등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들은 그 윗대인 배달국과 더 윗대인 고대한국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입니다. 때문에 천지화랑의 기원이 지금부터 3888년 전인11대 도해단제때라는 것도, 그때 처음 기록에 나온다는 말 일뿐이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고대 한국 연방의 한인할아버지께서 남북2만리 동서5만리인 유라시아 대륙전체에 흩어져 살고있던 백성들을 교화하기위해 1년에 한번 순행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신시배달시대의 한웅할아버지들도, 고조선의 단군 할아버지들도 사해(四海)를 순행하셨다고 합니다. 이때 젊은이인 화랑들이 그분들을 수행하며, 운해주(지금의 중국 중원지역). 천산주(천산산맥 지역). 성생주(인도. 동남아 지역). 월식주(중동 지역)들을 두루 순례하였습니다. 사실 이 지역들을 연결하면 고대 우리민족의 강역이 됩니다. 훗날 신라시대 화랑들이 명산대첩을 찾아다니며 수련하던 수행방식은 이렇듯 한단 시대 천지화랑들의 순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단군조선시대 화랑들의 총사령관을 국선(國仙), 여자낭도는 원화(源花), 남자는 화랑(花郞)이라 했으며, 단군으로부터 인정받은 화랑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선도를 닦음으로써, 하늘과 통하는 종교교육과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 군사교육을 한꺼번에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천기간동안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소도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평소에는 소도가 화랑들의 회의장소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신선도의 5상(五常)을 지켰는데, 5상의 내용은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5가지 덕목으로, 이것이 신라 때 원광법사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세속오계의 원형이다.
결국 알고 보면 신라의 화랑도는 단군조선 천지화랑의 표절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요. 단군조선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니까요.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근대조선시대 훈민정음도 단군시대의 가림토문자의 개정판입니다. 이렇듯 신라의 화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 무절의 기원은 모두 단군조선 시대의 천지화랑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그리고 효(孝). 충(忠).도(道)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그들 모두는 우리한국 청년들의 유전인자 속에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신과 기백을 오늘에 되살린다면, 국가와 민족 앞에 쌓여있는 오늘의 많은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남북통일과 동북아평화를 실현하여 세계적인 정신문화국가로 존중받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에 그러한 제도와 정신을 계승하여 2004년 1월에 천안 목천에 (재단법인)국학원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인간사랑' '민족사랑' '지구사랑'의 정신으로 계승한 국학청년단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신화랑도'가 다시 부활되고 있다는 것이다!
3. 무절(武節)은 백제의 싸울아비().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고구려의 조의선인 제도나 백제의 무절(武節)이 신라의 화랑도보다 후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 화랑이나 백제의 무절같은 경우 귀족만이 될 수 있었다. 조의선인이란 '검은조복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무절(武節)이라 불렀다. 신라의 화랑, 백제의 싸울아비와 같은 고구려의 고구려의 인재양성 제도를 말한다.
현제 일본에 무절현()이 있으며, 이곳은 백제가 망한 이후 도시가 형성된 곳으로 그이름이 남아 있디.
武節郷
旧稲武町、旧名倉村、旧津具村、豊根村、旧富山村といった北設楽郡北部の町村、及び長野県下伊那郡根羽村を含めた一帯は、古来より加茂郡に所属していたとされる。中世後期には加茂郡足助荘のうちにあり、当該地域の神社には足助荘の古名が記された棟札がいくつか残されているといい、棟札からは武節郷などの郷名も伝わっている[7]。当該地域の郡籍変更の時期については、1641年(寛永18年)頃[8]・1678年(延宝6年)頃[9]などとされる。
武節郷の範囲は現在の稲武地区域の大部分に相当すると考えられ、名倉川両岸の11の村々が所属していた。室町時代には土岐氏流菅沼氏の支配下にあり、戦国期にかけては武田氏・今川氏・松平氏による、当郷を巡っての攻防が繰り返された[4]。天正期には武節郷の11ケ村の大庄屋が武節町村に置かれていたというが、1636年(寛永13年)に生じた武節町村と稲橋村の争論が元となり[3]、武節町・小田木・川手・黒田・桑原・御所貝津の6ケ村が川西組、稲橋・大野瀬・押山・夏焼・野入の5ケ村が川東組に分けられる。川西組には武節町村に庄屋山口惣兵衛が置かれたが、不正を働いたかどで三河代官鳥山精元に罷免され、以後は各村に庄屋が置かれたという
*角川日本地名大辞典 23 愛知県』:1175-1176ページ。
선비의 생활
《소학(小學)》에서 나오는 선비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10살이 되면 남자아이는 사랑에서 아버지와 자며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20살이 되면 관례를 하고 널리 배우며, 30살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며, 40살에서는 벼슬에 나가고, 70살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 이런 생애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특히 선비에게는 학업과 벼슬이 중요하다.
선비는 한평생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선비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학문과 수련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이요, 학자다. 선비가 배우는 학문의 범위는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일의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목표를 둔다.
《대학(大學)》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주어진 ‘밝은 덕을 밝히는 일’과 ‘백성과 친애하는 일’의 사회적 과제를 가르친다. 선비는 항상 자신의 인격을 닦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인격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선비는 자신의 덕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관직에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치고 벼슬할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비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소수의 선비만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선비가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관직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여겼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맡은 관직도 주로 자신들의 학문과 신념을 펴는 직책이 많았다.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거나 언로를 맡아 임금에게 간언하는 직책이었다.
관직에 오르면 위로는 임금을 섬겨야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선비는 임금에게 무조건 복종과 충성을 하지는 않았다. 선비는 임금과 의리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언제나 그 직책의 성격과 임금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여야 했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뢰어 바로잡으려 하고,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했다. 그것은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경우를 흔히 ‘처사(處士)’라고 하였다. 처사가 관직에 나간 선비보다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후생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도리를 제시하는 사람을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호칭인 ‘공(公)’에 비해 훨씬 높은 존중을 받았다.
선비에겐 지향하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한 시대에 나가서 도를 시행하고, 또 하나는 후세에 말씀을 내려주어 가르침을 베푸는 일이다. 즉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을 통해 전하기도 하지만 직접 저술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의 일생은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자료는 각개 자료를 종합한 것으로 참고하시기 바란다.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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