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문영, 이창동 감독의 신작 [밀양]을 보고, 만나고, 쓰다
홍상수는 즐거움을 찍고, 이창동은 괴로움을 찍는다. 물론 홍상수가 희망을 찍고 이창동이 절망을 찍는다는 말이 아니다. 상식적인 용법으로는 차라리 그 반대에 가깝다. 홍상수는 현재에 도착한 세계만을 믿고, 이창동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 혹은 같은 의미에서, 지나가버린 시간을 믿는다. 홍상수는 영화적 기호의 물질성에 몰두하며, 이창동은 미끈한 기호 뒤로 사라졌거나 오지 않은 의미를 붙잡으려 한다. 그 결과, 홍상수의 이야기는 충만으로 향하고, 이창동의 이야기는 결여로 향한다.
공통점은 둘 다 거짓말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거짓말의 범위가 조금 다르다. 홍상수는 의미 자체와 싸운다. 그는 의미작용 자체를 불신한다. 그에게, 비유컨대, 말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이다. 이창동은 무의미와도 싸운다. 그는 무의미도 거짓말의 일종이라고 본다. 그에겐 거짓말이 아닌 말이 여기 아닌 어딘가에 있다. 요컨대 의미가 비워져가는 자리를 영화적 기표들의 활력이 채워가는 과정이 홍상수의 서사라면, 이창동의 서사는 오염된 의미들을 끝내 소진시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창동의 서사를 듣고 있기 힘겨운 이유는 그가 소진을 중간에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야기가 끝나고도 소진은 끝나지 않는다. 의미는 바닥나고 인물은 탈진한다. 우리는 추락을 거듭해 흉하고 딱딱한 바닥과 결국 마주한다. 아주 희미한 반짝임이 있었다. 아니 없었을지 모른다. 말 그대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말할 수 있는 의미의 전부인가? 이창동은 동요 없이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이야기를 하는 이유다. 이창동 영화의 괴로움을 받아들인다면, 소진된 거짓 의미들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희미한 반짝임마저 사라져서는 살아낼 수 없다고 당신의 몸이 말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
이창동의 네 번째 장소 밀양에 신애(전도연)라는 여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내려와 새 삶을 시작한다. 밀양은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이며, 그곳에서 신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센터를 하는 종찬(송강호)이 신애의 곁에 머무르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홀로 버텨내려 한다. 그러다 아들은 유괴당하고 곧이어 시체가 되어 돌아오며 범인은 금방 잡힌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스포일러가 될 수 없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녀는 버텨낼 수 있을까.
<밀양>은 유괴를 언급하지만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유괴의 과정도 유괴된 아이의 시신도 볼 수 없으며, 아이의 절규도 유괴범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사건이 종료된 뒤에야 체포된 유괴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애의 몸과 말을 통해서 그 과정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밀양>은 유괴라는 행위와 살해에 관심 없다. 오직 그 결과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흐느낌과 구토와 떨리는 몸과 통곡과 광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게 전부다.
“왜 고통을 다루는가”라는 질문에 이창동은 “고통을 다루는 게 즐거움을 다루는 것보다 덜 불편해서”라고 대답했다. 이창동은 <밀양>에서 지금까지처럼 가해자가 존재하는(그것이 익명의 집단이건 아니면 특정한 인물이건) 고통을 다룬다. 그러나 그 방식에서 전작을 훌쩍 뛰어넘는다. <밀양>은 고통 받는 주인공을 드러내면서, 고통을 영화라는 매체에 담아온 이창동이 자신에게 혹은 자신의 영화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창동은 먼저 자신에게 묻는다. 고통을 재현한다는 게 가능할까. 혹은 정당할까. 이 질문을 경유해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할까.
관객이 즉각적인 고통을 느끼도록 혹은 느낀다고 믿도록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해행위 즉 폭력을 육체적으로 보여주면 된다. 그 효과는 피해자가 관객이 동일시할 만한 인물일수록 더 강해진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영화에서 고통을 유발한 폭력이 재현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게 표현되더라도 ‘참을 만한’ 자극이 된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극장에 들어와 안전한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에서 관음증의 탐식성은 지독한 것이어서, 피해자의 고통의 자리에서 묘사된 폭력조차 은밀하게 ‘즐길 만한’ 것이 된다. 9·11 동영상에서 경험했듯 허구의 서사로 재현된 폭력이 아니라 기록된 실재의 폭력조차 이 관음증의 탐식을 피해가지 못한다.
최악의 사태는 영화의 재현된 폭력을 감상하고 나서,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안전한 분노가 그 이해의 증거로 내밀어진다. 이른바 고발성 영화에서 종종 일어나는 전도 한 가지는, 고통의 이해가 분노를 낳는 게 아니라 안전한, 그래서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거의 잊혀질 분노가 고통의 이해를 사후 승인하는 것이다. <그놈 목소리>를 본 그 수많은 관객 중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그 영화를 즐기기 위해 쓴 비용을 범인 체포를 위해 쓰지 않는다. 이것은 관객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 윤리의 문제다. 또한 폭력의 재현을 변호하는 데 동원된 언어의 문제다.
이창동이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재현된 ‘나’의 손상된 육체나 일그러진 삶을 전시함으로써 가해자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김혜리가 말한 공범의식(<씨네21> 594호 ‘김혜리가 만난 사람’)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이건 심각한 결단이다. 재현된 폭력을 접해온 우리의 관성으로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창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공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서 왜 신애가 아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그녀의 죽은 남편은 정말 바람을 피웠는지, 그리고 정말 밀양으로 온 이유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신애라는 여인의 내력도 동기도 잘 알 수 없다. 게다가 땅 살 돈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그녀의 언행은 유괴범을 끌어당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신애는 평범하되 사랑스러운 범상함을 갖고 있지 않은, <귀여운 여인>(체호프)의 올렌카처럼 그저 약간 이상하고 딱한 여인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 빛이 스며드는 법
이 여인이 끔찍한 불행을 당했다는 말만 듣고, 우리는 그 여인의 오열과 통곡, 종교에 몰두한 뒤 갑자기 천사처럼 바뀐 얼굴, 그러다 다시 종교를 증오하고 미쳐가는 모습을 차례로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창동은 극중 인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이해하겠지, 라고 단 한 번도 달콤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밀양>은 유괴도 신앙도 광기도 언급하지만 어느 것도 다루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밀양>은 고전적 서사를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영화의 거짓말하는 능력을 경유해, 동시대 영화와 동시대의 삶을 말하는 언어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 그러나 위장된 대답에 휩싸여 죽어가던, 이 질문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대답들이 모조리 실패했을 때, 비로소 되살아난 질문, 그러나 여전히 불가능한 대답, 그 어둠 속에 흘러드는 희미한 비밀의 빛. ‘밀양’은 그곳에 있다.
첨언컨대, <밀양>은 이 글의 딱딱함과는 무관하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어쩔 수 없이 어떤 육중한 감정을 안고 있게 된다. 이창동은 극적 장치들을 거의 버리고서, 그리고 잔인하게도 전도연이라는 가냘픈 여배우의 육체에만 서사 전체의 무게를 실으면서, 놀랍게도 그것을 해낸다. 전도연은 연기했다기보다는 이 가혹한 서사 안에서 그저 버텨냈다는 인상을 준다. 그 버텨냄이 그녀의 어떤 연기와도 다르게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창동 감독, 영화평론가 허문영 대담
유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고통이다
허문영 : 3월 초에 김혜리 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 영화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생각은 털어놓으셨다. 하지만 개봉 전이어서 영화 안으로 깊이 들어간 질문은 아직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르지만 이 질문을 먼저 꺼내야겠다. 이 영화의 소재 중 하나는 유괴다. 위험한 소재다. 사회적으로 위험하기 이전에 영화적으로 위험하다. 영화 안에 유괴가 들어온 순간부터 다른 모든 것들은 삼킬 위험이 있다. 어떻게 이 소재에 이르게 됐는지.
이창동 : 청문회 열기가 한창이던 1988년 <외국문학>이란 계간지에서 이청준 선생의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즉각적인 느낌은 ‘이게 광주 이야기구나’란 것이었다. 청문회에서는 광주학살의 원인과 가해자를 따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제 화해하자는 공론화 작업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벌레 이야기>에는 광주에 관한 내용이 암시조차 없는데도 나는 광주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그 소설이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라고. 그리고 가해자가 참회한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누가 알 것이냐. 다른 한편으로는 이청준 소설의 큰 미덕인데,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되게 관념적인 이야기인데 그게 늘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었겠지. 그러다가 <오아시스>를 끝낸 뒤 밀양이라는 공간의 느낌과 그 이름이 이루는 아이러니한 대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게 나도 모르게 <벌레 이야기>와 결합된 것 같다. <벌레 이야기> 안에 유괴가 나온다. 그런데 이야기했다시피 유괴라는 게 너무 전형적인 사건이라 참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도 생각해봤는데 한 여자가 당하는 고통,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주 억울하고 고통스런 비극, 이게 유괴 이상의 사건이 없었다. 유괴는 어떤 특정인이 저지르는 것이긴 하지만, 처음에는 범인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가해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병으로 아이를 잃는다든지, 교통사고로 잃는다든지 하는 것과 또 다르다. 또 사회가 그 범인에게 범행을 떠미는 느낌도 있다.
허문영 :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는 다음 문제였을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유괴가 종종 다뤄졌다. <복수는 나의 것>이 있고, <그놈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밀양>에선 앞선 영화와 달리 유괴란 사건 자체의 구조는 찍지 않았다. 지금의 방식으로 찍게 된 고민의 과정이 궁금하다.
이창동 : 장르적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유괴사건의 플롯이라는 게 대동소이하다. 우선 범인이 누굴까 부터, 아이를 찾기까지의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 거기서 생기는 긴장, 그 이후 협박, 그리고 심리상태, 이런 것을 완전히 건너뛸 수 없지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가능하면 범인도 일찍 암시하고 싶었고. 정말로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들이닥쳤을 때 여주인공의 심리, 고통, 공포 이런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관객이 여주인공에 주관적으로 이입되는 것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보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도연은 너무 정직한 연기자
허문영 : 주인공 신애라는 인물에 대해서 묻고 싶다. 영화를 보면 이 인물을 잘 알 수가 없다. 개략적인 느낌은 관객이 반쯤만 동일시하고 나머지 반쯤은 동일시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일단 그녀가 밀양에 오기 전까지의 전사에 관해선 힌트만 주어지는데, 그나마 힌트도 수수께끼 같다. 밀양에 와서 보여주는 캐릭터도 의상실 주인의 말대로 약간 이상하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로 변하는 과정도 너무 급작스럽다. 시나리오 상태에서 신애는 어떤 여자였나.
이창동 : 나는 신애가 보통 여자라고 생각한다. 보통 여자라 함은, 나름대로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자기 성취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반쯤은 좌절했고, 또 한국사회에서 산다는 것만으로 여러 번의 거듭된 배반과 상처를 몸속에서 체화하며 살아온 여자라는 거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신애는 밀양에 내려와서 나름대로 자기가 만들어놓은, 원하는 어떤 모습으로 스스로를 만들려고 한다. 그게 자기 기만으로도 보이지만, 자기가 당한 고통과 배반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인 거다. 그래서 돈이 있는 척 한다든지 하는데 그것 때문에 되갚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빠진다. 그리고 그게 보통 한국 여자들의 모습일 수 있지 않을까.
허문영 : 메이킹 다큐를 보니 전도연 씨는 시나리오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참여하기로 결정했는데, 막상 시나리오를 보고서는 자신이 없다고 감독에게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감독님은 애초부터 이 인물이 전형적인 인물로 비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질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전도연 씨를 어떻게 설득했나. 둘째는 최초에 설득했다 해도 매번의 촬영과정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표현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나.
이창동 : 우선 전도연 씨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인물을 이해하기 어려워서는 아니었다고 본다. 배우가 어떤 인물을 이해할 때는 머리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본능으로 받아들이는 거다. 본능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설명하라고 하면 힘들지 모르지만. 그런데 시나리오에 드러나는 감정의 증폭이 너무 강하니까 전도연 씨의 고민은 이 파고를 타고 넘을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만큼 전도연 씨가 연기자로서 정직하다는 거다. 오히려 ‘너무 좋아요’라고 했으면 불안했을 거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안심이 됐다. 그건 못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굳이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촬영현장에서의 미묘한 감정이랄까 이런 것에 관한 것도 비슷한 차원이다. 목소리를 좀 올려 달라, 톤을 낮추자, 말을 빨리 해 달라, 이런 식의 디렉션은 배우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되겠지만, 그게 전형성에서 벗어난, 대단히 개연성 있는 감정과는 다른 거다. 결국 본인이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내가 디렉션을 주는 순간 전형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에둘러 말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소통방식이 연기자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뭘 얘기하는지 모르니까. 그러나 배우는 그 속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허문영 : 그 소문은 들었다. 테이크는 수없이 많이 가지만, 배우들은 왜 다시 찍는 건지 듣지 못했다는. 그래서 고통스러워했다는.
이창동 : 혹시 감독의 고통이 심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나? (웃음)
허문영 : 영화를 찍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하시기 때문에 이번에 고통스러웠다고 해서 새롭게 들리진 않는다. (웃음)
이창동 : 그러니까 나의 방법은 나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써 너도 당해봐라, 이런 거다. (웃음)
허문영 : 역시 메이킹 다큐에 전도연 씨의 감정이 안 잡혀서 그날 촬영을 접는 순간을 찍은 대목이 나온다. 어떤 장면이었나.
이창동 : 유괴범에게서 전화를 받는 장면이었는데, 본인이 굉장히 어려워했다. 아마 관객이 봤으면 충분히 뛰어난 연기로 봐줬을 법도 한데 본인은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 어려움의 핵심은 뭐냐 하면,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의 충격과 아픔이 자기 안에서 안 나온다는 거였다. 전도연 씨 같은 경우는 아이가 없어서,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가 하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본인이 느끼는 그 감정 속에 해답이 있다.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 이게 실감도 안 나고, 막막하고, 뭐가 뭔지 모르고 그렇지 않냐. 그런데 실제 애 엄마가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도 사실은 실감이 안 날 거다. 지금 마음속에 있는 그런 혼란이나 실감 안 나는 감정을 밀어내려 하지 말고 오히려 받아들이자, 그렇게.
허문영 : 이 영화에서는 범인의 목소리도 거의 들을 수 없고, 아이의 시체도 볼 수 없다. 실제로 유괴행위 자체의 육체성에는 전혀 접근할 수 없다. 그런데 영화에선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 아이 엄마의 얼굴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아마 배우로서는 가장 어려운 수준과 방식의 연기가 아닐까 싶다. 전도연 씨는 자신의 연기만으로 그 모든 긴장과 감정선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굉장히 가혹한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창동 : 유괴뿐 아니라 다른 것도 그랬다. 단지 감정의 파워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말한 거고. 아까 전화 받는 연기를 말했는데, 그게 장르영화처럼 지속적으로 조금씩 드러내면서, 말하자면 그 육체성과 같이 가면 훨씬 하기 쉬웠겠지. 그런데 그런 게 없으니까 어려웠을 거라고.
허문영 : 유괴범의 면회실 장면 뒤론 그 이후에 대해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고,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창동 : 그렇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사실 영화에서 유괴가 중심이 아니다. 중요한 건 고통이다. 그 고통이 무슨 사건에서 비롯된 고통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또 나는 고통이란 자기가 경험하는 것까지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인간관계의 모순이다. 그리고 어떤 고통의 경우에는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있다.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거다. 이 영화에서 신애가 당한 고통이 그런 고통이지. 그때는 가해자 자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미워해봐야, 다시 말해 인간의 논리로 미워해봐야 고통만 깊어질 뿐이라고. 거기서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고통을 치유 받든지, 어쨌건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야만 한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신애와 종찬의 영화다
허문영 : 앞의 세 작품들보다 여배우가 더욱 그러니까 전적으로 중요한 영화인데, 배우 전도연이 할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든 시점은 언제였나.
이창동 : 애초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배우로 갈까, 아니면 스타로 갈까 이걸 고민했다. 그러다가 스타를 써야 한다고 갑자기 생각을 했고. 왜냐하면 내가 제작자니까. (웃음) 제작자로서의 압박을 느끼기 시작할 때 스타를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스타라면 그렇게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허문영 : 송강호 씨의 연기는 워낙 정평이 나 있긴 하만, 무거운 분위기의 이 영화에서는 약간 조심스러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 속에서 대사들은 결과적으로 코믹한 대사가 많다. 코믹한 연기에 발군인 송강호의 연기를 어느 수준으로 밀고 당길지 어려울 수도 있었겠다.
이창동 : 그건 송강호뿐 아니라 전도연도 마찬가지다. 배우의 아우라가 크기 때문에. 보통 상업영화라면 그것을 대충 이용한다. 관객은 영화 속 캐릭터도 보려 하지만 배우의 아우라도 같이 보려 한다. 배우의 아우라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역할을 하는 거지. 우리 영화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일단 두 사람은 남녀 배우로서 가장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두 사람도 그런 점이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것을 빼는 것에 대해서. 내가 그런 쪽에서 고민을 많이 했고, 그게 배우들에게 보이지 않게 굉장히 압박이 됐을 것이다. 배우들은 그게 참 어려운 거다. 자기 아우라를 어떻게 벗으라는 건지. 그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벗으라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허문영 : 여주인공은 한없이 고통스러운데 종찬은 옆에서 툭툭 한마디만 던져도 웃긴다. 그 배합과 균형의 문제도 힘들었을 것 같다.
이창동 : 이 영화는 신애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신애와 종찬의 이야기다. 두 인물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 상황인 거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거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로 보이지 않지만 영화 속에는 엄연히 존재감이 있어야 한다. 신애의 고통, 신애가 갈구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고. 그런데 그 신애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눈에 늘 보이는 현실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다. 그리고 그게 밀양이라는 공간으로 축약이 돼 있다. 그리고 그 밀양이라는 공간이 인격화된 게 종찬이고. 신애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고 있다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처럼 인격체로서 종찬은 항상 두어 걸음 뒤에 따라오고 있다. 신애는 앞으로 보고 있다가 뒤만 돌아보면 그가 있다. 손만 잡으면 돼. 그런데 손을 안 잡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뭔가를 찾으려 하고 싸우려 하니까. 그러니까 종찬은 전면으로 나서면 안 된다. 배경으로서 늘 약간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내적으로는 균형을 이뤄야 하니까. 그게 송강호 본인에게도 어려웠을 거야. 두드러져 나오면 안 되니까.
허문영 : 종찬 캐릭터는 배우에 힘입어 대단한 활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다른 조연들도 생동감이 강하다. 혹시 이것이 대중 고려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이창동 : 상업적 계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낼 때 갖는 힘이 있다고 본다. 관객이 영화를 보려 하는 본능 중에는, 관객이 영화를 보며 찾는 재미 중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재미란 것도 있는 것 같다.
사실은 모두 지상의 문제고 인간의 문제다
허문영 : 유괴사건 이후에 신애는 기독교에 빠진다. 이 영화에 표현된 기독교들의 모습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다. 종교는 늘 예민한 문제다. 이들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야겠다고 애당초 생각했나.
이창동 : 기본적으로는 교회와 신앙에 관련된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것을 경계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그 어느 쪽도 사람들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다는 거다. 단지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강할 뿐이라는 것이고. 심지어 집사, 장로, 그리고 교회 신도들을 캐스팅할 때도 가능하면 인상이 좋은 사람들을 캐스팅하려 했다. 목사님도 처음에는 경험 많은 연기자를 캐스팅했는지 도저히 진짜 같은 느낌이 안 났다. 그러나 뒤쪽 부흥회 장면은 신애가 신에게 저항하는 장면인데 그 장면이 연출된 느낌이라면 신과 맞선다는 핍진성이랄까 이런 게 잘 살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발상의 전환을 했다. 목사님에게 부탁하자고. 그래서 여러 목사님을 만났을 때 놀란 것은 이 영화가 나름 민감한 점을 갖고 있는데도 다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했다는 거다. 영화의 뜻을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해석해주셨다. 특히 여기 출연하신 임광명 목사님은 실질적인 도움도 많이 주셨다. 설교 내용도 직접 만들어주셨다.
허문영 : 김혜리 씨와의 인터뷰에서 공범의식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번에는 유괴라는 행위가 좀 더 개별적이기 때문에 그 용어를 그대로 쓰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은 여전히 한 개인의 고통을 일종의 사회적 의제로 제기하는 것 같다.
이창동 : ‘사회적’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녀의 고통에 대해 뭘 해줄 수 있지? 난 없다고 본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그런 해법을 관객이 찾기도 원하지 않고.
허문영 : 그럼 <밀양>이 그 고통에 대한 이해를 사회적 의제로 제기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창동 : 다 좋은데, ‘사회적’이란 말은 좀 뺐으면 좋겠다. (웃음) 이게 전력 때문인지 거부반응이 든다. 왠지 이제는 그 말이 진짜가 아닌 것 같은 뭔가가 마음속에 생겨버렸다. 그러니까 뜻이 하나밖에 없는 말, 정확한 말, 정확한 논리, 정확한 개념만을 말하도록 강요받던, 그런 일을 해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영화 만들고, 소설 쓰고, 이런 일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허문영 : 이창동 영화의 주제는 변함없이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왜 영화라는 매체로 고통이라는 주제를 다루나.
이창동 : 그 질문을 약간 바꿔 답하자면, 내가 느끼기에 즐거움을 다루는 것보다는 고통을 다루는 게 좀 정직하달까. 그런 저항감도 있다. 나는 이른바 시네필도 아니다. 무작정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하게 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영화만 하면 다냐, 이런 생각도 있다. 정말 욕 들을 소리지만 영화가 그렇게 윤리적인 매체는 아닌 것 같다. 그 말이 싫다면 착한 매체는 아닌 것 같다. 그 말도 싫다면 영양가 있는 매체는 아닌 것 같다. 흔히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영화도 마음의 양식인가?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폭력을 다루는데, 폭력을 새롭게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왜 영화 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상찬을 하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관객의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남의 몫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 윤리적으로 보기에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다. 그게 상식이다. 영화는 그 상식이 작동 안 된다. 나는 여전히 그게 의심스럽다. 시네필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난 내가 고민하는 만큼 영화에서 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관객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니면 그냥 소비되고 마는 것인지.
허문영 : 공직생활을 하고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변화들이 꽤 많았다. 그중 하나는 커뮤니티의 와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계 내부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적으로. 그 세상의 변화가 이번 이야기를 만드는 데 어떤 작용을 했다고 느끼나.
이창동 : 글쎄, 그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는 공무원으로 호출받기 전에 마음먹었던 영화니까. 지금 한국사회의 현상들, 그러니까 커뮤니티의 와해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또 다른 해체, 이런 것일 텐데, 해체되거나 분열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언젠가는 그렇게 되는 거라고 본다. 그러면서 또 다른 뭔가를 만들어가겠지. 하여간 그것이 지금 내가 영화를 만드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허문영 : 혹시 그 변화가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대답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보나. 그러니까 흥행 기록과 무관하게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테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창동 : 글쎄, 나는 앞의 영화들보다는 <밀양>이 집단의 문제로부터는 좀 벗어난 것 같다. 기독교라는 경계가 있긴 하지만, 사실은 좀 더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하늘로 추상화되는 그곳의 존재, 어떤 질서가 있는데, 사람들은 곧잘 그 이름을 빌려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땅의 문제고 인간의 문제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정도다. 영화도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끝냈고. 이 땅, 오늘, 이 현실,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편을 가를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주연을 제외하고 모두 경상도에서 캐스팅한 배우들
허문영 : 주연을 제외한 다른 연기자들을 어떻게 선발했나. 거의 새로운 얼굴들이다.
이창동 : 이 영화에서 신애와 신애 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상도 사람이다.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출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서 캐스팅했다. 부산, 대구, 울산, 포항 등을 다니며 오디션도 많이 봤다. 또 의외로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연으로 나오지 않았던, 잠깐 출연하는 사람들, 창밖을 지나가는 보조 출연자마저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냥 일반인들을 연기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자신이 있다. ‘빛나는 일반인들’, 그거 하나는 자부할 수 있다. 연기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눈빛과 행동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허문영 : 유괴범 딸 연기한 아이가 특히 눈에 띈다. 어떻게 캐스팅했나.
이창동 : 좋은 10대 연기자들이 놀라울 만큼 많았는데, 우리 영화에서 요구하는 역할과는 달랐다. 오디션을 많이 봤다. 부산에서도 학교별로 돌면서 오디션을 열었는데 결국 못 찾았다. 그런데 우연히 아는 교장선생님이 경남 양산에 있었는데, 오디션을 만들어줬다. 각반에 2명씩 선발해서. 이 친구는 담임선생님이 너 나가라 하니까 얼떨결에 나왔다. 그런데 감성이 굉장히 좋았다. 어떤 대사를 시키는데 코가 빨개졌다. 요즘 10대 연기자들도 우는 연기는 문제없이 해낸다. 그런데 코가 빨개지는 건 몸이 움직이는 거다. 거의 원석에 가까운 감성을 갖고 있어서 가능하면 손을 안 대고 감성을 가져오는 것이 관건이었다.
허문영 : 기본적으로는 무거운 영화인데, 시사회장에서 사람들의 웃음이 많이 터졌다. 예상한 반응인가.
이창동 : VIP 시사를 보고 가면서 문자를 남겨준 사람들이 많은데, 다들 ‘영화 재미있어요’라는 것을 최대의 덕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런 말도 썼더라. ‘신기한 재미가 있어요’라고. 그러니까 내가 어떤 반응을 원하는지 아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 좋아요’ 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웃음)
<이번 대담에서 이창동 감독과 허문영 평론가는 <밀양>의 영화의 내적인 구조, 세세한 장면 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 대목은 독자들이 영화를 본 뒤 읽었으면 좋겠다”는 두 대담자의 뜻에 따라 개봉(5월24일) 뒤에 발행되는 605호에 별도로 실을 예정입니다.>
<씨네21-2007년 5월 15일>
첫댓글 [ 좀 더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하늘로 추상화되는 그곳의 존재, 어떤 질서가 있는데, 사람들은 곧잘 그 이름을 빌려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땅의 문제고 인간의 문제다.]
_()_
모든 고통은 자기를 통하지 않으면 자기의 고통이 되지 않는것일지도....다만 공감을하고,동조를 하고,경험치 로서의 이해 정도....
박하사탕은 보고 나서 참 힘들고 아렸던 기억이 나고 밀양은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며 일어섰지요 .. 박하사탕 다시 한번 볼까 생각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