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한계령 노래 좋아하시죠.
저는 초보운전 때 한계령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차가 스틱이어서 정말 스릴있게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내가 왜 여길 올라왔을까 후회하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있습니다. 저하곤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 데, 지금은 강원도 어디에서인가 자연을 벗삼아 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 때 발췌해 놓은 정덕수 선생의 글들을 올려보겠습니다. 그가 표현한 것 처럼 '차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참 많은' 원작과
노래가사도 비교해 보시구요. 30대 초반에 직장동료들과의 등산 길에 버스에서 이 노래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한계령 시 원작자인 정덕수 선생이 쓴 글인 것 같은 데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군요.
음악박스는 처음은 시 낭송(작곡가 황의종 교수), 두번째는 테너 심우훈, 세번째 테너 김명관의 노래 순서로 되어있습니다.
원작자인 정덕수 선생이 2012.5.30일날 올린 글입니다.
이은미가 부른 한계령 원작자의 감회
노래를 부르는 이들과 노랫말은 쓴 사람의 감동은 사람은 다르지만...
2012년 5월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산은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르고 속살은 걸음품을 팔지 않고는 볼 수 없게 녹음 속으로 잠겼습니다. 이만큼
걸어와 멈워 서서 산을 들려는 순간, 가끔은 한 생각 잠겨 돌아보게 됩니다.
기억도 아득한 내가 온 길, 조금 전 막 지나친 거 같은데...
5월로 접어들면 사실 글을 쓸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글을 쓰겠다고 한 자리에 1시간 앉아
있기가 어렵습니다. 제겐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가 5월과 6월입니다.
10여일 전 만해마을에 들려 몇 분 일행들과 산행을 하던 도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MBC 나는 가수다 2의 사업기획을 맡은 김지현입니다"로 시작한 통화는 "정덕수 선생님께서 쓰신 한계령을 편곡
해 나가수에서 사용하려는데 동의서가 필요합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작곡자인 하덕규씨가 동의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약 20분 뒤 다시 전화가 왔더군요.
"선생님 MBC 나가수2 김지현이데요, 하덕규 선생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하덕규 선생님은 정덕수 선생님께서 허
락을 하신다면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정덕수 선생님께서 허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저작권에 대한 편곡 승인서와 동의서에 서명을 할 때야 노래를 부를 가수가 '맨발의 디바'로 불
리는 이은미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양희은과는 다른 그만의 창법으로 불려질 한계령, 마야나 남궁옥분, 팝페라
가수 임형주나 여러 성악가 등 많은 이들이 연주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은미의 노래는 또 다른 감동을 많은 이들에게 선물했다 보입니다.
사실 저는 공연을 생방송으로는 보질 못했습니다. 5월 27일 원주에서 큰형님의 고명딸이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그곳을 다녀와 막 집에 도착하자 블로그를 통해 알고 지내던 이웃 한 분이 처음으로 방문을 하셨기에 함께 악수터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술 한 잔 나누다보니 못 본 것입니다. 식당에 요청해 TV플 켰을 땐 박완규가 마지막으로 노
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편곡 동의서와 승인서에 서명을 할 때 지켜 본 아이들이 엄마의 전화기로 녹화를 해두었다 제가 집에 들어서
자 보여주더군요. 제대로 본 것은 28일 새벽 갈증을 느껴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통해서입니다.
나는 가수다2 '이은미 5월 경연곡 한계령'
한계령을 쓴지 어느덧 30년도 훌쩍 넘었습니다.
제가 이 시를 처음 쓴 날 서북주릉을 대청봉에서 출발해 걷다 한계령(오색령)으로 내려섰던 1981년 10월 3일의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무렵엔 일과 등산을 미친 듯 매달려 있었습니다. 가난한 까닭에 하루 100원 통학차비
가 없어 장학생으로 가르치겠다는 학교도 다니질 못하고, 객지에 나가 일을 시작해야했던 가혹함을 잊기 위해서
였을 수도 있습니다.
일을 하는 날은 일에 지쳐 잠이 들면 잊을 수 있었지만, 쉬는 날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서글픔이 산으로 이끈 모양입니다. 6살에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한 몫 했겠지요.
제가 처음 썼던 시에서 부분 발췌되어 만들어진 노랫말을 옮겨봅니다.
한계령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
차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참 많다 싶습니다.
한계령에서 1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매일지.
삼만 육천 오백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어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
이만큼 시간이 지나 일부지만 저작권을 돌려받고 타인의 노래가 되어버렸던 한계령을 다시 듣는 감회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제법 긴 30년 가까운 세월 사랑을 받는 노래 한계령을 세상에 남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시인이랄 수 있다 싶습니다. 양희은씨가 한계령을 취입한 날이 1984년 2월 5일이니 말이죠.
노래를 불러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리며, 여전히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
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직접 보시고 싶은 분은 여기로 가시면 됩니다. 한사 정덕수 선생의 블로그 http://blog.daum.net/osaekri/15601270
이은미의 한계령
양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