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출사표를 던지다
운명에 맞서는 영웅… 그의 고독을 보았는가
나의 미래가 빠져나갈 길 없는 심연이라고 여겨질 때 ‘삼국지’를 읽는다. 내가 지금 열정을 바쳐 몰두하는 일들이 결국은 헛수고이며 실패는 숙명적임을 깨달을 때 ‘삼국지’를 읽는다. 나에게 ‘삼국지’는 나보다 훨씬 더 훌륭했던 사람들이 고민과 고통 속에서 살다가 아무 내색 없이 죽어갔다는 진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한(漢)나라를 구하려는 주인공들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하늘의 뜻에 맞서서 말할 수 없이 진지하게 노력하지만 마침내 실패한다. 도원결의로 맺어진 영웅들은 대의를 위해 분투하여 촉한을 건국했다가 허망하게 멸망해간다. 관우와 장비, 유비가 차례로 죽어가는 이야기가 너무 가슴 아파 차마 읽어내려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비애의 남은 잿더미로부터 마법 같은 불길을 일으켜 공명의 출사표(出師表)로 이어진다. 따라서 나에게는 출사표에서 공명의 죽음에 이르는 장면들이야말로 ‘삼국지’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공명은 처음부터 하늘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지극한 정성이 있으면 하늘도 감동할 것이라는 지성감천의 일념으로 분투한다. 그 최후의 분투가 바로 출사표이다. 출사표에는 최후에 승리하는 패배자의 미학, 위엄을 갖춘 희생자의 미학, 무상한 운명 속으로 꺼져가는 고결한 인간의 미학이 들어 있다.
“신은 본래 포의(布衣)로 몸소 남양에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목숨이나 보전하기를 바랄 뿐 조금이라도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그들에게 쓰이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더럽고 보잘 것 없음을 꺼리지 않으시고 귀한 몸을 굽혀 신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으시고 저에게 지금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신은 선제를 위해 개나 말처럼 닫고 헤맴을 무릅썼습니다.”
출사표는 이 대목에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고독을 드러낸다. 그것은 패배할 줄 알면서도, 자기를 알아주었던 사람을 위해 싸우다 죽으려는 남자의 고독이다. ‘한실 중흥’이라는 대의명분 밑에는 이렇듯 의리와 인정에 얽매여 비극적인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남자가 숨어있는 것이다.
‘삼국지’를 읽는 현대인들은 공명의 비합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을 무의미한 전쟁터로 내몰려야 했느냐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명의 세계관에는 사적 유대감으로서의 의리를 한실 중흥이라는 공적 명분으로 포장한 측면이 있다. 이 같은 세계관은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물음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를 내장하게 된다.
자칫 공적인 명분이 사라질 때 ‘삼국지’의 세계는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 낭만적인 임협(任俠)과 무법(無法)을 실행하며 쓸쓸히 스러져 가는, 바람이나 달빛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 ‘수호지(水滸誌)’가 된다. 나아가 현실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야붕과 꼬붕, 주군과 가신이라는 동아시아적 당파(黨派) 시스템으로 속악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사표 장면은 강한 문학적 진실을 담고 있다. ‘민중’의 좌절은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공명처럼 비범하고 고결한 인물이 가치 있는 행동을 하다가 좌절할 때 우리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범과 의미들을 찾고 인생과 세계에 대한 반성을 경험한다. 이것이 ‘삼국지’가 거듭 읽히는 힘이다.
by 이인화 (소설가)
예로부터 공명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남자는 글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출사표 한편에는 남자의 삶이 이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쳐 생사를 잊고 승패를 초월하는 불꽃 같은 삶의 아름다움이다. 만약 이런 독선이 없다면 인류의 역사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이상을 향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흠~! 시대는 나를 유비로 만들려하고 있으나 나는 조조가 좋다....라면 정신이 약간 이상한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