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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전부 몰살시켜 강대했던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대영웅. 그가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 전기를 쓰신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을 4천 년 우리 역사에서 제일의 인물이라고 했다.
을지문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만, 『삼국사기』 등에는 을지문덕의 어린 시절이나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평안도 일대에서 그에 관한 많은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
『역대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을 평양 석다산 사람이라고 했다. 석다산은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에 있는 산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을지문덕이 어릴 때부터 글 읽고 무술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또 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에 있는 불곡산의 동굴 속에서 글을 읽었으며 석다산 남쪽 마이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무술을 익혔다고도 한다.
『환단고기』란 책에는 이러한 현지에 내려오는 전설을 뒷받침할 내용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을지문덕은 석다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어려서 일찍 산에 올라가 도를 닦았으며 꿈에 천신을 만나서 크게 깨달았음을 얻었다고 한다. 전설에서 불곡산이라고 했던 그 산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신라 김유신에게서도 볼 수 있다. 김유신은 중악이란 산의 석굴에서 공부하다가 난승이란 노인을 만나 그에게서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옛 시대의 위인을 높이 기리는 글에는 이와 같은 기록들이 많이 전한다.
불곡산의 전설을 다시 들어 보겠다.
어느 날 을지문덕이 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박 졸고 있었다. 그때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 들어왔다. 이상한 기운을 느낀 을지문덕은 깨어나는 순간에 그가 갖고 있던 칼로 구렁이의 머리를 쳤는데, 이때에 내려치는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도 을지문덕이 공부했던 동굴 속에는 검으로 책상을 쳤던 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불곡산 동쪽의 대원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대원산은 평안남도 평원군 운봉리에 있는 산이다. 을지문덕이 이곳에서 무술훈련을 하였는데 활쏘기를 하다가 과녘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게 자란 나무들을 검으로 쳐서 반반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 산의 서남쪽 부분에는 바위가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을지문덕과 관련된 사슴발부인 이야기도 있다. 평양시 대성산 광법사 사적비에도 사슴발부인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민간전설을 통해 알아보겠다.
고구려에 사슴의 발 모양과 똑같은 발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그 여인은 한 번에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그 아이들의 발도 사슴의 발처럼 생겼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아이들을 보더니 아이들이 오래 살고 유명한 인물로 키우려면 어머니와 떨어져서 살아야 하고 함께 살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사슴발부인은 너무나 슬펐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큰 나무함에 아이들을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다. 그런데 그 나무함이 바다로 떠내려가 수나라 해안에 도착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자라나 모두 장군이 되었다.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들도 고구려에 왔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적장 가운데 사슴발을 가진 형제장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슴발부인은 그들이 분명 자기의 아들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을지문덕을 찾아가서 사연을 말했다. 사슴발부인은 자신이 적진에 들어가 아들들을 타이르겠다고 청했다.
사슴발부인은 적진에 들어가 사슴발 장수들을 만났다.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란다. 너희들이 어머니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옳지 못한 일이다. 자, 내 발을 보아라.”
그들은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자 사슴발부인은 가슴을 헤치고 젖을 짜니 젖줄기가 여러 가닥으로 뿜어서 그 장수들의 입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때서야 친어머니임을 알아보고 투구를 벗고 용서를 빌면서 고구려로 넘어왔다.
사슴발부인의 전설은 을지문덕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함께 힘을 합쳐 수나라를 물리쳤음을 말해 주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을지문덕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들을 살펴보았다. 전설이 곧 사실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들은 을지문덕이 얼마나 대중적인 인기를 지닌 인물이었나를 말해 준다. 현재 서울에서 종로와 함께 중심지를 관통하는 도로의 하나가 을지문덕의 이름을 딴 을지로라는 사실은 그의 인기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지금부터 을지문덕이 이룩한 업적인 살수대첩에 대해 알아보겠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8천 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병사들만 1백만이 넘는데다가 보급을 담당하는 보조인원까지 합치면 족히 300만이 넘는 엄청난 인원이 동원된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은 이번 전쟁을 을지문덕과 자신의 동생인 건무에게 맡겼다.
을지문덕은 적의 주 공격을 육지에서 막는 임무를, 건무는 적의 해군을 막고 수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을지문덕은 비록 고구려군이 숫자는 적지만 반드시 적군을 물리치겠노라고 다짐했다. 598년 수나라 군대를 요하도 건너오지 못하게 하고서 물리쳤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반면 수나라 사람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백성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무향요동낭사가」라는 노래이다. 농민반란군을 지휘하던 자칭 지세랑이란 자가 지은 노래는 이러하다.
장백산 아래에서 나는 비단옷 대신에 농부의 옷을 입었다.
긴 창이 하늘의 반을 가리우고,
전쟁무기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네.
산 위에서 노루와 사슴을 잡고,
들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평화롭게 지냈는데
문득 들으니 관군이 도착하여 칼을 들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 하네.
사람들이여, 요동에서 죽는 것을 깨달아라.
참혹하게 머리가 잘리며 부상당한 모습을.
이 노래는 한가롭게 시골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전쟁터에 끌려가 죽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전쟁을 반대하는 당시 수나라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수나라 사람들은 10여 년 전 30만 대군이 고구려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말 타고 활 쏘며 사냥하는데 익숙하고 용맹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수나라 군대도 장점이 많았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무기와 군용 물자들을 가져왔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성에 쉽게 오를 수 있는 사다리인 운제, 성문을 부수는 데 이용하는 충차, 큰 돌을 던져 성벽을 부수는 데 사용하는 발석차 등 다양한 무기도 개발했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가장 큰 힘이었다.
수나라의 대군에 맞선 고구려에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곽, 단결된 고구려인의 마음가짐과 드높은 사기, 그리고 을지문덕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어떻게 전략을 짜서 수백만의 적군을 물리쳤던 것일까.
수나라의 군대는 지금의 북경 지방에서 군대를 출발시켰다. 여기서 고구려의 방어선이 있는 요동까지는 무려 2천 리. 을지문덕은 적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아무리 대군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려 싸울 힘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옛부터 만리장성 남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동은 아주 먼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수나라 군대는 이 먼 곳에 와서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요동의 겨울은 몹시 추워서 그때까지 전쟁을 치렀다가는 수나라 군사들이 다 얼어죽기 때문이었다.
612년 1월 북경 지역을 출발한 수나라 군대는 3월 중순 회원진에 이르러서 요하를 건너기 위한 준비를 했다. 고구려군은 요하 동쪽에 방어 진지를 만들고 요하를 건너오려는 적을 맞이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첫 번째 싸움인 요하전투가 벌어졌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을 피하여 요하 하류지역에 서둘러 뜬다리를 만들어 강 동쪽에 대놓고 강을 건너려 했다. 이들을 향해 고구려의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다. 고구려 궁수부대는 수나라 1군 총사령관 맥철장을 비롯해서 전사웅, 맹차 등 여러 장군들을 요하싸움에서 잇달아 활로 쏘아 죽였다.
첫 싸움에서 요하를 건너지도 못하고 크게 패배한 수나라 군대는 일단 후퇴하고 뒤에 오는 부대를 기다렸다. 이 사이 을지문덕은 방어태세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4월 중순 수양제가 직접 요하 서쪽에 와서 지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적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강을 건너는 작전을 시도하자, 고구려군은 일차 목표인 적의 진격속도를 늦추었던 것에 만족하고 요동성으로 퇴각하였다.
고구려 서쪽 방어망의 중심은 요동성이었다. 요동성은 현재의 요양시 지역으로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웅장한 성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2개의 문뿐이어서 적군의 침입을 막기에 유리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에게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서 적과 싸워 빨리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적군은 요하를 건너자 곧 요동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적군은 반드시 고구려를 물리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만든 새로운 무기들을 총동원했다. 높은 요동성을 넘기 위한 운제와 성문을 부수기 위한 충차, 불을 지르기 위한 화차, 돌을 던져 성벽을 부수는 발석차 등 최신 무기는 요동성의 고구려군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이에 맞선 고구려는 마름쇠를 성벽 주위에 집중적으로 뿌렸다. 마름쇠는 밤송이처럼 뾰족한 쇠촉이 사방으로 나 있어 보병들이나 기병들이 마름쇠에 잘못 찔리면 큰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적들의 성벽진입을 막는 무기다. 또 성에 접근하는 적군을 향해서 돌덩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포차를 성벽 곳곳에 배치했다. 또한 활을 잘 쏘는 고구려인답게 화살부대가 적군을 향해 활을 쏘았다.
수나라 군대가 아무리 공격해 와도 강인한 고구려군의 반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수나라 군대의 요동성 공격을 고구려군은 6월 초순이 될 때까지 잘 막아내고 있었다.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은 고구려의 성을 단 한 곳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너무나 잘 싸우고 있었다. 다만 이때 고구려의 요동성주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가 없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이 요동성을 지나 다른 성을 공격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수양제는 고구려의 성을 하나도 빼앗지 못하자 잔뜩 화가 났다.
“너희 장군놈들이 내가 직접 요동에 오는 것을 반대하더니 너희들의 이런 무능함을 보일까 봐 두려워서 그랬구나. 내가 너희들을 믿고 있다가는 요동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겠다. 당장 고구려 수도로 쳐들어가 고구려 왕과 을지문덕의 목을 베어 오지 못할까.”
수양제는 노발대발해서 부하장수들을 다그쳤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보내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을 직접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수나라 해군은 산동 반도에서 출발해서 평양과 가까운 대동강 입구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해군과 연합하여 장안성을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고구려 수도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을지문덕은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에서의 방어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별동대를 상대하기로 했다. 을지문덕은 명림답부 이래 고구려에서 사용해 오던 청야전술을 펼쳤다.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영토 안에서 단 한톨의 식량도 얻지 못하도록 전쟁터 주변에 사람들과 먹을 것을 전부 치워 버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오면서 점차 식량이 부족해졌다. 하나둘 굶주림에 지치기 시작했다.
청야전술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일치단결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과 식량을 전부 성 안으로 옮겨왔고, 적군과 몰래 정보를 주고받는 배신자도 없었다.
“자, 빨리 식량과 물건을 성 안으로 옮기자고. 적군이 와서 이것을 빼앗으면 적군이 강해지는 것이니 빨리 옮기는 것이 적군을 물리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요, 수나라 군대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단결하면 저들을 금방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가 되어 을지문덕의 작전에 적극 따라주었다. 만약 백성들이 호응해 주지 않았다면 을지문덕이라도 적을 쉽게 물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나라 별동대는 여러 고구려 성들을 제쳐놓고 오로지 수도인 장안성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오직 장안성만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군대를 피해 가다 보니 군사들의 식량과 물자의 보급이 자주 끊겼다.
30만 5천의 군대는 1인당 100일 분량의 식량을 각자 가지고 진격했다. 너무 많은 식량을 들 수 없던 병사들은 식량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심각한 식량 부족 현상이 수나라 군대를 위협하게 되었다.
적들이 압록강에 이르자 을지문덕은 적의 약점을 파악하여 언제 어떻게 공격을 할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적진에 사신의 임무를 가지고 방문했다.
을지문덕의 갑작스런 방문에 수나라 장군들은 당황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수양제는 일찍이 부하들에게 명령했었다.
“고구려에서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은 왕과 함께 뛰어난 장군인 을지문덕이다. 이 둘은 반드시 사로잡거나 죽여라.”
수나라 사령관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유사룡이란 자가 사신으로 온 적장을 사로잡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니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다.
을지문덕은 적군의 사정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적진을 빠져나왔다. 적장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것을 후회하고서 다시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을지문덕이 그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뒤도 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우중문은 유사룡에게 소리쳤다.
“을지문덕을 네놈 때문에 놓쳤다. 놈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우중문과 함께 별동대를 지휘하던 우문술이 곁에 있다가 우중문에게 말했다.
“장군, 우리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소. 이쯤에서 돌아가야겠소.”
“아니, 장군께서는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적을 물리치지도 못하고 되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만날 수 있겠소이까. 지금 우리 정예부대로 고구려군을 쫓아가면 분명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우리가 이대로 물러나고 을지문덕을 놓친 일까지 임금이 아신다면 우리는 죄를 받을 것이오.”
우중문이 이렇게 화를 내며 단호히 말하자 우문술도 마지못하여 우중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추격하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적진에 들어가서 이미 저들의 양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을지문덕은 적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작은 싸움을 하여 패하는 척 달아나는 작전을 펼쳤다. 하루에 일곱 차례 싸워 수나라 군대가 모두 이기기도 했다.
우중문은 우문술 등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군대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살수를 건너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과 불과 30리 되는 곳에 와서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멋진 시를 지어 보냈다.
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마저 통달했네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거든 이제 그만 멈춤이 어떠하냐
겉으로는 우중문을 칭찬하는 말이지만, 시 속에 담긴 뜻은 그를 야유하는 소리였다. 지금 고구려 깊숙이 공격해 왔지만 실상은 너희가 포위되었다는 것을 슬쩍 알려 준 시였다.
수나라는 그때서야 고구려의 진짜 전략을 알게 되었다. 군량도 떨어진 상태에서 더 이상 공격을 해보았자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퇴각을 결정했다.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쫓기던 그들은 살수에 이르렀다. 살수는 오늘날 청천강이라고 알려져 있다.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무렵 을지문덕은 총공격을 시도했다. 수나라 군대는 우왕좌왕하며 서로들 뒤엉켜 강물에서 허우적거리고,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칼과 창에 찔려 죽었다. 30만 5천의 수나라 군대는 살수에서 무참히 패배하여 요동 지역까지 살아돌아간 자가 불과 2,700명에 불과했다. 그 많던 군수물자와 공격무기들도 전부 고구려 것이 되었다. 세계전쟁사에도 길이 남을 만한 대승리였다.
이 싸움이 있은 후 780년이 지난 어느 날 조선의 창업공신인 조준은 명나라 사신 축맹과 더불어 청천강이 바라다보이는 백상루라는 누각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살수의 물이 하늘에 출렁이는데
수나라 백만대군이 물고기가 되었음이여.
이제는 어부나 나무꾼의 이야기로만 남아
나그네의 작은 웃음거리도 못되는구나.
이 시를 들은 명나라 사신 축맹은 얼굴을 붉히고 붓을 던져 대답할 시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조준은 시로써 우리 조상의 용맹함을 자랑하고 명나라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또한 명나라가 당시 큰 나라라고 해서 조선을 얕잡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중국인들도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것은 뛰어난 을지문덕 때문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이렇게 말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예전에 없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것이다. 그럼에도 능히 이를 막아내어 고구려를 보존하고 적군을 물리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을지문덕은 단지 싸움만 잘하는 군인은 아니었다. 을지문덕이 쓴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는 그 작품의 완성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을지문덕은 가장 이상적이라고 불리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여러 글에서 칭송을 받고 있다.
『동사강목』에서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양만춘의 안시성싸움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여겨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을지문덕이 남긴 공적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겨 나라를 잃었던 20세기 초에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의병들이 부른 노래에는 을지문덕을 본받자는 내용이 많다.
한산도에 왜적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수나라 병사) 백만 몰살하오신
이순신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쳐보세
이처럼 을지문덕은 이순신 등과 함께 외적을 물리친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일반 백성들만이 을지문덕을 숭배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세조의 신하였던 양성지는 1458년 왕에게 국가에서 제사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인 인물로 12명의 왕과 24명의 신하들을 추천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과 함께 살수대첩의 주인공인 을지문덕과 영양왕이 함께 추천되었다. 숙종 임금은 1680년 관리를 보내 을지문덕을 모신 사당에 간판을 다시 만들고, 제사를 지내 주기도 했다. 숙종 임금은 특별히 을지문덕의 제사에 많은 신경을 써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을지문덕의 혼자힘으로 이와 같은 승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쟁에 참여한 고구려 군인들과 백성들의 일치단결된 힘이 있었다.
평안도 안주땅의 ‘칠불사 전설’도 그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살수대첩은 세계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대승리여서인지 어떻게 이겼는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일반 병사들의 활약도 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다.
7명의 고구려 병사들이 모두 스님으로 가장했다. 아마도 수나라에는 스님이 많고, 스님은 전쟁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수나라 사람들을 속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수의 깊은 물 속을 얕은 개울물처럼 속이려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을 건너는 시늉을 하였다.
이들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본 수나라 군사들은 서로들 자기가 먼저 빨리 강을 건너려고 했다. 추격해 오는 고구려군의 화살과 창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살수를 반쯤 건널 무렵 갑자기 위에서 엄청난 강물이 쏟아져 내려와 많은 병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고, 수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에 고구려 군대가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칠불사 전설은 고구려가 승리하도록 부처님이 스님을 보내 도와주웠고, 고구려에서 부처님께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일곱 부처님을 기리기 위해 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양제는 살수대첩에서 크게 패배하자 서둘러 도망가고 말았다. 수백만의 인력과 엄청난 비용을 쏟아붓고서도 고구려 성을 단 한 곳도 차지해 보지 못하고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도망가는 양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고구려에 대한 앙심을 키웠다. 수양제는 을지문덕을 놓아준 유사룡을 죽이고 싸움에 패한 우중문과 그 밖의 장수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화풀이를 했다.
수양제는 다음해와 또 다음해에 을지문덕에게 패한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도리어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반란이 일어나 수나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20세기 초 역사가 단재 신채호는 영양왕이 을지문덕과 함께 병사들을 몰아 수나라를 공격하여 중원땅으로 쳐들어갔으면 천하를 제패할 기회를 얻었을 것인데 못내 아쉽다고 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수양제의 말로’ 이야기에는 이러한 아쉬움이 담겨져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고구려와 수나라가 한참 전쟁을 마무리하던 614년 10월 영양왕이 사신을 통해 국서를 수나라 양제에게 보냈다. 이때 사신을 따라갔던 고구려의 용감한 무사가 있어 수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그는 수양제가 고구려에서 보낸 국서를 읽고 있는 기회를 틈타 품속에 넣어 가지고 갔던 작은 쇠뇌로 그의 가슴을 겨누어 쏘아 맞추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수양제는 군사를 돌이켜 퇴각하면서 한탄했다.
“내가 큰 나라의 황제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하였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이 설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수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고구려 백성들의 수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적군을 물리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 후 을지문덕이 수나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혹시 전해지는 기록이 없을 뿐 을지문덕이 만리장성을 넘어 수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다른 자료가 없는 한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을지문덕과 고구려.
전쟁은 끝났다. 전쟁이 끝난 후 을지문덕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혀 없다. 심지어는 그가 누구의 자손인지도 모른다. 태어난 시기도 알 수 없어서 몇 살의 나이에 수나라와 싸웠고,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612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수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는 것과 전쟁 후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을지문덕의 공로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 강대한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으로 30여 년 후에 쳐들어온 당나라 태종의 군대도 여지없이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만일 을지문덕이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멸망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와 형제를 죽인 수양제가 고구려 백성들을 어떻게 괴롭혔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대운하, 만리장성, 궁궐공사 등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노예처럼 일만 시켰을 것이다. 또한 백제나 신라도 수나라의 위협에 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을지문덕은 우리 조상들의 행복한 삶을 지켜준 위대한 장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