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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환 - '이 유쾌한 씨를 보라'
- 코미디 그리고 유추 - 김광우(미술평론)
비닐보이
한마디로 주재환의 미학은 '미술의 종말을 부른 코미디 그리고 유추'이다. '유쾌한' 방법으로 그는 모더니즘을 비판하여 종말을 채촉했으며, 표현 개념에 있어서는 유추의 방법을 사용했다. 미술의 종말을 재촉한 것은 그가 모더니즘의 전모를 파악하고 그 한계를 알았음을 의미하며, 코미디와 유추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로 시작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어보려는 자신감의 시위이다. 유추는 주변의 세계를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연결시켜서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의 거울에 비친 주변을 바라보게 하여 주재환식 성찰을 가지라는 독려인데 이런 표현은 평소에 유머를 즐기는 그의 기질과 다분히 관련이 있다.
1980 - 2000, 주재환 작품집 / 2001, 미술문화
'미술의 종말the end of art' 이 '미술의 죽음the death of art' 이란 뜻으로 해석 되어서는 안 되므로 이 개념에 관해 조금 언급한다. 이는 소생이 불가능함을 뜻하는 최후를 맞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미술에는 더 이상 진전이 없으므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미술의 희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연극에서)... 제 2막은 제1막과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이며, 여기서 작가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창작의 자유를 누린다. 렘브란트, 베르미어, 고호, 고갱 등 누구의 양식이라도 빌려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네의 양식에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체주의 양식을 보태도 무방하고, 그 위에 잭슨 폴록의 물감흘리기 기법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 정물화에 대한 갑작스러운 열광도 있을 수 있으며, 누드만을 고집할 수도 있고,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만을 주제로 삼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작품으로 보이느냐고 예술가들은 더 이상 묻거나 실험하거나 회의에 빠질 필요가 없는데 모든 것이 모든 곳에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도망가는 임산부
길에서 주운 것을 화랑에 옮겨 놓아도 작품이 될 수 있으며, 남의 작품을 변형시켜도 작품이 될 수 있다. 이같은 거의 무한한 창작의 자유는 과거의 미술이 종말을 맞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런 식의 미술의 좀말은 헤겔의 역사의 종말과 관련이 있다. 헤겔은 역사가 자유 안에서 종말을 고한다고 예견했는데 오늘날 예술가들이 한껏 누리는 자유는 미술이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주재환의 무제한에 가까운 창작의 자유는 그러므로 그가 미술의 종말을 부른 것이고, 다만 표현 양식에 있어서는 코미디와 유추라 말할 수 있다.
화투놀음으로 본 해방 50년
예술가에게 무제한에 가까운 창작의 자유가 허락되었다면 미술의 종말 이후 오늘날의 작품에 대한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주재환은 분명 제2막에 속한 작가이다. 그의 이야기에는 주변의 세계에 대한 주재환식의 비평이 있고, 과거 미술에 대한 비평이 있으며, 그리고 물신주의, 지적 과시주의 , 외래지향주의, 기회주의 집단이기주의, 은밀한 부정, 부패주의, 현대판 샤머니즘, 부조리 은폐주의 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다. 그의 이야기에는 대화체 문학이 있고, 시적 환상이 있으며, 체험을 통한 행동철학이 있다.
과외
아쉬운 점은 언론보도 및 그 밖의 글에서 예술가로서의 주재환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마치 기인처럼 행세한 주재환만 부각된 것이다. 주재환과 같은 곡절많은 인생을 용케도 살아낸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으며, 그런 인생이 예술가의 삶과 겹쳐서 새삼스럽게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술가로서의 주재환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이 유쾌한 씨를 보라'는 주문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유쾌한 씨' 라고 하지만 숱한 고뇌에 몸부림친 세월이 너무 길어서 그는 이제 허탈한 상태에 이르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십 년 동안 작품에 몰두하다 이제 비로소 한꺼번에 소개할 수 있었다면 긴 세월을 그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꾹 참으며 때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겠는가!
Boss
"전시장에 뒤샹, 몽드리안, 클레, 미로, 해링 등 20세기의 내노라 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비평이 있던데 모더니즘에 대한 총평이란 느낌이었습니다. 요즘 모더니즘에 대한 다각적인 비판 내지는 반성이 뉴욕에서도 일고 있는데 특별히 비판하려는 점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난 서양의 모더니즘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습니다. 뒤샹, 몬드리안, 클레, 미로 등 이름들이 다 나오는데 이 사람들에 관해 단편적인 지식 외에 특별히 공부한 것이 없습니다. 1980년에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라든가 몬드리안의 <구성>을 가지고 장난친 것 아닙니까? 지금도 그런 것 같은데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걸쳐서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이 외국의 경향들을 지나치게 추종하는 듯한 느낌이고, 미술판의 경우 외국의 유행사조를 모방, 답습하는 해바라기 성향이랄까 하는 것에 대한 반감 내지는 자성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나 <몬드리안 호텔> 같은 작품을 제작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백색담론에 중독된 '기지촌 지식인' 이란 자조적인 말이 현재에도 통용되고 있겠어요?"
Box Boy
주재환의 작품에 나타난 코미디, 레디메이드, 그리고 말장난은 그러므로 내게 미술의 종말을 재촉하는 일련의 행위로 보여졌고, 문학적 언어로 반어적 효과를 노리는 익살스러운 비평주의가 더욱 그렇게 보여졌으며, 유추의 방법으로 정곡을 지르는 사회 전반에 걸친 그의 비평에서 삶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짐을 보았다. 전시장에서 채플린이 머리에 떠올랐는데 무성영화 속에서의 '유쾌한 씨' 채플린의 사회비평에 도사린 비극은 웃기에는 눈물이 날 것만 같고, 울기에는 웃기는 것이었는데 이런 비극과 희극이 한데 어울려 정점을 이룬 카타르시스를 주재환의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사
악보
군사분계선
총잡이 장고
상상력의 자장(磁場)
최 민(미술평론)
그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구상한다. 그는 도회적인 작가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19세기 파리의 만보객과 비슷하게 그는 '일산' 이라는 신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지각을 다듬고 상상력을 키운다. 동시에 갑자기 만들어진 이 도시가 매일 배설해내는 소비사회의 폐품 속에서 재료를 발견한다. 각종 플라스틱 제품, 잡지, 광고, 사진, 인쇄물, 못쓰는 장난감, 인형, 조화, 테이프, 끈, 버린 액자, 거울 등등 그의 흥미를 끄는 것들을 눈에 띄는 대로 수거하여 작업실로 가져와 작업을 시작한다.
엽기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을중심으로 유행하던 소위 '정크 아트' 즉 '폐품 예술' 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차 고철 등 산업사회의 폐품들을 한데 결합하여 만든 입체나 평면 작품들이다. 누보레알리즘도 이 계열에 속한다. 재료 자체가 기계문명이나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 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자극하는 것들이다.
출입금지
반면에 주재환의 가난한 미술은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빈곤한 재료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어떤 면에서 방법적이고 체계적이기까지 하다. 돈이 전혀 안드는 재료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비싼 재료를 구입할 능력이없어서라기보다는 미술에 대한 그의 입장과 태도의 적극적 표명이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이란 삶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유한계층의 환경을 꾸며주는 멋있는 물건을 만드는 장식적 작업을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작가들의 생태와 그는 무관하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하지만 이는 미술에서는 도달하기 힘든 이상에 속한다. 미술의 존재론적 기반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에 있으며 그 제약과 구속 안에서 무언가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 할 때 물질적 제약에서 해방된다는 말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형용모순(形容矛盾)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주재환이 어떤 재료, 어떤 기법, 어떤 양식, 어떤 조형언어를 사용하든지 간에 그가 그의 작업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어떤 생각, 어떤 정신적 상태이다. 따라서 그는 미술의 물질적 토대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커다란 비중을 두지도 않는다.
굴뚝모자를 쓴 시인
달밤
심야의 고속도로
만약 주재환의 작품에서 제목이없다면 나머지 이미지의 부분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제목, 때로는 웃기고 떄로는 정신이 번쩍 들게하고 때로는 암시적이고 때로는 어떤 것을 적시하고 떄로는 황당한 여러 종류의 파격적인 제목들이 항상 이미지를 동반하며 작품의 전체적 의미를 형성한다. <검정잠바 다리를 건너다> , <폰팅 맨>, <짜장면 배달>, <내 돈>, <오늘 밤 춤을 추어요>, <볼펜의 수명>, <한강다리로 오신 예수>...
일출
그의 작품이 환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폐쇄되고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가변적이고 잠정적이다. 그리고 '가볍다'. 이 가벼움은 이동하는 자의 가벼움이다.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한 곳에 정주할 필요가 없는 자의 정신적 가벼움, 즉 자유로움인 것이다.
아트선재센터
주재환 大兄에게 -개인전<이 유쾌한 씨를 보라>에 부쳐- - 박시교
나는 유쾌하고 더없이 행복하다 그가 사는 시대를 함께 산다는 사실이 더더욱 통렬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이
단언컨대 이 세상에 유쾌한 씨는 없다
옛 마포 종점 근처 그를 처음 만났던 미술 잡지사 편집실, 그렇지 그 좁은 사무실에서 그의 동반자 서 금자 화백을 나는 먼저 인사했고, 악수했고, 술잔을 나누었고, 명명백백 회상컨대 어느 화창한 봄난ㄹ그 녀와의야유회 ㅒ도 분명 유쾌한 씨는없었다 환갑에 겨울 철이 나서 첫 개인전 열며 폐품만 잔뜩 모아 붙이고 뜨잘데없이 대문짝만한 홋수로 만용을 부린 '夢說夢說掛圖' 앞에서 또는 60년대식 싸구려 여인숙 천장에나 매달려 있음직한 30촉 짜리 백열등 이 대롱거리는 '몽드리안 호텔' 앞에서 아, 나는 분명히 말하건대 ㅇㅎ쾌한 씨는 없다, 제기랄
周大兄, 제발 좀 삽시다 이 환장하게 푸르른 날
주재환 1941년 서울출생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역임 현실과발언 창림전, 도시와 시각전, 고 박종철 열사 추도 '반고문전', 동학농민혁명전, 그림으로 읽는 한국명시전, 우리시대의 자화상전, 부산 국제현대미술전 '고도를 떠나며', 제 10회 민족예술인상 수상...
불러봅니다 1994년
어제를 살다 간 옛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쟈가동, 오미리, 우루미, 숙쇠, 은뫼, 검둥, 막동, 거매...
송사리의 또다른 이름을 불러봅니다. 눈쟁이, 뾰돌이, 날랭이, 추리치, 모쟁이, 반뜩이
오늘을 살고 있는 벗님네들의 별명을 불러봅니다. 꺽, 똥, 꼴통, 날냄이, 변태, 하염이, 아이고, 뽄드, 떼떼, 빠리, 딱따구리, 배추, 물두부, 날가루, 장고...
-주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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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쾌한 씨를 보라" 했을 때 나는 그 '씨'를 소설 속의 '화자' 거나 한 작품의 명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연극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시든 작가가 가공한 '씨'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이 '씨'는 배후 조종자로 남아 있어야 할 작가 자신을 직접 드러낸 말이니 이 어찌 '유쾌'하지 않으랴! 그래서일까 몇 몇 저널은 정작 이 분의 작품에 대한 색다른 감상과 훌륭한 유쾌에 빠져들기 보다 (기인적)작가의 면모에 홀리는 반응이 많았다 한다. 하긴 여간 특이하고 보통 재민가... 작가의 이력에서 보듯 20년 간의 작품을 단한번에 내보이는데, 작품이 낡고 게으르다거나, 경향상 몇 차례의 굽이가 선명하다거나, 질보다 양이라거나, 퀴퀴한 구닥다리거나 하는 염려도 되는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고 있는 것이 묘하고, 무엇보다 그 흔한 수묵이니 유화니 아크릭 조각 도조 콩테 과슈 판화들을 버리고 비닐봉다리며 라면박스며 동전이며 빨래판들이 춤을 추니 참으로 가관이다. 나들이가 그러했으니 혼자 도심을 걷고 히죽거리며 벗을 불 러내 한잔하고 자고 그러면 언제 나같은 치하고 한가로이 대면할 틈이 있었겠는가! 나로서도 이분의 첫 개인전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그 존재감을 새롭게 느껴볼 수 있었으니 보통의 입냄새는 아니다. 한번 냄새를 피우면 반경 검색 가능한 울타리 내에는 아예 접근을 거부하는 그는 그만의 '영토'를 확보한 것이다. 보이는 것마다 '표현의 대상' 이 되는 미적감각이라면 그림쟁이들의 대략은 다 갖 추고 산다. 하지만 그것들을 '작품' 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일 차원과 용기는 대다수 장착 하고 있지 못하다. 이는 미술이 '매력있는 상품으로서의 본색' 이 있으며, 화가는 물감 살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설사 쇼펜아우에르의 말처럼 '예술가는 자기 의 내면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 만약 자기의 내면을 그릴 수 없다면 붓을 꺾어버려야 한다" 하여 이를 버리고 예술의 한길에 매진한다 해도 작가 주재환처럼 이 독특하고 평범한 미 적 일상을 움직여 세상과 교통하기 쉽겠는가! 얼마나 깊은 고통과 회한이 작품 뒤에 숨어 있었겠는가! 나는 전화를 했다. 사실 조금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기뻐히 누군가의 작품에 끌리어 그 두꺼운 도록을 보내달라 요구한 과거 도 없었다. 선배님은 들떠주었다. 죠크나 유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어감으로 도 날 유쾌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도록을 몇몇 후배들에게 돌려 보였고 잔잔한 담론을 나누기도 했는데 오늘 카페에서 또 '씨'를 만나 기쁘 다. 내가 세상에 그림쟁이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형을 배워서 넘어가야 한다. 붓을 들고 세상을 향해 가 는 나만의 매력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 한방의 진단과 약 처방이 환자의 장상과 체질에 따라 천양천색이듯
내가 즐겨지는 작품들에 간간이 주목하는 것은 썩 좋은 자가진단이 될 것이다. '붓'으로 삶을 생각하는 버릇을 못버릴 때가 또 조만간 이르렀으면.. 제발.. 2009. 2. 20.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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