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대구 묘골마을과 육신사
순천박씨 충정공 박팽년 후손의 500년 집성촌
지난 3월 22일 달성군 묘골마을에 다녀왔다. 묘골마을은 달구벌대로를 따라 성주 방면으로 가다가 문양역을 지나 성당식물원에서 곧장 우회전 한 후, 안내판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 도시철도 문양역에서는 달구벌대로(30번 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행정상의 위치는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이다.
묘리(妙里)는 ‘묘하게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밖에서는 마을을 볼 수 없고 안에서도 마을 밖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묫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이 마을은 용산(龍山)을 배산으로 등지고 있으며, 용의 꼬리와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이 골짜기에 의해 떨어져 마주보는 형상에 자리하여 명당으로 일컬어진다. 낙동강변의 성주대교 인근에 위치하여 오늘날 대구와 성주를 잇는 30번 도로의 요충지로서도 주목 받는 곳이다.
사찰의 일주문처럼 생긴 ‘충절문’을 지나 마을에 도착하면 입구에 ‘사육신기념관’이 있다. 2010년 개관한 기념관에는 사육신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어서 탐방객이 관람하기에 좋은 곳이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모형으로 잘 만들어져 있어 제사 지내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자동으로 인식하고 설명을 해주는 자동인식기기도 있다.
기념관을 나와 마을로 들어서면 길 양쪽에 전통한옥이 늘어서 있다. 묘골마을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유일손인 박일산부터 500여 년 동안 후손이 거주한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마을의 가장 높은 산 밑 끝자락에는 종택이 자리 잡고 혈연의 위계에 따라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마을은 또 일제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약 300여 호의 가옥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30여 가구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래된 한옥들을 정비 보수하여 마을 전체가 깨끗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마을 안쪽에는 사육신을 향사하는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세조에게 왕권을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병자사화로 숨진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들을 모신 사당이다. 후손에 의해 박팽년만 배향되다가 나중에 현손 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사육신 사당은 이곳 육신사를 비롯해 서울 노량진동의 의절사, 강원도 영월군의 창절사 등 전국에 세 곳이 있다.
처음에는 육신사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하여 오다가, 숙종 17년(1691) 부터는 낙빈서원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1866년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사우 건물인 숭정사에는 사육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제사 때 외에는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사당보다도 엄숙함이 더한 것은 온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의 절개 때문일 것이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숭절당, 외삼문, 홍살문, 내삼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가 1979년 건립되어 세워져 있다.
육신사 경내의 오른쪽에는 태고정(보물 제554호)이 자리잡고 있다. 태고정(太古亭)은 충정공의 후손인 박일산이 1479년 건립했다.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불리는 태고정의 건축학적 묘미는 지붕에 있다. 오른쪽은 팔작지붕,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형태를 띠고 있다. 건물 한채에 세가지 건축 양식이 각각 적용되어 있으며, 조선 전기 건축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인 가치가 크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서 순천박씨 문중이 매년 음력 9월에 사육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편, 묘골마을 인근의 삼가헌(중요민속자료 104호)도 중요한 고택이다. 묘골마을 입구에서 서쪽으로 가는 둘레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으면 낙빈서원과 삼가헌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건 ‘삼가헌(三可軒)’ 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박황 가옥, 삼가헌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정자와 사랑채, 그리고 본채 등으로 구성된 웅장한 가옥인데, 특히 정자인 하엽정(유형문화재 제36호)에는 여름이면 연당에 연꽃이 만발하여 운치가 특별하다.
최근 이곳 육신사에는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있다고 한다. 단체 방문객도 많지만 특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탐방객이 역사 교육을 겸해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시내버스(성서2번)도 1시간 간격으로 마을을 드나든다. 도심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에서 사육신의 절개와 불사이군의 올곧은 선비 정신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대구의 자랑이다. 갑작스런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묘골마을과 육신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 박옥 해설사에게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