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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부터 후끈후끈!'
더워도 이렇게 더울 수가 있을까. 5월 초 날씨라고는 믿기 힘든 뜨거운 햇살이 한강변을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굽이길을 따라 30분을 걸어 난지지구에 도착했을 때, 내 양미간은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다. 시작부터 땀을 흘리며, 프레스 패스를 목에 걸고 드디어 드넓은 잔디밭으로 입장! 아아 이럴수가. 그 안에서는 이미 더위는 열기로 짜증은 함성으로 바뀌는 마법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태초에 연금술사는 어쩌면 음악가가 아니었을까?
'힙합, 월디페의 문을 열다.'
드디어 시작! 소울컴퍼니가 무대에 올랐다. 키비를 필두로 더콰이엇, 화나 등 소울컴퍼니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한데 모여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어린 팬들이 많은 소울컴퍼니 답게 그들의 공연에는 갓 소년 소녀 티를 벗은 앳된 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어서 마스터플랜의 무대가 펼쳐졌다. 한때 힙합씬의 최정상에 군림하며 수많은 팬들을 웃고 울리던 트렌드세터의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노련미 가득한 그들의 공연 역시 월디페의 한 장면을 장식하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무대 앞은 서서히 발 디딜 틈 없이 채워져 나갔고 마지막 힙합 공연팀인 아메바 컬쳐가 등장했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뮤지션이라 할 수 있는 0CD, 슈프림 팀의 실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웹에서만 만나는 그들의 모습에 혹시나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품었던 사람들은 그날 분명 그들의 실력에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으리라. "오늘은 음악으로 하나 되는 날, 다 집에 가지 마!" 라는 외침과 함꼐 다이나믹 듀오까지 가세했을 때 드넓은 난지지구는 힙합의 그루브로 들썩이고 있었다. 'Solo', '진짜', 'Ring my bell' 등 우리 귀에 익숙한 히트곡들이 터져나왔고 무대가 부서지랴 방방 뛰어다니는 그 무대매너 역시 유효했다. 이름 그대로 이보다 더 다이나믹할 수 없는 두 래퍼는 관객을 움직이는 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만간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두 사람의 무대이기에 그들의 팬들은 아마도 더욱 더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Rock N Roll All Night Long!'
뜨거웠던 힙합의 향연이 막을 내리고 락 세션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 한국대중음악상 3관왕에 오르는 등 최고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느 장기하와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의 활활 타오르는 분위기를 대변하듯 빨간색 코사지를 목에 걸고 무대에 오른 그는 예의 그 무심하고 어눌한 말투로 관중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별일 없이 산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등 그의 히트곡들은 더 이상 인디라 부르기에 쑥스러울 정도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펄럭이는 팔놀림(?) 안에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괴력을 선보였다. 이어지는 내귀에 도청장치의 열연은 마치 DJ 페스티벌이 락 페스티벌로 바뀐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보컬 이혁의 그로테스크한 황금빛 복장은 그를 콘서트장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비장한 '유리꽃' 으로 시작하여 '해커', 'E-mail' 등 감정을 서서히 고조시키는 레퍼토리는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곳곳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슬램을 하고 "I love you" 를 뜻하는 세개의 손가락이 하늘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이러다 사람들 DJ는 구경도 하기 전에 모두 녹초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그들의 에너지는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세대를 초월한 청춘찬가 '언젠가는' 을 부르며 등장한 이상은은 다시 모든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내 노래에도 놀 수 있어요!" 라는 그녀의 외침은 결코 공허하지 않았다. '돌고래 자리', '나는 나인 나' 등은 충분히 우아한 춤사위를 객석에 선사했으며 예상치 못한 '담다디' 의 선곡은 팬들을 위한 추억의 선물이었다. "아 역시 이상은!" 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각인시켰다.
'당신, 즐기고 있나요?' 잠시 숨을 돌리려던 차,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내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연에 심취해 있었다. 아까 집에 가지 말라고 했던 아메바 컬쳐의 0CD 아닌가! 그는 몸소 그의 말을 실천하며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시원하게 자른 머리에 신발까지 벗어 던진 그의 모습은 흡사 21세기에 히피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할 정도로 유쾌했으며 자유로워 보였다. 뮤지션과 관객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순간, 이런 것이야 말로 진정한 축제의 궁극의 모습인 것이다. 음악에 빠져 잠시 주변의 풍경들을 놓치고 있던 동안, 내 뒤로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밭은 새카맣게 사람들의 물결로 채워져 있었다. 웃통을 벗어 제끼고 물총싸움을 하는 외국인, 기사와 요정으로 분한 코스프레 친구들, 서교동 지역 축제의 일환으로 월디페를 찾은 아주머니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광란의 시작, 다이시! 다이시!' 다이시다!! 갑자기 전후좌우에서 사람들이 마구 밀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DJ박스에 교주님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다이시 댄스의 등장, 아니 강림에 사람들은 모두 우사인 볼트가 되어 무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대단한 인기였다. 그의 손놀림 하나, 몸짓 하나에 사람들은 외치고 또 뛰었다. 'Strings of life', 'Love,trust & believe' 등 그의 단골 믹스가 플레이되자 서서히 내리는 달빛 아래 한강공원은 하나의 거대한 클럽으로 변해갔다. 이어서 터진 'I don't like dancing', 'The weekend' 등 친근한 노래들은 월디페를 하나의 거대한 합창단으로 만드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다이시 댄스 또한 그러한 열렬한 반응에 기분이 좋았는지 연신 박수를 치며 무대를 방방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쥬얼 아트 역시 인상 깊었다. 물방울을 형상화한, 몽환적인 느낌의 비디오는 다이시 댄스의 음악과 완벽한 싱크로를 이루며 팬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하게 했다. 흩어지고 또 다시 모이는 물방울들이 자아내는 묘한 긴장감은 시각과 청각의 복합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의 숨 막하는 흥분을 뒤로 하고 'I believe' 와 함께 다이시 댄스는 아쉬운 작별인사를 청했다. 광분의 대가는 쓰라렸다. 아직 자정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씩 풀밭 위로 털썩 털썩 쓰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상태에서 계속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그랬다가는 의지와 상관 없이 나의 몸뚱이 역시 어느 주인 없는 돗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기세였다. 잠시 휴식을 갖기로 했다.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이 참에 서브 무대를 가보기로 했다. 메인 무대만큼 스케일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 곳 서브 무대 역시 화끈했다. 외국인이 유난히 많아서일까, 서로 술잔을 마주하며 금세 친구가 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볼 수 있었다. 스테이지 위의 DJ가 누구인지, 흘러나오는 음악이 무엇인지 아랑곳 하지 않고 그 공간 자체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메인 무대의 DJ 중심의 분위기와는 또 다른 방식의 즐기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대, 그대의 이름은 정동화.' "빰~빰~빰~ 빠암~"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대프트 펑크였다.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노래 믹스를 끝낸 DJ 리키 스톤이 'One more time' 을 익살스레 플레이하고 있었다.'Aerodynamic' 까지 연이어 플레이하며 그는 지친 관객들을 다시 한번 무대 앞으로 모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분' 이 등장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명실상부 제 3회 월디페의 넘버원 헤드라이너! 토와 테이였다. 리키 스톤의 그를 위한(?) 헌사 혹은 봉사로 이미 무대 앞은 터져나갈 듯 했다. "안녕하세요 토와테이입니다." 그렇다. 역시 그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인사와 함께 새 앨범 수록곡인 'Taste of you' 와 'A.O.R' 이 흘러나왔다. 음악이 빠르건 느리건 중요하지 않았다.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새벽 3시의 밤, 사람들에게 이제 BPM 따위는 한낱 숫자에 불과했다. 'Heartbeat', 'Take 5 giddy aunt' 등이 이어지며 심장박동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토와 테이 역시 그러한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는지 무대 앞으로 나와 관객들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헉 이럴수가! 갑자기 블러의 'Song2' 가 터져나왔다. 아,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다이브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하나, 둘이덧 것이 다섯 여섯으로 늘어나더니 이윽고 무대 쪽으로 넘어가는 다이버들은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둥글게 둥글게 원을 만들며 발을 구르는 이들도 보였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무언가를 목청이 터져라 꾸준히 외치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물론 아무것도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엔돌핀이 팍팍 도는 이 순간들, 아 얼마나 유쾌한가! 다이브는 커녕 저질 체력에 정신을 잡고 있기도 힘든 타이밍이었지만 그 광경에 다시 한번 불을 붙여 토와 테이의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토와테이의 열광적이었던 공연이 끝이 나고 딥그루브, 스캇퓰렌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굉장히 미안하게도 더 이상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소울컴퍼니부터 토와테이까지, 14시간의 마라톤과 같은 음악 러쉬는ㅜ 이미 나의 체력을 모두 앗아간 뒤였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강변의 아름다운 추억, 내년에 또 만나요.' 올해로 3회를 맞는 국내 최대의 DJ 축제, 월드 DJ 페스티벌. 일관된 컨셉으로 축제 문화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 이러한 시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용기와 끈기에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물론 아쉬운 점도 존재했다. 한강공원 난지지구의 취약한 접근성 문제를 비롯, 월드 DJ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일본과 유럽의 일렉트로니카 씬에만 치우친 DJ 섭외, 무료로 시작했던 1회에 비해 5만원이라는 꽤나 부담스러운 가격이 책정되었던 이번 회차의 가격문제까지.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문화 행사가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 내에서 성공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답답한 클럽에서 벗어나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호흡하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이른 아침 한강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모두의 얼굴에는 내년을 기약하는 진한 아쉬움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