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발달된 유평리.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유평계곡에 대원사가 있어 일명 대원사 계곡
유평계곡 옆 차도를 따라 올라가면
아랫새재, 웃새재, 삼거리, 외곡마을
지금도 멧돼지 떼와 싸우며 농사 짓는 산골
58년~ 60년대 초 화전민들이 정착했던 오지.
유평리 산판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방인들.
노름하다가 빚졌던 사람,
사업을 하다가 망했던 사람,
빗 보증 섰다 덤태기 쓴 사람.
돈도 땅도 없어 맨 몸으로 먹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숯 굽는 일.
...............,,,,,,,,,,,,,...참숯 굽기............................
숯굴은 검은 흙이 나오면 안되고 황토가 나와야 된다.
그래서 숯굴자리 보는 사람은 반풍수 다 된다고들 한다.
흙을 파내고 둥글게 담을 싸고 거기에다가 나무를 세운다.
삿갓모양의 흙지붕을 덮고
작은 나무로 틈새를 메우고
또 흙을 덮어 숯가마를 만든다.
사람 드나는 구멍은 한 군데.
굴뚝 하나마다 불구멍도 하나.
나무 넣고 구멍막아 불을 땐다.
숯이 되면 검은 연기가 나온다.
3-4일후 숯이 새까마면 검탄,
백탄은 새파란 연기 올라올 때
갈쿠리로 꺼내갖고 재에다 묻어
꺼가지고 하루 지내고나서 꺼낸다.
백탄은 화력도 좋고 오래 간다.
백탄은 방에 피워 놓아도 머리가 안 아픈데,
검탄은 가스가 나오니까 머리가 몹시 아프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백탄을 쓴다.
숯굴도 불이 잘 붙는 굴이 있고., 안 붙는 굴이 있다.
서툴면 여러 날 동안 불때도 타만 내려가지 숯이 없다.
나무 세운 바닥보다는 부엌의 이막이 더 낮아야만 된다.
그래야 연기가 높은 데로 찾아간다.
굴뚝은 바닥에서 손 하나 들어갈 정도
담쌓는 밖으로 굴뚝을 빼야 연기가 빠진다.
불을 때면 불이 위에서부터 타 내려와야 한다.
처음에 서툴러서 너무 크게 굴을 파면 실패한다.
장정 서넛이 한 열흘 넘게 걸려야 숯굴 하나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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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200 여개 숯굴 터., 유평리.
당시 아낙네의 하루 품삯이., 쌀 한 되,
남자 하루 품삯은 쌀 두 되에 못미쳤다,
유평리의 남자 하루 품삯은 쌀 서되,
숯굴 기술자 하루 품삯이., 닷되 정도
하여, 전국 각지에서 품팔려 몰려들었다.
숯굴 두개에서 열흘만에 숯 200포씩 생산.
숯굽기로 먹고 살만 하니까 당국에서 제지.
숯굽기 10년 만에 일이 끊긴 품팔이 주민들.
70년대 후반 산판까지 막으니까 화전을 개간
덕산(德山)은 옛부터 선비들이 즐겨찾던 곳.
덕이 많은 선비들이 찾는 산이라 하여., 덕산.
옛부터 지리산 유람 길의 들머리는 으례히 덕산.
덕산은 남명 조식의 발자취가 많은 고장.
인근에는 8담 8정으로 유명한 화림동계곡.
하여, 풍류 묵객들이 즐겨 찾던 대원사계곡
한편, 대원사계곡은 옛부터 역사적인 피난처.
변환기 때마다 중요한 피난처이자 역사의 현장.
구한말 ~ 1960년 대까지 화전민들 삶터., 유평리.
1862년 2월 산청군 단성면에서 진주로 농민항쟁 확산.
농민항쟁에서부터 동학혁명에 실패했던 사람들의 은둔처.
그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화전을 일궜던 유평리 마을.
일본과 무역 개항으로 영세수공업 등은 경쟁력 상실.
소수 지주 부농층만 대일 미곡수출을 통해 재산을 축적.
지주제가 강화되자 몰락 농민들이 모여 일군 화전민 마을.
동학은 서학에 대칭이 되는 종교.
서학은 서양학의 줄임말에서 유래.
서양학은 천주교를 통해 들어왔다.
하여, 동학은 동양의 종교라는 뜻.
따라서, 서학은 천주교를 의미한다.
동학은 천주교 영향으로 일어난 종교.
동학(東學)은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
동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후천개벽 종교.
1894년(고종 31) 농민들의 사회개혁 운동.
농민들의 봉기로 양반은 지배 계층 위치를 상실.
천주교 남녀평등 사상에 의해 이조 유교관념 붕괴.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및 쇄국정책으로 국정 혼란기.
이 무렵 동학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 등
개혁 지도자를 중심으로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의 혁명.
몰락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체제 반봉건 근대화 운동.
호남 동림서원과 다산 정약용 등의 실학사상
동학혁명을 일어나게 한 밑바탕이 되는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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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 75세로 운명.
농민, 피지배층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던 인물.
청렴한 관리 양성, 붕당정치를 고쳐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역적 누명을 쓰고 무려 18년 간이나 귀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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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을 진압하려 조정은 청일에 원병을 요청.
결국, 일본군이 동학 농민을 진압하고 한일합방.
이조는 국운을 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유평마을은 일제 항일 의병들의 은신 거점이었다.
6.25 전란 후에는 밤에 빨치산, 낮에 토벌군 세상.
옛 화전민 마을 터에는 꿀사과 밭으로 채워져 있다.
대원사계곡은 고산준령들이 애워싼 거대한 협곡.
1998년 7월 31일 밤 10시~ 8월 1일 새벽 2시 사이.
피서철 절정기에 유평계곡이 범람해 수많은 희생자.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내리면 유평 계곡은 물난리.
하여, 대원사는 길가보다 약간 높은 산기슭에 있다.
비구니 참선도량 대원사는 유평리 조개골 끝에 있다.
작은 샘에서 발원한 물길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
신밭골 조개골 밤밭골로 모여 새재와 외곡마을을 지나
대원사가 있는 유평리에서부터 청정 비구니들 독경처럼
세상을 깨우치듯 흐르는 물소리로 깊은 산속 정적을 깬다.
'유평계곡의 선녀탕, 세신대, 세심대, 옥녀탕.'
비구니 참선도량 대원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한 이름이다.
선녀같은 여인들이 몸을 씻고 마음을 씻고 욕망을 씻는 곳.
구도자이기에 앞서 인간이라 씻고 씻어도 씻기 어려운 세속.
..............경허스님...........
"나비 한 마리의 가냘픈 날개 짓이
거센 태풍의 시발이 되기도 하듯이
한 비구니의 깨달음이 무너져 가는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죽음 앞에서 혼비백산
내 배움이 헛되었구나.”(1846~1912).
....................................
9살의 나이에 청계사로 출가한 경허 스님
14살에 동학사로 와 20년 간 수도에 정진.
당시 이조시대 제일 명성높던 33세 비구니.
그러나, 콜레라 마을에서 강연 도중에 도망.
콜레라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두려웠던 때문.
"생과 사는 뜬 구름과 같은 것,
생(生)과 사(死)는 둘이 아니다."
늘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던 그녀.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로 혼비백산.
그렇게 달아났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
그후 자신이 한 말은 모두 헛 소리라며
제자들을 보내고 또 다시 20 년을 정진.
토굴에 들어가 턱 밑에 송곳을 세워놓고
수도자로서 참선에 정진 후 해탈한.,경허.
요즘, 잘 알려진 비구니는 누구일까?
도쿄대와 하버드대 박사출신 소운스님.
‘맨발의 붓다’를 펴낸 동국대 박사 정운스님
방송계에서는 정목스님.‘마음으로 듣는 음악’
1990년대 초 불교방송 ‘차 한잔의 선율’ 후 8년 만.
‘거룩한 만남’ 진행을 맡은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어린이 포교 프로그램 ‘룸비니 동산’의 지용스님.
........................'자연의 벗.' 지율스님..........................
1957년 산청군 색동면 지리산 기슭에서 태어난 지율스님.
천성산의 도롱룡을 살리려 단식 백일을 감행한 사찰의 산감.
산감은 사찰을 둘러싼 산속 뭇 생명들을 보전하는 일이 소임.
'도롱룡은 자연보호를 위한 상징적인 생명체.'
2003년 2월 5일부터 38일 간, 같은 해 10월 5일부터 45일 간,
2004, 6. 30.~ 58일, 10. 27~ 2005. 2. 4 .(100 일 간 단식 고행).
`도롱룡의 친구', `천성산 지킴이'로 불리우는 비구니 스님..지율.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나 같은 사람은 백번 죽었다 백번 태어나도
산속 물줄기 하나 못 만들지요” - 지율 스님. -
“스님, 제발 져주십시오.”
“너무 많이 졌어요. 물러날 자리가 없는걸요”
“먼 미래를 생각해주십시오.”
“이것이 미래고, 현재고, 과거예요.”
"말라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산과 샘."
100일 단식 중 지율스님의 자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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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비구니., 텐진 파모...............
서양여성으로서 첫 티베트 비구니
텐진 파모스님(2005년 현재 62 세)
작은 몸집에 회색빛 푸른 눈..서양 여성.
티베트 라마승 자주색과 오렌지 빛 가사.
12년 동안 동굴 수행을 거쳐 저서를 발간.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
영국 소녀 다이안 페리가 18세에 맺은 불교와의 인연.
20 세에 인도로 건너가 만나게 된 스승 캄트룰 린포체.
사미니계를 받고 히말라야 산자락 동굴에서 홀로 수행.
“혼자서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기회가 닿으면 다시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요.”
눈사태가 동굴을 막아 숨쉬기 곤란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수행으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1980년 입적한 스승은 아기로 환생한 후 그녀와 재회.
2 살 6개월 어린아이가 곧 그녀의 스승.
아기 스승은 제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단다.
“내 사랑하는 제자 비구니, 파모가 왔구나.”
“깨달음에서 비구와 비구니의 차이가 없듯이
스님과 재가신도들의 차이도 역시 없습니다.
불성을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거울로 비유할 때,
수행 과정은 바로 그 먼지를 털어 없애는 것이지요.”
...............................................................
승무(僧舞) - 조지훈 詩.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정순덕 여인.
조개골 내원골 일대는 빨치산 최후의 항전처.
빨치산 전용 방앗간이 있을 규모의 중요 거점.
법일스님이 50 년간 떠나지 않았던 대원사계곡.
'내원골 초입은 정순덕 여인의 체포 현장.'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유격부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 정예부대.
노고단에서 내원골까지 토벌군을 포함 사망자만 2 만명.
'정순덕 여인 체포로 막을 내린, 반란의 역사.'
제주 4.3 민중항쟁 진압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국군.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민중항쟁 진압 거부.
반란군이 된 여수 14연대가 지리산 문수골로 쫓기며 남부군.
그 반란을 이용해 지리산을 적화기지로 이용한 공산당.
그들을 진압하려 군경연합으로 지리산에 투입된 토벌군.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주민들은 그 틈새에서 방황.
1955년 5월 23일.
남부군 소탕 완료.
그전까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주민들.
밤낮으로 지배자가 바뀌는 세상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던 선택이
생명과 맞바꾸어 지는 일로 직결.
지리산 주변 주민들이 겪었던 고초.
1949년 9월에서 12월 사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7백 여 주민들이 몰살당한 사건.
좌익 혐의로 덕산 농업 창고에 수용되어
토벌군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차례로 총살.
금서면 방곡리 가현부락 청년 40 명
경남 사천군 새동 공동묘지에서 총살.
1951년 '산청 함양 주민 대학살사건'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이다.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그랬었는지
자세한 사연조차 알 수 없는 사건들.
중군리 구진벌, 군자리 앞산,
시천면 신천국민학교, 경호강변.
중기리 앞 섬진강변 모래밭 등에서
산골주민들이 집단 총살 당한 사건들.
1951. 3. 12.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 골짜기에서 500 여명 주민들.
토벌군에 의해서 총살 당한 산골 주민들
남부군에 의해 숨진 주민들
비슷한 숫자였을듯 추정된다.
어느 편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산으로 들어갔던 주민들.
먼저 산속으로 들어간 남편을 따라서
가장을 따라 산에 올랐던 남은 가족들.
남북간 사상전에 휘말려 죄없이 죽어갔다.
지리산 속을 방황하며 병들거나 굶어 죽고,
토벌군에게 총맞아 죽고, 얼어 죽기도 했다.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도
그런 산골마을의 평범한 새색씨.
사상과 이념을 떠나 되새겨 본다.
그녀는 어찌하다 지리산에 입산하게 되었을까?
여자 몸으로 무슨 사연이 있어 남부군이 되었을까?
하여, 그녀의 진술기록을 찾아 그 내용을 소개한다.
......................故 정순덕 여인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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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덕 여인의 진술 내용을 읽다가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길을 걸었을 듯.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도망다녔던 남부군들의 최후.
결국, 공산주의에 이용 당하고, 버림 받고, 방황하다가 죽어갔다.
이제는 그 백골들이 진토가 되어 지리산 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법일스님은 그 영혼들을 달래려고 대원사를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국사봉 가는길' 내원골은 남부군 정순덕 여인의 관광 코스.
국사봉은 옛날 봉화를 올렸던 산봉우리를 국사봉이라 불렀다.
마을을 재앙에서 지키려고 신의 거주처를 마련한 것이 국사당.
따라서, 천제단 또는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 국사당.
몽골 '오보' 신앙이 한반도에서 산신신앙과 결합한 흔적.
거기에 고대중국 '성황'신앙이 들어와 기능과 명칭이 복합
국사당은 옛부터 속칭 고갯마루 서낭당이라고도 불리워왔다.
국사봉 지명은 원나라에 80년 간 지배받았던 고려 시대 흔적.
국사봉이란 지명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남아있다.
산청군은 몽골의 고원과 같아 고대 북방 유목민 풍습이 많다.
산청군 일대는 한반도 고대국가 간에 전란이 빈번했던 격전지.
하여, 국사봉은 마을 재앙이 유난히 많았던 고갯마루를 뜻한다.
'13년간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이 버틴 <내원골>.'
17 살 신랑은 결혼 직후 6.25가 터지자 공산군 수중에서 부역.
국군이 덕산을 탈환하자 그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피했고
신혼 새색씨 그녀는 그해 겨울 밤, 남편 찾아 지리산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16 살 어린 신부에겐 가시밭길 인생 역경이 시작된다.
지리산에서 남편과 함께 지낸지 불과 20 여일 만에 다시 헤어진다.
내원골 안내원 마을엔 그녀가 살았던 집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천왕봉-중봉-써레봉-국사봉-구곡산(961m) = 황금(동남부)능선.
30km 능선의 초원지대가 가을엔 황금빛으로 물들어 붙여진 이름.
덕산 뒷산인 구곡산까지 이어진 써레봉-중봉-천왕봉 구간은 20km.
써레봉은 등산로가 미로와도 같아 길찾기가 어려워 등산객이 드물다.
국사봉은 안내원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 큰 절골, 작은 절골로 나뉜다.
그녀가 태어나 남부군이 되어 붙잡힌 순간까지의 마지막 활동무대이다.
1960년까지 순두류를 거쳐 천왕봉으로 가는 유일한 등산로.
봉화대 역할을 한 남부군 활약무대였고 지휘부대가 있던 곳.
깊은 산중이면서도 민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절묘한 은신처.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한, 정순덕 여인.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17세 성석조씨와 16세에 결혼.
1950년 결혼 직후 6. 25 동란에 공산당에게 남편은 6개월간 부역.
1951년 1.4 후퇴 후 국군이 탈환하자 남편 따라 지리산에 들어감.
1951년∼1953년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1952년 남편 전사).
1953년 남부군 노영호 부대에 편입하여 거점을 덕유산으로 옮김.
1963년 산청군 내원골에서 국사봉 거점으로 남부군 활동 중 체포.
1963년 11월 체포과정에서 대퇴부에 총을 맞고 한쪽 다리를 절단.
1985년 8월 15일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후 가석방.
1988년까지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다가.. 자립하기 위해서 나옴.
1995년까지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1995년 비전향 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 만남의 집 ’에 정착.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 마비.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 치료.
2000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
2001년 전향 무효 선언하며 2차 송환을 촉구했지만 무산되었다.
2004년 4월 1일 운명후 통일로 길목인 파주 보광사에서 영결식.
정순덕 여인의 비화는 생전처럼 사후에도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듯..
16세 새색시, 18세 대성골 불바다 속 5일 사투 끝 기적 생존, 72세 타계.
초혼. - 김소월 作.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속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선녀굴.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뒷산에 위치한 선녀굴
정순덕 여인이 20대 청춘을 숨어살며 보낸 곳.
당시 수색작전에 참여한 분들과 목격자들 증언.
마천, 추성, 송대, 남호, 동강, 문정 주민들 구전.
지리산은 남부지방에서 가장 일찍 첫눈이 내린다.
단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왕봉 주위에는 하얀 눈
겨울이 일찌기 찾아오고 봄은 제일 늦게 찾아오는 곳.
'1962년 2월 겨울이 한창이었던 마천 추성골.'
칠선계곡 쪽에서는 천왕봉 아래 희끗희끗 쌓인 눈.
추성리에서 바라보면 겨울이 지나가기엔 아직도 요원
사찰(유격대) 경찰들은 칼빈 소총의 잠금 장치를 한 채
흙으로 채운 마대로 쌓은 토치카 안에서 지루한 하루 하루.
1955년 2월에 이르러 빨치산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7월 이후 분산된 빨치산들은 다시 지리산으로 집결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경찰의 소탕작전은 1955년 후반부터 1956년까지 실시
이 작전으로 55년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빨치산 부대들이 소멸.
이현상이가 빗점골에서 사살되고 그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거의 사라졌다
당국이 공식선포한 시기는 1955년 5월 23일.
그러나, 1956년 말까지, 43명의 빨치산들이 활동
1953년 7월 휴전 후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활동
당국에서는 경찰서장의 재량으로 사찰 경찰을 임명
향토 방위 또는 빨치산 소탕 작전 때엔 도우미 역할
문영만과 지동식은 이런 사찰 경찰로서
추성리 빨치산 신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마천 지서의 지시에 따라 무한정 경계 근무
가끔은 칼빈 소총으로 몰래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벌목꾼이나 숯꾼들 불법행위를 눈감아 주고 부수입.
향토 방위대 소집권한도 부여받아 제법 괜찮은 위치.
고사리나 산채를 채취하러 가는 주민들을
빨치산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감시
관솔(소나무 기름이 엉긴 나무) 채취 허가권.
몇년 동안 이렇다 할 전투하나 치루지 못하고
기약 없는 방위 임무만 부여받은 채 하루 하루
어느날 추성골에서 곰을 보았다는 나무꾼의 제보
몇 달 동안 뜸했던 곰 사냥 생각이 간절했다.
꼭 곰이 아니라도 송아지 만한 노루사냥 계획
추성골 석이버섯 전문 채취꾼 허정갑을 안내자
18세의 기골 장대한 허정갑에게는 대나무 죽창
세 사람은 벽송사 뒤쪽 산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빨치산이 숨을 곳을 없애려 불을 질러 온통 민둥산
약초꾼들이나 나무꾼들이 오르내리던 길목이지만
빨치산들의 출몰 위험 때문에 다져 있지 않은 산길.
정순덕 일행이 언제 집중사격할지 모른다는 강박의식
그들은 선녀굴을 거쳐 독바위 넘어 쑥밭재로 갈 계획.
마천 지서에는 빨치산 수색작전이라고 변명을 할 요량
북서쪽 능선에는 쌓인 눈위에 짐승들의 발자국이 선명
아직도 지리산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는 정순덕
눈위의 발자국으로 추적하기에 아주 용이하다는 계산
신출귀몰한 정순덕 여인을 잡거나 사살하면 큰 보상금
평생 행복을 보장받을 만큼 거액이 눈앞에서 오락 가락.
산 능선을 두어 시간을 올랐을 때
개가 발버둥을 치며 낑낑대기 시작.
문영만은 사냥개 목줄을 풀어 주었다.
무엇인가 냄새맡은듯 선녀굴로 달려가는 사냥개
두 사람은 선녀굴을 향해 카빈 총구를 겨냥했다.
6.25 무렵에는 약 2만 빨치산들과 군경찰 토벌대
지리산에서 활개치며 양민들을 참 많이도 괴롭혔다.
젊은이들에게 보급투쟁 명목으로 약탈한 생필품 운반.
공산당 세뇌 교육을 시켜 빨치산 부대로 편입하곤 했다.
빨치산이 가장 많이 출몰하였던 마천 지역
경찰의 힘으론 그네들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어서
마을 청년들로 향토 방위대를 조직해 빨치산과 대적
향토 방위대와 빨치산의 첫전투는 독바위 아래 노장대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향토 방위대
빨치산들은 여러번 마천 지서 습격사건,
면소재지 당벌마을을 습격한 빨치산 공세
함양 빨치산 주요거점은 노장대 신밭골 쑥밭재
산청 빨치산 부대와 정보교환을 할 때는 사립재
주요 지시사항이나 공격목표, 부대사항등 정보교환
특히, 독바위 인근 '천연의 요새' 선녀굴을 위시해서,
노장대 마을 위쪽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 등 은신처.
눈비 또는 한겨울 칼바람을 피하기엔 아주 적당한 장소
많은 빨치산들이 살다시피 했던 곳이 선녀굴 근처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이어 고막을 찢어낼 듯한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
총소리와 함께 개짖는 소리도 동시에 뚝 끊어졌다.
세 사람의 이마에서 땀이 송송 맺혀지기 시작했다.
그 칼빈 총소리는 분명 공비의 소행이라 확신한 탓.
잠시후 선녀굴 가파른 바위위에 물체가 어른거렸다.
문영만과 지동식의 카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바위 위 검은 물체가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린 물체는 분명 사람 같았다.
선녀굴 바위에 총알이 튀며 불꽃이 팽팽 돌았다.
안내자인 허정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 사람의 등에서는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올랐다.
엎드려 쏴 자세로 약 30분이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인가 총맞고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선녀굴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겁이 났다.
짙은 산그림자가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주변에서는 억새와 싸릿대를 스치는 바람소리.
공비들이 자리를 옮겨 공격할 것만 같은 불안감
세 사람은 선녀굴 반대쪽으로 미끄러지듯 도망쳤다.
산죽 비트에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몇년 간 조용했던 선녀굴의 인근에서 요란한 총소리
우남마을, 세동마을, 송대마을 추성마을, 광아리 마을
등지에서는 주민들이 불안감에 몸들 바를 모르고 있었다.
선녀굴로부터 약 2km 아래에 위치한 송대 마을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알수 없는 불안감
그날 문영만과 지동식은 공비사살 사실을 신고.
이미 날은 저물었기에 다음날 새벽에 비상 총출동
선녀굴 주변지역 수색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1924년 가족 생계를 맡았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죽자, 그 이후부터 경제적으로 빈곤
여관이나 친구들의 하숙방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방랑 생활
1925년말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다가 1926년 귀국
그해 8월 26일 급성 폐렴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백조 동인들이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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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은 32세에 운명한 김소월과 동갑 친구
일본은 한일합방후 의병과 애국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
민족고유문화 말살 및 경제 침탈로 생존권에 심각한 위협.
민족자본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1910)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1910∼18)으로 토지를 빼앗기고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빈농·소작농 화전민으로 전락,
토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노동자가 된 농민들
일본인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 등으로 열악한 노동 환경 속
식민통치 10년동안 모든 사회구성 계층이 식민통치의 피해
1919년 3월 1일 일제 치하에서의 기미독립운동.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종교계 지도자 및민족대표 33인
고종황제 국장을 계기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수만 시민들이 가담하며 전국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 전개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군중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학살 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후 일제 수탈은 날로 더해 이 땅의 지성인들은 염세주의.
조국을 위해 쓸모가 없어졌다는 자괴감.
기생이 몸팔듯 주색에 자신을 던져버린다.
자학과 자괴감에 빠져든 이 땅의 지성인들.
'기생의 품속에 안겨 한과 울분을 토로.'
팔도강산에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
일제에 빼앗긴 산과 들에서도 봄을 알리던 꽃
추운 겨울을 이겨낸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던 꽃.
'진달래꽃은 절제, 청렴, 민족혼의 상징.'
연인 간에 나눠먹으면 바람기가 사라진다는 진달래꽃.
한방 또는 민간요법에서 강장,이뇨,건위 등에 쓰인다.
한반도 민족혼을 뜻하는 김소월 시인의 민족시 진달래꽃.
..................<진달래 꽃> 詩에 얽힌 이야기.......................
수많은 연인들의 심금을 울린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김소월(1902 8.30∼1934)은 32세의 짧은 삶을 살다간 시인.
동경상대에 재학 중 관동 대진재으로 중퇴 후 귀국한 인테리.
김소월이 작품 활동을 하던 19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
그 영향으로 일제 치하에서 맛본 민족적 분노와 비통함
시의 주제는 저항과 좌절, 의지와 허탈, 분노와 패배감
그 뒤엉킨 감정을 극복하기보다 그것에 휩쓸려가는 풍조
감상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이 퇴폐로 빠져 들던 시기.
피지배층 식민지 민족의 한과 슬픔까지 미학으로 추구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이상주의가 불가능해 지식인들은 좌절.
민족적인 전통이 일제 강요에 의해 단절되고 역사가 전도
삶의 목표와 질서가 무너진 그는 설흔 둘 젊은 나이에 운명.
관동대지진 발생 혼란기에 학업 중퇴하고 귀국.
1924년 조부 광산 일을 도왔으나 광산업이 실패,
가세가 크게 기울자 처가가 있던 구성군으로 이사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지국 개설후 경영(1926) 실패,
1930년대 작품활동 등한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
1934년 12월 24일 오전 8시 고향 곽산에서 아편음독 자살
평북 정주 곽산 남산리에서 출생
처절한 애수를 담고 있는 소월의 시.
그 처절한 애수는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김소월은 진달래꽃 주술같은 사랑을 했던듯.'
1920년 '낭인(浪人)의 봄.'으로 문단데뷔 후 1922년 '진달래꽃'
1923년 민족 혼이 담긴 시를 발표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1924년 오랜 방황 끝에 연변에서 채란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소월의 '주옥같은 시'를 보면 채란과 깊은 관계.'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불멸의 시 작품들.
1925년 처가집 구산군 서산으로 이사 후 발표 作-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대표작은 <진달래꽃>
'김소월은 채란과 헤어진 후 죽도록 못잊은 듯..'
채란은 진주 권번사에서 손꼽는 미모의 여류시인이자 기생.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란 채란.
13살 때 편모가 개가밑천을 장만하려고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채란은 팔도강산,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
연변에서 소월을 만나 사랑을 나눈 것으로 추정.
소월이 주옥 같은 시를 쏟아낼 만큼, 깊은 관계.
채란은 김소월 시인의 '불멸의 시' <진달래꽃>의 여주인공.
한반도는 물론 중국까지 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 방황한 채란.
바라만 보아도 곱지만 하도 흔해 손쉽게 꺽을 수 있는 진달래꽃.
온몸으로 님을 반기듯 봄바람 타고 피어나 꺽여버리기도 하는 꽃.
채란은 진달래꽃 같은 신세라 그 꽃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듯.
그녀는 객지를 떠돌듯 남자의 품속을 돌며 주옥같은 시를 토해낸다.
진주권번 들병이(삼패기생) 뿌리 없는 몸으로 팔려 다닌 신세.
춤과 노래를 익히고, 고향이 그리울 때면 시로 마음을 달랜 듯.
조국을 잃어 버린 소월과 들병이 신세 채란의 만남.
서로 신세를 한탄하며 자학하듯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당시 소월의 시 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나타나 있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 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들면 님.'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지금까지 알려졌다.
김소월의 불멸의 작 <진달래꽃>에는 채란의 심경도 잘 담겨있다.
님은 먼곳에..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곳에. ♬
노래 : 김추자. 조관우. 장사익.
채란은 몸 파는 기생이라 김소월을 사랑하면서도 붙잡지 못한 듯.
빼앗긴 조국 팔도강산에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진달래꽃.
<진달래 꽃> 시는 김소월을 민족시인이라 부르게 했던 불멸의 명작.
................................................................................................
詩.
진달래 꽃.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사랑하는 님을 멀리 떠나보내야 할 때, 그 가슴 아픈 마음.
이미 내 곁에서 떠났어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래서, 떠나가는 님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님이 가시는 무릎 걸음마다 진달래꽃을 뿌리며 고이 보내는 마음.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싶기에, 울고 싶어도 죽어도 아니 우는 마음.
김소월 詩人의 가슴 속에서도 님과 피맺힌 이별은 '한'이 되었나 보다.
이곳 유평리 대원사에서부터 노고단 문수골까지
반란의 역사로 숨진 2만 여명의 토벌군과 남부군.
이 詩로 이곳 못 다한 삶의 진혼들을 위로해 본다.
2004. 10.10. 법일스님 100 주년 탄신 추모제에 즈음하여
2004년 4 월 1일 생을 마감한 정순덕 여인 혼도 달래본다.
내원골
대대로 자연의 섭리만 쫓아 살아오던 지리산 기슭 주민들
지리산의 마지막 비극이길 바랐던 1948년10월 여순 반란사건.
구례 왕시루봉 서쪽 문수리 계곡에서 국군토벌대와 한판 싸움
그러나,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고
6.25 이후 1963년까지 십수년간 이어졌다.
아늑한 어머니의 품속처럼 고요하고 포근했던 내원골
6.25를 전후하여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현장으로 돌변
격변하는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내원골
1945년 8.15 광복이란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데올로기 전쟁을 겪으며 시작된 지리산의 비극
특히, 내원골은 지리산의 비극이 종지부를 찍은 곳.
내원골에서도 가장 깊은 안내원에서 태어난 정순덕
1950년 16세 어린 나이로 시천면 사리로 시집을 간다.
17세 신랑은 6.25이후 마을을 점령한 공산군에게 부역
국군이 다시 덕산 일원을 탈환하자 부역한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신혼 6개월 앳된 신부도 뒤따라간다.
칠흑 같은 겨울밤, 남편 옷을 챙겨 산으로 들어간., 정순덕.
남편과 상봉한지 20여일 만에 남편을 잃은 정순덕.
그로부터 13년 세월을 짐승처럼 살아야만 했던 그녀.
李洪伊와 함께 그녀가 경찰에 붙잡힌 1963년 12월 11일
그날 상오1시 즈음 자신이 태어난 내원골에서 잡힌 그녀.
당시 내원마을에서 보름간 잠복근무를 하던 산청 경찰 2인.
이홍이는 현장에서 사살됐고, 정순덕은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내원골(안내원)에는 그녀가 살던 집과
그녀가 생포됐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태어난 집은 송두리째 흔적이 없고 집터만 남아 있으며
살던 집은 지금 이 마을에 사는 성한술이라는 사람이 관리
그녀가 이홍이와 마지막으로 저항하다 생포된 집은
안내원마을 유일한 가게 집 뒤편에 창고로 쓰여진다.
이 마을에서 살다가 전란 와중에 다른 곳으로 가서 살다
다시 15년 전에 들어와 혼자 살고 있다는 김재용씨(75)는
정순덕이 살던 집과 태어난 곳, 생포된 장소를 아직도 기억
당시의 기억이 너무도 끔찍해 생각하기조차 싫다고 말한다.
네 가구가 사는 안내원마을은 관광지로 겨우 각광받고 있다.
내원사에서 바깥 내원마을 지나 배양이, 안내원마을까지 도로
"외탑이" "쌍탑이" "큰 절골" "작은 절골" 등의 지명
국사봉으로 이어진 안내원마을은 고산지대의 이색적 분지
옛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며 근대 빨치산들의 활동무대
지금부터 그곳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씩 들춰내 보자.
여름에는 계곡에 발 담그고 땀을 식혀가며
천왕봉을 다녀오는데 예전에는 3~4 일 소요.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일반적이던 산행 코스.
내원사 계곡의 압권은 내원사 주변 내원골과 장당골 갈림길.
내원사 규모는 작지만 천년의 역사를 지닌 대가람다운 고찰.
내원사를 한 바퀴 돌아 대나무 숲으로 가면, <내원마을 가는 길>.
장당골에는 마을이 없는 반면 내원골에는 바깥내원과 안내원마을.
<경상대 자연학습장>이 있는 장당골은 예전의 화전민촌 모두 다 철거.
내원마을 특산물은 곶감과 복조리, 워낙 고산지대라 공기도 맑다.
이곳 주민들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곶감깎고 복조리 만드는 것이 일.
'반란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1948년 10월 전라도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폭동 진압군들의 반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가 토벌대에 쫓기며 시작되었던 빨치산 역사.
지리산에서는 구례 문수골에서 시작, 내원골에서 마감된, 반란의 역사.
1950.6·.25~1955. 5월 빨치산이 섬멸될 때까지 7년간 접근 금지된 마을.
소개령 이후 원주민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그들이 떠난 빈자리엔 객지인들이 찾이하고 있을 뿐.
'반란의 역사' 산증인들은 고령으로 희미한 옛 기억을 상실.
생존에 있는 산증인조차 거의 역사의 진실을 침묵으로 일관.
지금은 아쉽게도 반란의 역사 현장들이 전설처럼 잊혀져간다.
첫댓글아는것과 모름의 차이는 재미가 있고 재미가 덜 있는것의 차이지만 결과는 정 반대의 변화차이로 돌아올 수 있는것이다. 새롭게 정리된 지리산 학술적 등반기술을 정리해 둠으로서 지리학적 등반기술과 지리산으로 인한 기후,생태,변화,문학,환경으로 인한 학술적 가치를 다시 한번 다듬의 보는 마음으로 선경님의 지리산
'그곳에 가고 싶다.'에 올렸다가 지우고 '알고 갑시다.'로 옮겼읍니다./어느 한쪽에 몰려 있어야 읽는 분들이 편할 것 같아서요./<지리산 이야기>에는 현장감이 부족한 대목도 있지만, 전체 줄거리를 연결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로 메꾼 곳도 더러 있읍니다. 하여, 와룡산 카페를 통해 보완하고 싶습니다.
mtchoyu 님! '지리산 이야기' 를 쓴 저 자신도 솔직하게 지리산을 잘 모릅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파헤치기에는 너무 방대한 유래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지리산/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지리산에서 사라져가는 유래와 전설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알기쉽게 정리하고 싶어 올린 글...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여름, 윗새제-무재치기폭포-치밭목대피소-써리봉-중봉-천왕봉 ~ 중산리로 하산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시간에 쫒겨 눈팅만 하고 지나쳤던 대원사계곡, 사진 한 방에 만족해야 했던 대원사 일주문, 선경나라님의 소중한 글이 그때의 아쉬운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는것과 모름의 차이는 재미가 있고 재미가 덜 있는것의 차이지만 결과는 정 반대의 변화차이로 돌아올 수 있는것이다. 새롭게 정리된 지리산 학술적 등반기술을 정리해 둠으로서 지리학적 등반기술과 지리산으로 인한 기후,생태,변화,문학,환경으로 인한 학술적 가치를 다시 한번 다듬의 보는 마음으로 선경님의 지리산
사랑으로 정리된 여러 측면의 글을 통하여 보다 값진 지리산 오름행위가 이루어 지기를 바라며 이런 계기로 인하여 생각한는 등산, 살아움직이는 등산 활동으로 발전 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 합니다. 저역시 등산에 도움글 많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공부글 감사합니다.
'그곳에 가고 싶다.'에 올렸다가 지우고 '알고 갑시다.'로 옮겼읍니다./어느 한쪽에 몰려 있어야 읽는 분들이 편할 것 같아서요./<지리산 이야기>에는 현장감이 부족한 대목도 있지만, 전체 줄거리를 연결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로 메꾼 곳도 더러 있읍니다. 하여, 와룡산 카페를 통해 보완하고 싶습니다.
mtchoyu 님! '지리산 이야기' 를 쓴 저 자신도 솔직하게 지리산을 잘 모릅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파헤치기에는 너무 방대한 유래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지리산/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지리산에서 사라져가는 유래와 전설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알기쉽게 정리하고 싶어 올린 글...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원사 가는길 안내에서는 대진고속도로 8:단성 IC를 이용 하는게 빠른길입니다.(덕산.대원사.중산리.거림.청학동(묵계) 까지이며, 10:생초IC 에서는 왕산,필봉, 함양독바위(동강,운암)쪽 산행시에 빠른길이며, 11:함양IC에서는 (인월,마천,추성,백무,달궁,성삼재)까지 빠른길 입니다. 서울방면 깃점으로 전주,남원 방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성삼재,구례 화엄,쌍계사,악양.하동까지가 빠른길 안내인것 같습니다. 함양에서는 칠선계곡,마천 지름길은 오도재로 넘어가는 길도 있습니다만 사이길이라 참고로 알아둘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9:산청IC 에서 밤머리재로 해서 대원사로 가는 사이길도 잇습니다만 오도재나, 밤머리재길은 산길이라 비상도로 알고 있어면 될것 같습니다.
이름없는 여인처럼 나도 그 곳에서 살고싶습니다 .
작년 여름, 윗새제-무재치기폭포-치밭목대피소-써리봉-중봉-천왕봉 ~ 중산리로 하산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시간에 쫒겨 눈팅만 하고 지나쳤던 대원사계곡, 사진 한 방에 만족해야 했던 대원사 일주문, 선경나라님의 소중한 글이 그때의 아쉬운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