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울리히는 예카테리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예카테리나 또한 그런 카를 울리히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채로 두 사람은 각자 정부를 두고 18년간을 함께 살았다. 예카테리나가 낳은 세 아이들도 모두 정부의 소생으로 아버지가 각각 달랐다고 한다. 엘리자베타 여제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러시아 황실의 안정을 위한 후사일 뿐 누구의 혈통이냐는 어차피 관심 밖이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조카인 카를 울리히와는 관계가 나빴지만 예카테리나는 무척 총애하였다.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차르에 올라
예카테리나의 남편 카를 울리히는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의 황태자인 스스로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자란 프로이센에 대한 해바라기 사랑으로 러시아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외국인인 예카테리나가 더 러시아를 사랑했다. 그녀는 총명하고 야심만만했으며 뛰어난 지식과 유연한 성격, 러시아에 대한 애정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배웠으며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였고 러시아 역사에 통달하였다. 더불어 유럽의 계몽 사상가들과 교유하면서 러시아를 더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자연스레 황태자의 인기는 땅에 떨어지고 황태자비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열광적이 되었다.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카를 울리히는 표트르 3세로 러시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황제에 오른 후 표트르 3세는 거의 다 이긴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불리한 조건으로 중단하고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거의 빈사 상태에 있던 프로이센은 표트르 3세의 프로이센 사랑 덕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표트르 3세는 자신이 통치하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프로이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러시아 황실에 프로이센 세력을 끌어들이는 등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렸다. 러시아의 귀족과 백성들은 표트르 3세의 실정에 불만을 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