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실네트워크 정찬필 사무총장
1천 조각이 넘는 퍼즐은 네 모서리와 둘레를 맞추는 것에서 시작한다. 건축은 땅을 고르고 건물을 지탱해줄 철근을 든든히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 교육의 시작은 무엇일까? 특별한 ‘교육 시스템’을 만들려면 왠지 창조나 개혁 같은 거창하고 무게감 있는 수식어가 달린 정책들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교육의 가장 작은 세포인 ‘교실’의 변화에는 거대한 담론이 필요치 않다.
수업이 즐거운 학생과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힘을 얻은 세포들이 모여 몸을 만들고 움직인다면, 무엇보다 학교에서의 배움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세상과 만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이 어디 있을까. 교실의 변화가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를 만든다고 믿는 미래교실네트워크 정찬필 사무총장을 만났다. 그가 들려주는 바뀐 교실의 위력에 귀 기울여보자.
취재 김지민 리포터 sally0602@naeil.com 사진 이현준
편집부가 독자에게 ...
학교 교육이 중요한 이유 미래교실네트워크 강당 벽에서 재미있는 지도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려워서 포기한 수학, 수학 능력시험에서는 치르지 않으니 버리는 과목, 이과라서 또는 문과라서 필요 없다 여겼던 여러 과목이 우리가사는 세상 속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지도의 제목은 ‘한 과목이라도 포기해도 되는가’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 ‘버려도 되는’ 과목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다시한 번 깨닫습니다. 지도를 보며 공교육이 반드시 살아나야 할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_ 김지민 리포터 |
정찬필(48) 미래교실네트워크 사무총장은 고려대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1994년부터 20여 년을 KBS에서 PD로 활동했다. 2014년 <21세기 교육혁명-미래교실을 찾아서>, 2015년 <거꾸로 교실의 마법>, 2016년 <배움은 놀이다> 시리즈를 통해 교실 혁신의 대안을 제시했다. 거꾸로 교실 교사들의 모임인 ‘미래교실네트워크’의 창립위원. 올해 KBS를 떠나 미래교실네트워크의 사무총장으로 자리 잡았다. 미래교실네트워크는 2016 구글 임팩트 챌린지에서 ‘사상 최대 수업 프로젝트’로 4개 우승팀 중 하나로 뽑혔다. 학교 교육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맞닿는 지점을 넓히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행복한 교육의 선순환 ‘거꾸로 수업’
정찬필 사무총장은 올해, 20년 넘게 근무하던 KBS를 떠났다. 그가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미래교실네트워크’. 오래 일했던 KBS를 떠날 만큼 ‘대단한’ 일터일 텐데 대표가 아닌 사무총장을 맡았다.
“미래교실네트워크는 거꾸로 교실 교사들의 모임이에요. 대표는 당연히 선생님이 맡아야죠. 저는 창립 인원 중 하나였고 더 많은 선생님과 학생이 소통하는 즐거운 수업을 만들어 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거꾸로 수업은 교사의 일방적 강의가 아니라 교사가 미리 제공한 수업 내용을 미리 본 뒤, 수업 시간에는 학생 주도로 과제 수행, 질문, 토론 등의 활동을 하는 수업 방식이다.
지금은 ‘거꾸로 수업’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지만 2014년 처음 방송된 <21세기 교육혁명>에서 보여준 ‘거꾸로 수업’은 교사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학교만 오면 무기력해지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던 선생님들이 먼저 나섰다. 거꾸로 수업을 시작하자 말문을 닫고 잠을 청하던 ‘좀비’ 아이들의 눈빛이 살아나고 수업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 처음엔 두 학교, 일곱 명 교사로 시작한 거꾸로 교실, 올해는 집계된 참여 교사는 1만5천 여 명에 달한다.
“집계되지는 않은 교사도 많으니 실제 거꾸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는 훨씬 많을 거예요.” 거꾸로 교실은 학생이 변하고 교사도 더 행복해지는 선순환의 교육 시스템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 정 사무총장의 의견이다.
PD의 촉으로 찾은 교실의 문제
교양 프로그램 PD가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2013년 2월 해외에서 열린 교육 혁신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교실이 무너지고 아이들의 무력감도 커지는 문제는 많은 나라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문제점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PD의 촉이 발동했죠. ‘이건 확인해봐야 한다’고.”
교육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는 정확한 답도 없고 뻔해지기 쉬워 소위 말하는 ‘인기 없는’ 아이템이다. 많은 사람이 안 된다 말렸지만 ‘똘끼’ 하나로 프로그램 제작을 밀어붙였다. 물론 그동안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목표를 정하고 지향을 잡았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근성이 똘끼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중요한 덕목이지요.” 정 총장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도 습관과 훈련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이뤄가는 것들이 많다며 우리 아이들이 건강한 ‘똘끼’를 지니고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KBS를 떠난 것도 정 총장의 똘끼였을까? 그도 KBS를 떠나는 것을 몹시 망설였단다. “그런데 이 길이 외길이더라고요. 경제적·사회적 안정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일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도 있고요.”
다행히 사회적 기업가 지원 단체인 아쇼카재단 한국지부(아쇼카 한국)의 아쇼카펠로우로 선정돼 3년간 생활비를 지원받은 것도 큰 힘이 됐다. “3년간 먹고 살 걱정은 덜은 셈이죠, 하하하.”
교실 교육, 세상과 만나다
정 총장은 거꾸로 수업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며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교실에서의 수업을 단지 평가나 입시용이 아닌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고. 그가 그린 그림은 올해 치러진 구글 임팩트 챌린지에서 ‘사상 최대 수업 프로젝트(이하 사최수프)’로 우승을 차지하며 날개를 달았다. 정 총장은 ‘사최수프는 교실 안에서 배운 것을 교실 밖의 세상에도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실현하는 개념’이라며 거꾸로 교실을 통해 문제 해결 방법을 터득했다면, 사최수프를 통해 실제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나가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거꾸로 수업은 수업의 방법을 바꾸는 것이어서 빠른 시간에 확산될 수 있었지만 사최수프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들이 있다. 사최수프는 교사가 아이들의 질문이나 행동에서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그 것을 같이 해결해나가려는 교사의 문제 해결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미래교실네트워크는 교사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거꾸로 수업이나 사최수프 모두 교실에서 시작되는 변화입니다. 공교육을 활성화하고 교실을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키우는 심폐소생술의 역할을 할 거라 믿습니다. 아직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지 알 수 없지만 우리 학교 교육이 제 역할을 내는 데 큰 동력이 될 겁니다.
교육에 대한 잘못된 신화
문득 든 궁금증 하나. 정 총장의 자녀는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을까? 자녀의 교육 환경은 만족스러웠을까?
“아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생각했는데 중학교에 가더니 점점 무기력해지는 거예요. 아이가 중2 때 <21세기 교육혁명-미래교실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프로그램을 만들며 아이의 무기력 원인을 찾아냈죠. 아이를 탓할 일이 아니었어요.” 환경에 밀려 무기력해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단다. “아이에게 무한 자유를 줬어요.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고.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았어요. 몇 달을 게임만 붙잡고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애니메이션을 하겠다고 선언하더니 스스로 준비해서 애니메이션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정 총장은 무한 자유를 주었던 그 시간이 아이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그는 많은 부모가 아이에게 절대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도 못 미더운 마음에 관여를 한다며 결국 아이 스스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기회를 뺏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학교의 수업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고급 외제 승용차가 어디론가 쌩하고 달려가요. 그 뒤로 대형차, 소형차, 자전거까지 이유도 모르고 따라가죠. 불안을 자극제로 삼아 어떻게든 따라가야 한다는 교육에 대한 잘못된 신화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이 남아 있거든요.”
정 총장은 학교 교육을 통해 이런 잘못된 신화가 깨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학년을 넘는 예습, 끊임없는 문제 풀이, 학원투어…. 이 모든 것들로 가득 찬 입시와 관련된 신화도 이제는 깨어져야 한다고.
“대학 입시는 이미 충분히 바뀌었어요. 학생부 종합 전형이 그 대표적인 예죠. 올해 불수능으로 들썩거리기는 하지만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학교가 대학 입시를 핑계로 오래된 신화에 머물러 있으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거죠.”
그가 묻는다. “21세기 교육 목표가 뭔지 아세요?” “? … .”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지요.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수업의 중심인 교실, 아이들의 호기심을 깨우고 생각을 묻는 교실, 배운 것을 세상에 적용하며 문제 해결력을 키우는 교실. 교실이 이렇게 변화한다면 학교가 아이들의 실력과 인성, 창의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인생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만들어갈 한국은 앞으로 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도 품어본다.
그렇다면 지금 엄마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신화에 갇힌 선입관과 편견의 벽을 넘어서는 21세기형 엄마로의 진화가 아닐까?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