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과장 김모(38ㆍ서울 강남구 개포동)씨는 최근 “머리가 나빠진 것 같다”며 아내와 함께 정신과를 찾았다.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으며 상사의 지시를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다. 상사로부터 수차례 크게 혼이 났지만 좀처럼 ‘멍해진’ 느낌은 좋아지지 않았다. 소화가 잘 안되고 가슴떨림 증상도 생겼다.
급기야 김씨는 성생활까지 문제가 생기면서 아내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은 것이다. 김씨는 “승진에서 자꾸 밀리면서 곧 잘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기를 쓰고 일을 했는데 이렇게 됐다. 혹시나 해서 검사라도 받아보려고 병원을 찾았다”고 말했다.
병명은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포천중문의대 분당차병원 정신과 이상혁 교수는 “최근 삼팔선, 사오정 등이 일반화되면서 40ㆍ50대 직장인들 중에는 ‘잘리면 끝’이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을 많이 겪는다. 그 증세가 기억력 감퇴로 나타나는 수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자신감 치료를 병행하면 증세가 호전된다는 것이다.
“65세 이상 가벼운 인지장애” 미국에만 100만명
40대 이후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면, 물건을 둔 장소를 다시 떠올리지 못하고, 회의와 약속시간을 깜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이같은 망각이 단순한 개인적 불편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문제, 직장문제 심지어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력 감퇴로 고민할까. 국내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미국의 경우가 우리에게 참고가 된다. 미국 UCLA에서 기억력클리닉을 운영하는 신경과학자 개리 스몰은 자신의 책 ‘메모리 바이블’에서 “기억력 장애를 경험하는 비율이 50대 초반에는 40%, 60대에는 50%, 70대 이상에서는 70%에 이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라며 “가벼운 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65세 이상 미국인은 약 100만명으로 추산되고 이들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확률은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10∼15%씩 늘어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스트레스가 많아지면 기억에 관계하는 뇌 ‘해마’의 노화가 촉진돼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서울 광제국한의원 이정주 원장은 “회의 때 브리핑하려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대기업 부장, 과다흡연(하루 2갑)과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건망증이 심해진 벤처기업 직원, 일상생활에는 문제없지만 중요한 일만 닥치면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편집디자이너 등이 많다. 최근 경기가 나빠진 탓인지 이런 환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회사원 최모(37ㆍ서울 서초구 방배동)씨는 심한 경우다. 6개월 전 회식 술자리에서 동료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한 이후 기억력에 이상이 생겼다. 이후 그는 직장에서 왕따가 됐다고 한다. 이정주 원장은 “순간 정신적인 충격을 당한 이후 최씨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자신감도 줄어들면서 성격까지 변했다”며 “늘 전화하던 거래처 전화번호를 잊어먹거나 상사의 지시를 까맣게 잊는 일이 빈번했다”고 말했다.
갑작스런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기억력을 아예 상실하는 ‘해리성 기억상실’이라는 것이다. 수치심 때문에 2개월 동안 그 사건을 숨겨오던 최씨는 결국 심리상담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직장인에게는 알코올 남용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도 많다. 지난해 말 중앙대 용산병원 알코올중독 클리닉을 찾은 직장인 이모(54ㆍ서울 용산구 후암동)씨는 20대 중반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 주량이 소주 1∼2병, 막걸리 3∼4통이었다. 3년 전부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이 떨리고 잠이 오지 않는 등 금단증세를 겪은 이씨는 병원을 찾기 한 달 전부터는 물건을 놓은 장소를 잊어버리고 방금 전에 한 얘기를 반복하고, 집도 잘 찾지 못하는 등 치매와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알코올중독 클리닉 이영식 교수는 “부족한 비타민 B1(티아민)을 꾸준히 보충해주고 금주(禁酒) 등 알코올 중독치료를 함께 병행했다”며 “기억력은 호전됐지만 뇌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완전 회복은 불가능한 케이스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은 결과 금방 한 얘기를 계속 반복하거나 물건 둔 곳을 잊어버리는 증세는 없어졌다. 하지만 정상일 때의 기억력이나 판단력보다는 훨씬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영식 교수는 “알코올을 많이 섭취하면 단기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가 영구 손상될 수 있다”며 “필름이 끊기는 일을 경험했다면 술을 자제해야 한다”고 밝혔다. 흔히 필름이 끊겨도 이름이나 직업, 주소 등 장기기억은 온전하지만 5∼10분 전의 일을 기억 못해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가 바로 ‘해마’ 손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울증ㆍ갑상선 질환 등이 주부 건망증 유도
주부들에게는 우울증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가 잦다. 최근
분당차병원을 찾은 전업주부 이모(50ㆍ경기도 용인시 구성읍)씨는 남편이 죽은 후 자녀들도 분가해 혼자 살고 있었는데, 몇 달 전부터 치매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가스불을 켜놓고 외출해 집에 불을 낼 뻔하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들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치매일 것으로 예상하고 병원을 찾았으나 병명은 우울증이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오병훈 교수는 “주부들의 경우 주의력 감소, 스트레스, 불안 및 우울, 피로 등 생활과 밀접한 심인성 건망증이 많다”며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면 기억력은 쉽게 회복되기 때문에 조기진단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여성에게 훨씬 많이 생기는 질병인 ‘갑상선 기능 저하(항진)증’이나 기타 내분비계의 질환도 기억력 감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충고했다. 신문사 여기자 백모(30)씨가 바로 그 케이스. 백씨는 지난해 3월 갑상선 기능항진증 판명을 받은 후부터 다소 황당한 경험을 했다. 모 가수 인터뷰를 끝내고는 그녀와 집 방향이 같아 함께 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회사에 자신의 차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내려야 했다.
백씨는 “인터뷰 도중 유명인의 이름이나 고유명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아 대화가 자꾸 끊기자 인터뷰 대상자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 차문을 잠갔는지, 집에 불을 껐는지 등을 비롯해 중요한 약속을 자꾸 깜빡깜빡해 아예 다이어리에 모든 일정을 기록한다”고 말했다.
드문 케이스지만 ‘해리성 기억상실’로 병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2월 주부 김모(32ㆍ서울 강동구 길동)씨를 병원에 데리고 온 남편은 “(자신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내가 갑자기 결혼한 사실도 잊어버린 채 남편도, 아이도 몰라보고 자신을 처녀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이 경우 환각이나 망상,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고 본인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지만, 최근의 일만 기억하지 못한다.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연병길 교수는 “한 달 동안 면접치료를 통해 심리상담을 하고 약물치료를 병행했더니 서서히 회복됐다”며 “큰 쇼크 후 일시적으로 겪는 기억력 감퇴는 대부분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기억력 감퇴는 단지 성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입시열풍에 시달리는 수험생이나 자극적인 환경에 노출된 어린이도 최근 기억력 관련 질병이 늘고 있다. 서울 양천구 Y고 3학년생 배모(17ㆍ서울 양천구 신월동)군은 시험 불안으로 인해 기억력 감퇴를 경험했다. 배군은 고2학년 당시 모의고사 성적이 330∼350점대로, 전교석차가 3∼7등 정도였다.
배군은 “명문대에 가고 싶은 욕심에 고2 초반부터 하루에 한두 시간씩만 자고 공부했다. 처음에는 집중도 잘되고 성적도 많이 오르더니 3학년 초부터 어깨와 목이 심하게 결리고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자 모의고사를 볼 때도 아는 문제를 틀리는 일이 잦았고 성적편차도 크게 나타났다.
광제국한의원 이정주 원장은 “수험생 중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머리에 열이 발생하고 주위가 산만해져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많다. 이들은 ‘머리가 좋아지는 약’을 지어달라며 한의원을 찾는다”고 말했다.
수험생 불안ㆍ스트레스도 한몫
성적고민 때문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은 이모(11ㆍ초등5ㆍ서울 강남구 수서동)군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할 정도로 산만한 성격.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기억하지 못해 성적이 하위권을 맴돌았다. 이정주 원장은 “학생들 중에는 유사 ADHD(주의력 결핍 과다행동장애)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며 “컴퓨터 게임, 방송 CF 등에 노출돼 뇌파가 하루종일 빠르게 움직이느라 뇌는 더욱 피로해지고 결국 무기력해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누구나 20대부터 알츠하이머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고유명사가 잘 기억나지 않거나 약속을 자주 잊어버리는 등 사소한 건망증이라도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내버려두면 안된다”고 말한다. ‘도시병’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억력 감퇴야말로 현대인들 모두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질병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한편 기억력 감퇴현상이 일상에서 보편화하다 보니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제품들이 마구잡이로 출시되고 있다. 특히 분유ㆍ식료품(우유, 계란, 멸치 등) 업계에서는 뇌의 기억력을 높이는 DHA가 함유된 제품들이 최고 인기다. ‘정관장 홍삼톤 아이패스’ ‘브레인원’ ‘브레인 트로피아 닷컴’ 등과 같이 수험생들의 두뇌 기능을 활성화시킨다는 제품들도 출시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들 제품에 대해 “플라시보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 의학적으로 그 효과가 명쾌하게 입증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