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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삶의 스승들
송재호(10회)
다른 학교들과 비교할 때 금계중학교는 어떤 진한 공동체, 끈끈한 유대로서 얽혀져 있는 학교라는 느낌을 지니게 된다. 무슨 거창하고도 대단한 것보다는 알차면서도 실속이 있는 배움의 공동체라는 것을 금계중학교는 늘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느 학교에 못하지 않게 모든 방면에 있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으니 이러한 면에 있어서 또한 특이하고도 범상치 않게 생각되어진다. 일찍이 남강 이승훈선생은 평북 정주에 유서 깊은 오산학교를 세워서 우리나라의 많은 걸출한 인재를 배출하여서 학교가 크게 명성을 떨쳤거니와 어딘지 모르게 내게는 다른 지역에 있는 또 하나의 오산학교 같이 생각되어지곤 하는 것이 모교인 금계중학교다. 아닌게 아니라 금계중학교를 창립하신 계삼정 교장 선생님도 가끔 학생들에게 오산학교에 대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송지향선생님도 옛적에 정주를 기차를 타고 지나면서 저만치에서 보이는 오산학교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금계중학교는 창립자인 계삼정 교장 선생님의 미래지향적 개척 정신과 창의적인 교육정신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창회보에 실리는 고등공민학교 시절의 선배들이나 1회 또는 2회, 3회의 선배들의 회고담을 읽어보면 어려웠던 시절의 금계중학교가 하나의 당당한 배움의 전당으로서 발전하기까지의 눈물겨웠던 내력들을 익히 알 수가 있다. 교실의 돌 하나, 기둥 하나, 운동장의 흙더미 하나하나에는 당시의 선배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이 짙게 배어있었다.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서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서 세운 것이 유서 깊은 배움의 전당인 금계중학교다. 오늘에 있어서 모교에 찾아가서 장족의 발전을 거둔 학교의 여러 모습들을 접하게 되면 실로 깊은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우리가 학교 다닐 적에는 실로 실력을 두루 갖춘 훌륭한 선생님들이 여러 분 계셨다. 계삼정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과학을 가르친 김정철 선생님, 수학의 명지수 선생님, 국어와 국사를 가르친 송지향 선생님, 체육, 생물 등을 가르친 조영주 선생님, 영어를 가르친 최종로 선생님 등을 위시해서 서용운, 양영식, 배인현 선생님 등 여러 쟁쟁한 선생님들이 계셨다. 모든 분들이 열심히 가르치셨고 학생들도 또한 열심히 배웠다. 사제 간의 유대관계가 다른 어느 학교보다 긴밀했고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내용들도 정성과 열성이 뒷 밭침이 되어져서 학생들에게 한층 더 감동적으로 전해졌다. 단순히 교과서의 내용들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의 체험에서 우러난 많은 생활의 지식들은 학생들이 미래의 생활전선에서 유념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졌다. 중학교 때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성인이 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어지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 교육을 받은 정도나 내용에 따라서 한 학생의 인생의 진로를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져서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했고 훌륭한 배움의 전수의 터전이 되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초창기의 학교의 창립과 발전의 모태가 된 계삼정 교장 선생님의 개척정신과 짙은 유대의 공동체 정신이 오늘날의 모교를 이루어냈고 또한 미래의 금계중학교의 기본이 되는 정신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세월이 지나도 멀리 다른 데에 떠나 있어도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이 모교에서의 학창생활 때의 추억이며 조용히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들의 모습이다.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항상 우리에게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모교에서의 추억이요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이다. 수업을 받고,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구기경기를 하고, 소풍을 가고, 수학여행을 가고, 작업을 하고, 답사여행을 했던 때의 일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지만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또 흘렀고 문득 옛 적의 상념들에서 벗어나서 오늘의 상전벽해와 같이 변모된 현실을 깨닫게 된다. 늘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선생님들의 가르침이요 선생님들과 함께 보냈던 소중한 시절들에 대한 추억들이다. 선생님들에 대한 고마움, 옛 학우들에 대한 우정의 소중함 속에서 또한 미래지향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의 기반은 늘 마련되어진다고 볼 수가 있다.
내가 금계중학교를 다녔던 때는 1960년도 초반기였다. 그 때에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큰 변동이 생겼으니 이른바 4.19혁명이나 5.16군사정변도 모두 이때에 서로 앞을 다투어서 발생했다. 나는 4.19 때 서울에 있다가 그 뒤 얼마 있어서 풍기로 와서 금계중학교 2학년에 들어갔다. 한 학년을 다 끝내지 못하고 다시 서울에 갔다가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서 다시 풍기에 와서 금계중학교 2학년을 끝냈고 이듬해에 3학년 때 명지수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던 때에 학교를 다녔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차동원이 자기 아버지가 풍기고교 교장 발령을 받아서 풍기에 오실 때 같이 이사를 와서 금계중학교에 다녔는데 산뜻한 서울내기 인상을 풍기면서 모든 일에 열성을 보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교에서 경주와 포항등지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어서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정화를 보여주는 경주의 여러 고적들을 둘러 볼 때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포항에서 생전 처음으로 모래 희고 물 맑은 동해바다를 구경하기도 했다. 모처럼 고향을 떠나서 넓은 곳을 구경하는 동급생들의 밝고도 활동적이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등산을 유난히 즐겼던 조영주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서 학교에서 도솔봉으로 등반을 갔는데 이때에는 풍기고교의 차기영 교장선생님도 동행을 하였었다. 좀 힘들게 여겨지기도 했던 도솔봉 등산이었지만 선후배들끼리 서로 격려를 하고 도와주고 또 선생님들이 항상 보살펴주셔서 무사히 도솔봉 정상에 올랐고 산등성이를 타고서 고항치를 거쳐서 되돌아올 수가 있었다. 당시 우리 나이 또래로서는 수월하지만은 않았을 도솔봉 등산을 마치고 귀가했던 추억은 두고두고 큰 자부심과 더불어서 남았으니 그 때의 기백과 정신으로서 매사에 임하면 무모한 실패는 없을 것 같이 여겨졌다. 체육을 담당하셨던 조영주 선생님은 유별나게 등산을 좋아하셨고 틈만 생기면 학생들과 같이 등산을 하거나 여행을 하셨는데 그 때의 재미있던 추억들을 지금도 동창들을 만나면 들을 수가 있다. 단순히 학교수업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고 틈틈이 여행도 하고 등산도 하고 견문도 넓게 하는 실물교육이 병행이 될 때에 한 사람의 인생에 보탬과 도움을 주는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리라고 본다.
참으로 당시에는 여건이 어렵기는 했어도 선생님들은 열심히 가르쳤고 학생들은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서 배움에 임했다. 학교를 오가는 길이 아무리 멀다고 해도 학생들은 좀처럼 결석을 하지 않고서 학교에 나왔다. 한 학년 아래에 당시 동급생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서 명색이 중학생이지만 이미 어른 티가 났던 이원덕을 비롯 이성덕, 이용덕 3형제가 학교에 다녔는데 이들은 예천군 상리면에 있는 집에서 그 멀고 험한 길을 매일 걸어서 학교에 나왔다. 당시 고항치를 넘는 산길은 변변히 길도 없는 오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유상태, 남효근 등은 창락리에서 매일 걸어서 학교에 나왔고 황원상, 정승환 등은 순흥면 태장리에서 매일 걸어서 학교에 나왔다. 그 당시의 그러한 배움의 열정이 모이고 끈기와 열정이 두루 축적이 되어져서 오늘날의 우리나라도 이렇게 발전이 되었을거라고 생각을 해본다. 역시 매사에 열성적인 조영주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서 학교에서 학예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전 학년이 참여했던 행사로서 연극과 노래와 무용이 두루 합쳐진 종합예술발표 행사였다. 이 내용 가운데에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와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와 슈니츨러 원작의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을 내용으로 한 연극도 끼어 있었는데 당시 공부도 잘 했고 의젓했던 한 학년 아래의 김문수가 세 연극의 주인공을 도맡아 하면서 열연을 하였다. 또한 염라대왕과 두 서기가 자리 잡고 있는 무대에 저승으로 온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재판을 받는 연극도 있었는데 염라대왕은 당시 반의 반장이던 김현철이 맡았었고 두 명의 서기는 나와 이운영이 맡았는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곤봉을 돌려가면서 열심히 공연을 했던 여학생들의 모습은 참으로 돋보였다. 발표회가 모두 끝나고서 풍기의 이름 있는 유지들이 모두 칭찬을 해주셨는데 특히 당시 최영달 지서주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두 악수를 나누면서 성공적인 공연을 축하해 주셨다. 당시 우리가 공연했던 극장이 지금의 성동상가 근처에 있었는데 크지 않은 극장이었어도 국내의 이름 있는 배우들이 심심치 않게 와서 공연을 했었다. 희극배우 김희갑씨가 미국으로 여행을 가기에 앞서서 지방 기념공연을 가졌던 곳도 이 극장에서였다.
전통에 빛나는 금계중학교가 올 해로 개교 60주년을 맞는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송의 말을 해도 부족하리라고 본다. 우리 고향인 이 지역이 우리가 학교에 다닐 적만 하여도 한적하고 도무지 오늘과 같은 발전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고향은 예로부터 산자수명하고 유서 깊은 내력과 역사를 가진 고장이다. 명산인 소백산과 이름 높은 고찰인 희방사가 있고 인삼의 주산지이고 일찍이 주자학을 도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안향선생을 위시해서 안축, 주세붕, 이황, 황준량 등의 명현 석학들이 이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오늘의 혁혁한 발전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을 두루 살펴보면 충분히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전망도 극히 희망적으로 여겨진다. 금계중학교는 두고두고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나갈 것이다.
당시 송지향선생님은 전공이 한문이었어도 국어를 또한 가르쳤는데 문법교과서가 최현배선생이 쓰신 말본이었다. 특이한 학문체계를 바탕으로 한 말본 교과서를 바탕으로 한 국어 문법수업은 어찌 보면 낯설고도 신기하기도 했다. 송지향 선생님과 김정철 선생님은 자주 민족과 우리 민족의 자부심 같은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영어에 대해서 실제 경험도 많으시고 실력도 있으시던 최종로 선생님의 영어 수업은 매우 유창했고 또 다양했다. 원래 천부적으로 체육에 관심이 많았던 조영주 선생님의 체육시간은 유익하고 재미있기도 했고 학생들은 열성적으로 모든 운동에 열심이었다. 영어를 가르쳤던 양영식 선생님은 경복고교를 나오고 연세대 영문과 출신이었는데 내가 후에 경복고교로 진학을 하게 되어서 나의 고등학교 선배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왈흥이라는 성함을 지녔던 명지수 선생님은 수학을 참으로 열성적으로 가르쳤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강의의 모든 내용들을 이해하고자 정성을 기울였다. 모두 그 때의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모범적인 생활에 감화를 받았고 그 모든 것들은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늘 우리를 인도하고 교훈을 주기도 하였다.
우리가 금계중학교를 다닐 때를 되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즐겁기도 하지만 그것은 늘 우리를 각성시키고 있다. 그 때와 지금은 시간상으로 이미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늘 그 때를 생각하고 그 때 배움의 길에 있던 자신들을 되돌아보지만 때로는 때와 장소를 잊을 정도로 진지하게 생활해왔던 과거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각 개인의 역사가 분량을 가늠해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모두 소중한 기억과 경험들이고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모두 우리의 모교인 금계중학교와 인연이 닿을 정도로 우리의 모교는 우리에게는 결정적이고도 소중한 것이 되어졌다. 그 소중한 것들이 늘 우리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져야만 하겠다.
1961년 2학년 가을소풍(희방사)
이기섭 송재호 김정철선생님
1961년 2학년 가을소풍(희방사)
OOO 송재호 최종로선생님
1962년 4월 중순 도솔봉 정복
1962년 가을
1962년 가을
김세환 김윤촉 김현철
김병일 차동원 김진현 송재호 황병순
1962년 가을
송재호 김세환 조영주선생님 김현철
황병순 김진현 차동원 김윤촉
1962년3월17일 명왈흥 선생님 결혼식날 선물을 해드리면서...
김현철 이성덕 이원덕 차동원 전상수 김문수 김세환 송재호 명왈흥선생님
2008년 중국여행에서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네. 벌써 50년 전인데 어제 일 같이 생생하게 기억해 주셨네. 귀한 사진도 잘 보관했었고 선생님의 자상한 내면을 표현해 주셔서 고맙네. 나는 금계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있고 아는 선생님이 계셔서 공감이 가는 그 때의 아름다운 이야기 추억으로 간직해 보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