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6
경자유전
새파란 얼굴로 황 선생이 교실에 왔다
컴퓨터에서 찾아 본 경자유전의 뜻은
농부가 밭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라며
아까 아침에 내가 말한 경자유전이란 말이 틀렸다며
성난 얼굴 성난 목소리로 사과를 요구한다
봄이 되자 선생 셋 기능직 하나 작은 시골 분교
불이 나서 철거한 목조 사택 터인 실습지를 넷으로 나누었다
숙직실 옆 작은 채마밭은 공동 소유지로 하기로 했다
무엇을 심을까 어떻게 가꿀까
내 지분의 밭을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싱그럽다
두당 만원 씩 내어 사 만원으로
안동 장에 나가 채소 씨앗을 사고
로타리를 해준 영섭이 아버지에게 선 담배 한 보루 사 주었다
돈 주고 사기도 하고 학부형에게 얻기도 한 고추 모종을 심고
토요일 오후 앞 산 과수원에 가서 전지한 가지를 모아
고추 막대기를 해 세우고 원석이가 가져온 마 씨도 몇 골 넣고
옥수수 호박 양대 씨앗을 밭가를 따라 구멍 구멍 넣으니
낮에는 선생 퇴근하면 농부인 생활이 즐겁다
여름이 되자 고추 마 옥수수 호박 쑥쑥 자란다
세 사람 지분 밭에서도 고추와 고구마가 쑥쑥 자란다
기능직 권 주사는 근무 시간에 일을 한다
퇴근 후에는 아무도 일을 하지 않고 나만 일 한다
가을이 되어 고추가 붉게 익어간다
홍고추 몇 푸대를 따 영주 모친에게 날라다 주었다
이웃 밭에도 고추가 실하게 영근다
오늘 아침 권 주사가 준섭이네 벌커에서 화근해 온 고추를 나눈다
저울로 무게를 달아 똑같이 세 푸대를 만든다
어제는 고구마를 캐서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누었다
오늘 아침 교무실에서 한 마디 했다
봄부터 가을 까지 내내 땡볕 아래 권 주사만 일하던데
두 선생은 가끔 뒷짐 지고 밭가에 서 있을 뿐
경자유전이라고
땀 흘려 일한 사람이 더 많은 몫을 가지는 게 정당한 것
분배가 잘못 됐지 않느냐 한 말 했더니
권 선생과 황 선생이 먹물답게 대번에 발끈 했다
그놈의 고추 몇 근 고구마 두어 박스 때문에
우리가 도둑놈이란 말이냐 그 말 취소해라 등 등
총 맞은 멧돼지처럼 길길이 분노한다
권 주사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다
쉬는 시간에 권 주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경자유전
땅은 직접 농사짓는 사람의 것
추수는 직접 땀 흘려 일한 자의 몫
경자유전의 이치는 기능직에게도 해당되는 것
내년에는 땀 흘려 일할 자만 실습지를 가지라고
내년부터는 몫을 정당하게 주장하라고
권 주사는 쓸쓸한 표정으로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하더니
올해는 그렇게 하고 내년에는 경자유전 하지요 한다
이듬해 2004년 그 분교 실습지 가을 추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시대 오백 년 내내 양반 지주들 그러했듯
작은 양반 두 선생은 작년처럼 뒷짐 지고 밭둑에서 어슬렁대고
기능직 권 주사만 꾸벅꾸벅 땡볕 아래 땀 흘렸을까
다음날 은근히 사과한 황 선생의 마음이 자라듯
말 한 마디로 씨 뿌린 경자유전이 싹 터 자라
세 사람 함께 노동하며 땀 흘렸을까
가을 되어 추수 고추 고구마 공평하게 삼등분으로 나누어 졌을까
땀 흘린 자의 몫이 8할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