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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렌강 아리랑
글 (지승스님) 20190701
사람은 제가 태어난 풍토 따라서 말을 배우고, 행동을 배우고, 그렇게 자라면서 생각을 배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攝理;燮理)를 따르는 것이므로 ‘저절로 그렇게’-自然- 될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같은 문화권에 사는 사람이라도 지역이 다르면 당장 그들의 말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가령 전라도 사람과, 충청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한 자리에 앉는다고 할 때, 그들은 각기 자기 고향의 언어로 떠들기 마련이다. 그들을 길러낸 고향풍토의 언어가 조금씩 차이가 지는 탓으로다.
이 문제를 좀 더 사실적으로 접근해보자.
우리민족은 어디서나 아리랑을 부른다. 누구나 부르는 보편적인 아리랑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
그러나 각 지역에서 부르는 지방지방의 아리랑을 알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밀양 아리랑’을 부르고 전라도 사람은 ‘진도 아리랑’, 강원도 사람은 ‘정선 아리랑’을 부른다. 그리고 충청도 민요로 대표적인 것은 ‘천안 삼거리’를 들 수가 있고, 경기도 같으면 ‘도라지 타령’을 칠 것이다. 도라지 타령이나 천안 삼거리는 아리랑이 아니지만, 그들 지방을 대표하는 아리랑으로 친대도 손색이 없다. 그 지방의 산천특색호흡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어서다.
가령 도라지타령은 서울 한강의 물줄기에서 건진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나게 불거지는 부분도 없고 큰 특징도 없는, 그저 사븐사븐한 서울 말씨 같은 그런 리듬이, 아리랑 같은 3박의 호흡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충청도사람들은 당연히 충청도 산천으로 평가된다. 곧 청풍명월이다. 겉으로 보는 충청도 산세(山勢)는 점잖고 고결한 선비의 자태이다. 청순하고 미끈해서다. 그러나 막상 그 산을 타보면 겉보기와는 다른 지덕(地德)에 놀란다. 감추어 둔 데가 많고 까다로와서 등산하기가 생각처럼 쉽지가 않은 탓이다. 그래서 그런지 충청도 사람은 의뭉하고 속이 깊어서 좀체 속내를 까내지 않는다.
천안삼거리의 노랫가락에 ‘흥-’하고 눙치는 대목이 일단 그런 것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흥-. 축늘어졌구나 흥-.’
마디마디에 ‘흥-’ 하는 이 콧소리는, 직설적으로 바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를테면 ‘얼레꼴라리’일 수가 있다.
이 얼레꼴라리는 진도 아리랑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을 전라도 사람들 답게 ‘음음음’으로 리드미칼하게 고쳐 부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세월이 가기는 바람결 같고요, 청춘이 가는 건 물 같이 흐르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
마지막으로 정선아리랑을 보자. 흔히 암하고불(岩下古佛)로 말해지는 강원도인의 기질은 어리무던하기도 하지만, 일단 노랫가락이 유별난 것은, 강원도산천의 특질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산이 많아서 아니 골짜기가 많아서 그렇겠지만, 그들 목구성에는 언제라도 여울지는 산골짝의 물소리가 끌려나온다. 다시 말해 돌 살에 긁히는 개울 물소리를 내는 것이 저들 강원도 사람이라는 말이다. 강원도 민요는 정선아리랑이 아니어도, 모두 돌 살에 긁히는 물소리로 불러야 제 격이다. 그러니까 결국 강원도 민요는 강원도인 만의 것이라는 이야기일 수가 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지려나 만수산 먹장구름이 막 날아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그런데 이 소리 마디마디에서, 산골에서 흐르는 물소리, 곧 여울이 지는 소리를 듣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고쳐서 말하면 그들 목구성은 돌 살에 긁히는 여울 물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흥안령에서 내가 불렀던 아리랑의 감동에 대해서도 말해야겠다. 한 여름이라고는 해도 북위 53도가 넘는 그곳 초저녁의 바람은 오싹하도록 서늘하다. 주먹뎅이 같은 별발들이 팔월의 풋대추만큼이나 푸지게 널린 하늘 아래서 나의 아리랑 노래는 신들린 것처럼 튀고 있었다. 소수민족 풍속습관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곳에 뿌려진 일곱민족의 뿌리를 더듬고 다닌 속생각은 실은, 조선족 아니 배달민족의 연원을 찾는 것이었다. 태백산에 신시제단을 묻고 배달(倍達)나라를 시작하기 전에, 바이칼 동쪽에서 이미 나라(桓國)-역년이 63,182년-를 시작했던 것이 우리민족의 첫 나라살림이다. 백제가 함락하고 고구려가 망하던 날, 그 불구덩이에 역사서책을 밀어 넣은 것이 단서가 되어, 김부식의 삼국지가 나오고 이병도의 식민사학이 나오는, 그래서 우리가 뿌리 잃은 민족이 되었지만, 오늘 동서양의 문명은 바이칼시절의 환국에서부터 가지를 치고 번졌다는 것을 믿는 나로서는, 옛 고구려나 조선의 숨결이 남아있는 흥안령에서부터 민족의 뿌리를 찾는 것이 중요했었다.
그래서 흥안령골짜기에 뿌려진 소수민족들, 이를테면 만주족, 몽골족, 허절족, 시바족, 오르쫀족과, 어원커족, 그리고 다굴족들을 더듬고 다녔었다. 굳이 말한다면 고립어를 쓰는 서토의 중국민족에게 혼인법을 가르치고, 제사법을 가르치고, 주역을 가르쳐서 문명을 처음으로 가르쳤던 태호복희(太昊伏羲)는 바로 우리의 배달나라 사람이다. 복희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모두 우리조상인 것이다.
그렇게 소수민족들을 찾아다니면서 민족의 뿌리를 줍던 어느 무렵, 소흥안령 지역인 쓰빠쟌(十八坫)인가 빠인나(白銀納)에서 허절민족(赫哲民族)의 향(鄕) 장(長)인 새파란 젊은 아낙을 만나서, 술판을 벌이고 아리랑을 불렀었다. 그날의 흐드러졌던 아리랑을 잊을 수가 없다.
풋대추 같고 전구알 처럼 빛나던 머리위의 별들은 또 얼마나 설레이고 미치도록 감동적 이던가.
잊을 수가 없는 몽골초원의 여행
일찍부터 몽골은 와보고 싶은 땅이었다. 그것이 꼭 초원이라는 이유에서 만은 아니었다. 바이칼의 환국(桓國)이 동서로 2만 여리에다, 남북으로는 5만 리였다는 국토의 크기에, 여기 몽골은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으로 부르면 환국이지만, 나누어서 부르면 12연방인데, 그 연방의 하나가 슈메르였다는 것은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전하는 우리 쪽 기록이다. 그 슈메르가 그리스문명의 초석이 되었고, 그리스가 로마문명을 배태시켰다면, 오늘의 서구문명은 당연히 로마문명의 연장이다. 그들의 민족이동기에 로마의 시체를 뜯어먹은 저 구라파가, 그 시체 속에 들어있던, 게르만의 관습과 문명의 독에 함께 취했을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문명이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세계문명이 되었고, 게르만의 관습은 그들 서구나라들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보편적인 상식이다. 가령 영국에서는 불문율(不文律)이라면 미국은 성문율(成文律)인 것이다.
몽골은 그래서 환국을 생각할 적에 와보고 싶은 곳 이었다. 바이칼의 지표가 변하고, 화산운동 등으로 지구의 기상(氣象)이 변하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시절이 오자, 사람들은 앙가라강-왕으로 가는강-에 뗏목을 띄우고 바이칼을 탈출한다. 흥안령에 붙어사는 일곱 개의 소수민족은, 본시 바이칼이 근원이었다고 인류문화 학이 주장하는 것은 까닭이 그래서다. 그러나 적자(嫡子)에 해당하는 우리민족은 흥안령을 지나쳐 내륙으로 깊이파고 들어서 오늘의 섬서성(陝西省) 태백산-높이 3767m-에 신시제단(神市祭壇)을 묻고, 환국의 다른 이름인 배달(倍達)나라를 시작했던 것이다.
부도지(符都誌)가 전하는 우리의 개벽신화는 민족의 탯자리를 파미르고원으로 말한다. 거기서 흰둥이 검둥이 할 것 없이 모두 지유(地乳)를 먹으면서 함께 살았는데, 드디어 지유가 모자라게 되자 포도를 따서 먹는 사단이 생겼고, 그 실수의 죄업으로 탯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적자인 황궁씨(黃穹氏)는 포도 먹은 죄업에 책임을 느끼면서 칼바람이 모질게 닿는 천산쪽으로 길을 잡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죄업을 참회하고 본래의 선(善)에 닿기 닿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리하여 천산산맥이 다하자,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한가이산맥을 밟고 바이칼에 닿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우리민족은 순전히 산에서 산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산에서 자란 산의 민족이다.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흐르는 피는, 그렇게 여전히 산의 기운과 정기로 흐르기 때문이다. 지금 절집에 가면 대웅전 뒤에 작은 산신각이 있다. 절집에 주인은 대웅전 부처님인데 그 뒷배에 산신이 앉아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말하자면 세대주인 아버지 위에 할아버지가 있듯이, 산신은 부처님보다 더 윗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그래놓고도 아무 탈이 없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된 질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에서의 모든 수행자는 반드시 산을 찾는다. 산은 사람을 검(儉)스럽게 만드는 곳. 곧 생명의 풀무간이어서다. 석가모니도 결국 산을 찾아 도를 닦아서, 헌 쇠가 풀무간에서 거듭 나듯 부처님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 만 년을 산을 타는 동안에 민족의 창조성은 단련되면서 자랐을 것이다. 그래서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는 불사신으로 되었을 것이다. 여기 아시아의 동쪽 물가에 새우등으로 꼬부려 붙은 조선반도의 지정학적인 조건을 한 번 따져보라. 수 없는 열강의 틈새에서도 용하게 살아남는 우리의 생명력은, 산에서 길러진 불사신의 창조성이 아니고서는, 무엇으로도 설명이 안 된다. 그 창조성 안에는 아리랑이 숨을 쉬고 있다. 말하자면 수 만 년을 선을 넘는 동안, 민족의 가슴 가슴에 싹이 튼 것이 아리랑이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지 아리랑은 조선족 만의 노래가 아니다. 여기 몽골에서도 아리랑을 부르고, 부르야트민족도 아리랑은 부른다. 다만 그 적자(嫡子)민족으로서 조선족은 말 해질 뿐이다.
아! 몽골초원
애시당초 포기하려 했던 여행이었다. 갑작스럽게 외쪽 다리에 고장이 생겨서였다. 그러나 굳이 가자는 안동립회장의 권유 때문에, 옆 사람들에게 신세질 각오를 하고 따라 나섰다. 그런데 오기를 열 번 잘했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소감이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많이 남은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달려도 달려도 초원이다. 끝 간 데가 없는 것이 보이느니,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평선의 초원뿐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그림으로는 몽골도 어디서나 산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곳일 줄 만 안 것이, 지금까지 내가 아는 몽골이었다. 그 관념이 여지없이 부서진 것은 초원에 차들이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우리 열 다섯 일행은 4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이레를 꼬박 초원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아니 현지에서 함께 나선 일행도 다섯이나 있었다. 숙소가 없는 들판에서 야영을 준비해야 할 팀들이었다. 그들의 차까지 합치면 다섯 대의 차가 움직인 셈이다.
‘저리고2’라는 이름의 현지 운전수는 마흔 서넛 쯤 됐을까?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글서글하고 좋은 인상의 사내였다. 그의 운전석 옆에 내가 앉았다. 그러니까 막히는 것이 없이 초원을 통으로 볼 수 있는 휑하게 탁 트인, 더 할 수 없이 좋은 자리였다. 산이 없으니까 하늘도 통째로 보였다. 하늘이 그토록 넓다는 것도 드물게 신통한 일이었다. 하늘이 넓다는 것은 동서남북을 한눈으로 마크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 하늘 구석과 구석이, 하나로 보이는 대신 언제라도 다른 호흡으로 숨을 쉬면서, 동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과 북쪽이 다른 테마로 항시 출렁거렸다.
이를테면 남쪽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잔뜩 찌등그리는데, 서쪽하늘은 그저 덤덤해서 ‘헤헤, 아직 일 없어요’하는 식이다. 회색 구름 몇 장과 흰 구름 얼마가 그냥 한가해서다. 동쪽은 보라색 구름발 사이로 거대한 무지개가 솟아, 그 한 끝을 북서 방향으로 드리우고 있고, 북쪽에서는 ‘여기를 봐요, 지금 여기 무슨 일이 생기잖아요?’ 하고 속삭이는 표정이다. 여러 종류의 구름들이 수런수런 모여들면서 금방이라도 일을 벌일 듯이 서둘러대는 탓이다. 그런가 하면 푸르고 깨끗하던 중심부에서는 갑자기 흰 구름발이 덤성거린다. 그 구름이 남쪽의 먹구름 장을 끌어당기는가 싶더니 이내 회색에서 보라색을 만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멀쩡하게 푸른 하늘이다. 무지개가 걸려있던 동녘은 그 뿌리를 구름에 가려 잃고는 시침을 떼는 중이다. 이렇게 하늘은 잠시 잠깐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동화책이다.
아마 그런 구름을 닮은 것이 우리들 자동차일까? 초원이라고 길이 나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매번 무시를 당한다. 그저 다니는 것이 길이었다. 가다 길을 잃으면 구릉(丘陵)의 풀밭을 건너서 잃은 길을 찾으면 그만이고, 또 길을 잃으면 풀밭을 다시 건너고, 구릉을 넘어 달리면서 길을 찾는다. 그렇게 하늘에 구름이 떠다니는 것처럼 전혀 서두르지 않고, 아무 데서나 차를 세우고 쉬는 것이다. 쉴 적마다 서두를 것 없는 표정들이 한가한 줄담배를 피우면서 잡담들을 나눈다. 오늘 달려야 할 길이 몇 백 km라고 분명하게 알렸으니, 죄다 들어서 알고는 있을 텐데 전혀 개의치를 않는 것이다.
안동립회장이 팔뚝에 시계가 없길래 왜 시계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일부러 시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대답이다. 그 대답에서 대장으로서의 강한 풍모가 느껴졌다. 한 마당 행사를 두고도, 잘 치러지고 못 치러지는 것은 언제라도, 그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의 역량에 달려있는 법이다. 언제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늘 그렇다. 그런데 가장 마음을 졸여야 할 대장이, 시계를 없애고는 시간을 잊고 행동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여행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일이었다.
그러나 또 한 끗 생각하면, 바이칼의 환국에서 부터 홍익인세(弘益人世)를 주장해왔던 민족이매, 그렇게 태평스럴 수 있는 그 유래나 까닭의 동기가 있을 것 같았다. 우리들 핏줄로 내림하는 그 동기의 뿌리가 무엇일까? 아마도 천부경(天符經)일 것이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에서 천부경으로 백성들을 훈육해온 민족이라면, 그런 서두르지 않는 배짱쯤은 이미 체화(體化)가 되어서, 보편으로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겠기 때문이다.
차제에 천부경을 펼쳐보자. 겨우 81자로 된 것이 천부경이다.
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匱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 成環五七 •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昂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그러나 이 81자 글자 안에 우주와 생명을 펼치고 접는 이치가 충분하게 담긴다. 一始無始一로 시작해서 一終無終一로 끝내는 경전이다. 이 안에 하늘의 일과 땅의 일과 사람의 일이 모두 들어있다. 중간에 방점(•)이 두 개 있어서 세 등분으로 알기쉽도록 나누어 놓았다.
하나는 시작된 데가 없다. 시작됨으로 하나다. -一始無始一- 쪼개면 셋의 극으로 된다. -析三極- (그러나) 하나의 근본은 다하지 않는다.-無盡本- 하늘은 하나이면서 하나이고,-天一一- 땅은 하나이면서 둘이고,-地一二- 사람은 하나이면서 셋이다-人一三-. 하나를 쌓아 열이 된다고 해도-一積十鉅-, 핵심도 둘레도 없으므로 (다시)셋으로 된다-無匱化三-. -여기까지가 하늘의 體다-. 하늘은 둘이면서 셋이고-天二三-, 땅도 둘이면서 셋이고-地二三-, 사람도 둘이면서 셋이다-人二三-. 큰 셋이 합쳐서 여섯을 이루면 (거기서) 일곱 여덟 아홉이 나온다. -大三合六 生七八九- 운행하는 것은 3과 4요, 고리를 이루는 것은 5와 7이다. -運三四 成環五七- (이 부분은 땅의 相이다). 하나가 묘하게 번져, 만 번을 가고 만 번을 오되, 用은 변해도 근본(體)은 움직여 본 적조차 없다.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근본핵심은 근본 태양의 높고(昻)밝음(明)이니 -本心本太陽昻明-.여기 앙명은 인간의 도덕을 상징해서 말하는 중이다-.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은 다시 하나가 된다 -人中天地一-. 하나는 마치는 데가 없으나 마침으로 하나다 -一終無終一-.
마지막인 이 끝은 사람의 몫인 用을 말했다. 인간의 도덕정신을 하늘의 태양의 덕(德)과 소임(所任)에 비긴 것에 유념할 일이다. 이 부분이 천부경의 핵심이다.
천부경은 흔히 어려운 경전으로 통한다. 당연하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너 나 없이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부경은 문명이 아직 나오기 전의 원시적 감각으로 우주호흡을 펼쳐낸 것이다. 그래서 체질적으로 서로를 받아들일 수가 없고 용납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 천부경에서 인문의 진수(眞髓)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나왔고, 그 홍익인세(弘益人世)에서 정밀한 태양력과 태음력이 나왔다. 그리고 같은 방식의 책력을 주장하는 것이 주역이다. 책력의 근본원리는 천체학이다. 그러니까 주역과 천부경은 같은 내용이다. 굳이 선과 후를 따진다면 환국의 천부경이 앞서는 것이요 박달나라의 주역이 뒤가 된다.
그러나 천부경은 훨씬 열려있고 개방된 데 반해, 주역의 논리는 많이 가리어져 있다. 쉽게 비유한다면 천부경은 친절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지만, 주역은 공부 많이 한 학자들의 언행이다. 이야기의 분위기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풀어가지 않으면 끝까지 알 수 없는 게 주역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원시의 감각으로 되어있는 점에서는 같다.
동양의 천체학은 곧 과학의 바탕이다. 동시에 모든 인문학과 철학 그리고 의학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에서 말하는 과학이 서로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사람의 병을 다스리는 의학의 바탕이 다르다. 저들은 동양에서 같은 관념으로 하늘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과 의학에서 늘 발전을 말해온다. 그러나 하늘의 별자리 호흡은, 예나 이제나 항상 일여(一如)한 법이다. 천체의 숨결은 달라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책력에서는 일 년이라는 시간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라고 말한다. 이 천체호흡의 비밀을 안 것은 달나라 초기다. 환단고기에 들어있는 신시본기(神市本紀)에서 그렇게 주장하는데, 지금부터 대개 5,400년 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미 정확한 태음력과 태양력을 써 왔던 것이다.
아는 바와 같이 서양인들이 오늘의 정확한 책력을 갖게 된 것은 겨우 2백 년 남짓이다. 기독교의 성서가 주장하는 천동설에 갇혀서 숨을 못 쉬다가, 지동설을 알고 나서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의 초기부터 지동설을 말해왔고, 땅덩이가 다른 별과 함께 하늘을 떠도는 별의 하나라는 것을 믿어왔다. 이런 기록은 환단고기에도 자주보이지만, 부도지에는 한 달을 28일로 해서 일 년을 13개월로 정리한, 정확한 태양력을 만드는 법칙이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있다.
밀양아리랑과 몽골아리랑
몽골인들이 아리랑을 부른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들어온 터였다. 그리고 부르야트인들이 아리랑을 부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헤를렌강 아리랑이라며 녹음된 몽골 아리랑을 들려 준 이가 있었다. 신익재 선생이었다. 출판업을 한다던가? 현지를 미리 답사해서 우리들 이번 여행을 도모한 멤버라고 들었다. 그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냥 상고사를 찾아서 필요한 곳은 다 찾아다닌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몽골 아리랑은 나로서는 아리랑 같지가 않았다는 것이 정직한 느낌이요 소감이다. 정선 아리랑을 닮았다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만 싶었지, 여겨서 들어도 잘 모르겠는 게 몽골남자의 목인 쉰 음색만 들리는 정도였다. 그게 전부다. 똑 부러지게 우리말로 불러야만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내 노래수준이었으므로,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거기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은 정녕코 아니다. 그러나 굳이 한 마디 보탠다면 몽골의 풍토에서 올라 온 것이 자연스런 그들 아리랑일 것이다. 단 반음이 없는 3박의 노래가 본래의 ‘아리랑곡조’라면, 이들 몽골 아리랑도 그 점에서는 틀림없이, 음과 박이 우리와 같을 것이란 확신정도는 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부르는 보편적인 아리랑이 있다. 그 아리랑을 기초해서 지방마다 다른 그 지역 아리랑이 있는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의 억양이 세고 투박한 것은 그들의 높은 산악지대의 바람이 그렇게 억세게 감기고 거칠게 풀리기 때문이다. 그 바람으로 숨을 쉬는 한은, 그들의 생리는 그 바람결을 닮아갈 수밖에는 없다. 같은 논리로 진도아리랑은 한려수도의 물줄기 숨결이 잔잔하기 때문에 ‘아리아리랑 스리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하고, 잔잔하게 감겼다 잔잔하게 풀리는 것이지만, 동해안의 파도는 호흡이 크게 철썩이는 탓에 경상도 말씨가 ‘니캉 내캉 안 그렇나.....’하는 억양이 센 말씨를 뱉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밀양아리랑’을 들그서 내보자.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 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다 틀렸네 다 틀렸네 다 틀렸네, 꽃가마 타고 시집가기는 다 틀렸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혼자자다가 둘이 자니 와 이리 좋노.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이불이 들썩 이불이 들썩 이불이 들썩, 혼자 자다가 둘이 자니 와 이리 좋노.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아리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라.
끄트머리에 두어 줄은 원문에 없는 것을 넣어 보았다. 그러나 점잖은 원문에는 없는지 몰라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챙겨 넣었다. 챙길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 이렇게 아리랑은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늘리고 줄이는 편집이나 각색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아리랑은 슬퍼서만 부르는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즐거워서만 부르는 노래도 아니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우리의 아리랑이다. 민족의 애환 속에서 언제나 함께 동시적으로 숨을 쉬어온 것이, 바로 아리랑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후렴이 달라진 것에서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하마 눈치를 챘을 것이다. 우리의 아리랑은 다른 민족의 민요들이, 넘나들지 못 하는 특별한 리듬호흡이 있다. 같은 이웃이라도 일본음계는 4박이지만 중국은 2박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3박이다. 2박과 4박은 서로 넘나들 수가 있다. 그러나 3박에는 접근 자체가 어렵다. 그러나 3박으로는 2박도 4박도 얼마든지 넘나든다. 왜일까? 3이라는 숫자는 원래 하늘의 숫자요 자연의 숫자인 탓이다. 형편 따라서 인위로 만들어낸 그런 개념의 숫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연의 숨결이므로 들어가지 못 할 곳이 없음이다.
가령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얼음 밑에 잠을 자던 풀 씨앗이 아구를 틀 때, 제 몸에서 열을 내면서 힘들게 싹을 틔울 때, 그때의 미세하게 흔들리는 생명의 리듬, 곧 기본 숨결의 가락이 세마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마치는 박(拍)으로 치지를 않는 박이지만, 생명의 기본가락인 우주의 리듬은 늘 셋에서 머문다. 그럴 수밖에는 없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주역의 괘가 3획으로 나타남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이 3을 근간으로 삼을 수밖에는 없다. 유교에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삼재(三才)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라고 해온다. 모두가 3에서 머물고 있다. 자연의 수를 기본으로 하는 아리랑은 형편 따라서 얼마든지 경계를 넘나들 수가 있다. 그래서 후렴을 임의로 하는 것이지만, 가사 자체도 자유롭게 형태를 바꾸면서 얼마든지 넘나들거나, 달라질 수가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우리는 불사신의 민족이다. 동시에 자유와 평화를 생래적으로 머금은 창조적 민족이다. 과거의 이조정치는, 애초부터 정치 밖에 서있는, 성리학이었다. 그것으로 양반상놈을 구분 짓고 엉터리정치를 했던 것이다. 국민으로 하여금 밥을 먹고 돈을 벌고 힘을 쓰게 하는 것이 정치의 본분이라면, 철학이나 문학은 그런 정치의 본질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정치판을 짜서 국민을 옥죄고 수탈했으니,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였을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런 엉터리 국가를 만들어서 명분 없는 호령으로 허세를 부리다가, 결국은 속이 곯아서 왜놈에게 나라를 뺏긴 것이다. 거기서 친일파가 생겼고, 미군정을 지나면서 또 친미파가 생겼다. 그야말로 거덜이 난 폐허였므로, 국민의 정신도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서,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을 만 큼 되었다.
그런데도 피 속에 흐르는 홍익정신(弘益精神)만은 용하게도 말짱했다. 그것의 증거가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 것이요, 거국적인 시위 속에서도 약탈이 없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광주민주화혁명에서, 약탈이 없는 것을 보고 세계가 놀랐던 적이 있지만, 지난 번의 국정농단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의 혁명도 시종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것도 종교전쟁으로 날을 새는 중동에서 본다면, 종교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조그만 한국은, 비좁아터진 복잡거림 속에서도 종교끼리 다툼질이 없는 것을 보면, 글쎄 확실히 이해 안 되는 나라가 맞을 것이다.
보수(保守)와 진보(進步)
어느 사회에나 보수 진보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진보나 보수 사이의 우애는 피차가, 살벌하기까지 하다. 성리학 시절에 파당싸움을 했던 버릇이 그냥 있는 탓이다. 민생문제는 늘 뒷전인 국회가, 국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대가리가 터지는 개떼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지난시절 붕당싸움의 연장이다. 어디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시절 성리학자들도 자기들의 당파싸움은 늘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라고 명분이나 핑계를 댔었다. 그러니까 핑계나 명분은 늘 만들 탓이다.
옳은 보수정신은 사회적 전통을 중시하면서 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민중들의 사회는 언제고 변하기 마련이라, 자칫 작은 실수라도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늘 전통을 돌아보고 위험한 실수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보수는 과거에 친일을 했던 친일정신을 보수라고 착각한다. 성리학정치가 망하면서, 왜놈들이 들어오고, 거기서 친일파가 생기고, 또 육이오가 터지고, 미군정이 들어서고, 국토가 남북으로 쪼개지는 역사의 혼란기에서, 친일세력을 기용했던 이승만이, 공공연하게 그들 편을 들어준 것이, 오늘의 보수 친일파들을 만든 것이다. 그들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를 지나면서, 반공과 빨갱이를 무조건 배척했고, 그것으로 보수를 자처했고, 그 버릇이 고칠 수 없는 고질병통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나라의 그런 보수를 키워낸 것은 애초에 이승만이다. 차제에 이승만에 대해서 짚어보자. 그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문학을 가르치는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지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는, 이어서 하버드대학과 프리스턴대학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과정을 단 5년 동안에 마친다. 그러니까 머리는 좋은 사람이다. 거기에 외교능력과 사교성까지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 시절의 못된 폐습을 버리기보다, 그냥 고스란히 지킨 것이 탈이었다. 그래서 성리학 버릇대로 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생을 소모하고 허비 했던 것이다. 그가 당시 하와이에 정착한 교포들 사회에서 한창 힘을 뻗어가던 국민회(國民會)에다가, 분열과 대립을 조성했던 것부터가 그렇다. 하와이의 이민역사는 서기 1902년부터 시작된다. 처음에 102명이 정착했던 것을 시작으로 3년 사이에 7200명으로 그 숫자가 불어난다. 거의가 사탕수수밭에서 품을 파는 처지였음에도, 10달라 씩을 갹출하여 ‘국민회’를 결성한다. 왜놈치하에 있는 조국을 생각하면서 자발적으로 애국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당시 그들 월급이 35달라였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던 1913년에 이승만과 박용만(朴容萬)이 나란히 하와이에 상륙한다. 이들은 일찍이 대한제국의 고조황제 무능력을 비판하다가 함께 옥살이를 했던 감옥의 동기생이기도 했다. 박용만은 헤이스팅스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곧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결심하여 ‘대한조선국민군단(大韓朝鮮國民軍團)’을 만들고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던 사람이다. 그러던 박용만이 갑자기 국민군단을 해체하고는 미국을 떠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이승만이 당시 하와이에 정박 중이던 일본군함 출운호(出雲號)를 박용만이 폭파하려 한다고 법원에다 밀고했기 때문이다. 왜 이승만은 이렇듯 동지를 파는 비열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을까?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서였다. 그 무렵 그가 유력한 일간지에 낸 기사를 보면, 이승만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야심이 얼비친다. ‘나는 어떤 반일적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할 뿐이다. 그러니 이 지역 일본신문들은 내가 반일감정을 일으킨다는 오해를 하지 말기 바란다.’ 고 되어있다. 그 무렵의 이승만은 교포사회에서 나름으로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용만이 없어지자 그는 노골적으로 제 야욕을 드러낸다. 그는 앞서 이야기한 국민회에 곧 검은 손을 뻗쳤다. 국민회의 기금과 통제권을 노린 것이다. 가량하다 싶이 당시 하와이 이주민들은 대부분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감리교회였는데 그들 사이에 해괴한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감리교를 선택하던 이승만을 선택하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제 추종자들에게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자기를 따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의 높은 학벌과 우수한 영어실력은 가뜩이나 학벌에 주눅이 들어 있는 교포들에게 먹혀들고 있었으므로 이승만은 쉽게 그들의 우상이 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교육자답지 않은 언행 역시, 성리학시절의 썩은 선비들 짓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일이다.
그리하여 이민사회가 분열과 대립의 혼잡한 양상으로 치닫는 형편이었다. 벌건 대낮에 총성이 울리는 테러가 끝도 없이 자행되었지만, 그것을 그칠 방법은 없었다. 모두가 이승만이 일으킨 분쟁이었다. 그 이승만이 야욕을 채우던 날 총성도 멎었다. 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해방의 혼란 틈새에서 시국(時局)을 읽을 줄 아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잽싸게 맥아더에게 붙었다. 그 맥아더의 속 생각을 읽어내고 곧 반소(反蘇)와 반공(反共)을 부르짖었다. 모든 면에서 맥아더의 혀처럼 논 것이다. 거기에 사설정보기관까지 가동 시켰다. 미군정을 찬양했음은 물론이고, 더욱 친일파들의 편까지 들면서 그들을 끌어들였다.
해방의 광복이 오고 비록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었다고는 하나, 친일파들을 미워하는 국민의 정서는 모두 하나 같았으므로, 당시의 제헌국회가 ‘친일청산’을 법조문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들을 여전히 중책에 기용하고 있는 이승만의 정권은 끊임없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 당시 국회의원의 2/3가 친일파였다면 다 한 말이다. 거기에 고등계 형사나 경찰들도 대부분 왜정 때에, 밀정이나 친일을 했던 인사였다. 그들은 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나 반대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댔다. 북쪽에 김일성이 편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이 국토를 식민지(植民地)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식민지가 되면 국토가 나뉘지 않아도 되는 찬탁(贊託)이었지만, 독립정부를 원하면 반탁(反託)이었다. 그런데 일찍이 임시정부 시절에 이승만이 식민지를 만드는 게 좋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단재(丹齋)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파는 매국노’라고 일갈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승만은 제 이익 따라서 움직이는, 갈 데 없는 기회주의자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열렬한 반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일성이도 반탁을 찬성했기 때문에, 북쪽의 수령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으로서는 북쪽에 김일성을 미워하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할 수가 있었다. 김일성과 이승만이 국토를 나눈 것도, 갈데없는 이조의 파당싸움 연장이다. 이승만이 키운 친일파도 문제이지만, 학계에서 이병도(李丙燾)가 키워낸 식민사학(植民史學)도 그렇다. 우리의 기록들이 전쟁의 불더미에서 없어지고 나자, 사대모화주의자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나와서 가뜩이나 민족의 사기를 죽이는 판에, 왜놈시절이 오자 친일파들이 만든 식민사학까지 가세하게 된다. 그 식민사학자의 90% 이상이 현재의 대학교단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 실정이다. 그야말로 앞이 안 보인다. 왜놈은 물러갔지만 이렇게 식민사학이 득세를 하는 한 민족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국토광복은 어떻게 이룩했으나 역사광복은 여전히 요원한 지금, 역사광복은 시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아베 노부유끼’라는 일본의 마지막 총독이 남긴 다음 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백 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들도 조선의 역사가 찬란하고 위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기 때문에 식민지교육을 심어서, 서로가 서로를 이간질 하는 노예적 삶을 살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런 노부유끼의 예언은 실수 없이 맞아서, 우리는 지금 식민사학의 늪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식민교육 때문에 동서남북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 학계의 현실도 분명 큰 일이다. 거기에 다수의 민중은 민중대로 이승만의 친일함정에 빠져서 동포를 적으로 간주하는 현실은 더 큰 사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한다. 이제 반공을 외치고 김일성을 욕하는 것은,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지나치지가 않는, 천하의 명분이 된 것이다. 오늘의 한국보수는 그렇게 해서 골격이 만들어졌지만, 애초부터 친일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사람까지 꼴통보수가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결국 친일의 우산 밑에서 기생한 사람들인 탓이다. 반공을 외치면서 빨갱이를 때려잡자는 것만이, 그들 친일파들이 요구하고 주장하는 최고의 충성이며, 그렇게 목청을 높이는 것이 그들로서의 당위이자 애국이라고 믿은 사람들인 것이다.
민족의 혼 아리랑
이제 이야기를 근본으로 가져가 보자. 이렇게 진보와 보수는 피차가 우애에서 멀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서로를 원수 보듯 한다. 그렇게 된 것이 다 갈 데 없는 성리학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다. 다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골라 들으면서, 자기와 다른 쪽의 이야기라면 무조건 무시하고 까뭉개는 것을 원칙으로 생각한다. 너그러운 얼굴을 하는 겉 표정은 웃음이지만, 속 마음에는 용납할 수 없는 시퍼런 칼이 들어있다. 지금 텔레비전의 뉴스를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들의 사회분위기가 어제 오늘에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나쁜 시절 만나 양반 상놈으로 나뉘면서 시작된 짓이므로, 그 뿌리는 삼국사기가 나오면서부터요, 사대모화의 유교가 시작되면서 부터였으니, 고려초기 유교를 받아들이고 과거제도를 채택했던 광종임금까지는 거론되어야 할 듯 싶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날을 세우고 으르렁거리기는 해도, 가슴 속 심장에서 뛰는 피는 원래의 착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질게 흘겨보다가도 자기가 하는 짓을, 어느 순간 무심하게 돌아다 보는 수가 있다. 그 찰라에 어떤 부끄럼을 느낄 수가 있다. 우리는 그런 품성을 가진 민족이다. 이번 몽골여행에서 나는 그렇게 내 속에 있는, 어리석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이런 고백은 조금 망설여진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내 태도가 그리 부끄러울 것도, 또 창피할 것도 없다 싶다. 우리 모두가 자기선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런 나쁜 불통시대에서는 너 나가 따로 없이, 모두가 그 통 안에 갇힌 한 무더기의 같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렇게 내리 구르는 통 모양으로 멈출 줄 모르는, 그런 일탈 된 우리들의 모습을, 우선 나를 통해서 나부터 고발하고, 아울러 조그만 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은 어떨까?
이번에 모인 팀 중에 좌장(座長)은 80세의 이선영 총재였다. 열 여섯에 서울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고, 열 일곱에 행정고시를 뚫었다는 이다. 미국에서 석사를 마쳤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20여 년을 공직생활을 했고, 그리고 개인 사업에 뛰어들어 총재직을 10여 군데 거쳤다는 것이다. 처음 ‘마마밥솥’으로 가보니, 생산직 위로 놀고먹는 간부들이 13층이 있더라고 했다. 그 간부를 4층으로 줄이는데 꼬박 1년이 들었다. 일 년 월급은 그대로 주면서 각자 다른 길을 찾으라고 했다. 놀고먹는 간부를 정리하고 나니 생산직 월급이 그 해로 당장 30%가 오르더란다. 이렇게 모든 회사를 하나씩 하나씩 살렸다는 것이다. 놀고먹는 양반이 상전일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사회가 만든 고질적인 폐습이다. 그 유풍이 남아서 여전히 생산직을 상놈취급을 했던 것인데, 그 버르장머리를 고쳤다는 것은 열 번 잘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박정희를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유신정권을 만들어서 3선 개헌 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구국의 영웅일 것이라고 말해온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공(功)과 과(過)를 비교적 공정하게 보았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듣는 박정희의 부정적인 면모가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속에서 두드러졌던 모양이다. 특히 제 정권야욕을 위해 숱한 애국지사를 빨갱이 사냥으로 처단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그러나 이선영총재가 박정권 아래서 그렇게 민간기업을 도왔다면, 그런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겠느냐는 데 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중화학공업을 일으켜서, 오늘의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린 박정희를 꼭 독재자로만 볼 것이냐는, 마음 속의 다른 돌아봄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 이선영총재란 분의 사람됨이 그랬다. 누구하고나 아무 때든지 무슨 말이든 가리지 않고 해대기 때문에, 언제라도 상대하기가 편한 사람이었지, 무슨 권위라거나 체통 따위와는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소탈하고 솔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과장 없이 해대는 그의 말이 주는 울림은 저절로 컸을 밖에 없다.
이렇게 나를 우선 정리하면서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지금까지의 세상이 조금씩 달라보였다. 같은 차에 타고 있는 일행 중에서도, 내가 앉은 자리가 너무 좋다고 여겨져서, 뒤에서 쭈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미안했고, 다리가 불편한 나를 차문이 열릴 적마다 부축해주는 황현규(黃鉉奎)선생도 고마웠으며, 식사 때면 풀밭에서 끼니준비를 하는 조홍기(趙洪基) 선생도 다시금 보였다. 서울 시청에서 국장으로 퇴직을 했다면 저런 일은 안 할 사람인데, 끼니마다 스스럼 없이 나서는 것이 대견했다. 또 조국장과 같은 고등학교 동기라는 측량업 대표인 박인석(朴仁錫)선생도 그랬다. 끼니를 챙기는 일이 남자들 일이 아니어서 귀찮기도 하련만, 시종 웃고 떠들면서 즐거워 하니, 옆에 사람들까지 매번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차가 진흙창 개펄에 빠져서 애를 먹을 때도, 누구 한 사람 특별히 서둘지를 않으니, 그 넉넉한 여유로움이 또한 좋았다. 세상이 억울하면 억울한 세상을 고치기보다, 나를 고쳐서 세상을 보라는 이야기는 이래서 좋은 것인가?
‘천상의 화원’이라 부르는 초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 거기를 가지 못했다. 흐르는 구름 뽄으로 다니다 보니 아마 거기까지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누구 아쉬워하거나 불평하는 이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흘러 다니다가 붉은 꽃들이 홋 이불 자락들을 펼쳐놓은 것처럼 드넓게 펼쳐진 어딘가에서 우리 일행은, 다섯 대의 차를 초원에 모두 세우고 제각기 카메라를 꺼내고 휴대전화기를 챙겨서, 마음에 드는 풍경들을 담기에 바쁘다. 휴대전화기로 사진을 찍는 것이 늘 신통한 나는, 아픈 다리 때문에 그냥 차에 남아서 그들을 멀뚱하게 보고 있었다. 같은 차의 운전수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속초 전문화원장 박무웅(朴武雄) 선생도 끄덕 끄덕 존다. 그때 휴대전화기를 든 상기된 얼굴 하나가 무턱대고 차에 올라와서 전화기를 내민다. 박원장에게 전화기에 담아온 사진을 좀 보라는 것이다.
왼 쪽 귀 옆머리에 화사한 붉은 꽃 한 송이가 꽂혀있는 사진이었다. 누가 봐도 잘 찍은 걸작이다. 앙증스럽기까지 한 이 사진은 가히 작품사진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보였다. 박무웅원장은 껄껄거리면서 박수를 쳤고, 나도 얼결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서 속으로 가만히 사진에 제목을 붙여보았다. ‘영원한 소녀!’ 여자는 할머니가 되어도 나이 먹은 소녀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아리랑이다. 몽골서 부르는 헤를렌강 아리랑이다.
몽골초원 아리랑은 우리 모두 아리랑, 부르야트 몽골족 모두모두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아리고개로 날넘겨주게./ 파밀고원 천산산맥 차례로 넘어서, 알타이 한가이 바이칼에 닿아서./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거기세운 나라 6만 3천년, 그것이 우리들의 원시국갈세./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이내청춘이 다 늙어 가누나./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 주시게./ 그 후에 오는 세상은 천재지변 덮쳐서, 앙가라강 강물에 뗏목을 띄웠지./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고개로 내가 넘어간다./ 앙가라 강 원(原)이름은 왕으로 가는 강, 바이칼 사람들이 왕이 됐단 얘기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네./ 흥안령 골짜기에 흩어진 민족, 그 일곱 소수민족도 결국우리 붙일쎄./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그러나 보아라 달민족은, 흥안령을 지나서 내륙 깊이 들었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어./ 그곳 태백산에 신시제단을 묻고서, 바이칼 달나라 기상 다시 세웠지./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고개를 넘어간다./ 그 후에 조선나라도 달나라 연장, 십구세 웅천왕(桓雄天王)이 첫 왕검(檀君王儉)일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맨드라미 줄 복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은데, 열에 칠팔세 한숨소리는 내는 듣기 싫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고개로 내가 넘어간다./ 백제 고구려 함락시킨 당나라 설인귀(薛仁貴), 역사창고에 불을 지른 웬수놈의 종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넘어가고 있네./ 걸걸했던 삼신역사가 그로부터 꼬였지, 사대모화 삼국사기에 친일파들 역사./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다네./ 문경세재는 웬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한숨이로구나,/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어./ 그러나 그것이 달민족 역사다, 정말로 지워야할 엉터리 역사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를 넘어간다./ 헤를렌강 아리랑은 척사현정(斥邪顯正) 아리랑, 반드시 이룩해야 할 사필귀정(事必歸正) 아리랑./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어./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