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접하는 소설 삼국지는 유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유비라는 인물에 대해 영웅이라 칭하는가 하면, 기회주의자라는 혹평을 내리기도 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극명한 평가는 유비의 어떤 면을 중요시하여 보았는가와 관련되는 문제다.
정사 ‘삼국지’를 쓴 사람은 촉한 출신의 진수이다. 그는 위·촉·오의 3국이 정립한 시기부터 진(220~289)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다. 그는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약 10년간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간결한 문체로 『삼국지』 65권에 담아놓았다.
그런 점에서 ‘삼국지’는 소설이 아니라 정사이다. 진수는 비록 유비의 촉한 출신이지만 바로 그 ‘삼국지’에서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꼽았다. 진수의 생몰연대는 233~297년이므로 동시대의 눈으로 세 나라를 겪으면서 쓴 것이므로 이를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에 남조 송나라 때 배송지가 ‘삼국지’의 간략함을 보충하기 위해 상세한 주를 달았다. 그 후 명나라 때 나관중은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삼국지통속연의’라는 모두 24권 240칙을 썼다. 이를 중화권에서는 ‘삼국연의’라고 한다.
‘삼국지연의’는 184년부터 280년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연의’라는 말은 ‘고전역사소설’이라는 의미다. 주인공을 누구로 하는가는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삼국지연의’는 유비가 주인공이며, 모든 에피소드는 유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는 ‘삼국지’를 처음 정사로 저술한 진수의 뜻과는 배치된다. 그러나 독자들은 대부분 진수의 ‘삼국지’가 아니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는다. 따라서 삼국지의 영웅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진수의 조조가 아니라 나관중의 유비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나관중은 왜 조조를 버리고 유비를 주인공으로 택했을까?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을 경우 이야깃거리가 심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대체로 완벽했고 상황판단이 정확해 빈틈이 없었다. 따라서 정사에서는 특별한 존재일 수 있으나 소설의 주인공으로서는 심심할 수 있다.
반면 유비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그 험난한 과정을 모두 극복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 과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인재는 어떻게 발굴했는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등등은 독자들의 솔깃하게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크고 작은 전쟁 과정에서 그가 겪었던 고초나 위기의 극복 그리고 성공은 흥미진진한 전쟁 이야기를 넘어 삶의 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행간에서 우리는 그의 인물 됨됨이와 함께 널리 인재를 구하는 비범한 능력은 소설적 요소가 충분하다.
‘삼국지연의’는 정사와 구별되는 소설이다 보니 읽는 재미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더러 역사에는 없는 가공의 인물이나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도원결의가 대표적이다. 이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매우 가까운 관계였음을 극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독자는 유비의 인물됨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도원결의는 결국 관우와 장비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유비의 광기로 막을 내리게 됨으로써 유비의 의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삼국지연의’에는 ‘삼국지’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들은 영웅들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 장치 역할을 한다. 절세미인 초선은 대표적인 가공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신의라는 별명을 얻은 화타의 이야기도 가공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어떻든 소설은 성공적이어서 거의 1800여년을 면면히 이어내려 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그 과정 속에 유비라는 인물의 긍정적인 면이나 영웅적인 풍모가 자연스레 고착되었을 것이다.
소설 삼국지는 유비를 우유부단함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에 자신을 의탁하지만 이러한 점조차 오히려 인간적으로 그려진다. 여포 같은 인물도 이리저리 살길을 도모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종오는 ‘후흑학‘에서 유비의 이런 점을 꼬집어 “의리와 지조가 없는 기회주의자”라고 혹평했다. 또한 그는 “진퇴양난의 순간에 이르면 통곡으로 위기를 모면”함으로써 ’유비의 영토는 모두 이 눈물 때문에 얻은 것‘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분명히 유비는 분명 훌륭한 장수도, 대단한 지략가의 면모도 보여주지 못했다. 조조처럼 대세를 장악하지도 못했다.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가진 재산이라는 것은 숱한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관된 바로 이런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한번 사람을 얻으면 버리는 법이 없었고, 그를 적재적소에서 활용할 줄 알았고 한번 믿고 맡길 일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사람을 볼 줄 알았던 것이다. 사실 난세를 헤쳐 나가는 데는 그만한 재산도 없을 것이다. 진수의 평이 이를 뒷받침한다.
“도량이 넓고 의지가 강하며, 마음이 너그러워 인물을 알아보아 선비를 예우했다. 그는 한 고조의 풍모를 갖춘 영웅의 그릇이었다. 나라 일을 제갈량에게 부탁하고 조금도 의심이 없는 것은 분명 군신의 지극한 마음으로, 고금을 통해 가장 훌륭한 모범이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훌륭한 인재를 모을 수 있는 근본이다. 그의 주변에는 제갈량을 비롯해서 늘 출중한 인재들이 있었다. 난세에 이보다 더 큰 힘은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를 일개 돗자리 장수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유비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엇갈린다. 따지고 보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나관중의 요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릇 세상이 이와 같다. 진실은 가려지고 외면되기 일쑤이며, 그 자리를 왜곡과 허위가 대신한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