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진정 살이 돋는 사랑을 배우는 바람직한 삶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와 헤어진 후로 언제나 가슴 속에 낙엽이 지는 쓸쓸함만 있을 줄 알았던 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더 큰 조직과 악의 세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느낀 뒤 그때부터 세상을 보는 그 시야란 참으로 지구가 뒤집어지는 큰 착란이었다.
아버지의 농장으로 들어가며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나는 자꾸만 흙을 밟았다.
아, 흙들이 여기에 있었구나!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만을 걸어다녔던 내 모습들이 갑자기 불쌍해지는 이유는 뭘까?
고단한 사람들은 흙을 만지면 태초의 평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만든 단조로운 시야로 바라보던 세상은 전부가 다 다르게 와 닿았던 것이다.
원래 말수가 적었던 나는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뵈면서 무슨 말로 아양을 떨어야 할지 그것은 막연 이상의 괴로움이었다.
가슴앞 명치 끝이 이렇게 아픈 것은 왜일까?
아버지를 최초로 속이는 작업에 들어가면서 그 가슴 떨리는 아픔들을 어떻게 감추고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할까?
'첫째, 아버지를 배신하라.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어라!'
안인숙은 그것부터 먼저 내게 요구했다.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픔을 줄 것!'
'사랑이 깊은 만큼 멀리서 그리워 할 것!'
그런 가혹한 명제들을 내게 안겨주었다.
뒤뜰에서 장작들을 챙기는 고적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니 너무나 가슴이 아파 자꾸만 눈물이 고여 오는 것을 참느라 무진장 고생을 해야했다.
한숨을 여러번 쉬고나서야 나는 인기척을 내었다.
"아버지!"
뒤돌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나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눈빛은 말 보다 더 큰 말들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왔느냐? 좀 전에도 넘어토에 나가보고 왔더만 안 보이더니..."
아버지의 굵은 손이 내 어깨를 안고 툭툭 칠 때 나는 그만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왈칵 쏟구쳐 오르는 것을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었다.
"홍시하고 네가 잘 먹는 수정과 방에 가져다 놓았다. 박서방이 시내 나갔다가 오는 길에 널 태워 오겠다더니 못 만났구나."
"네에. 좀 걷고 싶어서 저 먼저 들어간다고 했어요. 아저씨는 덕분에 다른 볼 일을 보고 오신대요."
눈물을 추스리며 겨우 말하는 나를 아버지가 돌아다 보셨다.
"왜 그러냐...? 이 녀석, 아버지 많이 보고 싶었구나. 그러게 진즉에 좀 오지."
내 어깨를 감싸안아 당신의 허리춤에 꼭 끼워 연인처럼 안아주셨다.
"곧 가야 하니까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 가슴에 기대여 가슴에 박동을 듣고 있었다.
이 소릴 잊어 버리지 말아야지. 혹시 다시는 못 만나더라도 절대 이 소릴 잊지 말아야지...
눈물을 머금고 나는 아버지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다.
내 처절히 아픈 마음 처럼 정초의 겨울바람이 드세기만 했다.
"여름 방학 때만 병원실습을 한다더니 요번에는 웬일로 겨울방학 때 실습을 한다고 그러냐 아가? 그것도 왜 그렇게 멀리 있는 병원으로 가야하니?"
나는 아버지를 안심 시킬려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뜻있는 방학을 보낼 욕심에 이번 기회에 나병 환자들 있는 곳에 가 볼려구요. 거긴 전화도 편지도 안 될거에요. 영주를 통해서 아버지께 소식을 드릴께요. 제 걱정은 조금도 하시지 마세요."
아버지가 다시 꼭 한쪽 팔로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꼬옥 안아주셨다.
"허허... 이 녀석 참으로 대견하구나. 그래... 세상을 많이 보거라. 사람들도 많이 보고 깊어지거라. 아가..."
내 이마에 살짝 입술을 올려 놓으며 미소 지으셨다.
아가... 아가! 사랑에도 도가 있고 법칙이 있는 것일까.
아가, 나는 '아가'라고 부르는 그 한 단어 속에 압축되고 여과된 사랑을 알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있는 순수 그대로 영원히 쓰다듬어 주고 싶고 말없이 바라보면서 절제하고 아끼는 큰 사랑 말이다.
'아가...' 최근 들어 이 말이 다르게 와 닿는 것은 사랑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뒷 등에 시커먼 돌덩이가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벗어나 실컷 울고 나면 나아지리라.
먼 훗날 내가 저지른 배신에 가슴 아파도 단 한 분, 내 아버지는 나를 믿으시리라.
비눗 방울처럼 사라지는 게 생명이며 사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
이미 삶의 질곡을 몇 번이나 겪은 당신이 아니시던가.
당신과 헤어지고 더 많은 눈물을 뿌리게 되더라도 그의 심장소리를 기억하려고 나는 그 가슴에 깊이 얼굴을 기댔다.
사람의 심장은 무엇인가.
'가을의 전설'이란 책에서 주인공 남자가 전선에서 죽은 동생의 심장을 칼로 도려내 병에 담아 오던 것이 생각난다.
그 심장을 고향의 부친에게 가져다가 아들의 죽음을 알리고 그 심장이 든 병을 벽장에 올려놓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도 죽으면 누군가 그렇게 우리 아버지께 가져다 주려나.
끔찍한 딸의 심장을 본 우리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나는 그토록 아프게 아버지와 헤어졌다.
헤어진다는 것.
어쩌면 다시 만날지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헤어짐은 가슴에 황량한 바람을 몰아쳤고 그 가슴의 협곡마다 우수수 진저리치는 아픔을 남기고 있었다.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은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이지만 그 아픔 만큼이나 깨끗한 체념이 자리하는 이유는 또 뭘까?
그것은 인내일 것이다.
더 이상 아프면 견딜 수가 없기에 몸과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장치를 만드는 것일 게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열이 오를 때 몸은 뜨거워도 손은 싸늘하듯이 스스로의 아픔은 스스로 적응해 나가면서 사는 게 아니던가.
신은 인간을 참으로 특별하게 만드셨다.
영주가 문제였다.
알고 보면 지독한 겁쟁이인데다가 나와 떨어져서 지내는 걸 어떻게 받아 들이려나.
"영주야..."
눈을 감고 나는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으응?"
눈 감은 내가 이상한지 영주가 곱게 대답을 했다.
"후 내년이지만 금방이야. 2월에 국가고시인데... 너, 미리 조금씩 준비 해라. 알지?"
"그래 맞아. 떨어지면 도로아미 타불이닷! 으아... 끔찍하다. 그 성인학, 나는 너무 어려워. 요즘은 공부를 통 안 했더니 뭐가 뭔지도 모르겠구.."
"나도 성인학이 어렵더라.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해."
영주가 느닷없는 내 질문에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넌 꼭 시험을 보지 않을 것처럼 말하네?"
"나는 미리미리 공부 다 하잖아."
내 말에 영주가 비시시 웃었다.
"진희야 너 요즘 보기 다르게 왔다갔다하고 좀 산만하다는 거 아니? 꼭 무슨 일이 일어난 사람 모양 불안해 보인다구. 마치 어디론가 사라질 사람처럼..."
나는 순간 몹시 당황했다.
사람의 직감은 다 같은가 보다.
그렇게 조심을 하고 끝없이 자기 성찰을 해도 그 어딘가에 보이는 영혼의 실체가 있으니.
혼은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았다.
혼은 밖으로도 보인다.
얼마나 아픈지, 혹은 얼마나 아플 것인지, 아픈 뒤에 어떻게 성숙하는지도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특별한 존재다.
안인숙의 말이 생각났다.
"백사람에게 존경 받을 생각을 하려거든 이 일을 하지 못해. 단지 진정으로 너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부터 진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거야. 역사를 들먹이는 자들은 진정한 역사의 의미를 모른다. 그들은 언젠가는 회의감에 빠져 괴로워 하게 될 것이다. 5월 항쟁에 뒷발치에서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문인들은 글들을 썼지. 검정과 회색, 그리고 핏빛 붉은 색깔로 화가들은 분노와 고통을 나타냈고 지금도 끝없이 나타내고 있지만 그들 역시 뒷자리에서 팔짱 낀 방관자 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공황 상태가 오면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될 거야. 그게 인간이니까... 살아있음의 확인이 필요할 시점이 되면 모두가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 하게 될 거다. 그 때는 네가 더욱 필요하겠지. 너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으니..."
남들이 못 가진 것을 가졌다는 말의 뜻과 의미를 나는 살아가면서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전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적인 성격이나 그 밖의 사소한 버릇까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을 바보처럼 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아닌가.
나 아니고서는 아무도 못 해 낼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꼭 필요한 간단한 짐만 챙기라는 인숙의 말을 떠올리며 과연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무엇을 챙겨 가져 갈까. 생각해보면 책과 옷 밖에 없었다.
나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요즘 들어서 아무리 껴 입어도 추웠다.
태어나서 이렇게 추운 겨울은 없으리라.
처음으로 털코트를 꺼내 입고 그 옷에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 써야했다.
그래도 뼈속까지 한기가 파고 들며 나는 춥고 또 추웠다.
먹고 싶은 것은 왜 또 그리 많은지 아무곳에나 서서 떡볶이를 먹고 오뎅 국물을 마시는 이상하게 변해가는 내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돼.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절대 누구도 믿어서는 안돼!"
안인숙은 힘주어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래, 누구에게도 말을 못해서 그런 거 였구나.
이 엄청난 일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춥고 배가 고팠던 거구나.
인숙이 말한 그 약속 장소로 가기로 한 날짜가 임박했을 때 나는 영주와 준호를 밖으로 불러냈다.
이미 아버지로 부터 타낸 돈은 쓰고남을 만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풍요로운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을대로 받고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연줄로 영주는 이미 모 단체로 부터 절반의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공부를 하고 생활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리라.
나는 그들을 만나 술마시고 떠들고 양껏 놀아야 했다.
그들이 언젠가 지금의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놀라 경악하고 배신감을 느끼더라도 돌이켜 생각하노라면 위로가 될 뭔가를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양심의 가진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만 뭐라고 위로를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캄캄할 뿐이었다.
나이트 클럽에서 내가 영주의 귀에다 큰소리로 말했었지.
"영주야 너어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래?"
우리는 왜 그렇게 철없이 죽는다는 소릴 자주 했었는지. 영주가 웃더니 내 귀를 잡아 당겼다.
"생각할 것도 없다. 그런 몰상식한 인종은 바로 화장을 시켜 싹 갈아서 그냥 변기통에 넣고 얼른 물을 내려버리지!"
영주가 손바닥을 치며 깔깔 웃었다.
그녀의 말에 내가 그다지 웃지도 않고 그냥 씰씰거리자 영주가 당황해서 다시 내 귀를 잡아 당겼다.
"내 농담이 심했니?"
영주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 말이 그 헤어지는 마지막 말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마 안인숙이가 영주를 만나서 작전을 펼 것이고 영주는 분명히 농담으로 일관했던 이 말들을 기억하리라.
이런 말들이 서로 기약없이 헤어지는 날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는 것을 그 나중에 알았을 때 누군들 가슴이 아프지 않을까?
사람은 상처를 준 만큼 상처를 더 많이 받는 것이다.
양심의 기준은 다 다르지만 그 기준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그 영혼에 내가 가진 더 특별한 양심으로 그 슬픈 이마에 키스를 보낸다.
몸에 마비가 오기 시작한다.
발가락 부터 뒤틀려 올라오는데 그 경련감은 비명을 지를 정도다.
참으면서 나는 두 손으로 발가락들을 움켜 쥐었다.
그래도 비명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 아악!"
아버지는 그러셨지.
진희야 밤에 자다가 마비가 오면 혼자 앓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
영주는 말했었지.
진희야 그거 마그네슘 부족이다. 수영은 절대 하지 마라!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아득한 옛일 처럼 다가온다.
마음은 견딜만한데 왜 늘 몸이 먼저 이럴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생리현상이다.
마비가 이제는 무릎으로 뻗쳐 올라온다.
"아... 아악...!"
내 비명소리에 세례명이 '베로니카'인 맑고 선량한 눈빛의 오십대 여인이 뛰어들어 왔다.
"진희씨...!"
손으로 발가락을 움켜잡은 채 온 몸을 비트는 나를 보며 그녀는 어디요, 하면서 쥐가 난 곳을 찾았다.
"오, 하느님...이 불쌍한 영혼을 구해 주십시요."
그녀는 나의 발과 무릎을 정신없이 마구 주무르며 그렇게 외쳤다.
"사랑이 많으신 성모 마리아여. 기뻐하소서...주께서 함께 계시니..여인 중에 복되시며..."
그녀의 기도를 들으며 나는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애통의 덩어리가 부스러질수록 가슴은 안개 같은 습지를 이루며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얼굴을 침대에 파묻으며 흐느끼는 나의 등을 베로니카씨가 연신 쓰다듬으며 성모송을 계속 노래하고 있었다.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예요. 베로니카씨...?"
"신부님. 빨리 좀 들어 오세요."
베로니카씨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안경을 낀 마른 시인 같은 그 타락한 신부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자기 쥐가 내리나 봐요."
"그래요...?"
신부는 자초지종을 깨달은 듯 날 안심시켰다.
"곧 괜찮아 질 겁니다. 천사여... 그대의 영혼을 구해 드릴께요."
그러면서 신부는 뭔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이름을 '유채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에게 이제 이진희라는 이름 석자를 완전히 잊어버리라고 했다.
유채분... 처음에 유채분이라고 했을 때 나는 무슨 어려운 꽃 이름인 줄 알았었다.
무슨 사람의 이름이 저리 어려울까.
하느님이 외우기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나에게 주시는가 보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채분... 아, 나는 이진희인데 유채분이라는 이름은 웬지 어렵고 무섭게 느껴졌다.
이진희는 얼마나 수수하고 밝은가.
우리 아버지가 이진희라고 지어주셨는데 아아... 도대체 무엇들을 하는 것인가.
"베로니카씨, 진희씨가 적응이 되도록 지금부터 이름을 유채분씨라고 불러드려요."
스스로 타락했다는 신부님이 말하는 소릴 나는 들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들이 누군지 정확히 모른다.
단지 눈빛이 맑으며 너무나 온화한 미소를 가졌다는 것 이외에...
그리고 그들이 그와 나의 영혼을 구해 줄 때까지 나의 양부모가 되기로 했다는 것 이외에는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나는 모른다.
하기야 어디 사는 누군지가 무슨 소용인가.
다들 미쳐서 돌아가는 이 난장판에... 이런 판국에 말이다.
"진희씨, 천사같은 진희씨."
유채분이라고 하기로 해놓고 신부님이 또 나를 진희라고 불렀다.
"어차피 세상은 타락했으니 그대에게 이 나이롱 신부가 세례를 할께요..."
이미 청심환 비슷한 것을 먹어서 의식이 혼미한 나를 눕혀놓고 그들은 영세를 주었다.
"세례명을 뭘로 하고 싶소...?"
시인처럼 마른 신부님이 물었었지. 나는 꿈처럼 대답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
나의 책들... 문학소녀가 어디 가겠는가.
나는 그렇게 대답했고 그래서 내 가짜, 헐렁한 세례명은 "베아뜨"가 되었다.
그들이 나를 택한 이유를 나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오직 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이유를 알고 나서야 나는 그들이 대단한 감성적 사고력과 결단력을 갖고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분은 진희씨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했습니다...? 그것은 결과론이지 않는가.
평이한 사복차림의 신부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나는 숨이 탁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가 잘못 되었구나... 죽었든지 아니면 죽음 직전이든지. 오 하느님...
"진희씨만이 그 분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영웅이지만 지금은 너무나 아픈 사람입니다."
신부는 천천히 내가 머리로 가슴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내게 줄 말과 내게 필요한 말들만을 골라서 주입시켰다.
"그가 몹시 아픕니다..."
처음엔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 그 누구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진희씨 이외엔..."
나 이외엔 그를 구할 수가 없다니?
이 참으로 기쁘고 슬픈 이런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분은 홀홀단신입니다. 위로 형님이 한분 계셨지만 그 분을 가르치기 위해 젊은 나이에 전기공사 일을 하다가 전봇대에 떨어져서 반신마비가 되었죠. 얼마되지 않은 보상금은 약값으로 다 날려버리고 복지 정책도 없는 이 나라를 원망하다가 아파트 난간에서 그만 투신하고 말았죠..."
하나 뿐인 가족을 그가 그렇게 잃었구나. 그런 세월이 있었구나.
나는 아득히 그의 실체들을 보았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며 순수하고 여리게 받아들이기만 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분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어릴 적에 할머니가 그분을 키우셨대요. 하지만 어찌나 효심이 지극했던지 그분은 어릴 적에 혼자 리어카로 흙들을 실어날라 아버지 산소의 봉분을 만들고 또 흙이 떠내려가면 그 봉분을 다시 만들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보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먼저 말씀을 해 주세요."
감상에 빠져드는 신부에게 난 내가 가장 알고싶고 궁금해 하는 그 한 마디만을 던졌다.
안인숙은 왜 보이지도 않는가.
아마도 미행 때문에 그러는가 보다고 나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다들 모르는 사람들인데 안인숙이가 없은들 무슨 상관이랴.
내가 치뤄야 할 댓가는 오직 나만이 꾸려갈 몫이거늘...
누가 내 영혼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울부짖고 빌건만 왜 멀리 계시나이까?"
베로니카씨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들과 만난 첫날 나는 그렇게 쓰러져 잠이 들었다.
쓸쓸한 날의 잠은 허무였으며 잠 속까지 파고드는 아픔이었기에 잠은 더 이상 잠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름 위를 떠도는 먼지와도 같아서 말로 할 수 없는, 말 그대로의 몽환이었다.
가슴에 황량한 바람이 불어와 끝끝내 잡히지 않는 허깨비를 보면서 나는 몸부림쳤다.
리어카 가득 힘겹게 흙을 싣고와서 아버지의 무덤위에 봉분을 세우는 어린 그의 모습이 꿈처럼 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왔다가 안개 처럼 사라져갔다.
모습을 보아야 해!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어!
그를 내 눈으로 보고 내가 만지고 안아보아야 나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아. 그 속에 담은 아픔이 얼마나 크길래 그대 때문에 사람들이 이토록 애태우는가.
당신을 만져봐야 살 수 있을 것 같다.
제발 그 모습을 내게 보여다오. 그 어떤 색깔이든지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게 없으니 제발 모습을 보여다오. 이 사랑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모른다.
단지 당신이 그립고 그리울 뿐이다.
따뜻하고 절제된 그 모든 감각들이 나는 그리울 뿐이다.
그 가슴에 얼굴을 묻을 때 까지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
긴 말이 필요없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 되는 것이다.
이틀을 그들과 지냈다.
그들의 간절하고 애틋한 영혼의 기도를 들으며 나는 바람처럼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교리는 알고 보면 식별이다.
이성적인 행위와 맑음은 다들 타고나는 것인데 무슨 교리가 필요하느냐고 그들은 말했다.
어려운 말들은 오히려 해로운 것이라며 그들은 나의 주관적인 사고와 분별력을 그냥 믿고 따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심판으로 원고와 피고로 남겨졌다.
"너희가 여기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한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일년 사계절 중에 내게 가장 힘든 계절은 겨울이었다.
하지만 사계절을 두고 인기 투표를 하라고 하면 겨울은 가장 싫으면서도 또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살을 에이는 바람소리가 싫지만 그의 따뜻한 품으로 끝없이 안겨들고 싶은 그런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어도 그를 만난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했다.
그를 향해 비상하려는 내가 가진 건 목숨과 같은 때묻지 않은 사랑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 사랑은 커다란 독수리가 될 수도 있고 작은 종달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이미 온 세상을 유유자적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어야 했다.
화살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