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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땅에 꽃 피운 사랑이야기 글/김부식
(이 이야기는 김부식원장의 실화이며 2000년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주최한
전국 장애인 수기모집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잘못된 정보겠지. 이럴 수는 없어.'
지난 십 년 동안 학원을 경영하며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아껴 쓰고 모아왔던 재산을 전부 털어 상계동 아파트 단지 상가 60평을 분양 받았는데 그 상가가 2중 3중 분양 사기란다.
꿈을 꾸는 것일까?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로 다가왔고 아파트까지 정리해 분양대금으로 지불한 우리 가족은 내일을 꿈꾸며 키워왔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과 함께 온 세상이 그렇게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신문에서나 봤던 일,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일로 여겼던 그야말로 끔찍한 일을 내가 직접 당하고 보니 정말 세상이 싫어졌다.
열심히 살라보려고 했는데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당한 첫 번째 아픔이었고 그 좌절의 그림자는 오늘날까지 고통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불행의 시작)
나의 어린 시절은 긴 고통의 시간이었다.
세 살 되던 해에 보리 타작하던 집 마당에서 누나들의 실수로 보리 검불더미에 떨어뜨려져 놀라 경끼를 일으켰고 당황한 누나들과 어머니는 의사가 없는 농촌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자주 찾아가는 의원에게 치료를 부탁했고 그 의원은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주사를 놓아주었다.
경끼에 주사를 맞으면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돌팔이 의원이 지어준 약을 들고 집으로 돌아선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깨어날 줄 몰랐고 초조해진 어머니는 새벽부터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똑바로 누운 채 눈만 뜨고서 움직일 수 없는 마비된 몸을 뒤척이려고 발버둥치며 안간힘을 다해 꿈틀거려본다.
어머님은 그런 자식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것은 헤치고 가야 할 자기 삶 앞에 펼쳐질 비운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는 듯 몸부림치고 있었다.
반년이 지나 일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는 일어날 줄 몰랐고 갓 백일 지난 갓난아기처럼 배로만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정도였으니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이나 안타까웠을까?
그 누구보다도 튼튼하게 자라던 자식이 장애인이 된 것을 바라보고 계시던 어머님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아픔이었고 탄식의 나날을 지새우셨다.
한끼가 무서웠던 그 시절 배고픔보다 자식의 건강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으며
온갖 좋다는 약은 다 구해 정성스레 간호하신 어머니!
매일 눈물로 자식의 건강만을 위해 기도하시던 5살 되던 초봄,
나는 힘겹게 벽을 짚고 기대서서 악을 쓰고 버티다가 쓰러지고 또 일어남을 반복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어머님은 기뻐 손뼉을 치셨고 가슴 도려내는 한의 걸음 한 발작 한 발자국을 눈물로 훔쳐보면서 비록 건강하게 걸어다니지는 못해도 무릎으로 땅바닥을 기어다니던 지난 몇 년간의 악몽 같았던 길고도 아픈 세월이 한순간에 눈 녹듯 녹아 내렸고 벅찬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며 그렇게도 고운 입가에 이제서야 함박 웃음꽃을 피우신다.
어릴 적 생생한 기억들! 늘 굵은 침과 쑥 뜸이다.
대못과 같은 긴 침은 다리를 관통했고 그때마다 혹시 다리에 힘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어금니를 깨물고 울음을 참아가며 수도 없이 대침을 맞았고 온 다리에 지금도 깊은 상처를 남긴 쑥 뜸을 직접 떠야했던 아픈 시간들이었다.
한쪽 다리를 절고 살아 가야하는 나로서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려는 속성을 갖게 되었고 호적에 2년이나 늦게 등재된 덕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두 살 어린 동급생들보다 늘 우등생으로 학교와 가정에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강하게 키우셨다.
건강한 사람들과 똑같이 일을 하게 했으며 불구자라고 해서 남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셨고 매를 들어서라도 해야할 일은 반드시 끝을 보게 하시는 철저한 정신교육을 시키셨다.
어릴 적부터 받은 어머님의 강인한 교육을 통해 앞에 다가오는 어려운 문제들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고야 마는 홀로 서기에 익숙해 져 있는지도 모른다.
(겨울 징검다리)
넉넉지 못한 살림에 근근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우리 가정에 또 한번의 불행이 닥쳐왔다.
여덟 살 되던 해에 맏형의 사업실패로
우리 가족은 재봉틀 한 대 덕분에 거지신세를 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리 펼 날 없이 한끼도 잇기 어려운 그때에 맏형은 집을 뛰쳐나갔고 둘째형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공부를 포기해야만 했으며 누나들은 한 입이라도 줄여야겠기에 마지못해 시집을 가야만 했다.
둘째형은 회갑을 넘기신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살림을 꾸려야 했고 또 맏형을 대신해서 불구자 된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열 세살 때부터
너무 어린 나이에 자기 키보다 더 큰 등 지게를 진 둘째형의 어깨는 피멍이 들어갔고 거칠어진 손바닥 상처가 아물기 무섭게 또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늘 그런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서 나뭇짐 새에 숨겨온 진달래꽃 한 다발을 건네주며 씩 웃고 마는 형, 그런 형을 바라봤던 나의 어릴 적 마음속에 고마우면서도 죄송한 그 감정은 가끔 혼자 있을 때에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형님의 수고를 알기에 오늘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늘 미안하고 고마운 그 형님이 자리잡고 있다.
소나무 껍질 베껴 떡 해먹고 산나물 캐 팔아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불구가 된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시고
내가 다닌 중학교는 산간벽지에 자리하고 있던 터라
장애인이었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학창시절은 전혀 장애를 느끼지 않았고 모든 동창들과 동등하게 뛰어다니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전액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금호공고가 새워졌다는 소식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수석자리를 한번도 빼앗아보지는 못했지만 2-3등은 늘 지켰기에 합격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입학이나 한 것처럼 들떠있었다.
늦둥이로 태어났기에 철이 들어 부모님을 바라 봤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으신 70 고개를 넘기신 부모님. 늘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 대학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금호공고는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학교에 진학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그러나 입학 조건에 신체 건강한 자라야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며칠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시험이라도 쳐야겠다는 생각에 필을 들었다.
장애를 입은 자들도 그 장애를 극복하고 용기를 내어 공부할 수 있도록
박대통령각하의 선처를 호소한다고, 금호공고에 시험 칠 기회라도 한번 달라는 눈물의 편지를 대통령께 직접 보냈다.
당시 중3인 철부지가 쓴 편지는 문교부를 통해서 영양군 교육청으로 회신이 왔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진학할 수 없어 미안합니다.'
한 가닥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장애를 가진 자신이 너무 서럽고 원통해 눈시울을 적셨다.
그 날 온 종일 서러움에 겨워 선바위 자갈길을 오르내렸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좋은 학교에 갈 수 없는 현실과 그런 사회 구조가 한없이 미웠다.
장애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음은 처절하리만큼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야 동감하리라.
결국 나는 시골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해 동료들이 고등학교 삼 년 동안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공부를 하는 동안 대신 중등준교사 자격시험에 목표를 두고 음악이론서를 뒤지며 독학을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이 4년간 대학 생활 할 동안에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 걱정시켜드리지 않고 교편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책과 씨름했다.
졸업 후 시험을 치기 위해 교육청을 찾았을 때는 경북 도교육청의 검정고시 부정사건으로 몇 년 동안 자격시험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결국 그 꿈마저 접고 접어 가슴깊이 새겨놓은 채 팔 만원의 거금(?)을 들고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서울과 연인)
서울로 올라왔지만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동네 아이 몇을 모아놓고 가정교사를 하는 등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해야 했다.
아주TV학원에서 열심히 전자 수리기술을 배웠고 피아노 조율학원에서 조율을 배우며 먹고살기 위한 투쟁의 삶이 계속 되었다.
서울생활은 장애인인 나를 힘겹게 했지만 배움의 서러움 때문에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배울 수가 있었다.
한번은 라디오 조립 공으로 취직해 한 달간 열심히 일했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일한 임금 2만원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던 서러움도 감수했어야만 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받는 천대와 핍박이 싫어 이리저리 옮겨 다닌 직장은 또 얼마나 되던가?
주위의 편견은 오히려 내가 수없이 많이 일을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간판집에서 입간판을 만들고 현수막을 붓으로 쓰는 일과 필경사에서 글을 써 주던 일, 또 제도사로 전자회로 제도를 해주던 일, 심지어는 와이셔츠를 주문 받아 배달해 주는 일들과 외판원으로 책을 들고 다니며 방문 판매하던 일들......
순간 순간은 위기의 상황이었고 절망가운데 우뚝 서 있을 때가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자취방에서 홀로 서러움에 겨워 눈물을 훔치며 오직 장애인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또 일어설 수 있었고 그때 겪은 온갖 수모와 서러움은 오히려 풍랑 이는 세파 속에서 꿋꿋이 서 있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장애로 인해 겪어야하는 숱한 아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주위 사람들의 조소와 손가락질을 피해가며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속울음을 울어야 했고
오직 자신의 목표만을 향해 주위시선을 외면한 채 뛰었고 뛰다가 넘어지면 또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 달려왔기에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이지만 어릴 때 꿔왔던 그 파란 꿈을 펼칠 수 있었으리라.
1980년 사회의 혼란 중에서도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바로 총신대학교에 입학한 일이었다.
대학에서 많은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어릴 때 선생님들로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았던 음악, 문학, 미술 이 세 분야를 모두 공부해 독특한 전문가가 되어 보고픈 욕심이 생겼고 그 첫 걸음을 이 대학에서 떼게된 것이다.
그래서 습작이었지만 작곡발표회도 수없이 많이 했고 각종 그룹전에 산수화를 출품하면서 또한 문학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 나갔다.
그 결과 내가 꿈꾸어온 세상의 문이 조금씩 열려지는 희열을 맛보게 된 것이다.
(희망과 절망)
여기 저기로 직장을 옮겨가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힘겨운 삶의 투쟁이 계속되던 그때 천사와 같이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그녀는 지휘자인 나를 늘 따르며 옆에서 지팡이가 되어 악보 챙기는 일이며 대원들 연락과 잔심부름까지 마다하지 아니하고 오른팔 역할을 해주었고 우리의 그런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했고 서로를 이해하며 의지하는 일생의 동반자로 함께 가고 있었다.
일년이 지나고 삼년째가 되던 해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그녀의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과일을 사들고 찾아뵈었다.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이것이 무엇이냐 필요 없으니 당장 나가라."
단 일분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사정없이 뿌리치시는 그녀의 어머님의 차갑고 냉정한 고함소리를 뒤로하고 쫓겨나듯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한 냉대는 계속되어갔고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가족들의 항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깊어만 갔고 우리들만의 숭고한 사랑은 뜨거워져만 갔다.
그렇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결혼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빠를 비롯한 온 가족의 반대로 몇 번 헤어지고 다시 만남을 반복하면서 가장 반대했던 오빠와의 최후 담판에서 확실했던 내 인생 철학과 당당함을 보고 결혼 승낙을 하셨다.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혼인, 양가의 따뜻한 박수와 사랑의 격려로 은사이신 총신대학교 정성구총장님을 주례로 모시고 많은 하객들의 축복가운데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결혼 생활은 드라마틱한 삶을 연출해 나갔으며 늦게 시작한 대학공부까지 아내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아들 규진이와 딸 지혜가 태어나 건강하고 예쁘게 커주었고
우리 앞에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날로 수놓아 갔다.
우리는 종암동, 남가좌동, 망원동에 피아노학원을 개원하고 청원미술학원과 유치원을 열어 교육사업에 힘쓰며 내가 목표한 3개 부문 전문예술가로 커가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 전진해 갔다.
대학에서 전공한 음악으로 창작작업을 하며 합창단의 지휘자로 음악활동을 계속해왔고 틈틈이 그린 산수화를 개인전과 그룹전에 내어놓으며 매 주말마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는 꿈같은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어두움의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1987년 여름, 눈물겹게 마련했던 문정동 아파트를 팔고 소유하고 있던 모든 현금을 동원해 계약한 상계동 아파트 단지상가가 이중 사기 분양되었다는 청청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왔던 것이다.
순진하게 앞만 보고 성실히 살아왔던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모진 아픔의 시련이었고 엄청난 사건이었다.
모든 꿈이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은 절망가운데 이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시간들과 꿈 가득 담았던 미래의 청사진은 퇴색되어 가는 것만 같았고 절망의 수레바퀴만 돌고 돌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덤빈 자신이 그렇게도 한심스러워 보였으며 이젠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절망가운데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칠전팔기의 용기로 두 눈을 부릅뜨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한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절대로 판매하지 않았던 자신의 그림을 한 두 점씩 팔기 시작했고 학원과 유치원을 매각하고 친구들 집을 시작으로 하여 피아노 조율을 하며 힘겨운 삶을 꾸려 나갔다.
긴 시간들이 우리의 아픔을 잊게 했다.
이젠 한숨 쉴 여유도 생겼고 재물도 제법 모았다.
장애인으로 무서운 세파들을 넘어 지금 이 자리까지 억척스레 달려온 자신이 대견스러우면서도 나 자신만을 위해 달려왔던 이기적이었던 긴 시간들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웠다.
욕심으로 가득했던 자화상 앞에 허무하리만큼 텅 빈 구석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정말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용기 있는 결단)
1992년 7월, 한 장애인의 권유로 지난 아픔을 뒤로하고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
그때는 중국과 수교를 맺고 있지 않았기에 중국에 입국하기조차 힘들었던 때였다.
알고 있는 중국말 두 마디, '니 하오( 好)'와 '시예 시예(謝謝)'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기에 더욱 답답했다.
중국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이 그것도 안내자 한사람 없이 여행길에 올랐으니 그 여행이 무사할 리 만무했다.
북경에서 인력거를 혼자 타고 다니다가 강도로 변한 인력거 기사에게 여권과 지갑을 빼앗길 뻔했던 일이며 목단강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수치를 당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슴 조였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여행이 계속되었다.
긴장된 여행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연길에 도착해서야 고향에 온 것과 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이다.
이곳은 한글이 곳곳에 나붙어 있고 한국말이 통하는 한국의 소도시의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조선족 장애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서 들은 장애인들의 생활은 처절하리만큼 비참했고 자신들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어려운 삶의 쳇바퀴만 돌고있었음을 알게되었다.
그 현장들을 몇 군데 방문하면서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지난날 장애인의 서러움을 겪어온 수많은 시간들, 그 가운데 좌절하지도 용기를 잃지도 않았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술을 통해 우뚝 설 수 있었던 과거를 생각하며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는 저들에게 필요한 일들이 있다면 기꺼이 도우리라 생각했다.
몇몇 장애인들을 만나 보고 장애인기관들을 방문하면서 주정부장애인연합회에서 장애인기술훈련을 할 수 있는 전문인을 초빙키 위해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예기를 듣게되었고 그들은 중국 연변조선족장애인들에게 기술훈련원을 세워 도와줄 것을 강력하게 부탁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승낙을 했고 이일을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모든 초청서류와 관계되는 것들을 준비하고 심양을 거쳐 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고장난 버스를 탄 덕택에 25시간 만에야 천진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아시아나 비행기에 지친 몸을 싣고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서울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필요한 재료들과 장애인 기술훈련에 관계되는 것들을 찾아 장애인을 위한 기술훈련 계획들을 하나 둘 세워 나갔다.
전에 없던 기쁨과 희열이 가슴에서부터 넘쳐흘렀고 저 중국 땅 어둠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 조선족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할 것을 생각하니 온통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한국에는 나보다 유능하고 훌륭한 장애인사업가들이 많지만 중국 오지까지 갈 사람은 없었다.
그 길이 험준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기꺼이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그 동안 모은 재산들을 정리해 떠날 채비를 하게되었다.
긴 시간동안 아내에게 중국 조선족 장애인들의 삶을 설명하고 봉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30여 년 뒤진 중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대답 외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1년 가까이 설득한 끝에 아내와 아이들이 손을 들어주었고 우리가 가야 할 길목에 가족 모두는 기쁨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1993년 6월, 임시 전세방을 얻어 가족을 기다리게 한 후 보건복지부와 관계기관을 돌며 어렵게 특정국가 방문 허락 비자를 받아들고 혼자 다시 중국으로 들어와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를 하며 장애인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우선 미술반 학생 7명을 받아 기초 데생과 서법을 가르쳤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음악을 공부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모아 키보드로 음악기초를 가르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중국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지난 8월7일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가족들의 초청장과 장기체류서류를 준비해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와 아들, 딸을 얼싸안고 이렇게 말했다.
"이젠 우리가족이 우리생애에 가장 보람 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
이 길이 우리가 가야할 최고의 가치가 있는 길이란 말이야."
그 길을 달려온 깊은 감상과 희망찬 아빠의 포부를 아내와 자식들에게 열변을 토하며 설명했다.
아직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인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는 모른 채 마냥 즐거워만 했고 아내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이었다.
우리는 양가 어머님과 함께 임시로 얻은 전세방에서 며칠 뒤 떠날 준비에 대해 의논하며 시간가는 줄 모른 채 예기 꽃을 피웠다.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잠이든 온 가족들은 다시 한번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음을 알리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1시가 막 지난 시각, 누전으로 인해 밀폐된 거실공간에 한시간 동안 전기선이 타며 가스를 뿜어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온 집안 식구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불길은 삽시간에 번지기 시작했고 온 가족은 잠결에 당황하며 겨우 창문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아내는 유독가스에 고통스러워하고 장모와 아들은 머리카락을 태운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돗물을 틀어 불길을 잡으려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만 같았다. 제발 이것이 꿈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간힘을 다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다행히 가족 모두는 큰 사고 없이 불길에서 빠져 나왔지만 중국으로 가져가려던 수많은 자료와 그 동안 쓰지 않고 한푼 두뿐 모은 현금과 아꼈던 물건들은 잿더미가 되어있었고 2층과 3층까지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소방차가 출동해 모든 것이 해결된 뒤에야 온 가족은 속옷바람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떨고 있었음을 의식하게 되었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검게 타 잿더미가 되어버린 허탈함 그 자체뿐이었고 우리가 겪는 또 한번의 절망 앞에 오열을 토하였다.
망막하기만 한 우리들의 앞날을 걱정해 주는 주위사람들의 위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2층과 3층에 세 들어 사는 다른 집들은 잘 대피해서 그날 사고는 인명피해가 없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그 정황 하에서도 감사할 조건이 생겼다.
아니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중국에서 가족초청을 위해 준비해온 각종 서류와 여권봉투가 잿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불타버렸지만 문갑 위에 두었던 서류봉투만이 기적적으로 남겨진 채 불이 꺼진 상태였다.
나는 소리쳤다. 이것이 기적이라고..... 그러나 이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준비했던 정착금과 가재도구는 잿더미가 되었는데 무슨 방법으로 중국에 가며 또 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젠 빈 털털이가 되어 오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주인집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 불탄 집수리를 위해 전세금 한푼도 되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팔방으로 뛰며 전세금만이라도 되돌려 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방법이라고는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몇 년 동안 법정에서 싸워야만하고 고통의 시간들뿐이라는 것이다.
숨통이 조여오는 힘겨운 하루하루의 삶이었다.
넋을 잃고 좌절한 채로 며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중국에 있는 한쪽 팔이 없는 지체장애인과 농아인 그리고 맹인들이 '제발 이곳에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손짓을 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타난 그 장애인들은 애타게 우리를 부르고 있었고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가 없어서 손수 제작한 수레에 올라앉아 꿈틀거리며, 선생님 오시기만 고대한다며 애절하게 부르는 저들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이상한 힘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했다.
<가장 어려울 때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 참 용기라고!>
그렇다. 모든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만 그 생각한 것들을 실행에 옮기지만
나는 가장 힘들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행해 보자고 결심했다.
나의 삶 가운데 쉬지 않고 찾아온 어두움의 그림자를 깨끗이 지우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힘겹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최소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행을 결심해야만 한다는 각오로 아내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함께 해야 할 일들을 위해 갑시다. 이렇게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우린 아직 젊음이 있어요. 힘있을 때 할 일을 하고 봅시다. 지금 중국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장애인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어요."
긴 침묵이 흘렀고 화재로 인해 고통가운데 치료를 받고있던 아내와 풀죽어있는 아이들은 한참 만에야 아빠의 결정에 두 손을 들어주었고 그래서 이제 한 마음이 되어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전세금을 포기한 채 이제는 지난날의 모든 미련들을 버리고 빈 주먹과 알몸으로 뛰어가 중국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들과 같이 낮아져서 장애인들과 같은 처절한 생각과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리신 뜻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중국을 향해 떠날 채비를 했다.
욕심과 명예로 가득히 채워졌던 수많았던 시간들을 잠재우고 순결하고 겸손한 마음의 문을 열 때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더 큰 기쁨과 만족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친척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섯 뭉치의 헌옷가방만을 둘러메고서 중국 동북 땅 연길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는 광활한 황무지 앞에 개척자의 모습으로 의연히 서있음을 느끼었다.
연길 땅은 한마디로 삭막한 겨울철 깊은 산 속 오두막집에 우두커니 서있는 외로운 노인네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식구들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 달에 400만원 이상의 수입을 마다 해야했고 음악가로 화가로 활동했던 화려한 생활을 벗어 던졌으며 딸에게 첼로와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자랑스럽게 다니던 명문사립학교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삿짐을 풀면서 나는 속으로 울먹이며 다짐했다.
<오늘 이 아빠의 결심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코 보여주겠노라고!>
(내가 사랑한 땅)
연변 200만 인구가운데 5%를 차지하는 장애인들은 10만을 넘어서지만 중국 전체의 장애인들은 8천만여명에 이른다.
이 장애인들에게 준비되어진 앞날은 아득함뿐이다.
장애인직업기술훈련쎈타를 세우고 직접 피아노조율과 동양화를 가르치면서 나를 필요로 하는 장애인들에게 언제든지 달려갔다.
어릴 때 감전되어 오른팔이 없는 춘권이는 내가 처음 중국에 와서 장애인에게 어떻게 해야하지를 가르쳐 준 청년이다.
가정을 버리다시피 떠난 아버지 대신 뇌졸증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호하며 가장의 자리를 지켜야하는 그는 내가 가르치는 데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올바른 인격자로 다듬어져 갔고 정성을 기울여 4년 동안 가르친 덕에 제법 그림을 그린다.
우리 식구는 시간이 있는 데로 중풍으로 쓰러져있는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빨래와 김치를 담궈주며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그는 힘을 얻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가 작년부터 한국에 나가 공부하고 있으며 그의 가정에 희미하나마 웃음꽃이 피어나게 되었다.
춘호네 가정은 어렵게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하체장애로 전신을 쓰기 힘든 그는 길거리에서 자전거 수리를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겨울이 가까워지는 것이 제일 걱정이란다.
그의 어려움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수 장애인들이 영하30도 강추위 속에서도 뗄 거리가 없어 냉방에 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장애인 가정을 수소문해 30가정을 찾아다니며 온 겨울을 날 수 있는 남방용 석탄 2톤씩을 나눠주는 것이 지금까지 겨울이면 연례 행사가 되어버렸다.
춘권이를 비롯한 3명의 장애인 화가를 처음 배출한 감격의 순간을 회상해 본다.
오른팔이 없는 춘권이, 청각장애인 성환이와 지체장애인 영수, 몇 년 동안 정성을 다해 지도한 제자들의 첫 전람회(1994년)에 나는 이렇게 감회를 털어놓았다.
<창밖에 그리움처럼 봄이 와 설레이는 계절입니다.
침묵하던 긴 겨울이 기지개를 켜고 두 손 쳐들어 고함치듯 여기 늪진 장막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삶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토해내는 뜨거운 자리가 있습니다.
작은 텃밭을 일구어 자그만 열매를 소출 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농부의 마음 밭이 있습니다.
이 자리가 있기까지 지난 몇 년의 길고도 짧은 시간 속에서 숨 가쁜 붓 놀림으로 돌을 다듬어 뉘고 나무를 깎아 세우며 산과 산을 이어 빈 화폭을 메워가며 우리들의 꿈의 세계를 펼쳐왔습니다.
우리 장애인들의 길은 그리 평탄치는 못했습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숨막히면 숨막히는 대로 떠밀리다 쓰러져도 쓴웃음 한번 뿌리고 홀로서는 투지로 벼랑길 외길에 질긴 목숨하나 의지하며 삶을 불살라 왔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웃의 짐이 될 수 없습니다.
옆 사람 보다 조금 불편할 뿐임으로 냉소를 받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자임을 증명하는 이번 전람회에 거는 기대가 실로 큽니다.
즐겨 당한 환난이 인내와 연단을 통해 안겨오는 소망 앞에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함께 걸어나갑시다.
어둠을 돌아 밝고 희망찬 미래 앞에 우리의 지친 시간들을 멈취 세워 쉼터위로 함께 걸어나갑시다.>
(남아있는 일들)
어릴 때부터 많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탓에 제일 듣기 싫은 장애인이란 단어. 그 말이 싫어 장애인으로 살지 않고 음악, 미술, 문학을 다 잘하는 특별한 사람으로 우뚝 서기를 원해 그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고 고국에서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에게 봉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지금 이곳 장애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땅에 복지사회가 되는 그날까지 앞서 장애인사업과 복지사업을 개척해왔던 한국과 미국 등 선진국들의 경험과 기술을 보급하고 전달해 주는 가교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들과 함께 한다면 먼 훗날 이 땅에 소외되었던 많은 자들이
조금은 여유로와 질 때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작년에는 이 땅에 온지 7년만에 조금은 쑥스러웠지만 기쁜 일이 생겼다.
중국 길림성 정부가 외국적 교사에게 주는 우수교육자상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상은 중국 길림성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운데 우수한 교육자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수 백명 외국인 교수 가운데 한 명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상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안에 거주하는 외국인 교육자가 300여명 이상이 현재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대표로 이 상을 받게되었기에 이 땅에 와서 지난 수년간 장애인들과 함께 달려왔던 작은 자가 행한 적은 일에 중국 정부가 손을 들어 준 것이기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국제장애인복지회를 통해 동북지역에 1995년에 연변장애인기술훈련센타가 세워졌는데 올해 처음으로 국제장애인복지회 장애극복대상을 제정해 매년 장애인들의 삶에 용기를 심어줄 것이라 기대된다.
1996년에 금밀장애인실업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 안에는 금밀미용실, 금밀수예원, 금밀복장점, 명성인쇄소, 금밀타자복사점, 장성미술사, 금밀음반점, 황토안마진료소, 북평상점, 전갈양식장이 세워져있다.
이 자영업 대표는 모두 몇 년간 뜻을 같이해온 장애인들이기에 헌신적이며 많은 장애인들이 취업해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게 되었다.
지난 2000년 3월에는 남방지역에 소수민족 장애인들을 위한 운남성 홍하장애인기술훈련센타가 문을 열었다.
중국 안에 나를 필요로 하는 장애인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달려갈 각오가 되어있다.
국제장애인복지회는 중국을 중심으로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 미개발지역에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개발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이제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칠전팔기 우뚝 선 용기 있는 장애인으로 국제 장애인들에게 내가 꿈꾸어온 파란 그 꿈을 심어주고프다.
이제는 이 땅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이제 이 두 번째 고향에서 지난날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부끄러운 일들을 묻어둔 채 새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땅에 소외된 자들을 위해 삶의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며 자립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사랑으로 그들을 껴안을 것이다.
지난여름 시장에서 보기 딱한 광경을 목격했다.
20대 처녀가 쓰레기통을 뒤지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정신지체장애인이었다.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생각 끝에 저들과 같은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연변천사원을 설립했다.
정부에서도 이들에게 특별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기에 천사원 설립을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지금은 17세부터 25세의 청년이 15명 수용되어 있다.
이제 이들에게 농장을 마련해주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는 것이 내게 남은 숙제이다.
연변천사원에 수용된 15명의 순결한 작은 천사들,
그들의 티없이 맑은 웃음을 보며 이 시설을 설립한 것이 참 잘한 일이었다고 자찬해본다.
중국 정부의 지원 없이 외국인 손에만 의지해 운영되는 연변천사원을 보고 내가 혹시 본국으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자모님들은 불안해하고 있지만 천사원에 농장을 세우고 결혼청년기에 이른 작은 천사들의 가정을 꾸려주는 일 등 해야할 일들이 아직도 많다.
중국 동토의 땅,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그 얼어붙은 동북 연변에 지금도 살길을 찾아 아우성 치고 있는 조선족 장애인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내가 한국에서 붓 한 자루로, 조율 망치 하나로 어려웠던 당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배부를 수 있는 빵 한 조각보다 스스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배우게 하는 일이 최우선의 일일 것이다.
심산 속 오미자 넝쿨은 홀로 서지는 못해도 빛을 찾아야겠기에 옆 나뭇가지를 부여잡고서라도 저 끝까지 피나는 노력으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어코 오르고야마는 진리를 보여주듯 이 땅에 고개 숙인 많은 장애인들에게 용기 있는 삶을 불사르게 도울 것이다.
(글쓴 이유)
하나님이 선택해주신 이 땅에서의 일들을 시작하면서 가장 감사하는 것은 장애인이 되게 해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장애인이 된 것을 감사하는 이유가 있다.
장애인이었기에 억척스레 배울 수 있었고 비장애인들에 비해 독특한 예술 감각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외로웠기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표출시킬 수 있는 힘이 남달리 컸다고 본다.
또 하나는 제2의 고향, 중국 땅을 위해 장애인이 된 것을 감사한다.
내가 만약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이 땅의 장애인들이 마음 문을 쉽게 열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상처로 인해 굳게 닫혀있던 저들의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또한 장애인이었기에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어쩔 수 없이 배운 16가지의 기술들은 이곳에서 모두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배워왔던 수많은 재능들이 오히려 지금은 이 땅에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저들에게 용기와 꿈을 심어줄 수 있어서 감사한다.
이 글을 읽는 나와 같은 장애인들에게 몇 번이나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나 좌절하지 않고 지금의 보람된 길을 걷고 있는 작은 자의 부끄러운 용기를 소개하고 싶기에 보잘것없는 글을 써 내려왔고 유능하지도 그렇다고 무능하지도 않게 적당히 쓸만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필을 놓는다.
첫댓글 너무나 감동받았습니다 ㅠ.ㅠ;; 경의롤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