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방울
수학 교사로 퇴직한 친구 네 명이 가끔 만나서 오름이나 올레길을 걷고 맛집을 찾아다니자며 모임을 만들었다. 올해 이월에 넷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퇴직한 나를 축하하는 의미로 첫 모임은 나의 고향에 있는 새오름(저지오름)을 오르게 되었다.
새오름은 2005년에 생명의 숲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대상)을 받을 만큼 전국적으로 알려진 제주의 숲길 명소이다.
새오름에는 다른 종의 나무에 비해 유독 소나무가 울창하다. 초등학교 시절 산림녹화사업에 동원되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새오름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 작던 묘목이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되어 새오름을 울창하게 덮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새오름에 터 잡아 살아온 소나무는 재선충이 심하던 시절에도 끄떡없었다. 제주도 전역으로 재선충병이 번지면서 수많은 소나무가 베어져 나가는 데도 새오름 소나무는 잘려 나가지 않았다. 새오름의 토양을 밑거름으로 튼실하게 자라났기 때문일 것이다.
새오름 산책길에는 여기저기 솔방울이 떨어져 나뒹군다. 한 친구가 솔방울 주워 들더니 비늘을 세고 있다. 무심결에 나도 따라 자그마한 솔방울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친구가 상기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진짜 팔십구 개네”
나도 꼼꼼하게 솔방울 비늘을 세어 보았다. 오십오 개의 비늘이 달려있다. 고등학교때 자연을 닮은 수열에 대하여 들어보긴 했으나 사십여 년이 지나서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다.
피보니치수열은 처음 두 항이 각각 1과 1이고, 다음 항부터는 바로 앞의 두 항을 더하여 이루어지는 수열이다. 나열하면 1, 1, 2, 3, 5, 8, 13, 21, 34, 55, 89, … 가 된다. 솔방울은 시계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나선이 나 있다. 이 나선의 개수가 8이나 13같이 피보니치수열의 수라는 것은 알려져 있다. 이번에 솔방울 비늘의 개수마저 피보니치수열의 수라는 걸 눈으로 확인한 셈이다. 피보니치가 우연히 이런 수열을 발견한 건 아닐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깨달으려 수많은 몰입 관찰을 통한 체험속에서 자연을 닮은 수열을 발견했으리라.
꽃잎의 개수는 어떨까. 화이트칼라 백합은 1장, 등대풀은 2장, 붓꽃은 3장, 채송화는 5장, 코스모스나 모란은 8장, 금잔화는 13장, 치커리는 21장, 질경이는 34장, 쑥부쟁이는 55장, … 왜 식물의 열매나 꽃잎, 잎차례와 같은 것들은 피보니치수열과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대개의 나무는 씨앗에서 줄기가 나오고 그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온다. 또 그 가지에서 더 작은 가지 갈래로 분화한다. 땅 위에서부터 일정한 높이로 등분하여 나무의 가짓수를 살펴보면 1, 2, 3, 5, 8, 13, …순서로 많아진다.
식물의 DNA에 어떻게 이런 정교한 정보가 숨어 있다가 발현되는 것일까. 대부분 나무는 햇볕을 더 잘 받고 튼실하게 성장하기 위하여 높이에 따라 가짓수를 피보니치수열에 따라 늘려나간다. 여러 종의 식물들도 다양한 형태로 꽃이나 씨앗을 보호하고 번식하기 위하여 유휴공간을 줄이는 나선형으로 자라면서 꽃잎 개수와 씨앗을 피보니치수열에 따라 배치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성장 효율성이 좋아 가성비로 따지면 최고이다.
이렇듯 평범해 보이는 자연에 놀라운 수학이 숨어 있다. 피보니치수열의 발견으로 사람들은 식물들이 나선형 구조로 자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식물은 어떻게 자라는가. 작은 생장점에서부터 줄기, 잎, 꽃과 같은 새로운 기관이 생겨난다. 각각의 기관은 원기(原基)라고 하는 각각의 새로운 조직이 중심에서부터 새로운 방향으로 자라 나오는데 기존에 자라던 방향과 일정한 각을 형성한다. “황금각”이라 불리는 137.5도 방향으로 자라면서 나선형을 이룬다. 어떤 이유로든 새로운 조직이 황금각 방향으로 자라지 못하면 나선모양이 흐트러지는데 일종의 돌연변이 현상이라 여겨진다. 해바리기의 꽃씨 배열, 파인애플 눈의 배열, 소라껍데기 문양에서 피보니치수열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어느날 텃밭의 귤나무를 햇볕이 잘 들도록 전정하고 나서 살펴보니 뻗은 가지들이 피보니치수열을 닮아있다. 피보니치 수열을 의도하며 가지치기를 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피아노 건반도 피보니치수열을 닮았다. 피아노의 검은색 건반은 2개 또는 3개씩 배열되고, 한 옥타브에는 검은 건반이 5개, 흰 건반이 8개이다.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을 더하면 13개의 건반이 된다. 이 수들을 작은 수부터 늘어놓으면 2, 3, 5, 8, 13이 되는데, 피보니치수열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스토포리가 지금 형태의 피아노를 처음에 만들 때 피보니치수열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는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자연은 생존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진화해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삶을 지키고 종족 번식을 위해서 자연을 닮은 수를 터득해 왔을 것이다. 피보니치수열이 자연은 우연히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에 능한 절대자가 설계한 대로 진화한다는 하나의 증표가 되지 않을까.
새오름을 내려오면서 솔방울 몇 개를 더 집어 들었다. 솔방울 색은 유난히도 태어난 토양의 색깔을 띤다. 황토색 흙에서 자란 소나무의 솔방울은 황토 색깔이고 흑갈색 흙에서 자란 소나무의 솔방울은 흑갈색을 띤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다가 자신에게 자양분을 내준 흙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의 색깔일 것이다.
손위에 놓인 솔방울을 본다. 맏사위가 운영하는 카페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억새꽃 옆자리에 놓아야겠다. 땅에 떨어져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솔방울도 태어나고 존재하며 소멸해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2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