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 jhāna
無碍解道 解脫 Paṭisambhidāmaggo-mahāvagga- vimokkhakathā
Katamo jhānavimokkho:
무엇이 禪-解脫인가?
A.
1. nekkhammaṃ jhāyatīti1 jhānaṃ
2. kāmacchandaṃ jhāpetīti jhānaṃ,
3. jhāyanto2 muccatīti jhānavimokkho,
4. jhāpento muccatīti jhānavimokkho.
5. Jhāyantīti3 dhammā, jhāpetīti kilese,
......jhāte4..ca ................ jhāpe ca jānātīti jhānavimokkho. [PTS Page 045] [q 45/]
1. 出離를 담<=들이>게 되었다고 해서 禪(=담/들이게 됨)이라 한다.
2. 慾欲을 태우게 된다고 해서 禪(=태우게 됨)이라 한다.
3. 담게 되고 있는 자는 해방되어 진다고 해서 禪解脫(=담음에 의한 풀려남)이라 한다.
4. 태우게 되고 있는 자는 해방되어 진다고 해서 禪解脫(=태움에 의한 풀려남)이라 한다.
5. '담기게들 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法들이고, '태우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染에 (대해)서 이다.
담기게 되는 것들과 태우게 되는 것들을 안다고 해서 禪解脫(=담음과 태움에 의한 풀려남)이라 한다.
= 담을 것과 태울 것을 앎에 의한 禪解脫이 있다. 또한 그 담았던 것들도 또한 태울 것일 수 있는 듯.
* jhāna: 同音異議語 √dhyai *사역형보다는 수동형[Pass.~ ~이게 되다=ī + ya]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해서....
나. 燃燒
가. 禪 ← dhāna ← dhyāna ←dhāyana←/dhyā(ḍ)yati/← dhiyati [Caus]← dahati/dadhāti/ ← √dhā(to put)
..............................................................................[dhā + ī + ya]
cf. 三昧 (samādhi
[← sam-ā-dhāna<jhāna>] ←/sam-ā-dhyā(ḍ)yati/← samādhiyati ← samādahati ← sam-ā-dhā)
cf. dahati/dadhāti/ : 두다, 놓다, 정하다, 정리하다, 고려하다. → 놓다/담다 →[caus] 놓게/담게/들이게 되다
가. jhāyati: [Sk. dhyāyati, dhī; with dhīra, dhīḥ from didheti shine, perceive;] * = jhiyāyati
.....to meditate, contemplate, think upon, brood over (c. acc.): search for, hunt after -- pp. jhāyita.
나. Jhāyati2 [Sk. kṣāyati to burn, kṣāy & kṣī, cp. khara & chārikā]
to burn, to be on fire: fig. to be consumed, to waste away, to dry up ;
-- aor. jhāyi DhA ii.240 sq. -- (fig.) Dh 155; J vi.189. -- Caus. jhāpeti. -- Cp. khīyati2.
나. jhāpeti: 火葬하다/태우게 되다. ← 태우다.
<*끓이다/데우다/그슬다→덥히다/그을다(그을림, 그을음-끄시름), 덖다→조리되다.>
가. jhāyanto: M86/Dhp.27- [√dhā-[dhā + ī + ya]]=√jhe의 Ppr. m.Sg.Nom 禪하는 자.
Netti[PTS39]
na nissāya jhāyati jhāyi jhāyati ca.
Ayaṃ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aha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issitena cittena na ñāyati jhāyanto.
나. jhāpento:
가. jhāte:
나. jhāpe:
[요가수뜨라(Yoga-sūtra)와 니까야(Nikāya)의 三昧觀 재검토... 경북대 철학과 임승택]
예컨대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선정의 기능을
‘생각에 잠긴다(jhāyati)’와 ‘번뇌를 태워 없앤다(jhāpeti kilese)’라는 2가지로 풀이한다.50)
50) “법을 지닌 이들이 ‘생각에 잠긴다’는 [의미에서,] 번뇌를 ‘태워 없앤다’는 [의미에서,]
‘생각에 잠김’과 ‘태워 없앰’을 안다는 [의미에서] ‘선정에 의한 해탈’이다.”
(jhāyantīti dhammā, jhāpetīti kilese, jhāte ca jhāpe ca jānātīti jhānavimokkho. Ps II. p.44)쪽.
B.
abyāpādo jhāyatīti 1 jhānaṃ,
byāpādaṃ jhāpetīti jhānaṃ,
jhāyanto 2 muccatīti jhānavimokkho,
jhāpento muccatīti jhānavimokkho.
Jhāyantīti 3 dhammā' jhāpetīti kilese, jhāte 4 ca jhāpe ca jānātīti jhānavimokkho
C.
ālokasaññā jhāyatīti jhānaṃ,
thīnimiddhaṃ jhāpetīti jhānaṃ -pe-
D.
avikkhepo jhāyatīti jhānaṃ,
uddhaccaṃ jhāpetīti jhānaṃ -pe-
E.
dhammavavatthānaṃ jhāyatīti jhānaṃ,
vicikicchaṃ jhāpetīti jhānaṃ -pe-
F.
ñāṇaṃ jhāyatīti jhānaṃ,
avijjaṃ jhāpetīti jhānaṃ, -pe
G.
pāmojjaṃ jhayatīti jhānaṃ,
aratiṃ jhāpetīti jhānaṃ -pe
H.
paṭhamaṃ jhānaṃ, jhāyatīti jhānaṃ,
nīvaraṇe1 jhāpetīti jhānaṃ -pe
I.
arahattamaggo jhāyatīti jhānaṃ,
sabbakilese jhāpetīti jhānaṃ,
jhāyanto muccatīti jhānavimokkho,
jhāpento muccatīti jhānavimokkho.
Jhāyantīti dhammā, jhāpetīti kilese, jhāte ca jhāpe ca jānātīti jhānavimokkho.
Ayaṃ jhānavimokkho.
Katamo anupādācittassa vimokkho: ......................................................................
첫댓글 禪의 (명사,) 동사형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본문도 역시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로 보이고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三昧는 아무래도 대상에 대한 집중은 아닌 듯 하고,
心所들이 모두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잘 지향하고 있는 (國論이 統一되고 均衡잡힌) 마음 상태인 듯 합니다.
그 방향이 해탈 열반쪽으로 향하는 삼매를 바른 삼매(正定 = 色界禪)라고 하는 듯 합니다.
반면 無色界와 관련하여 等至(samaa-patti/확득)라는 용어가 쓰인다고 합니다.
임승택 교수님의 논문은 on-line에서 보았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일독하시길.
禪도 三昧와 어원은 같은 듯 여겨 집니다. 둘 다 수동형으로 많이 나타나는 듯....
daa-, dhaa-, dhar.- 등에서 法과 禪등의 의미를 찾아가다가... 흘러 흘러 또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단어에 대한 분석과 번역은 소설도 아니고 봄봄의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의 끄시름(사투리- 그을음)입니다.
본인이 우문하고 본인이 우답한 것입니다.
아직 경을 좀 더 읽어 보고 실참하시는 분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겠습니다.
'봄봄'님의 <본 글>과는 상관 없는 <댓글>을 달고자 합니다.
'환희봉행'님의 <본 글>에 달아야 하는 <댓글>을 여기에다 다는 것인데요......
이유가 있습니다. 요즈음 '봉행'님이 삐지신 것 같은디.... <댓글>마저 신랄하게 달면 <더 삐지실 것> 같아서 입니다.
엉터리 제일 '환희봉행'님이야말로 .......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이신데요....... 뫼가 높아야 골이 깊은 이치입니다.
<엉터리>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요, 어지간히 노력해서는 <엉터리의 경지>도 만만치 않은 것이거든요.
특히 <有無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엉터리들이 '고수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ㅋㅋ....
'봄봄'님의 글에 <댓글>형식으로 달고자 합니다.
'봄봄'님 <왜 '有無'를 극단이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아위자'의 견해로는 <하나의 法을 대상으로 有無를 따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단 하나의 法을 대상으로 하면> <有無>이외에는 더 따질 것이 없습니다. 끝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두개 이상의 法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보면요 .... 소위 <막가(=길)>라는 것이 그려지는데요.
비유하면, <識과 觸이라는 '두 法'의 '관계'>를 보십시요. 識이 있다고 한다면 觸이 있고요, 만약 識이 없다고 한다면 觸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
이러한 말씀이 <有無중도>라는 말씀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연기된 것>이라고 지적하실 때는, 단 하나의 法을 대상으로 '있음과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다른 것이다>라고 識하는[=분별하는] 그 대상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두 개이상의 법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연기>도 그러하지만, 특히 <집과 멸>이라는 용어(=사실상 같은 용어입니다만)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苦의 집>이라고 할 때, <단 하나의 法인 '苦'>를 대상으로 하신 것이 아니고요, '苦'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두개 이상의 法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니, <苦樂중도>라는 말은 더더욱 웃기는 용어인데요......... 일부 사람들이 <팔정도>가 <苦樂중도>라고 우깁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들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발로 들어도 그런 미친 소리는 안 하게 되는데요. 지적을 해줘도 못 알아듣는 정도가 되면, 문제는 '까마(kaama)'에 미쳐있기 때문입니다.[=어려운 지적입니다.]
<두개 이상의 法들>의 문제에 있어서 <禪(자나)와 까마(kaama)의 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 둘은 <보통 밀접한 관계>에 있는 '法들'이 아닙니다. 어쩌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에 위치하는 '관계'인데요.
'아위자'가 지금 <禪사상>에 대한 글을 쓰고 있거든요..... (1)번 글과 (2)번 글을 써 놓고서 망설이고 있는데요...... 너무 어려운 이야기여서 <어떻게 하면 '쉽게'표현해 볼까?>를 궁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단 먼저, 사념처수행이라는 <초선과 관련이 깊은 定蘊>에서 <법념처의 법수관>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까마(kaama, =오개에서 첫 번째 덮개 혹은 장애임)>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대상인 <法>이라는 말입니다.
@아위자 그렇게 중요한 <法>에 대한 Sati를 말씀하시는 장면인데요..... 중요한 점은,
<까마(kaama)에 대한 Sati>가 아니라 <까마(kaama)라는 法에 대한 Sati>라는 점입니다.
'그 차이점'은 <사념처수행이라는 초선과 관련이 깊은 定蘊>에서의 이야기에 있습니다.
@아위자 <까마(kaama)가 아니라 까마(kaama)라는 法에 대한 '즐김'>이 바로 <禪(자나)>입니다.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 차이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
@아위자 그래서 '(1)번 글'에 <까마(kaama)에는 禪이 없다>라고 강조하고서, '(2)번 글'에서는 <까마(kaama)와는 무관한 것이 禪>이라고 그 어떤 놈이 지껄인다면 <놀고 있는 놈>의 헛소리이며, <대념처경>조차도 한 번 읽어 보지 않은 놈의 <미친 놈>의 잠꼬대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다섯 까마(kaama)>를 포함하고 있는 <까마(kaama)>를 웃습게 아는 놈이 뭔 '불교공부'를 한 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좆도 모르는 놈이 부랄 보고 "탱자 탱자"하는 것 아닙니까?
@아위자 <다섯 까마(kaama)>의 대표는 '좆'입니다. 그 다음이 '돈'이나 '명예'나 '권력' 같은 것이고요
@아위자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 먼저 라는 말씀.
우리는 '그 오개'에 덮혀서{=미쳐있어서] '앎과 봄'이 없는 것일 뿐이라는 말씀.
그래서 <까마(kaama)가 아니라 까마(kaama)라는 法에 대한 '즐김'>인 <禪(자나)>에 들어서 Sati를 발동해 보자~~~~~~~~~~라는 것이 바로 <禪(자나, =올바른 삼매, =正定)>이라는 '베이스켐프' 이야기입니다.
@아위자 이와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궁리하는 도중에
'봉행'님의 <有無중도>가 튀어나오고, '봄보'님의 <法(dhamma)에 대한 번역>이 튀어 나온 것이어서 솔직히 당황되고, 절망되어서 ....... "이거이 참으로 심각하구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끝.
참고로, 경전에서 '극단(=끝, 안따)'이라는 용어는 <막힌 곳, 낭떠러지, 길(=막가)이 없는 곳 등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法을 대상으로 하지 말고> <두 개 이상의 法들을 대상으로> <그 '관계'>를 살펴보면 '길(막가)'이라는 것이 보인다..................라는 말씀이 중도(맛찌마 빠디빠다)입니다.
<팔정도>가 <중도>라는 말씀! <37조도품>이 <중도>라는 말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 중도를 걷는 것>이라는 말씀!
法에 대한 계정혜!
어려워도 <法>!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法>!
최소한 <法> 하나 만이라고 거들지 않고, 건방 떨지 않고서 기다리면 됨!
<法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라는 <신념과 결심>으로 정진! 모르는 놈이 승리함!
역대 조사님들께서도 다 그렇게 하셨습니다. 法에 대하여 아는체 하거나 '물어보기만'하여도 몽둥이 찜질을 .............. 그렇지만 '아위자'는 조사는 커녕 선사도 아니기에 이렇게 친절하게 "위험한데요"라고 설명하는 것임![=ㅋ, 너무나 친절한 '아위자'!]
소가 '길 아닌 곳, 남의 밭'으로 들어서면 '몽둥이'가 제일이지만,
'중생폭행죄(=중생학대죄)'라는 것이 있어서 현행법에는 저촉됩니다. 하기는 요즈음은 그러한 <친절한 선사님들> 자체가 씨가 말라버려서 걱정 붙들어 메어야 하지만요......... ㅋ.
<팔정도>(=중도)의 끝에 <禪(자나, =올바른 삼매, =正定)>이 위치하고요 거기가 '베이스켐프'이지만요......... 사념처에는 그러한 '베이스켐프'가 없고요....... 정상까지 그냥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곧바로 위빠사나로 넘어가도 무방하다는 이야기. 그렇지만 <정규코스>는 <팔정도-아빈냐(=행을 파악함)-위빠사나>입니다.
며칠 전부터 주변의 잡다한 일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나니 ........ 시간이 나서 말도 더 많아지고 ㅋㅋㅋㅋ......
심심하니 카페에 들어 오는 횟수도 많이져서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삼학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
본문과 댓글을 보면서 공부증장하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자주뵙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