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리면 영도다리를 건너다니던 시절이 생각난다. 58년 전 중학생이 되어 비를 맞으며 영도다리를 건넜다. 하루에 두 번 오전10시와 오후4시에 영도다리가 번쩍 들리는 것을 보려고 비를 맞으면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학교에서 오후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대에 다리가 들리는 것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웬만한 비는 그냥 맞고 다니는 게 시원하고 좋았다. 지나가는 배들을 구경하고 갈매기들이 가까이서 나르며 시끌벅적한 선창가를 구경하며 지나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비바람이 칠 때면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뛰었다. 바람이 워낙 쌘 곳이라 우산이 있으나 마나여서 새로 지어 입은 교복이 푹 젖도록 천연스럽게 비를 맞고 다녔다. 갈매기들은 지네들과 경주를 하자는 줄 알고 꺄 악∼꺄 악 거리며 가까이 날아들었다. 비를 맞아도 괜찮을 때라 그냥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부터 나는 우산을 쓰는 게 싫어져서 이슬비 정도는 요즘도 바바리만 걸친 채 맞고 나다닌다.
한동안 영도다리를 혼자서 건너다니다가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다. K와 C은 남항동에 살았고 나는 신선동3가 산마루 판자촌에서 살았다. 내가 1학년 C반 급장이었던 관계로 둘은 내 보디가드처럼 같이 다니기를 좋아했다.
셋이서 어울려 방과 후에는 풀빵을 사먹으면서 돌아다녔다. 남포동으로 달려가 영화를 보고 자갈치시장을 헤집고 다니다가 멍게와 해삼을 사먹고 나서 영도다리를 건너기 싫으면 대평동으로 가는 통통선나룻배를 슬쩍 타고 건너기도 했다.
어울려 놀기에 맛을 들린 우리는 방과 후 활동이 점점 심해졌다. 영도다리 옆으로 부두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패싸움을 하며 영도다리를 건너 시내로 원정을 갔다. 서면로터리 북성극장 옆에서는 반 친구 P집에서 아이스케이크 공장을 하고 있었다. 생활이 넉넉한 P를 4인방으로 끌어드렸다. 어느 날 C의 전차회수권 하나로 K와 나는 요령껏 전차를 슬쩍 타고 서면으로 달려갔다. 아이스케이크를 실 컨 먹고 북성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P네 집에서 운영하는 빨강색 O번 노랑색 O번하는 빙고게임을 조작해 상금을 받아 신나게 놀았다.
4인방 활동무대는 우리 반 학생이 사는 곳을 찾아 부산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영도에 사는 우리 셋은 남항동 기마경찰대 옆 C네 사진틀 공장이 아지트였다. 창고 한구석에 있는 탁구대에서 내기 탁구를 쳤다. 영도 소방서 아래 오래된 남도극장이 있었지만 우리는 영도다리를 건너 극장이 많은 시내로 나다니는 게 좋았다.
야구의 시즌이 되면서 우리는 야구공 던지기에 몰입했다. 각자의 모자를 글러브로 투수와 포수 나머지 한사람은 심판이 되어 스트라이크 넣기를 경쟁했다. 진 사람이 내는 빵을 먹고 영화를 보러 다니느라 탁구는 시들해 졌다. 때마침 우리 학교에 야구팀이 생겨 경기를 하는 날이면 전교생이 수업을 일찍 끝내고 구덕야구장에 모여 응원을 하는 바람에 야구에 열이 붙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밖에서 야구공 던지기를 할 수가 없어 시내로 나갈 궁리를 했다. K가 좋은 수가 있다며 집에서 고래 고기를 가지고 왔다. C네 옆집에 사는 교통순경아저씨에게 누가 뇌물로 준 쎄퍼트 강아지가 밖에서 노는데 그놈을 잡아다 팔아먹자는 것이다. C가 준비한 마대자루에 고래 고기에 유혹 되어 졸졸 따라온 강아지를 잡아넣었다. 셋이서 자루를 번갈라 매고 비 내리는 영도다리를 건너 부평동시장에서 팔아 군것질을 실컨 하면서 영화를 봤다.
주말이나 일요일에 하는 고등학교 야구를 보는 게 더 재미있었다. 시합이 있는 날 우리는 영도다리를 건너 야구장으로 달려가 뒷담을 넘어 들어갔다. 잡히는 날이면 몇 대 맞고 쫓겨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담을 넘어가 보는 재미에 스릴을 느꼈다. 우리들은 패거리 주먹자랑 이야기가 아니면 야구와 영화를 본 스토리로 폼을 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재동이 걸렸다. 우리 학교는 철저한 미션계학교로 교목이 아침조회 때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 후에 교장선생님이 훈화를 했다. 매주 1시간은 목사님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일요일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출석확인서를 기말시험 때 내야 했다. 성경은 학과점수 5점 교회출석이 5점으로 10점을 받아야 하는데 급장은 성경점수는 물론 교회 출석 점수를 잘 받아야 했다.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요일이면 낮에는 여전히 돌아다니다가 밤 예배가 끝날 때 쯤 교회를 찾아갔다. 목사님께 도장을 찍어 달라고 했지만 낮에도 계속 나오면 도장을 찍어주겠다는 말에 그만두고 우리 동네에 있는 교회를 공략하기로 했다. 나는 이웃에서 교회 다니는 아는 또래에게 부탁을 하여 목사님의 딸 여학생을 소개 받아 문제를 해결하면서 시간이 좀 걸려 그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일요일은 아침 주일학교부터 예배를 드리고 종일 봉사를 하게 되었다. 셋은 더 이상 일요일에는 어울리지 못하고 토요일 오후에만 모여 놀면서 그전처럼 놀지 못한 아쉬움에 여름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영도다리를 건너다니면서 중학생으로 첫여름을 맞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영도 해안 제2송도에서는 보트를 타고 해수욕을 했다. 우리 셋은 자동차 튜브를 구해가지고 수영을 다녔다. 어느 날 해안 길에서 싼타루치아와 로렐라이를 실감나게 가르쳐 줘 감동을 받았던 음악선생님을 만나 반가웠다. 그때 음악선생님이 바바리코트를 바람에 날리면서 걸어오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이후 나는 육군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목사가 되었다. 요즘도 가끔은 바바리차림으로 비 내리는 영도다리를 건너 선창가를 두루 거쳐 해안 길을 걸으며 산타루치아를 부른다. 201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