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집 제17권 / 서(序)
죽산박씨족보 서(竹山朴氏族譜序)
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수(壽) 81세
무릇 씨족은 사세(四世)가 되면 시복(緦服)을 입고, 오세(五世)가 되면 단문(袒免)할 따름이다. 시(緦) 이상을 ‘씨족’이라 하고, 단문 이하를 ‘동성(同姓)’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날의 그 씨족의 계보는 동고조(同高祖)의 친(親)에 그쳤으니, 대체로 씨족은 자상한 것이요, 동족은 간략한 것이다.
후세에는 보법(譜法)이 점차 넓어져 초조(初祖)로부터 이하를 빼지 않고 원근을 똑같이 수집하여 편록(編錄)하니, 비록 백세 동안 유택(遺澤)의 오르고 내림이 같지 않고 평생에 경조(慶弔)간 안면 접촉이 없었을지라도 그 족보만 살펴보면 모두가 한 집안과 같아서 근본을 돈독히 하고 씨족을 수합하는 성대함이 이에 이르러 더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정리(情理)의 능통(能通)과 의사(意思)의 간곡함은 결국 간혹 사세의 족보를 만들 때보다 못하기도 하니, 요컨대 이 두 가지가 각자 수보(修譜)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된다. 이제 그 족보를 편수(編修)한 사람이 있으니, 광주(光州)의 박사문(朴斯文) 모(某)가 그 사람이다.
박씨(朴氏)는 죽산(竹山)의 대성(大姓)이니, 고려(麗朝) 때부터 아조(我朝)의 중엽까지 유명한 큰 인물이 대대로 태어나 공훈으로 기록되고 역사책에 기록된 사람이 끊임없었으니 이는 생략한다. 죽림처사(竹林處士) 휘 경(璟)에 이르러 비로소 광주에서 살게 되었으니, 광주에 죽산박씨(竹山朴氏)가 있게 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죽림공(竹林公)은 충효(忠孝)로 입신하였고, 문행(文行)으로 가문을 전했으며, 포의(布衣)로 판탕(板蕩)할 때에 분연히 거의(擧義)하고 공을 이룬 뒤에 벼슬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았는데, 후손들이 훌륭한 것은 조상의 유풍이 충분히 있어서이다.
광주는 선향(仙鄕)으로 예로부터 사대부 명가가 많았는데 죽산의 씨족은 반드시 그 속에 든다. 오래전에 죽산박씨의 전보(全譜)가 있었으나 이제 박군(朴君)이 속수(續修)하는 것은 그 중조(中祖) 죽림공으로부터 이하의 자손을 다 기록하고자 함이다.
대체로 굳이 사세의 규모로 국한하지 않았고, 또한 멀리 관향(貫鄕)이 같은 씨족을 수합하여 수보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았으니, 이는 고금의 보법을 하는 사이에 거의 절충한 바가 있다. 아, 같은 가문에서 출생했으면 조(祖)가 같고, 그 중조(中祖)를 같이했으면 종(宗)이 같으며, 지내는 곳이 같으면 태어남에 서로 경하하고 죽음에 서로 슬퍼한다.
친함이 다하여 복(服)이 다하는 것은 천연(天然)이요, 애경(哀慶)이 서로 이어져 인정이 깊고 정의(情誼)가 두터운 것은 인심(人心)이다. 인심으로 천연을 참고한다면, 박군이 이 족보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종(宗)이 박씨와 혼인을 맺은 정의의 있음이 전조(前朝)로부터 이미 그러했으니, 대체로 그 고향 마을이 지금 한양(漢陽)의 양교(兩郊)에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리 집안이 기묘화(己卯禍)를 당하자 박씨의 선세 수찬공(修撰公)이 또한 금천(衿川)으로 물러가게 되었고, 이윽고 우리 가문이 남쪽 고을로 내려오자 박씨도 시골로 내려오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이제는 비록 자손의 세대가 멀어져 마치 서로 잊은 듯하지만, 통가(通家)의 정의의 깊음이 대략 이에 6, 7백 년이 되었다. 이로써 박군이 서문을 부탁하니,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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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竹山朴氏族譜序。
夫族四世爲之緦。五世則袒免而已。緦以上謂之族。袒免以下謂之同姓。故古之譜其族者。止於同高祖之親。蓋族所詳而同姓所畧也。後世譜法寢廣。自初祖以降。罔有遠邇。一例裒稡編錄。雖百世遺澤升沈不同。平生顔面慶弔靡接者。按其譜而皆若一家之內。惇本收族之盛。至此而無以加矣。然其情理之融貫。意思之惻怛。終或有遜於譜四世之爲者。要之是二者各爲修譜之一道哉。今有修其族譜者。光州朴斯文某其人也。朴氏竹山大姓。自麗朝迄我中葉。名碩世起。彝常之紀。汗簡之編不絶書。此可畧也。至竹林處士諱璟。始居于光。光之有竹山朴氏自公始。竹林公以忠孝立身。以文行傳家。布衣奮義於板蕩之日。受官不居於功成之後。嗣承濟濟。綽有祖風。光仙鄕也。古多簪纓名家。而竹山之族。必居其間。舊有竹山朴氏全譜。今朴君之續修也。則自其中祖竹林公以下子孫盡錄之。蓋非必限四世之規。而亦不以遠蒐同貫。爲修譜之能事。是於古今譜法之間。庶幾有所折衷者。嗚呼。同出則祖同。同其中祖則宗同。同居則生相慶而死相哀。親盡而服盡者天也。哀慶相續而情深誼厚者人也。以人參天。宜乎朴君之爲是譜也。吾宗之於朴氏。有婚姻之好。自前朝已然。蓋緣其鄕井同在今漢都之兩郊。及吾家罹己卯禍。朴氏之先修撰公亦自屛於衿川。旣已吾家下落南鄕。則朴氏之下鄕。亦與之後先。今雖雲仍世遠。有若相忘。而通家誼深。蓋六七百秊於斯矣。是以於朴君之屬之序也。不敢以無文辭。 <끝>
노사집 제17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