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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응청(黃應淸)
[본관] 평해(平海) / 경상북도 울진지역의 옛 지명임
[진사] 명종(明宗) 7년(15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進士) 2등(二等) 12위(17/100)
[생졸년] 1524년(중종 19)∼1605년(선조 38) / 壽 81歲
[거주지] 평해(平海)
1524년(중종 19)∼1605년(선조 38).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청지(淸之), 호는 대해(大海). 아버지는 훈도 황우(黃瑀)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참판(參判)에 오른 황여일(黃汝一)이 조카이고,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황중신(黃中信)이 공의 손자다.
1552년(명종 7)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2위로 합격하고, 1580년(선조 13) 별시에 응시했으나, 시험 문제가 좋지 않음을 보고 바로 과장을 나왔다. 1584년(선조 17) 천거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개성(開城) 연은문참봉(延恩門參奉)에 제수되었을 때는 박연폭포(朴淵瀑布)만 보고 바로 돌아와 버렸다.
1594년(선조 27)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에 제수되었을 때, 4가지 시폐를 개진하자, 왕이 가납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제수하였다. 진보현감 시절 민심을 수습하였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5)‚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아계 이산해는, 평해(平海)로 귀양갔을 때 항상 왕래하며 문질(文質)하였으며, 공의 학문이 주정함에 탄복하였다. 문집으로 《대해집(大海集》이 있다. 1671년(현종 12)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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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대해 황선생 행장(大海 黃先生 行狀)
선생은 성이 황씨(黃氏)이고 이름이 응청(應淸), 자가 청지(淸之), 자호(自號)가 대해(大海), 본관이 평해(平海)이다. 대대로 평해군(平海郡) 정명촌(正明村)에서 살았고, 고려 때에 첨의평리(僉議評理) 황서(黃瑞)의 후손이다.
증조 황옥숭(黃玉崇)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지냈고, 조부 황보곤(黃輔坤)은 생원에 합격하였다. 부친 황우(黃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모친 삼척 김씨(三陟金氏)는 김빈(金璸)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 1524, 중종 19)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과 지극한 행실이 있어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웠다. 임자년(壬子年, 1552, 명종 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경오년(庚午年, 1570, 선조 3)별시(別試)에 응시하였을 때, 책제(策題)에 좋지 않은 말이 있는 것을 보고서 대책(對策)을 올리지 않고 나왔다.
이로부터 두문불출하고 고고하게 지내며 학문에 힘쓰고 행실을 닦아 덕의가 세상에 드러났다. 갑신년(甲申年, 1584, 선조 17)에 조정에서 유일(遺逸)로 천거하고 선생을 불러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에 제수되어 비로소 부임하여 박연(朴淵)을 실컷 감상하고 돌아왔다.
갑오년(甲午年, 1594, 선조 27)에 장원서 별좌(掌苑署別坐)에 제수되었다. 당시 임금의 어가(御駕)가 의주(義州)에서 돌아왔는데, 선생이 스스로 분수와 의리상 편치 않게 여겨 애써 대궐에 나가 네 가지 폐단을 상소하여 진달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이치에 맞아 임금이 가납한 뒤에 이에 발탁하여 등용하라는 명이 있었다.
마침내 진보 현감(眞寶縣監)에 제수되어 흩어져 도망간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피폐한 백성들을 어루만져 보살피니 고을이 마침내 완비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왔다. 갑진년(甲辰年, 1604, 선조 37) 정침(正寢)에서 임종하여 호전(虎田)에 장사 지냈다.
아, 선생은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으로정성(定省)의 예와감지(甘旨)의 봉양을 시종 게을리함이 없었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죽만 마시며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서 하루에 한 번 집에 들러서 어머니를 보살피고 안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모친의 상을 당해서도 애모(哀慕)함이 앞의 부친의 상처럼 한결같아 지극한 정성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지주(地主)가 온 마을 사람들의 말로 관찰사(觀察使, 오늘날의 도지사)에게 알려 여러 차례 치계(馳啓)하였고, 만력 무인년(戊寅年, 1578, 선조 11)에 정려(㫌閭)가 내려졌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평소 거처할 적에 자신을 단속함에 고인을 법으로 삼아 행동하였다. 방에 앉아서 좌우의 도서를 언제나 읽고 사색하여 잠자고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스스로 체득하는 즐거움에 빠져 지냈으니 대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 원근에서 학도들이 줄지어 모여들자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에 관하여 강론하고 해명하며 어려운 것을 물었다. 이를테면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과 대암(大庵) 박성(朴惺) 선생 같은 분과 편지를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귀일점을 논변하여 밝혔다. 그것을 한 가정에서 시행하자 고을 사람들이 따르고 교화되어 마침내 바닷가 마을이 예의 있는 고을로 변하게 되었으니, 우리 유학에 끼친 공이 매우 크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상국(相國)이 일찍이 평해(平海)에 귀양 와서 살고 있었는데, 선생의 덕행을 사모하고 좋아하여 평소 공부를 하며 마음에 홀로 얻은 것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학문에 종사(從事)하는 사람도 아니고 다만 나는 동정(動靜)의 득실을 대강 알 뿐이다.
비유하자면 티끌을 쓸 때 쓸면 쓸수록 먼지가 더욱 일어나므로 차라리 쓸지 말고 그대로 두어 먼지가 절로 가라앉게 하는 편이 나은 것과 같으며, 비유하자면 우물을 칠 때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물이 더욱 흐려지므로 차라리 휘젓지 않고 그대로 두어 물이 절로 맑아지도록 하는 편이 나은 것과 같다.
이것이 어찌 정(靜)의 힘이 동(動)을 제어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계가 탄복하여〈정명촌기(正明村記)〉를 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아, 선생의 학문은 주정(主靜)에서 체득함이 심오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고을 사람들이 선생의 도를 추모하여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낸다.
저술한《기성지(箕城志)》와《향당헌(鄕黨憲)》등의 책은 법도가 조리 정연하니 모두 본받을 만하다. 부인 울진 장씨(蔚珍張氏)는 만호(萬戶) 장한보(張漢輔)의 딸로 아들 셋을 낳았다. 첫째 거일(居一)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중건(中健)은 현명하였지만 요절하여 종제(從弟)인 중미(中美)의 둘째 아들 현(鉉)을 후사로 삼았고, 차남 중신(中信)은 생원(生員)이다.
둘째 유일(有一)은 성균관 정자(正字)인데, 구례(舊例)에 따르면 해시(解試향시)에 합격하고 죽은 자는 성균관 정자에 제수하라는 고신(告身)이 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중길(中吉)과 중미(中美)이다. 셋째 경일(慶一)은 아들이 없어 중미(中美)를 후사로 삼았다. 딸 하나는 김시상(金是相)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의 아들이 둘인데, 첫째 천일(千一)은 외아들 중재(中載)를 낳았고, 둘째는 억일(億一)이다.
내외(內外)의 증손과 현손의 남녀가 또 약간 명이 있다. 선생의 현손 황명로(黃命老)는 바로 정자(正字) 공의 손자이자 황선(黃銑)의 아들인데, 좋은 의지와 품행이 있어 선생의 언행(言行)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뜻을 극진히 하여 가장(家狀)을 만들려고 수소문하며 지혜와 덕과 문장력을 겸비한 군자에게 한마디 말을 구하여명도(冥道)를 꾸미려 하였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어진 이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하였는데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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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남은 …… 배웠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도리를 행하고 나서 또 글을 배운다는 말이다.《논어》〈학이(學而)〉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제자(弟子)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오면 공손하며, 언행을 삼가고 미덥게 하며, 널리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히 해야 한다. 이
렇게 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는 말이 있
다.
[주02] 경오년:
《대산집(大山集)》의〈대해황공묘갈명(大海黃公墓碣銘)〉과《석계집(石溪集)》의〈진보현감대해선생행장(眞寶縣監大海先
生行狀)〉에는 경신년(1560, 명종15)으로 되어 있다.
[주03] 책제(策題)에 …… 것:
경신년(庚申年, 1560, 명종 15) 별시의 시관이던 홍섬(洪暹)과 윤춘년(尹春年)이 책제에 외척과 환관의 폐단을 예로 들며 치란의
조짐을 논하라는 제목을 냈는데, 명종은 당시 윤원형(尹元衡) 등 외척이 전횡하던 폐단을 풍자한 것이라고 불쾌하게 여겨 시관을 문
책하였다.《明宗實錄 15年 9月 10日》
[주04] 정성(定省)의 예: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줄임말로,《예기》〈곡례(曲禮)〉에 “모든 자식 된 사람의 예는 겨울이면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
름이면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편안하게 보아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이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
凊, 昏定而晨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5] 감지(甘旨)의 봉양:
부모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으로,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예기》〈내칙(內則)〉에 “새벽에 어버이에게
아침 문안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며, 해가 뜨면 물러나 각자 일에 종사하다가, 해가 지면 저녁 문안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올
린다.[昧爽而朝, 慈以旨甘, 日出而退, 各從其事, 日入而夕, 慈以旨甘.]”라는 말이 나온다.
[주06] 지주(地主):
성주(城主)와 같은 말로, 고을의 원을 가리킨다.
[주07] 이산해(李山海):
1539~160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ㆍ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지번(李之蕃)의
아들이고, 어려서부터 숙부 이지함(李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진사가 되고, 1561년(명종 16)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으나 양사로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595년에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주08] 만호(萬戶):
조선 시대 때에 각 도의 여러 진(鎭)에 소속된 종4품(從四品)의 무관직(武官職) 벼슬이다.
[주09] 명도(冥道):
보통 명계(冥界)로 염라대왕이 있다는 지옥의 저승 세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묘도(墓道)를 가리킨다.
[주10] 어진 …… 마련이다:
소식(蘇軾)이 “하늘의 도는 기필할 수 있는가? 현자라고 해서 반드시 귀해지는 것이 아니며 인자라고 해서 반드시 천수를 누리는 것
이 아니다. 하늘은 기필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인자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게 마련이다.[天可必乎? 賢者不必貴, 仁者不
必壽. 天不可必乎? 仁者必有後.]”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古文眞寶後集 卷8 三槐堂銘》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