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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3권 / 신도비(神道碑)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증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연양군 문청 이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贈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延陽君文淸李公神道碑銘 幷序)
만력(萬曆) 6년(1578, 선조11) 10월 계미일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증 좌찬성(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贈左贊成) 문청(文淸) 이공(李公)이 함양(咸陽)에서 돌아가셨다. 공의 휘(諱)는 후백(後白)이요, 자는 계진(季眞)이다.
그 선조 무(茂)는 처음에 당나라를 섬겨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는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의자왕(義慈王)을 평정하고 머물러서 신라를 섬겼다. 해고(海臯)에 살았는데 해고는 지금 연안(延安)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연안을 본관으로 하게 된 것이다.
증조의 휘는 숙감(淑瑊)으로 성종(成宗)를 섬겨 어느 도의 관찰사를 하였다. 조부의 휘는 세문(世文)으로 관직이 모 능참봉에 이르렀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휘는 국형(國衡)으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임씨(林氏)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은 태어나서 9세에 부모를 잃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명민하였다.
일찍이 이기(李芑)를 좇아 사장을 배웠는데 며칠 만에 문득 돌아갔다. 사람들이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기(芑)의 마음씨는 미세한 것까지도 일체 모두 숨기어 사람들이 모르게 하려고 하는데, 군자의 마음이 어찌 이래서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기와 절연하였다.
이기의 무리 중에 위사 공신(衛社功臣)이 된 자가 있었는데 공이 절에서 독서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만나려 하였으나 공이 곧장 거처를 옮겨 그를 피하였다. 동은 선생(峒隱先生) 이공(李公) 의건(義健)이 항상 그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진실로 장한 선비로다.” 하였다.
공은 27세에 진사가 되었다. 가정(嘉靖) 34년(1555, 명종10)에 을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임시로 맡았다가 세자시강원에 뽑혀 들어가 설서(說書)가 되었다.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으로 개임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겼으며, 사간원에 들어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개임되었다가 뽑혀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고 병조로 옮겼다. 이윽고 천거를 받아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檢詳)이 되었고 마침내 사인(舍人)으로 옮겼다.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서 홍문관에 들어가 응교(應敎)가 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공은 젊어서 최공(崔公) 경창(慶昌), 백공(白公) 광훈(光勳)을 좇아 가시(歌詩)를 지어 이름이 당세에 높았다. 사가독서할 때 항상 호당(湖堂)에 있으면서 여러 학사들과 문장을 과제로 지었는데, 학사들이 공의 가시를 보고는 모두가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융경(隆慶) 원년(1567)에 장황제(莊皇帝)가 한림원 검토(翰林院檢討) 허국(許國)과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을 보내어 조서를 반포하였을 때 공은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서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에 충원되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뽑히었다가 얼마 안 되어 참지병조(參知兵曹)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문순공(文純公) 이 선생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발탁되자, 소인 김개(金鎧)가 속으로 불만을 품고서 문순공을 매우 심하게 비난하였다. 공과 기 문헌공(奇文憲公) 대승(大升)이 노하여 그를 꾸짖었다. 김개가 진급하여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지금의 유림들은 괴상하게 일 벌이기를 좋아하니 신이 속으로 걱정됩니다.
옛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조정에서 죄를 얻은 것은 모두 괴상한 짓을 하는 무리로 말미암아 그 화를 빚은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통렬하게 제재를 가하소서.”하였다. 정 문청공(鄭文淸公) 철(澈)이 이르기를, “이는 김개가 이모와 기대승을 중상한 것이다.”
하고 즉시 대면을 청하여 임금에게 말하기를, “김개가 성총(聖聰)을 형혹(熒惑)하게 하니, 어찌 화를 유림(儒林)에게 전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매우 노하여 이르기를, “정철이 지나치다.” 하니 정공이 대답하기를, “전하의 진노가 비록 엄할지라도 신의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김개의 형혹의 죄를 말하니 임금이 결국 김개를 축출하고 그 관작(官爵)을 삭탈하였다.
얼마 있다가 공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고 또 병조(兵曹)에 들어가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개임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여 지키는 바가 있었다. 승정원에 있을 때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는데 용모가 엄숙하고 굳세어서 범할 수 없었으니 대궐이 숙연하여 궁중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 후궁(後宮)의 나인들이 서로 경계하여 이르기를, “이모가 도승지가 되었으니 말소리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하라.” 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오래 승정원에 있었다. 문충공(文忠公) 박 선생 순(淳)이 주상에게 고하기를, “증자(曾子)가 ‘6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고, 백 리(百里)의 명을 맡길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모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하였다. 5년(1571)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가선대부 예조 참판(嘉善大夫禮曹參判)에 발탁되었고, 사헌부에 들어가 대사헌이 되었다가 이조 참판으로 옮겨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하였다.
6년에 대기근이 발생하니 왕이 화공에게 명하여 유민도(流民圖)를 그리게 하고 공에게 말씀하기를,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불쌍하다. 이를 위해서 내병(內屛)에 그림을 그려 놓았으니 경은 시를 지어서 부덕함을 경계하라.” 하였다. 공이 이에 시 10편을 지어서 올렸다.
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에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북경으로 가서 국계(國系)를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이때 천자가 새로 즉위하였는데 대학사에게 명하여 《세종황제실록(世宗皇帝實錄)》을 편수하게 하였다. 예부상서 육수성(陸樹聲)이 공의 청에 감동하여 즉시 자세히 아뢰고, 실록에 실을 것과 인하여 또 이어서 편수하는 《회전(會典)》에도 넣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좋다.” 하였다.
겨울에 사신행이 돌아오니 상께서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듬해 상이 대신들에게 묻기를, “누가 형조 판서를 할 만한가?” 하니 대신들이 대답하기를, “이모가 할 만합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형조 판서를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어떤 일로 면직되었다.
또 이듬해(1575) 상이 공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고 김공(金公) 계휘(繼輝)를 평안 관찰사로 삼으니, 곧 떠나려고 하는데 문성공(文成公) 이 선생이 조정에 말하기를, “이모와 김계휘 두 사람은 조정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차자(箚子)를 올려 이르기를, “이모와 김계휘는 전장(典章)에 밝고 시무(時務)에 숙달되었으므로, 마땅히 머물게 하여 조정을 위해 써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2년 후에 불러서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을 제수하였다.
공이 전관(銓官)으로 있을 때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다. 비록 옛 친구가 여러 번 가서 그를 만나더라도 번번이 기뻐하지 않았다. 어떤 족인(族人)이 공을 찾아가서 만나보고 벼슬을 구하자 공이 정색을 하며 베겟머리의 효렴부(孝廉簿)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그 족인 이름도 장부 속에 있었다.
공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자네 이름을 기록해 놓은 지 오래되었으니, 자네가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벼슬에 추천할 수 있었을 텐데.” 하니 그 족인이 매우 부끄러워하며 갔다. 매번 주의(注擬)를 할 때마다 낭료(郞僚)들에게 두루 물었는데 만약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밤새도록 두려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내가 주상을 속였다.”라고 말하였다.
처음에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복심(腹心)이 되어 윤 충의공(尹忠毅公) 임(任)과 유 충숙공(柳忠肅公) 관(灌)을 죽이고, 또 큰 옥사를 일으켜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과 계림군(桂林君) 이류(李瑠)를 죽였으니, 영정(榮靖)을 아직 장례도 치르기 전에 외가가 모두 주륙을 당하였다.
원형 등이 또 인성왕비(仁聖王妃) 박씨가 몰래 이완을 왕으로 세우기를 꾀했다고 무고하였고, 윤임과 유관이 죽자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선조가 보위를 이어받자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위사 공신의 호칭을 삭제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인성왕비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에 위사 공신의 호칭을 삭제할 것을 명하고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으로 하여금 교서를 지어서 올리게 하였는데, 귀영이 지은 말이 졸렬하여 뜻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상이 근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충(忠)과 사(邪)를 변별하는 것은 국가의 지대한 일이니, 마땅히 그 언사를 바르게 하여 중외의 사신(士臣)들에게 효유(曉諭)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같이 엉성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곧 공에게 교서를 고쳐 짓도록 명하였다.
공이 분발하여, “시비(是非)가 비로소 밝혀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에 사양하지 않고 즉시 교서를 지어 바쳤는데, 교서를 선포하는 날 백관들 중에는 감격하여 이따금 주르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국론이 마침내 크게 정해져서 선조의 평명(平明)한 정치를 열게 되었으니, 공의 공로가 컸던 것이다.
얼마 후에 인성왕비가 돌아가시자 영의정 권철(權轍)이 의논드리기를, “전하께서는 마땅히 자최복(齊衰服)을 입어야 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왕자(王者)는 국체(國體)를 계승하는 자이니 비록 형제라고 하더라도 3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왕의 후사가 되시며, 선왕께서는 실로 영정왕(榮靖王 인종(仁宗))의 계통을 이으셨습니다. 이러하니 전하께서는 인성왕비에 대하여 조손(祖孫)의 관계가 있으므로 마땅히 3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결국 그 말을 따라 마침내 삼년상을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 6월에 공이 병으로 이조 판서를 고사하였는데 호조 판서로 개수되었다. 10월에 말미를 청하여 함양(咸陽)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누린 햇수가 59년이다. 상이 부고를 듣고 매우 슬퍼하며 조제(吊祭)를 내렸다. 그해 12월 경진일에 파주(坡州) 광탄(廣灘)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기상이 청수하여 바라보면 신심(神心)이 전일해 보였고 지조가 견고하여 옮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남의 아름다운 말을 들으면 당장에 따라 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사귐은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해졌다. 몸 다스림이 청렴결백하여 담담한 나물죽을 마치 빈한한 선비처럼 즐겨 먹었고, 사방에서 물품을 보내주었으나 받은 적이 없었다.
관찰사를 할 때에는 명분 없는 조세를 모두 면제하였다. 공이 돌아오고 나서 어사(御史) 허봉(許篈)이 북방을 순무(廵撫)하던 중에 변경에서 수비병이나 백성을 만나면 그들은 이공이 무탈하신지를 반드시 물었다. 허봉이 이로써 공이 그들을 사랑한 은덕이 북방에 남아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공이 평소에 청양군(靑陽君) 심공(沈公) 의겸(義謙)과 친하였는데 소인들 중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김효원(金孝元)이 항상 이르기를, “이모는 6경(六卿)에 알맞은 재목이다. 만약 정승이 된다면 내가 마땅히 탄핵할 것이다.” 하였다.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이르기를, “이모가 포용력은 없지만 지금 이른바 6경 중에서 이모보다 어진 자를 내가 보지 못했으니, 비록 정승이 된다고 해도 저 효원이 어찌 탄핵할 것인가.” 하였다. 처음에 선조께서 홍문관 부제학 유공(柳公) 희춘(希春)에게 명하여 선현(先賢) 김 문경공(金文敬公) 굉필(宏弼), 정 문헌공(鄭文獻公) 여창(汝昌), 조 문정공(趙文正公) 광조(光祖), 이 문원공(李文元公) 언적(彥廸)의 언행을 논차(論次)하여 〈유선록(儒先錄)〉 4편을 만들도록 하고 공에게 서문을 쓰게 하여, 위로는 정학(正學)의 근원을 밝히고 아래로는 전도(傳道)의 계통을 서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공의 뛰어난 기억력은 늙어서도 쇠퇴하지 않았다. 지은 시로는 《청련집(靑蓮集)》 1권이 있는데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다. 공이 돌아가신 지 12년(1590)에 현황제(顯皇帝)가 조서를 내려 《회전(會典)》을 반포하였다. 공이 국계를 바로잡기를 청한 공으로 특별히 명하여 연양군(延陽君)을 추봉하였으며,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의 호를 내리고 시호를 문청(文淸)이라 하였다. 후에 정부에서 공의 청렴결백함이 높이 알려진 관계로 이조에 명하여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모부(某府) 홍씨(洪氏)는 모군 군수 홍처성(洪處誠)의 딸로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선경(善慶)은 어느 도의 찰방(察訪)이었다. 장녀는 안창선(安昌善)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기성헌(奇誠獻), 삼녀는 박봉현(朴峰賢)에게 시집갔다.
찰방은 5남 4녀를 낳았다. 아들 태길(泰吉)은 현감(縣監), 유길(有吉)은 현령(縣令), 복길(復吉)은 별제(別提), 익길(益吉)은 현령, 정길(井吉)은 현감을 지냈다. 장녀는 유희성(柳希成)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최기(崔墍)에게, 삼녀는 이진선(李振先)에게, 그 다음은 김설(金揲)에게 시집갔다.
공은 선조조(宣祖朝)의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 왕조에 나아가 박 문충공(朴文忠公)ㆍ이 문성공(李文成公) 두 어진 이와 더불어 서로 덕으로써 양보하고 의리로써 이끌었으며, 청렴한 명성으로 고위직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른바 붕당의 설이 날로 더욱 치열해져서 공이 비록 이미 죽었으나 소인들이 화를 만들기를 그치지 않아 두 어진 이가 모두 중상을 입었으니, 슬프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이무(李茂)가 중국으로부터 / 李自中國
처음으로 연안에 이주하였네 / 始徙于延
관찰사는 강직하여 / 觀察侃侃
그 명성 자자하였네 / 烈聞甚燀
공이 문장을 닦아 / 公治文章
마침내 대궐에 거하게 되니 / 遂翔王庭
붉은 끈에 충아 달려 / 衝牙朱組
패옥 소리 쟁쟁 울렸도다 / 有鏘璜聲
공이 유학을 융성케 하시고 / 公隆儒學
우리 문순공을 보위하며 / 衛我文純
대도로 귀의하여 / 依歸大道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셨도다 / 以觝憸人
공은 훌륭한 명망이 있으시어 / 公有令望
원로신하들이 천거하니 / 元臣交擧
이에 법관을 제수하시어 / 乃授士師
9경(九卿)에 앉히셨도다 / 九棘以處
이에 부월을 주시니 / 乃畀鈇鉞
북방에서 선정 베풀었고 / 朔方于宣
혁혁한 그 천관 / 赫赫天官
어찌 그리도 소임이 중요했는지 / 何任之專
공은 훌륭한 덕행이 있으시어 / 公有懿德
문청공이 벗 삼았으며 / 文淸攸友
문충공은 선배시요 / 文忠維前
문성공은 후배시도다 / 文成維後
진실로 현명한 사람들은 / 允也哲人
끌어주고 밀어주었으나 / 引之挽之
아 저 간사한 자들은 / 嘻彼憸人
참소하는 말이 심하였도다 / 讒言其滋
임금께서 옳고 그름 밝히시어 / 王明邪正
이에 위사 공신을 삭제하고 / 爰削衛社
공이 교서를 지어 / 公作敎書
세상에 선포하셨도다 / 布聞于下
덕음이 비통하니 / 德音惻怛
무지한 백성들도 눈물 흘렸고 / 芻蕘亦泣
시비가 정해지니 / 是非旣定
왕도가 바로 섰도다 / 王道乃立
현명한 이는 기리고 / 哲人則譽
간사한 자는 비판하여 / 憸人則訾
돌에다 시를 새기나니 / 刻詩于石
백세토록 옮기지 말지어다 / 百世不陊
<끝>
[註解]
[주01] 자헌대부 …… 이공 : 조선 중기의 문신 이후백(李後白, 1520~1578)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6세 때 향시에 장원급제했고, 명종 1년(1546) 사마시를 거쳐 1555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선조 2년(1569)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함안(咸安)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청련집(靑蓮集)》이 있다.
[주02] 선조 무(茂) : 이무(李茂)로 연안(延安) 이씨(李氏)의 시조이다. 당나라 고종 때 중랑장을 지내다가 나당연합군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식읍 1천호를 받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주03] 연안(延安) :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의 신라 시대 때의 이름이다.
[주04] 이기(李芑) : 1476~155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다. 연산군 7년(1501) 식
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중종 22년(1527)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세력을 꺾었다. 죽은 뒤 시호는 문경(文敬)이
내려졌지만 선조 초 훈작(勳爵)이 추삭(追削)되고 묘비도 제거되었다.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의 원흉이다.
[주05] 위사 공신(衛社功臣) : 조선 명종 1년(1546)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 등 대윤 일파를 몰아낸 자들에게 내린 훈명이
다. 1등에 정순붕 등 4인, 2등에 홍언필 등 9인, 3등에 송기수 등 4인, 4등에 최연 등 7인 등 총 29인이었다.
처음 칭호는 보익 공신(保翼功臣)이었다가 고쳐졌고, 공신 등급도 재조정되었다. 보익 공신은 권력을 장악한 소윤 일파가 상대 세
력을 제거한 후 시행한 논공행상이었으며, 친ㆍ인척 등을 모록(冒錄)하기도 하여 사림파의 많은 비난을 받아오다가 선조 10년
(1577)에 모두 삭훈되었다.
[주06] 이공(李公) 의건(義健) :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의건(李義健, 1533~1621)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
隱)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배천 군수 이수한(李守漢)이며, 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이다. 1564년(명종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뒤에 학행으로 돈녕부 직장이 되었으나 친상으로 곧 사직하였으
며, 1610년(광해군2) 이항복(李恒福)의 주청으로 공조 좌랑이 되고, 이어 공조 정랑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시명을 떨쳤고, 후학의 양성에 전력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은유고》가 있다. 그의 글씨는 광평대군 이여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주07]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 시대에 젊고 유능한 문신(文臣)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힘쓰도록 한 제도이다. 세종 대 집현전(集賢
殿) 학사들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되었는데 세조 때 집현전의 폐지로 없어졌다가,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호
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했다.
중종 2년(1507)에 연산군 때 폐지된 독서당을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했다가, 중종 12년(1517)에는 두모포(豆毛浦)에 동호 독서
당(東湖讀書堂)을 열었다.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면서 그 기능을 계승하게 되었다. 휴가 기간은 1개월에서 장가
(長暇)라 하여 오랜 기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대체로 6인 내외가 뽑혔다.
[주08] 최공(崔公) 경창(慶昌) : 조선 중기의 시인 최경창(崔慶昌, 1539~1583)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
竹)이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당시(唐詩)에도 능해 삼당파(三唐派)로도 일컬어졌다. 선조 1년
(1568) 증광시문과에 급제했다. 시와 서화(書畵)에 뛰어났고, 피리도 잘 불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
죽유고》가 있다.
[주09] 백공(白公) 광훈(光勳) :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훈(白光勳, 1537~1582)으로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본관은 해미(海
美)이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린다. 이후백과 박순에게 수학했으며 22세에는 진도에 귀양 와 있던 노수
신에게 배웠다.
명종 19년(1564)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書道)를 즐겼다. 글씨
에도 일가를 이루어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선조 23년(1590), 강진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옥봉집》
이 있다.
[주10] 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의 다른 이름이다. 문관 가운데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학업을 닦게 하던 서재이다.
조선 세종 8년(1426)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처음에는 자택에서 독서했으나 후에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
하게 했다.
성종 23년(1492)에 지금의 마포 한강변에 있던 사찰을 확장하여 남호 독서당(南湖讀書堂)을 열었고, 이후 중종 때 두모포(豆毛
浦)에 동호 독서당(東湖讀書堂)을 열었다. 두모포는 현재 성동구 옥수동이다.
[주11] 융경(隆慶) : 명나라 제12대 황제인 목종(穆宗)의 연호로 기간은 1567~1572년이다.[주-D012] 장황제(莊皇帝) : 명나라 목종의
시호가 계천융도연의관인현문광무순덕홍효장황제(契天隆道淵懿寬仁顯文光武純德弘孝莊皇帝)이므로 줄여서 한 말이다.
[주13] 허국(許國) : 1527~1596. 명나라의 이름난 유학자이다. 휘주부(徽州府) 흡현(翕縣) 사람으로 자는 유정(維楨), 시호는 문목(文
穆)이다. 예부상서 겸 동각태학사(禮部尙書兼東閣太學士)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서에 《문목문집》이 있다.
[주14] 위시량(魏時亮) : 1529~1591. 명나라의 이름난 유학자이다. 남창(南昌) 사람으로 자는 공보(工甫), 호는 경오(敬吾), 시호는 장
정(庄靖)이다. 중서 사인(中書舍人), 남경 대리승(南京大理丞)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저서에 《대유학수
(大儒學粹)》가 있다.
[주15] 융경(隆慶) …… 때 : 명나라에서 목종이 등극하였음을 알린 것이다.
[주16] 문순공(文純公) 이 선생 : 조선 중기의 학자ㆍ문신인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
는 퇴계(退溪) 또는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다. 경북 예안(禮安) 출생으로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
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568년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했다.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과 괴
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가 있다.
[주17] 김개(金鎧) : 1504~156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방보(邦寶), 호는 독송정(獨松亭)이다. 1525년(중종
20) 진사가 되고, 1540년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1552년(명종7)에 청백리에 녹선되었
다.
[주18] 기 문헌공(奇文憲公) 대승(大升) :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
彦), 호는 고봉(高峰) 또는 존재(存齋)이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전남 나주(羅州) 출생이다. 1549년 사마시를 거쳐, 1558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조광조(趙光祖)와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고, 1570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1572년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객사했다. 스승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으로 사단칠정(四端
七情)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때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 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으로 남아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고봉집》과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주19] 조광조(趙光祖) :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510년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했고, 1515년 해 증광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중종에게 발탁되어
관계에 진출했으나 중종의 지지를 잃어 훈구파가 기묘사화를 일으키자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주20] 정 문청공(鄭文淸公) 철(澈) : 조선 중기의 문신ㆍ시인인 정철(鄭澈, 1536~1593)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桂林君)이 관련되자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유배지에 따라다녔다.
1561년 진사시에, 다음 해 별시 문과에 각각 장원급제했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3년 동안 강원ㆍ전라ㆍ함경도 관찰사
를 지내면서 시작품(詩作品)을 많이 남겼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렸고 1591년 광해
군의 책봉을 건의했다가 진주(晉州),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강화(江華) 송정촌(松亭村)에 우거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창평(昌平)의 송강서원, 연일군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배
향되었다. 문집으로 《송강집》과 《송강가사》 등이 전한다.
[주21] 문충공(文忠公) …… 순(淳) :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인 박순(朴淳, 1523~1589)으로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
(思菴)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53년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572년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했다. 극심한 동서당
쟁(東西黨爭) 속에서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했다.
시문서(詩文書)에 모두 뛰어났다.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사암집》이 있다.
[주22] 6척의 …… 만하다 : 《논어》 〈태백〉 제6장에서 증자가 한 말이다. “육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고, 백 리의 명을 맡길 만하며,
큰 절개에 임해서 빼앗을 수 없다면 군자다운 사람인가? 군자다운 사람이다.[可以託六尺之孤、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
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주23] 유민도(流民圖) : 송나라의 정협(鄭俠)의 유민도가 있다. 정협은 복청(福淸) 사람으로, 자(字)는 개부(介夫)이다. 그는 여러 차례
왕안석(王安石)에게 서찰을 보내, 신법(新法)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후 안상문(安上門) 감문관이 되었을 때, 큰 가뭄이 들어 유민(流民)이 길을 메웠는데, 입지도 먹지도 못하여 수척한 모습에다
심지어 차꼬를 차고 옹기와 나무를 져다가 팔아서 관아에 바치기까지 하였다.
정협은 이들의 모습을 그려 급한 일이라고 칭탁하여 마체(馬遞)를 발동시켜 소장과 함께 신종(神宗)에게 바쳤으니, 이 그림을 유민
도(流民圖)라 한다. 신종은 그림을 보고 몹시 탄식하다가, 이튿날 청묘(靑苗)ㆍ면역(免役) 등의 신법을 혁파하였다. 《宋史 卷321
鄭俠列傳》
[주24] 내병(內屛) : 문 안에 설치한 가리개를 말한다.
[주25] 국계(國系)를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말한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가 잘
못 기록된 것을 시정해 달라고 주청한 일로서 2백여 년을 끌었다. 고려 공양왕 2년(1390),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윤이(尹彛), 이초
(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공양왕이 이성계의 인척이며 이성계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한다고 모함하고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이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기록했다. 이는 신생국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 및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조선은 건국 초에 이 사실을 명나라 사신을 통해 알게 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시정을 위한 주
청을 하였다.
1573년(선조6)에는 윤근수와 이후백이 파견되었다. 이후 1584년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등본을 가지고 돌아옴으
로써 종계변무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주26] 세종황제실록(世宗皇帝實錄) : 명나라 제11대 황제 세종(世宗)의 실록이다. 세종의 재위 기간은 1521~1567년이다.
[주27] 회전(會典) : 중국 명(明)나라의 행정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말한다. 명나라 효종(孝宗)의 홍치(弘治, 1488~1505) 연
간에 서부(徐溥)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하여, 무종(武宗) 5년(1510)에 수정을 거쳐 반포되었다.
《회전》은 명ㆍ청(淸)나라 때의 종합 행정 법전을 말하는데, 《대명회전》은 명나라 초기부터 사용해 오던 모든 행정 법규를 이부(吏
部)ㆍ예부(禮部)ㆍ병부(兵部)ㆍ공부(工部)ㆍ호부(戶部)ㆍ형부(刑部)의 관제로 집대성한 것으로 모두 180권이다.
[주28] 김공(金公) 계휘(繼輝) : 조선 중기의 문신 김계휘(金繼輝, 1526~1582)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
崗)이다. 사장(詞章)을 짓는 데 매우 빨라서 다른 사람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154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1566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1575년 동서 분당(分黨)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었지만, 당파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당쟁완화
를 위해 노력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배향되
었다.
[주29] 문성공(文成公) 이 선생 : 조선 중기의 학자ㆍ정치가인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
는 율곡(栗谷) 또는 석담(石潭),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3세(154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9세(1564)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
기까지 9번의 장원을 하였다.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했다. 45세 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
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가 이듬해 서울의 집에서 사
망하였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율곡전서》가 있다.
[주30] 전관(銓官) : 조선 시대에 인사행정인 전선(銓選)을 맡은 관원으로, 문관은 이조(吏曹)에서 무관은 병조(兵曹)에서 맡았다.
[주31] 효렴부(孝廉簿) : 효렴으로 천거할 사람들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 효렴은 중국 한(漢) 무제(武帝) 때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에 의
해 설치된 과시(科試)의 일종으로서 지방관이 그곳의 효성 있고 청한한 사람을 중앙에 추천하여 등용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에 추천
된 자를 효렴이라고 하였다.
[주32] 주의(注擬) : 관직에 결원이 생겼거나 봄가을로 인사행정을 할 때 문서에 적격자를 기록하여 임금에게 재가를 받는 일로서 3배수로
천거한다. 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은 이조(吏曹)에서, 무관은 병조(兵曹)에서 3명을 정해 올렸다. 이것을 비삼망(批三望)이라 하는
데, 제1후보자를 수망(首望), 제2후보자를 부망(副望), 제3후보자를 말망(末望)이라 불렀다.
[주33] 윤원형(尹元衡) : ?~156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문정왕후(文
定王后)의 동생으로, 1533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인종(仁宗)이 세자였을 때 세자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
任)과 다투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파직당했다가 다음 해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득세했다. 을사사화의 공으로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江陰)에 귀양 가서 죽었다.
[주34] 정순붕(鄭順朋) : 1484~154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이령(耳齡), 호는 성재(省齋)이다. 1504년 문과에
급제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으로서 윤원형(尹元衡) 등과 함께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서 을사사화의 중심인물
이 되었다. 그 공으로 온양(溫陽)부원군에 봉해졌으나 1570년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임백령(林百齡), 정언각(鄭彦慤)과 함께
을사삼간(乙巳三奸)으로 불리었다.
[주35] 윤 충의공(尹忠毅公) 임(任)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임(尹任, 1487~1545)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임지(任之), 시호는 충
의(忠義)이다. 중종의 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로, 대윤(大尹)의 거두였다. 무과에 급제했으며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경원
대군(慶源大君 명종)을 낳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 보호를 둘러싸고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
나 대윤 일파가 숙청될 때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주36] 유 충숙공(柳忠肅公) 관(灌)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유관(柳灌, 1484~1545)으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
(松庵)이다. 1507년 증광 문과에 급제했다. 1543년 왕의 특명으로 평안도 관찰사에 부임하여 소란한 북변지대를 평정(平靜)시켰
다.
인종이 즉위하자 다시 불리어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에 전임했으며, 인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다. 을사
사화(乙巳士禍) 때 윤임(尹任) 일당으로 몰려 과천(果川)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문집에 《송암집》이 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
다.
[주37]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 1528~1547. 자는 자첨(子瞻)으로 중종과 희빈 홍씨의 차남이며 인종의 이복동생이다. 명종이 즉위
하자 윤원형 일파가 종친 중에서 명망 있는 봉성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역모를 꾀하였다고 무고하여 사사되었다. 1570년(선조3) 이
준경(李浚慶)의 계청(啓請)으로 신원(伸寃)되고 복관되었다.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주38] 계림군(桂林君) 이류(李瑠) : 1502~1545. 자는 언진(彦珍)이며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손자로, 성종의 셋째 아들인 계성군(桂城
君) 순(恂)의 양자로 들어갔다. 윤임의 조카가 된다. 을사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인품이 출중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다.
소윤의 일파인 김명윤이 “인종이 병환이 위중하자 윤임이 계림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밀계를 올려 대윤이 숙청되었다. 계림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밀고가 있자 안변(安邊)으로 달아났으나 토산(兎山)에서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고 왕위 찬탈의 모함을 쓰
고 군기시 앞에서 능지형을 당한 후 3일간 효수되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모략에 의한 희생임이 밝혀져 1577년 신원되었다.
[주39] 영정(榮靖) :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의 시호이다. 중종(中宗)의 장자로서 재위 9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544~1545년이다.
[주40] 인성왕비(仁聖王妃) 박씨 : 1514~1577. 인종(仁宗)의 왕비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로 태생이 없다.
[주41] 이준경(李浚慶) : 1499~1572. 본관은 광주, 자는 원길, 호는 동고ㆍ남당,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길에 올랐는데 김안로 일파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가 김안로가 제거된 뒤 재등용되었다. 영의정 이기의 모함으로 유배되었다가 이
듬해 석방되었다. 을묘왜란 때 전라도 도순찰사로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조광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들
을 신원하였다.
[주42] 김귀영(金貴榮) : 1520~159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상주,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이다. 1540년 진사가 되고,
1547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사신으로서 9번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임해군(臨海君)을 배종하여 피란했는데,
회령에 수개월 머무는 동안 민폐가 많아 인심을 잃었다. 때마침 적이 침입하자,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
에게 넘겨졌다.
[주43] 권철(權轍) : 1503~157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강화 부사 권적(權勣)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아버지다. 1528년(중종23)에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
다. 1565년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주44] 자최복(齊衰服) : 상례(喪禮)에서 규정한 오복제(五服制) 중의 하나로서 거친 생마포로 아랫단을 접어서 지은 상복, 또는 그것을
입는 제도를 말한다. 어머니상에는 3년을 입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의 어머니 상에는 1년을 입었다. 조부모상은 1년, 증조부
모상에는 다섯 달, 고조부모상에는 석 달을 입었다.
[주45] 전하께서는 …… 있으므로 : 12대 인종, 13대 명종, 14대 선조가 되므로 한 말이다. 인종은 후사가 없어 아우인 명종이 뒤를 이었
으며, 명종도 후사가 없어 11대 중종의 손자인 선조가 뒤를 이었다.
[주46] 허봉(許篈) : 1551~158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이다. 156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74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1583년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585년 노수신(盧守愼)의 주선으로 재기용되나 거절하고, 백운산
(白雲山)과 인천, 춘천 등지를 유랑하다가 1588년 금강산에 들어가 병사했다. 문집에 《하곡집》과 《하곡수어(荷谷粹語)》 등이 있
고, 편저에 《의례산주(儀禮刪註)》와 《북변기사(北邊記事)》 등이 있다.
[주47] 청양군(靑陽君) 심공(沈公) 의겸(義謙)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심의겸(沈義謙, 1535~1587)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
叔), 호는 손암(巽菴)ㆍ간암(艮菴)ㆍ황재(黃齋)이다. 1555년 진사가 되고 1562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량(李樑)이 새
로이 정계에 진출한 사림(士林)들을 숙청하려고 하자 왕의 밀지를 받아 탄핵, 유배시키도록 했다.
1572년 척신(戚臣)으로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이때 김종직(金宗直) 계통의 신진 사류(士類) 출신인 김효원(金孝元)이
이조 정랑으로 천거되자 이를 반대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대립하여, 그를 지지하는 서인(西人)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東人)
으로 갈라지는 당쟁이 시작되었다. 나주(羅州)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주48] 김효원(金孝元) : 1532~159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이다. 1564년 진사시, 이듬
해의 알성 문과에 급제했다. 명종 대 말과 선조 대 초에 훈구파(勳舊派)가 몰락하고 사림파(士林派)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관인(少
壯官人)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청렴결백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성암집》이 있다.
[주49] 유공(柳公) 희춘(希春)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中), 호는 미암
(眉巖)이다, 1538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제주도ㆍ함경도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책을 저술했다. 선조가 즉위하자 석방되었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
여하여 《대학》을 완성하기도 했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미암일기》ㆍ《역대요록》 등이 있
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주50] 김 문경공(金文敬公) 굉필(宏弼) :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
猷), 호는 사옹(蓑翁)ㆍ한훤당(寒喧堂),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소학》에 심취해서 ‘소학동자’로 불렸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했다.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에 처해졌다. 16세기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했고, 1610년 정여창(鄭汝昌), 조광조ㆍ이언적(李彦迪)
ㆍ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ㆍ《가범(家範)》 등이 있다.
[주51] 정 문헌공(鄭文獻公) 여창(汝昌) :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
勗),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 함양 출생이다.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83년 진사
시에 합격하였고 149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498년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성리학의 대가로
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했다. 《용학주소(庸學註疏)》ㆍ《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ㆍ《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지만 무오사화 때 부인이 태워 없애 일부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전할 뿐이다.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문집에 《일두유집》이 있다.
[주52] 이 문원공(李文元公) 언적(彥廸)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언적(李彦迪, 1491~1553)으로 본관은 여주, 호는 회재(晦齋) 또는 자
계옹(紫溪翁), 자는 복고(復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본명은 적(迪)이었는데 중종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1514년 문과에 급제했고, 1530년 귀향한 뒤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
書)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 동안 많은 저술을 남겼다.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문집에 《회재집》이 있다.
[주53] 공에게 …… 하여 : 서문은 《청련집》에 수록된 〈국조유선록서(國朝儒先錄序)〉이다.
[주54] 청련집(靑蓮集) : 1686년에 송시열이 쓴 행장이 있다. 한국문집총간 속3집에 수록되었다.
[주55] 현황제(顯皇帝) : 명나라 제13대 신종의 시호가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 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
仁止孝顯皇帝)이므로 신종을 일컫는다. 재위 기간은 1572~1620년이다.
[주56]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 내리고 : 《선조수정실록》 23년(1590) 8월 1일 기사에 의하면, 광국 공신(光國功臣)은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이라 하였고 이후백은 이등공신(7명)으로 책록되었다.
[주57] 모부(某府) 홍씨(洪氏) : 남양(南陽) 홍씨이다.
[주58] 관찰사 : 성종(成宗) 때 관찰사를 지낸 이후백의 증조 이숙감(李淑瑊)을 가리킨다.
[주59] 충아(衝牙) : 패옥의 일부이다. 끈에 달아서 가운데로 늘어뜨렸는데 옥의 모양새가 삼각으로 되어 있어 어금니 모양 같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60] 법관을 …… 앉히셨도다 : 종계변무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이듬해, 대신들의 추천에 의해 형조 판서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
[주61] 천관(天官) : 선조 10년(1577)에 이조 판서가 된 것을 가리킨다.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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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贈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延陽君文淸李公神道碑銘。幷序
萬曆六年十月癸未。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贈左贊成文淸李公。卒于咸陽。公諱後白。字季眞。其先曰茂。初事唐。爲中郞將。從蘇定方平義慈。留事金氏。家海臯。海臯於今爲延安。故子孫遂爲延安人。曾祖諱琡瑊。事成廟。爲某道觀察使。祖諱世文。官至某陵參奉贈吏曹參判。父諱國衡。贈議政府領議政。母曰林氏。贈貞敬夫人。公生九歲喪父母。鞠於伯父諱某家。少明敏。嘗從李芑學辭章。數日輒歸。人問之。公對曰。芑之中心。雖毫髮一皆秘之。不欲人知。君子之心。豈如是邪。遂與芑絶。芑之徒。有爲衛社功臣者。聞公讀書浮圖寺。欲往見之。公輒移棲以避之。峒隱先生李公義健常稱之曰。誠莊士也。年二十七。成進士。嘉靖三十四年。擧乙科。權知承文院副正字。選入世子侍講院。爲說書。改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遷兵曹佐郞。入司諫院。爲正言。改世子侍講院司書。選授吏曹佐郞。陞拜正郞。移兵曹。已而。薦入議政府。爲檢詳。遂遷舍人。由司諫院司諫。入弘文館。爲應敎。賜暇讀書。公少從崔公慶昌,白公光勳。爲歌詩。名重當世。及賜暇常在湖堂。與諸學士課文章。諸學士見公歌詩。皆以爲不可及也。隆慶元年。莊皇帝遣翰林院檢討許國給事中魏時亮。頒詔書。公以弘文館典翰。充遠接使從事官。宣廟卽位。擢承政院同副承旨。未幾。拜參知兵曹。初文純公李先生召至王京。擢議政府右贊成。小人金鎧。內不平。譏文純公甚切。公與奇文憲公大升怒詆之。及鎧進爲大司憲。乃啓言。今之儒林矯激喜事。臣竊憂之。昔文正公趙光祖得罪朝廷者。皆由於矯激之徒。釀成其禍也。願殿下痛加裁抑。鄭文淸公澈曰。此金鎧中傷李某,奇大升也。卽求對爲上言曰。金鎧熒惑聖聰。安得不嫁禍儒林邪。上大怒曰。鄭澈過矣。鄭公對曰。雷霆雖嚴。臣言不可以不盡。因言鎧熒惑之罪。上竟黜鎧。削其官爵。已而。公拜司諫院大司諫。又入兵曹爲參議。改承政院都承旨。公爲人淸愼有守。在政院。終日端坐。容貌嚴毅。不可犯。禁中肅然。掖庭人無敢闌語。後宮女侍。輒相戒曰。李某爲都承旨。毋使語聲出於外。公以是久居政院。文忠公朴先生淳。告于上曰。曾子所謂可以托六尺之孤。可以寄百里之命。李某是也。五年。擧文臣庭試第一。擢嘉善大夫禮曹參判。入司憲府爲大司憲。遷吏曹參判兼藝文館提學。六年大饑。命畵工爲流民圖。諭公曰。赤子流離之狀。予甚愍之。爲此圖列於內屛。卿賦詩以警不德。公於是。爲詩十篇。投進之。萬曆元年。充奏請使如京師。請正國系。是時。天子新卽位。勑大學士。修世宗皇帝實錄。禮部尙書陸樹聲。感公之請。卽具奏。乞載實錄。因又入續修會典。詔曰。可。冬使還。上嘉其忠。命特陞嘉義大夫。明年。上問大臣。誰可爲刑曹判書者。大臣對曰。李某可。遂特授刑曹判書。以事免。又明年。上以公爲咸鏡觀察使。金公繼輝爲平安觀察使。將行。文成公李先生。言於朝曰。李某,金繼輝兩人。不可去朝。乃上箚曰。李某,金繼輝。明於典章。達於時務。宜留之。爲朝廷用。上不從。居二年。召拜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公在銓。不受私請。雖故舊。數往見之。輒不悅。有族人往見求官。公正色。出示枕上孝廉簿。其族人亦在簿中。公歎曰。錄子之名久矣。使子不言。吾可以擬於官也。其族人大慙而去。每注擬。遍問郞僚。若有誤者。必終夜屛營不寐曰。我欺主上矣。初尹元衡與李芑,鄭順朋等。爲腹心。殺尹忠毅公任,柳忠肅公灌。又起大獄。殺鳳城君岏,桂林君瑠。榮靖未葬。而外家盡被誅戮。元衡等又誣仁聖王妃朴氏。陰主岏謀。任,灌旣死。策功臣號曰衛社。宣廟嗣位。領議政李浚慶等。率百官請削衛社功臣號。上不許。及仁聖王妃疾大漸。乃命削衛社功臣號。使大提學金貴榮。撰敎以進。貴榮詞拙而意不章。上顧近臣曰。辨別忠邪。此國家至大之事。宜正其辭。以曉諭中外士臣。豈可草草若是乎。卽命公改撰敎書。公奮曰。是非始可明矣。乃不辭。立草敎書以獻之。宣敎之日。百官感激。往往有泫然而泣者。於是國論遂大定。以啓宣廟平明之治。公功爲大。已而。仁聖王妃薨。領議政權轍議曰。殿下當服齊衰。公以爲王者繼體。雖兄弟。亦服三年。今殿下爲先王後。而先王實承榮靖之統。是殿下於仁聖王妃。有祖孫之義。當服三年。上竟從之。遂定爲三年之喪。明年六月。公以疾固辭吏曹。改戶曹。十月。請告如咸陽。未反而卒。享年五十九。訃聞。震悼。賜吊祭。以其年十有二月庚辰。葬于坡州廣灘之原。公氣朗。望之凝然。其守堅若不可移。聞人嘉言。不終朝而沛然從之。不少疑也。與人交。老而益篤。治身廉潔。菜羹淡然如寒士。四方饋遺無所受。爲觀察時。悉蠲其無名之賦。及旣歸。御史許篈廵撫北方。遇塞上戍卒小民。必問李公無恙否。篈以是知公遺愛之在北方也。然公素善靑陽君沈公義謙。小人不悅者甚衆。金孝元常曰。李某六卿之才也。若作相。我當劾之。李文成公曰。李某不能容物。而今之所謂六卿。賢於李某者。吾未見也。雖使爲相。彼孝元安能劾哉。初宣廟命弘文館副提學柳公希春。論次先賢金文敬公宏弼,鄭文獻公汝昌,趙文正公光祖,李文元公彥廸言行。爲儒先錄凡四篇。使公序之。上以明正學之源。下以述傳道之統。垂于後世。公彊記至老不衰。所爲詩有靑蓮集一卷。藏於家。公旣卒之十二年。顯皇帝詔頒會典。公以請正國系功。特命追封延陽君。賜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之號。謚曰文淸。後政府以公淸白聞。命吏曹。錄其子孫。配貞夫人某府洪氏。某郡郡守處誠之女也。生子一人。女三人。子曰善慶。某道察訪。女長適安昌善。次適奇誠獻。次適朴峰賢。察訪生子五人。女四人。子曰泰吉。縣監。曰有吉。縣令。曰復吉。別提。曰益吉。縣令。曰井吉。縣監。女長適柳希成。次適崔墍。次適李振先。次適金揲。公當宣廟極盛時。進於王朝。與朴文忠公,李文成公二賢人。相讓以德。相引以義。以淸名列於高位。然所謂朋黨之說日益熾。公雖已卒。而小人媒孽不已。二賢人皆被中傷。悲夫。銘曰。
李自中國。始徙于延。觀察侃侃。烈聞甚燀。公治文章。遂翔王庭。衝牙朱組。有鏘璜聲。公隆儒學。衛我文純。依歸大道。
以觝憸人。公有令望。元臣交擧。乃授士師。九棘以處。乃畀鈇鉞。朔方于宣。赫赫天官。何任之專。公有懿德。文淸攸友。
文忠維前。文成維後。允也哲人。引之挽之。嘻彼憸人。讒言其滋。王明邪正。爰削衛社。公作敎書。布聞于下。德音惻怛。
芻蕘亦泣。是非旣定。王道乃立。哲人則譽。憸人則訾。刻詩于石。百世不陊。<끝>
江漢集卷之十三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