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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심의겸
1535년(중종 30) - 1587년(선조 20)
조선 전기에, 이조참의, 이조정랑, 전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사인(舍人) 심순문(沈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이고,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증판서 이대(李薱)의 딸이다. 족부인 감찰 심홍(沈泓)에게 입양되었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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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
사헌부 대사헌 청양군 심공 묘지명 병서(司憲府大司憲靑陽君沈公墓誌銘 幷序)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심공(沈公)이 세상을 떠난 지 56년이 지났다. 그의 손자 희세(煕世)가 가장(家狀)과 대제학 이식(李植) 공이 지은 유사(遺事) 1통을 가지고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울다가 절하며 말하기를, “조부의 장례를 지낼 적에는 비방의 불길이 그치지 않았고, 뒤이어 임진왜란을 만났으며, 또 집안이 화를 겪어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새길 경황이 없었습니다.
백부(伯父 심론(沈惀)가 계첩을 지어 30년 넘게 상자 속에 넣어 두고만 있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조부 생전의 일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전후로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 버릴까 두려워 감히 이렇게 부탁드립니다.”하였다.
아! 공의 업적과 행실이 분명히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있다. 비방이 일어나고 명예 역시 뒤따랐으니 유구히 전해질 것인데, 어찌 남이 묘지명을 써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니라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다. 비록 그렇지만 그 일에 근거하여 기록하면 후세에 반드시 그 논의를 결정짓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드디어 가장을 펼쳐 그 세대와 관직의 이력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성대하구나! 심씨 집안이 크게 일어나 오랜 세월 동안 전해 왔도다. 선대는 본관이 청송(靑松)으로, 위위승(衛尉丞) 홍부(洪孚)가 처음으로 고려조에 현달하였고, 여러 대를 내려와 덕부(德符)에 이르러서는 장수와 재상의 모두 역임했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안정공(定安公)이다.
안정공은 온(溫)을 낳았는데, 온은 헌릉(獻陵 태종(太宗))을 섬겨 영의정 부사를 지냈으니,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부친이다. 나라에 상서로움을 열어 우리 영릉(英陵 세종(世宗)에게 출가하여 실로 문종(文宗)과 세조(世祖)를 낳았으니, 본조에 무한한 복의 기틀을 다졌다. 심온의 추시(追諡)는 안효공(安孝公)이다. 안효공은 회(澮)를 낳았는데, 회 또한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가 공숙(恭肅)이다.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니, 존귀함이 한 시대를 떨쳤다.
그의 아들 군자감 판관 원(湲)이 순문(順門)을 낳았는데, 의정부 사인을 지냈으며, 충직으로 간하다가 연산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두 명은 재상이 되었고, 나머지도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다.
조부 연원(連源)은 영의정으로, 시호가 충혜공(忠惠公)이다. 부친 강(鋼)은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이며, 시호가 익효공(翼孝公)이다. 모친은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이씨(李氏)로 증 판서 대(㠚)의 따님이다. 10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첫째가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의 비)이고, 공은 형제의 차례에서 셋째이다.
공의 휘는 의겸(義謙), 자는 방숙(方叔)으로, 족부 홍(泓)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홍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금산 군수(金山郡守) 희원(希源)과 청성군(靑城君) 순경(順經)이 그의 부친과 조부이다. 공은 17세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21세에 진사가 되었다.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17)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보임되었다. 천거되어 승문원 주서에 임명되었고 시강원 설서로 자리를 옮겼으며, 옥당에 선발되어 들어가 부수찬과 지제교를 지냈다. 얼마 뒤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병조 정랑, 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갑자년(1564)에 교리로 있다가 의정부 검상과 사인에 임명되었으며, 집의, 사간, 응교, 내섬시 정, 군기시 정, 사복시 정, 전한,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병인년(1566)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정묘년(1567)에 이조 참의로 재직 중에 익효공(翼孝公)의 상을 당했다. 상기를 마친 뒤 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조 참의,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경오년(1570, 선조 3)에 승지, 대사간, 참지, 공조 참의, 판결사를 지냈다.
임신년(1572)에 예조 참의, 대사간, 형조 참의를 지냈다.
계유년(1573)에 대사간, 병조와 이조의 참의를 지내고, 특별히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한성부 우윤과
병조 참판을 지냈다.
갑술년(1574)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공조 참판, 형조 참판, 예조 참판을 역임하고 청양군(靑陽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을해년(1575)에 한성부 우윤, 예조 참판, 개성부 유수를 지냈다.
정축년(1577)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무인년(1578)에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 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년(1579) 봄에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임오년(1582)에 외직으로 나가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
병술년(1586)에 양모(養母) 한씨의 상을 치르고, 파주(坡州)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해년(1587) 9월 초 6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3세였다. 그 해 11월에 선영이 있는 모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서원 한씨(西原 韓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충훈부 경력 흥서(興緖)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론(惀)은 청평군이며, 차남 엄(㤿)은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딸은 병조 참판 윤훤(尹暄)에게 출가하였다.
론(惀)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익세(翼世)이다. 엄(㤿)은 7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세(光世)는 홍문관 응교, 차남 정세(挺世)는 인천 현감(仁川縣監), 삼남 명세(命世)는 공조 참판 청운군(靑雲君)이며, 사남 장세(長世)는 현감, 오남은 안세(安世), 육남은 필세(弼世), 칠남 희세(煕世)는 좌랑이다. 장녀는 유준(柳儁), 차녀는 성여용(成汝容), 삼녀는 이조 참판 이식(李植), 사녀는 이승형(李承亨)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윤훤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순지(順之)는 참의, 원지(元之)는 익위, 징지(澄之)는 주서, 의지(誼之)는 진사이며, 딸은 좌랑 신면(申冕)에게 출가하였다. 익세는 아들이 없어 광세의 아들 헌(櫶)을 양자로 들였다. 광세의 소생 은(檼)은 진사이고, 억(檍), 헌(櫶), 총(棇)은 모두 현감이며, 딸은 승지 임담(林墰), 이집(李𥠋)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은 무(木+懋), 덕(㯖), 려(櫖)이다.
정세의 소생 진(榗)은 도사 이고, 딸은 감찰 백홍일(白弘一)에게 출가하였다. 명세는 아들이 없어서 희세의 아들 추(樞)를 양자로 들였다. 장세의 소생은 2녀인데, 장녀는 전적 이정영(李正英)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희세의 소생은 추(樞)이고, 장녀는 진사 신최(申最)에게, 차녀는 이행일(李行逸)에게, 삼녀는 신정(申晸)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의표가 훤칠하고 장대하였으며, 국량이 넓고 활달하였으며, 자기 몸을 다스리는 데 엄하였고, 의리를 좇는데 용감하였으며, 효도와 우애, 검소함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적에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은 재상의 지위에 올라 교화의 추기(樞機)를 주관하였고, 익효공은 세자의 외조부가 되어 포기(褒紀)라 일컬어졌다.
친족들이 현달하고 가문이 번창하였으나 전혀 습기(習氣)가 없었으며, 자신을 단속하고 어진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니, 아름다운 명성이 자자해져 사람들이 이자견(李子堅)에 견주었다. 벼슬길에 올라서도 올바르게 처신하여 어떤 일을 바라거나 피하지도 않았으며, 깨끗한 의론을 넓게 펴고, 선악을 분명히 구분하여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등 강직한 성품대로 행동하였다.
그의 외숙 이량(李樑)이 인사권을 장악하여 세력이 커지자 선류(善類)들에게 화를 끼치려 하였는데, 공이 안으로 간쟁을 하고 대외적으로 비호를 하였으나 되돌리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결국 공론을 따라 사악한 무리들을 도려내어 조정이 안정되자, 조야에서 올바른 행동이라 여겼다.
강릉(康陵 명종(明宗)) 말엽에 세자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어 식자들이 염려하였다. 당시에 재상 민기(閔箕) 공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큰 계책을 은밀히 도와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이는 그에게 대사(大事)를 부탁해도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목릉(穆陵 선조(宣祖))이 어린 나이로 잠저(藩邸)에서 들어왔는데, 어떤 재상이 말하기를, “궁중에는 보호해줄 사람이 없으니, 유모를 보내 임금의 마음을 위로 하고자 한다.”하였는데, 공이 왕성군(王聖君)의 일을 들어 쟁론하여 중지시켰다.
외척 정창서(鄭昌瑞)가 총애하던 첩에게 미혹되어 집안에서 패륜적인 일이 일어났다. 법관이 임금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공이 사헌부를 맡아 즉시 잡아들여 치죄하였다. 이조에서 후궁의 아비를 고을 수령으로 추천하려고 하자, 공이 이조 참의로 힘껏 그 일을 저지하였다. 여러 차례 한성부를 맡아 옥사를 다스렸는데, 공정하게 결단하여 문무해(文無害)라 불렸다.
개성부 유수로 있을 때에는 학교를 수리하고 학도들을 가르쳤으며, 심지어 녹봉을 털어 작성고(作成庫)를 설치하여 선비들에게 쌀을 지급하기도 했으니, 성대한 청아(菁莪)의 교화가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기강을 바로잡아 백성을 돌보고 폐단을 척결한 것이 모두 법도에 맞았으며,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고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도내(道內)가 그에게 은택을 입었다.
전주 부윤으로 있을 때는 한곁같이 법도대로 다스리고,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하였으며, 공권(空券)을 불태워 체납한 환곡(還穀)을 탕감해 준 것이 수만 섬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이 나아지게 되었다. 저장된 포와 곡식이 창고에 넘쳐나 관사와 정자를 크게 보수하고 교량과 하천까지 수리하였으며, 큰 도로에 역참을 설치하니, 그 지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놀라서 다시 쳐다보았다.
집에 있을 때는 유자(儒者)의 흰 옷을 입고 경서를 토론하였으며 재물을 나누어주어 친척들을 거두고, 곤궁하고 다급한 이들을 구휼해 주었다. 스스로 왕실의 외척임을 생각하여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집안사람들에게 문안을 여쭙는 일 이외에는 사적으로 찾아가지 말라고 신칙하였다.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대궐을 드나들던 일을 그만두었는데, 어진 사람들은 그의 뜻을 칭찬하였고, 간악한 자들은 이미 흉계를 꾸밀 조짐이 있었다.
공이 낭관을 지낼 적에 공적인 일로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는데, 유사(儒士) 김효원(金孝元)이 그 집안의 사위와 책상을 함께 놓고 글공부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늘 의심하였다. 얼마 뒤에 김공(金公)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는데, 별 생각 없이 이 일에 대해 말하였다.
김공 역시 무리들의 중망을 받아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이 양쪽을 당목(黨目)으로 지칭했다.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그 일을 걱정하여 상황을 진정시키고자 두 명을 지방으로 내보내도록 계청하여 공은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고, 김공은 변방 고을 수령으로 나가자 시의(時議)가 더욱 거세졌다.
신사년(1581)에 문성공이 대사간을 맡아 또 분열을 조정하는 논의를 하자, 심모(沈某)를 파직시키면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문성공이 믿고 그의 의견을 따랐다가 그가 지나칠 정도로 죄를 얽으려 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에게 속았음을 깨달아 결국 스스로 탄핵하니, 문성공까지 아울러 배척하였다.
정해년(1587)에 공을 공격하는 논의가 다시 일어나 당시에 명예와 덕이 있던 이들에까지 미쳐 사암(思菴) 박순(朴淳), 송강(松江) 정철(鄭澈), 해원(海原) 윤두수(尹斗壽), 해평(海平) 윤근수(尹根壽), 우계(牛溪) 선생, 율곡(栗谷) 선생, 대사헌 박응남(朴應男), 참판 김계휘(金繼輝), 익성군 홍성민(洪聖民), 부제학 신응시(辛應時), 대사간 이해수(李海壽), 관찰사 구봉령(具鳳齡), 참의 박점(朴漸)을 당인(黨人)이라 하여 모두 연좌하여 파직시켰으며, 생사를 막론하고 당인의 명부를 전조(銓曹)에 명단을 비치해 두었다.
아! 공의 한 마디 말은 애초에 의도가 있어서 한 말이 아니었으므로, 만년에 서로 허여한 것이 얕지 않았다. 김공은 공의 부고를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이 죽었구나.”하였다. 두 공의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재앙의 빌미가 얼음 녹듯이 풀릴 수 있었는데, 상황이 위태로워지고 갈수록 더 심해져 지금 이미 구제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어찌 세운의 성쇠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가만히 국론을 들어보니, 명종과 선조 때에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주고 위훈(僞勳)을 삭제하며, 유술(儒術)을 높여 장려하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여 후세가 미치지 못할 태평한 정치를 이루게 된 데에는 공이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퇴계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국사(國事)를 들어 면려하였고, 소재(蘇齋) 노 상국(盧相國)이 사림을 도와 보호한 공이 있다고 공을 칭찬하였으니, 이 사실로도 공의 일을 평가할 수 있다. 삼가 관직 생활의 전말을 모아 큰 일 만을 기록하여 서술하고 이어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청송 심씨는 / 靑松之沈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가문이라 / 冠冕大東
여섯 대를 지나는 동안 / 六傳其世
두 왕후와 다섯 공이 있었네 / 二后五公
청양군은 그들을 계승하여 / 靑陽承之
명문대가 자손임에도 겸허함 지켰네 / 履滿持沖
오직 그 점을 잊지 않지 않아 / 惟其不舍
나라 위하고 자신은 돌보지 않았네 / 遂著匪躬
감히 친척이라고 사심 두었으랴 / 敢私于親
충성으로 임금을 섬겼다네 / 事君以忠
소장의 기미를 당하여 / 消長之幾
묵묵히 큰 공을 이루었네 / 默運膚功
비방과 칭찬이 생기는 것은 / 毀譽之立
형체와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같네 / 若形景從
더구나 이것은 추기이니 / 矧是樞機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수 있으랴 / 而免群訩
당인으로 명부에 기록되었지만 / 黨人旣籍
사림의 종장이 되었네 / 士林之宗
개인의 재앙이 아니라 / 非曰人菑
나라의 나쁜 운수라네 / 惟國之凶
시종이 같지 않은 것은 / 始卒弗齊
만나는 때에 달려 있다네 / 亦係其逢
내 묘지명으로 질정해 본다면 / 我銘質之
백 세 뒤에도 동일하게 여기리라 / 百世之同
<끝>
[註解]
[주01] 사헌부 …… 묘지명 : 이 글은 심의겸(沈義謙, 1535~1587)에 대한 묘지명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
(巽菴)ㆍ간암(艮菴)ㆍ황재(黃齋)이다. 선조 때 동서(東西) 분당의 계기가 되었던 인물이다.
[주02] 포기(褒紀)라 일컬어졌다 :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는 말이다. 포(褒)와 기(紀)는 모두 주(周)나라 척리(戚里)의 성씨(姓氏)이다.
본문에서는 심강이 인순왕후 심씨의 부친인데다 순회세자가 태어나 세자의 외조부가 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冊府元龜 卷142
尊外戚》
[주03] 사람들이 이자견(李子堅)에 견주었다 : 가문과 부친의 관작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심의겸을 사람들이 이자견에 비유하였다는 말
이다. 이자견은 후한(後漢)의 이고(李固)로 자견은 그의 자(字)이다. 이고(李固)는 젊어서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고 사방으
로 스승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훗날 큰 유학자가 되었다.
일찍이 태학에 들어갔을 때는 당시 사도(司徒)의 벼슬을 하고 있는 부친 이합(李郃)에게 남들 모르게 문후를 드려 함께 수학하는 제
생들이 자신이 이합의 자식임을 모르게 하였다. 《資治通鑑 卷51 漢紀43》
[주04] 이량(李樑)이 …… 여겼다 : 《명종실록》 22년 1월 20일 기사 영돈녕부사 심강(沈鋼)의 졸기에, “이량은 자신이 공론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이감(李戡) 등과 더불어 명류(名流)들을 공격하였는데, 심의겸이 이량을 만날 적마다 그 불가함을 지적하자 이
량이 심의겸까지 아울러 제거하려 하였다. 심강이 이를 가만히 궁중에 알리고 기대항(奇大恒)을 시켜 논핵하여 이량 등이 축출되기
에 이르니, 온 사림이 고맙게 여겼다.”라고 하였다.
[주05] 왕성군(王聖君)의 일 : 왕성군은 후한(後漢) 안제(安帝)의 유모(乳母)로 야왕군(野王君)에 봉해진 왕성(王聖)을 말한다. 왕성은
궁중에 들어와 있으면서 강경(江景)ㆍ번풍(樊豊) 등과 짜고 태자(太子)의 유모인 왕남(王男)을 고자질하여 주감(廚監)인 병길(邴
吉)로 하여금 죽이게 하고 이어 후환이 두려워서 당시 태자였던 순제(順帝)까지 고자질하여, 태자가 폐위를 당하고 제음왕(濟陰
王)이 되게 하였다. 본문과 관련된 내용은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총서(總序)〉에 자세히 보인다. 《後漢書 順帝紀》
[주06] 문무해(文無害) : 판결문서에 하자가 없었다는 뜻이다.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서 한 고조(漢高祖)의 신하 소하(蕭
何)에 대해 “소 상국 하(蕭相國何)는 풍패(豐沛) 사람인데 문무해로 패(沛)의 연리(掾吏)가 되었다.” 하였다.
[주07] 작성고(作成庫) : 양사(養士)를 위한 일종의 장학금 제도이다.
[주08] 청아(菁莪)의 교화 : 인재를 양성하는 가르침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새발쑥이
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菁菁者莪, 在彼中阿.]” 하였는데, 이에 대한 모서(毛序)에, “청청자아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즐거워
한 시이다.” 하였다.
[주09] 생사를 …… 두었다 : 양사에서 박순(朴淳) 등을 사생(死生)의 교분을 맺고 권세에 서로 의지하여 조정을 어지럽힌 심의겸의 붕당
이라 일컬어 살아 있는 자는 파직시키고 죽은 자는 삭직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심의겸만 파직시키고 그의 붕당들은 논죄하지
말되, 다만 두 전조(銓曹)에 명단을 비치하여 다시는 등용하지 않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한 일을 말한다. 《宣祖修正實錄 18年 8
月 1日》
[주10] 더구나 이것은 추기이니 : 추기(樞機)는 화복이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으로, 말을 의미한다. 본문의 내용은 앞서 심의겸이 윤원형의
집에서 글공부를 하는 김효원을 비판하는 말을 한 것으로 인해 김효원 일파에게 공격을 받게 된 일을 말한다. <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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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司憲府大司憲靑陽君沈公墓誌銘 幷序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沈公卒五十有六祀。其孫煕世以家狀洎太學士李公植所述遺事一通。謁余爲誌。泣且拜曰。先王父之葬也 。謗焰未息。仍丁寇難。且更家禍。未遑於墓隧之刻。伯父撰次系牒。在笥餘三十年。竟齎志入地。世之能言王父時事者。長弟凋謝。及今不圖。懼遂湮沒。敢以是請。噫。公之事行。焯然在人耳目。謗行而名亦隨之。其傳之悠久。奚待人誌不誌也。余惟非其人。不足爲重。雖然据其事而書之。後世必有定其論者。遂發其狀。爲考其世次官歷。而曰盛矣哉。沈氏之發大而流長也。其先籍靑松。衛尉丞洪孚始顯於勝國。累傳至德符。位都將相。封靑城伯。諡曰定安公。定安生溫。事獻陵。領議政府事。卽昭憲王后之父也。祥開于邦。嬪我英陵。實誕文宗,世祖。基本朝億萬之祚。追諡安孝公。安孝生澮。亦領政府。諡曰恭肅。三世宅揆。貴震一代。其嗣軍資監判官湲。生順門。議政府舍人。以忠直死於燕山。後贈領議政。是爲公曾祖。有四子。二人作相。餘皆顯仕。曰連源。領議政諡忠惠公。考曰鋼。領敦寧府事靑陵府院君。諡翼孝公。配完山府夫人李氏。贈判書㠚之女。生十子 。長仁順王后。公於倫序居第三。諱義謙。字方叔。出後於族父泓。官司憲府監察。金山郡守希源。靑城君順經。其上二世也。公十七發解。二十一成進士。嘉靖壬戌。中文科。補承文院權知副正字。薦授承政院注書。移侍講院說書。選入玉堂。爲副修撰, 知製敎。俄除吏曹佐郞。賜暇湖堂。陞兵曹正郞, 侍講院文學司憲府持平。甲子以校理授議政府檢詳,舍人。歷執義司諫, 應敎, 內贍軍器司僕寺正典翰, 直提學。丙寅陟同副承旨。丁卯以吏曹參議。丁翼孝公憂。服闋。拜承旨。歷吏曹參議僉知中樞府事。庚午歷承旨, 大司諫, 參知工曹, 參議判決事。壬申歷禮曹參議, 大司諫, 刑曹參議。癸酉歷大司諫, 兵吏兩曹參議。特拜大司憲。遞爲同知中樞府事。歷漢城府右尹, 兵曹參判。甲戌復拜大司憲。歷工, 刑, 禮三曹參判。襲封靑陽君。乙丑歷右尹禮曹參判開城府留守。丁丑拜全羅道觀察使。戊寅授同知中樞府事兼同知成均館春秋館事。不拜。己卯春。禮曹參判。秋拜咸鏡道觀察使。壬午出爲全州府尹。丙戌守養母韓氏喪。廬于坡州。丁亥九月初六日不淑。壽五十有三。其年十一月。葬于先塋某坐之原 。公聘西原韓氏。忠勳府經歷興緖之女。生二男一女。長惀。靑平君。次㤿。玉果縣監。贈領議政。女適兵曹參判尹暄。惀一男翼世。㤿七男四女。男光世弘文館應敎。次挺世仁川縣監。次命世工曹參判靑雲君。次長世縣監。次安世。次弼世。次煕世佐郞。女適柳儁。次成汝容。次吏曹參判李植。次李承亨。尹暄四男一女。順之參議。元之翊衛。澄之注書。誼之進士。女適佐郞申冕。翼世無子。以光世之子櫶爲後。光世之出曰檼進士。檍, 櫶, 棇俱縣監。女適承旨林墰。次李𥠋。側出(木+懋), 𣚅, 櫖挺世之出曰榗都事。女適監察白弘一。命世無子。以煕世之子樞爲後。長世之出二女。長適典籍李正英。次未笄。煕世之出曰樞。女適進士申最。次李行逸。次申晸。餘幼。內外曾玄多不錄。公儀表魁偉。器宇宏豁。嚴於自治。勇於趨義。孝友簡儉。根於天植 。其遊太學也。忠惠當鼎軸。而斡化樞。翼孝擁承華而稱褒杞。宗黨昌顯。門闌鼎盛。而絶無習氣。約己下士。華問藹鬱。人比李子堅云。公旣釋褐。澡浴正翹。不望不辟。恢張淸論。甄別淑慝。弼違格非。棘棘直遂。其舅李樑秉銓張甚。將嫁禍善類。公內諍外護。力不能回。竟循公議。拔去邪黨。位著克靖。朝野韙之。康陵之季。儲嗣久虛。識者虞之。時相閔公箕貽書於公。責以密贊大計。蓋知其可託以大事也。穆陵沖年。入自藩邸。宰相有言宮中無保護者。欲進乳媪。以慰上心。公引王聖君事爭之得寢。外戚鄭昌瑞惑於嬖妾。家有悖倫之行。法官忌器而不能發。公爲憲府。卽收治之。政本欲以後宮之父注擬縣宰。公佐銓力沮之。累爲京兆大理。亭平斷讞。號文無害。留故都。修黌序課學徒。至捐奉置作成庫以廩士。蔚有菁莪之化。按湖甸。提挈維綱。拊摩刮剔。咸中於度。定貢案均民役。一方賴之。涖完山。一吏軌物。興利祛弊。焚空券。償逋糶至數萬。以紓民困。儲峙布粟。充溢庾廥。乃大治廨宇亭榭。以及橋梁溝洫。驛置衢街。入其境者。噲然改觀。居家被服儒素。討論經籍。疏財收族。恤窮賙急。自以通籍掖庭。恒存戒懼。飭家人起居之外。無毫髮私款。仁順升遐。遂絶通門之節。賢者賞其志。不肖者已兆媒蘗之計。公爲郞僚時。以公事造尹元衡家。聞儒士金孝元與其家子壻共榻隷業。心常疑之。未幾金公魁大科。公信口而發之。金亦負一隊重望。扶掖者衆。展轉左右。指爲黨目。栗谷李文成公爲世道憂之。欲爲消弭。啓請兩出。公守松都。金得塞邑。時議益激。辛巳文成公長薇垣。又爲調停之論。有言論罷沈某。可以保合者。文成信而從之。及見其捃摭過甚。始覺其詐諼 。終至自劾。則幷與文成而斥之。至丁亥。攻公之論復發。延及一時名德。以朴思菴淳,鄭松江澈, 尹海原斗壽,尹海平根壽, 牛溪, 栗谷兩先生, 朴大憲應男, 金參判繼輝, 洪益城聖民, 辛副學應時, 李大諫海壽,具觀察鳳齡, 朴參議漸爲黨人。俱坐罷免。無論存沒。籍置銓部 。噫。公之一言。初非有意而發。故晩際契許不淺。金公聞公訃。歎曰。知吾心者亡矣。兩公心事如此。禍端可以氷釋。而爻象危屬。愈往愈甚。今已不可救矣。豈非關世運盛衰者耶。余竊聽於國言矣。明宣之際。洗滌幽枉。鐫削僞勳。崇奬儒術。登庸俊良。淸平之治。後世莫及者。公與有力焉。是以退陶先生移書勉以國事。蘇齋盧相國稱公有扶護士林之功。則此足以定公之事也。謹掇立朝顚末。書其大者以爲敍。系之以銘。銘曰。
靑松之沈。冠冕大東。六傳其世。二后五公。靑陽承之。履滿持沖。惟其不舍。遂著匪躬。敢私于親。事君以忠。消長之幾。默運膚功。毀譽之立。若形景從。矧是樞機。而免群訩。黨人旣籍。士林之宗。非曰人菑。惟國之凶。始卒弗齊。亦係其逢。我銘質之。百世之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