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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뚱이의 시골일기
돌아보니 아름답다
짱뚱이(이덕숙)
늦은 밤입니다. 아버지는 얕은 코골이를 하며 주무십니다. 자면서도 트로트 노래가 좋으셨는지 라디오에서 장윤정 노래가 나지막이 들립니다. 문 밖에 매 놓은 흰순이는 제 모습을 보고 자다 벌떡 이러나 꼬리를 흔들어댑니다. 거실에 앉아 있으니 시계 초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밤 12시 반. 한밤에 궁상맞게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시골생활을 돌아봅니다. 지난 4년여를……. 실수하고 엎어지고 뒤둥그러지고 헤헤거리며 보냈네요. 밤의 표정은 수천가지일텐데 2009년 2월의 어느 날 밤은 참으로 혹독하고 추운 날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사건의 배후지로 우리 마을이 지목되고, 온갖 매체의 기자들이 순진한 농민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지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는 며칠을 굶다 사료를 주러 간 제 손목을 따뜻하게 핥아줍니다. ‘괜찮아질 거야’ 녀석이 말하는 듯합니다.
쓰라린 시간도 계절이 여러 번 바뀔 동안 고통의 깊이가 옅어져, 봄꽃을 보며 방긋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이를 조금 더 먹어 그런지 파편화된 농촌의 현실도 거리 두고 바라보며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골 내려와서 모내기할 때 생각이 납니다. 낯선 이웃동네에 가 모내기를 해야 할 시기였습니다. 참으로 내 간 맥주와 음료수가 남아서 들통에 넣어 50여 미터 거리에 있는 할머니 댁 마당에 내려놓고 논으로 돌아섭니다. 마침 예쁘게 핀 꽃이 여기저기서 손짓을 하네요. 바람도 살랑살랑 부니 콧노래도 나고요. 꽃을 꺾어 손에 들고 들통은 옆구리에 끼고 룰루랄라 걸어가는 뒷모습을 뒤에서 본 할머니가 저를 보고는 운전하는 저희 오마니를 세워 이렇게 말했다죠. “저기, 걸어가는 애 돈 거 아녀?” 그날 저는 엄마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았더랬습니다.(아~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ㅠㅠ )
처음 밭농사를 하면서 절대 농약을 칠 수 없다고 독립투사처럼 부르짖다가 100여 평 양파 밭을 풀천지로 말아먹고는 풀에 치인 양파를 구조해내다가 제가 먼저 구조될 뻔한 한낮의 여름 풀베기. 여자아이 주먹만 한 양파를 들고 서 있을 때, 혀끌끌참표 부모님의 썩소반응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지요.
2011년 여름 한밤에 갑자기 퍼붓는 폭우(600mm)로 뒷산에서 무너져 내린 흙과 나무가 삽시간에 집창고를 뻥 뚫리게 만들어버리고, 개장에 갇힌 개가 몸이 흠씬 젖어 늑대처럼 구슬피 울던 밤이 떠오릅니다. 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세상에 계신 모든 신들께 살면서 잘못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덜덜덜 떨면서 괴상한 기도를 연신 드렸습니다. 비 피해로 벼가 논바닥에 들러붙어버려서 콤바인 기계작업을 할 수 없어, 엉덩이 깔판을 대고 일일이 낫으로 벼 베기를 도와주셨던 느티나무 양두승샘, 사과샘, 남섭샘의 수고를 기억합니다.
무료하게 이어지는 농사일 틈틈이 문산마을도서관 활동을 했지요. 그 때 만난 아이들과의 추억이 저를 늘 설레게 합니다. 11월 초등학교 학예회에 애매한 학부모로 참석하였더니, 저를 처음 본 유치원 선생님이 ‘유괴범 아냐?’ 뭐 이런 느낌의 눈빛을 막 쏘아보냈습니다. 도서관에서 만난 동섭스님도 귀한 인연으로 남아 주셨습니다. 도서관 떠나기 며칠 전에 크리스마스 성극을 교회에서 보았을 때, 아이들 눈빛이 그 날 밤 내린 흰 눈처럼 고왔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고라니처럼 생생한 기쁨을 줍니다. 덜렁대는 모습으로 살아도, 조금 모자라도 품어주는 어른들이 그 곳에 있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이 답사를 하면 참석하는 어르신 거의 대부분이 눈물바다를 이룹니다.
짱뚱이는 시골에서 미친 사람대접도 받아보고, 애들한테 정겨운 반말도 들어보고, 면사무소 아가씨 노릇도 해보고, 요상한 학부모 역할도 해보고, 다문화친정엄마 소리도 들어보고, 말썽꾸러기 농부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좀 바빴어요. 시골일기의 주인공은 고라니, 개미, 흰순이, 감자와 고구마, 성난 풀, 팥죽, 할머니의 거친 손, 엄마의 잔소리, 소복이 쌓인 눈입니다. 주변사람들이 저보고 가끔 물어요.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럼 이렇게 말하지요.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시골 도깨비라고요.
그동안 제 모자라고 엉성한 시골이야기를 참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깨비는 잘 살 것이니 걱정 마셔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첫댓글 짱뚱샘 보고 싶어요, 짱뚱샘 어머니 아버지 시골 집도 그립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