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출3:11-12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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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믿음의 영웅들이 많이 나옵니다. 죄악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노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왕중왕 다윗, 불의 선지자 엘리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못 말리는 기도자 다니엘 등등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그들과 같은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우러나기도 합니다. 분명 귀감이 되는 분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는 정말로 특이한 분들 중의 한 분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모세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이는 예수님의 생애보다 더 자세한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토론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는 물론 현대의 이스라엘 민족조차 모세라는 이름에 엄청난 권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분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모세는 더 이상 클 수 없는 선지자요 지도자요 위인이었습니다. 그의 태어남과 양육과 삶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증거된 모세의 위대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따른 위대함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위인들처럼 모세도 자기 자신의 위대성으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과연 모세 자신의 위대함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어떻습니까?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3회에 걸쳐 모세의 인간적 위대성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모세가 부름 받은 초기에서 찾아지는 위대성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참고로 디엘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일생을, 40세까지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I am somebody), 80세까지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I am nobody), 120세까지의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I am God's body) 등으로 3기로 나누어 요약했는데 아주 잘 정리한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은 이 중 제2기말 내지 제3기초 어간의 모세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 성경이 증거 하는 모세의 위대성
성경은 여러 각도에서 모세의 위대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면에서 위대했었는지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출2:2절에 보면 준수한 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남자 신생아는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살벌한 명령 하에서도 석 달 동안 숨겨 기를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 민12:3절에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 출3-6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5번을 확인하고 후에 다시 3번을 재확인하는 신중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민11:11-15절에 나오는 모세의 한탄은 그의 직임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모든 기적들이 모세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홍해바다, 반석 물 등등).
○ 모세는 민족 사랑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출2:11절에는 동포를 핍박하는 애굽인을 죽였고, 이로 말미암아 광야로 쫓겨가 40년 간 양치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인도한 후, 모세 자신이 십계명을 받는 동안, 산 아래의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는 죄를 범합니다. 출32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난리 벚꽃장 같은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대노하시어 모두를 진멸하고 모세의 후손으로 새로운 민족을 이루어 이들을 통해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모세는 목숨을 걸고 중보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겠노라며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을 이제 여기서 멸하신다면 애굽과 이방인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어찌하여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참으로 당돌한 항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아무 말씀 못하시고 그만 양보하고 마십니다. 이 순간의 하나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머리끝까지 난 화를 억지로 참으시며 속으로는 “끙”하는 신음을 삼키시며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하마”하시는 모습을 말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32절에서는 아예 하나님의 다짐까지를 받아내고야 맙니다. “생명책에서 저를 제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셔야겠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십니다. 이 정도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신34:10절에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는 자’라 하고 있으며, 출33:11절과 17절에서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던 사람’, ‘이름으로도 알던 사람’이라는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 또 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과 비견될 정도로 위대한 자였습니다. 신18:18절에는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겠다”고 하셨고, 신34:10절에는 “이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증언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 그뿐 아닙니다. 민27:16에 보면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훌륭한 후임자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려는 준비심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대부분의 현대교회 목회자분들이 자신의 지도력의 누수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부목사 등 후임양성에 소극적인 현상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여하튼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모세의 위대성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할 것입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따른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쉬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모세라면 남보다 나은 면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잘 찾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모세 자신의 위대함은 하나도 없고 전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일 뿐일까요? 우리, 본문을 조금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모세는 자기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에는 “내가 누구관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라는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후에도 4번 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호통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애굽으로 돌아갔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의 이 말씀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아주 타당하고 옳은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시점에서의 모세의 처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모세는 과거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①태어난지 3개월만에 부모와 떨어져 애굽 공주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일종의 고아 내지는 유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이스라엘 동족을 핍박하는 애굽인을 살해하여 모래 속에 숨긴 사실이 발각되어 동족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바로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갑니다. 살인자/사체유기범/도주범 입니다. ③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쓸모없는 시골뜨기입니다.
○ 모세는 현재 무능력하고 무익한 사람입니다. ①나이는 80세의 고령입니다. 힘쓸 나이가 지나도 한참 지났습니다. ②옛날 동족을 사랑했던 열정도 다 식었습니다.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③양이나 치면서 하루 하루를 사는 촌 늙은이입니다. ④타국에서 나그네로서 그럭저럭 살고 있는 힘없는 외국인에 불과합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와도 같은 그런 형편입니다.
○ 모세는 미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①나이 많아 늙었고 ②소망도 없으며 ③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시골 늙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 입장에서 보면 정말 맞는 말입니다. 늙고 의욕도 없으며 체력도 부족한 자기를, 보통 일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사역에 쓰시겠다고 하시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촌사람 모세가 당대 세계 최강국 애굽의 왕에게 가서 수백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라니요? 가능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대등한 군사력으로도 힘겹게 정말 운좋게 겨우 흑인 노예해방에 성공했을 뿐임을 보면 모세는 얼마나 무모한 상황인지 알 수 있지요. 성공 확률 0%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모세로서는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확한 자기인식이었고 솔직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당시의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쓸모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도대체 쓸 곳이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다시 말해 겸손과 온유) - 바로 이것이 모세의 위대성이었습니다.
▣ 모세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좋도록, 완전히 준비된 사람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로는, 모세는 쓸모없는 사람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시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바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모세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 먼저 모세는 자신의 뜻, 의지, 욕심이 조금도 없는 흐물흐물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먹으신 대로 요리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너무 의욕이 없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8번이나 거역할 정도로 맛이 간 상태이기도 합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 맨 밑바닥에서 비로소 사용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는 더 없이 좋은 상태입니다. 더 이상 손댈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히 준비된 상태라는 의미가 됩니다.
○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요리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데 아주 요긴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애굽 학문도 다 익혔고, 40년 간 광야에서 인내와 포기의 법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아는 수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최상의 일군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제 된 것입니다.
○ 이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자신감을 보이십니다. 모세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모세를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되 모세를 중보자 또는 중간자로 하여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못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세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이후 40년 동안 그 험난한 광야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끕니다. 목이 곧고 불평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하여 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 그대로 이루어드리는 것이지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절).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 나가기
여하튼 모세는, 망설였던 처음 출발과는 달리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위대한,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이스라엘 민족도 가장 존경하는, 최대의 지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물론 모든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입니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말 모세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아주 커다란 위대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겸손입니다. 모세의 온유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라는 자기인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라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익함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공하려면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비어져야 합니다. 흐물흐물해져야 합니다. 아무 의지도, 뜻도, 목적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계획안으로 붙잡혀 들어와야 합니다.
이게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무 살아서 펄펄 날뛰는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는 쓰실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교훈을 통해,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실패자로, 무능력자로, 현실만족자로 살아가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성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쓰실 수 있도록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비운 모세를 배울 때,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안에서의 성공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