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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 공야장 公冶長 [ 자장 子長, BC519 – BC470]
공야장 公冶長 성은 공야(公冶), 이름은 장(長), 자는 자장(子長), 사기(史記)에는 제나라 사람으로 나온다.
공자의 사위가 된다. 새소리를 알아듣는 재주가 있었는데, 새소리를 듣고 시신의 위치를 알려주자 그가 죽인 것으로 오해해 투옥되었다고 전해진다. 노나라 임금이 대부로 그를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고 공자의 유지를 계승했다.
子謂 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子謂 南容 邦有道不廢 邦無道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공자가 공야장은 사위로 삼을 만 하다고 하면서 비록 그가 감옥에 있다고 하나 그의 죄가 아니므로 그의 딸을 공야장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縲絏(류설) 감옥, 류(縲)는 죄인을 묶는 검은 줄, 설(絏)은 묶다.
南容(남용) 성은 남궁(南宮), 이름은 도(縚), 자는 자용(子容)
不廢(불폐) 버림받지 않다. 벼슬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
刑戮(형륙) 법적인 형벌이나 불법적이 죽음을 의미
兄之子(형지자) 공자의 이복형인 맹피(孟皮)의 딸. 당시 형은 죽고 없었기 때문에 공자가 형을 대신해서 혼례를 주관했다.
공자의 사위 고르는 태도를 서술하고 있다. 공자의 오직 사람의 인물됨만을 보았을 뿐 부귀와 권력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공야장은 감옥에 있어도 그가 무죄임을 인정받을 만큼 신의 있는 인물인 듯하다. 공야에게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야장은 새나 짐승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공야장이 길을 가다가 새소리를 알아듣고 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노파에게 산속 시냇가에 그 시체가 있다고 알려주었다가 살인누명을 썼다고 한다. 공자가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이야기다.
남용은 평화로운 시절에는 남에게 버림받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고, 난세에도 형륙을 면할 정도로 슬기로운 인물인 듯하다. 남용에 대하여는 선진 11-5에도 언급되어 있다.
공자가 남용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림을 받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더라도 형벌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형孟皮 의 딸을 남용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공자의 형 孟皮,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施氏에게서 딸 9명, 다른 부인에게서 아들 孟皮가 있었으나 선천적인 발에 장애가있어 다시 공자의 어머니 안향의 딸 안징재 顔徵在에게서 공자를 얻었다. 위 구절에서 말한 형은 바로 맹피를 말한다. 공자의 형 맹피에게는 1남1녀가 있었는데 아들은 공충 孔忠으로 공문 70 제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공충(孔忠)은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공충(孔忠)이고, 자는 자멸(子蔑)이다. 공멸이란 이름으로도 나온다. 공자의 형 맹피(孟皮)의 아들로서 공자의 조카이자 제자이다. 공문(孔門) 칠십이현에 속해 있다.
그에 관해서는 공자가어에 기록이 있다.
“공자의 조카 공멸이 한 번은 공자에게 자아수양의 방법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알고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다. 사람을 가까이 해놓고 그를 믿지 않으면 가까이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즐거울 때 지나치지 않게 하고, 걱정스러운 일이 생기려 할 때 그 일을 분명하게 고려하고 상심해하지 말라.’라고 했다.” 위에서 말한 형의 자식은 맹피의 딸을 말한다.
남용은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물러나 있어 형벌을 면했다. 공자는 영무자의 사례를 들어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로워야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은 것이 더 낫다고 한다. 공야장과 남용 두사람 중에 남용이 더 공자의 뜻에 맞는 인물이다. 그런데 공자는 자신의 딸이 아닌 조카를 남용과 혼인하게 한다. 딸보다 조카를 더 먼저 생각하고 있다.
논어 제5편 [공야장 公冶長]
공자에게는 아들 백어 공리 말고 또 다른 자식이 있었을까?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자식에 관한 언급이 별로 없어서인지
또 다른 자식이 있는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특히나 악처로 소문난 소크라테스의 아내 꾸산찌뻬나 마찬가지로 공자의 부인 역시 당시 이름난 악처로 알려졌있다.
올관부인인지 기관부인인지 아내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고 성씨마저 제대로 맞는지 확인할 수 없다.
공자에게 있어 여인은 불가근 불가원한 존재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공자의 부인과 마찬가지로 베일에 쌓여있던 공자의 딸,
유일하게 논어 5편은 공자에게 딸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공교롭게도 이름이 '공교',
그녀의 남편이자 공자의 사위로 제자 공야장이라는 인물이 출현하는데 비록 그가 영어의 몸이어도 사위삼을만 하다며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이 공야장 편에는 공자의 제자들과 동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공자의 논평이 나오는데 참으로 진솔하고 관록이 묻어나는 평가라 아니할 수 없다.
남용, 자천, 자공, 옹야, 칠조개, 자로, 염구, 재여, 안평중, 장문중, 영무자, 백이숙제 등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연이어 이어지는데
대표적으로 자공과 자로, 영무자에 대한 평가가 인상적이다.
이 글을 통해서 보건데 자공은 스승 공자와 상통하는 데가 있으며, 공자는 흉중에 자공을 유달리 애지중지하였던 것 같다.
자공은 스승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 지 궁금했고, 공자는 그를 제사상에 올리는 호련과 같다고 평함으로써 은연 중에 공자가 자공을 귀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덕망과 학문에 있어 안회를 자공보다 한 수 위에 두고 있으며, 공자 자신보다도 안회를 더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자의 위대성과 안목을 확인할 수 있다. 공자를 우직하게 따랐던 용맹한 제자 자로에 대한 평가도 빈틈없다. 홀로 외로워져 길 떠날 때 오로지 자로만이 동행할 것이라고 칭찬하는가 하면 별안간 지혜가 없다고 타박한다.
이는 자로의 자만심을 경계함이고 향상하기를 권고하는 더 없는 평가일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평가는 영무자에 대한 것이다.
세상에 도가 통할 때에는 누구보다 지혜로웠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어리석은 체 했다는 말인데
공자는 그의 지혜는 능가할 수 있어도 그의 어리섞음은 흉내낼 수 없다며 영무자를 높이 평가했다. 누구나 높은 자리를 향할 때 낮은 자리를 향하는 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영무자의 지혜는 공야장 편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장에서 제자들과 한 시대의 명망가들과 동시에 또한 자기 자신을 평가하기를 모든 것을 차치하고 공자 자신은
불여구지호학야 不如丘之好學也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 만큼은 어느 누구도 나를 따를 자가 없다며 끊임 없이 정진하고 중정을 잃지 않고자 절차탁마했던 한 인간의 진면목이 이 공야장 公冶長 편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1. 子謂 公冶長 可妻也로다. 雖在縲絏之中이나 非其罪也라 하고 以其子妻之
어떤 그릇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종묘에서 쓰는 호련이다.
신정이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그는 욕심이 앞서니 어찌 강직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말씀하셨다. 충성스럽다. 인이라 하겠습니까? 묻자 공자께서는 아직 지혜롭지 못하니 어찌 인이라 하리니 자장이 또 묻기를, 최저가 제나라 장공을 시해하자 진문자는 10승의 말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갔으며, 거기서도 역시 몹쓸 신하가 있음을 보고서, 여기도 우리나라의 대부 최자 같다 고 하고 떠났으며, 다른 나라에 가서도 역시 우리 최자 같다. 고 말하고 떠났으니 그는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청렴결백하다. 하시자, 자장이 인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아직 지혜롭지 못하니 어찌 인을 얻었다 하겠는가?
합각언이지. 자로왈, 원거마 의경구 여붕우공 폐지이무감. 안연왈,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절망스럽구나. 나는 아직 자기의 잘못을 보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자책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